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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데이비드 케일리 외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 물레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내맘대로 독후감)
이반 일리치는 세상에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이반 일리치는 정규학교를 거의 거치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고 성장하였으며, 카톨릭교회의 신부이자 사상가가 되었다. 독립적인 한 개인이자 주체로서 이반 일리치는 평생을
통해 다양한 영역의 사회 현상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대한 대안과
해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소책자’운동을 통해 사람들이 이 문제를 논의의 주제로 삼기를 원했다.
이반 일리치는 사회의 커다란 담론인 ‘교육’, ‘의료화와
건강’, ‘운송 및 교통’등의 수단을 ‘도구’로
규정하고 이를 두 가지 분수령의 관점에서 우리 사회에 주는 변화를 파악하였다. 우선 초기 분수령에 이르면 ‘도구’는
우리가 기대했던 생산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번째 분수령에 이르게되면 도구는 반(反)생산적이 되어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된다는 것이다. 이는 도구가 만들어진
의도와는 멀어지는 사람이 장점으로서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사람보다 더 많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도구들’의
반생산성을 예로 들면, 제도화된 의무교육으로서의 학교 교육은 많은 어린이에게 가난에더해 의무교육을 마치지 못했다는 죄의식까지 심어주며, 학교는 필연적으로 탈락자를 만들어내는 제도로 되어버린 점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개인 혼자의
힘으로는 무언가를 배울 수 없다는 무능과 무기력에 빠지게되고 이는 ‘사회통제’라는
도식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은 개인을 양산하게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만연하는 수많은 ‘자격증따기’ 열풍은 제도화된 의무교육의 역기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정 직업을 얻기위해 ‘권위’를
내세우는 어떤 독점 기관이 제시하는 시험을 통과하고 자격증을 따야 자격을 부여받는 것이다. 자격증은 한 개인이 가능한 능력의 확장을 의미한다.
자격증은 마치 컴퓨터 게임의 ‘머니’ 내지는 ‘무기’와도 같은 기능을 한다. 한 개인의 능력이 되는 자격증은
곧 개인 자신인 것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이 ‘자격증따기
열풍’은 ‘지나친 자기 긍정’이
불러온 결과가 아닐까. 여기서 ‘과잉 긍정’은 결핍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지나친 긍정은 개인화되고
분열화된 사회 구성원에게 개별적이고 무기력한 피로를 가져다주고, 나아가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과 같은 병리학적 상황을 초래한다고 한병철 교수는 말하고 있다.
한편 이반 일리치는 운송 수단 및 교통의 문제를 통해 지나친
운송 수단의 발달이 비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자동차와 교통체증은 대도시에서
살고있는 사람이라면 절실히 느끼는 점이다. 교통 수단은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여 속도 경쟁을 하고
있지만, 공간적으로는 제한되어있다. 그 결과 대도시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시간에 쫓기게되는 부작용을 경험하게된다. 소설가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소설에는 1997년 외환위기를 맞고, 회사에서 권고퇴직을 하게 된 주인공이 인지하는 ‘시간성’을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장비나 운송 수단을 통해 우리는
과거에 일주일에 걸쳐 해내던 일을 단 하루, 혹은 몇 시간만에 끝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일주일의 시간을 단축했다고 여가시간이 고차원적인 활동에 쓰이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인간의 정신적∙정서적 ‘한가로움’을
위해 쓰이지도 않는다. 사색적인 안식과는 무관하게 그 단축한 여가시간은 끊임없이 다음 일을 위해 쓰여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현대 산업사회가 추구한 효율성의 극대화는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에 쓰이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여가시간이란 다음에 하게될 ‘미션’을
위해 필요한 육체적인 원기 회복의 시간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의료문제의 경우, 이반
일리치는 과도한 ‘의료화’에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건강’을
일정 강도 이상으로 ‘의료화’할 경우, 진단과 치료 모두를 의학이
독점하게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의 느낌을 의사가 가르쳐주는
대로 배우게 되고 고통을 견디어내는 능력이 퇴화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의사는 ‘생명을
책임지는 관리자’가 되어버렸다.
관리자가 된 의료의 문제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실히 드러나있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Middles East Respiratory Syndrome)이 현재 한국에서 가장 큰 화두이다. 첫 감염자 발생이후 한 달이 넘어가고있다.
감염된 환자는 ‘14번 환자’와
같이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린다.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병리학적 접근에서 보면 ‘감염
환자’는 ’14번 환자’로
불리는 것이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지하철 방송에서도 메르스사태는 마치 국가 비상 사태로 선포되고 있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손세정제를 비치하고, 비상 소독을 자주 실시하고
있으며, 국민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결연한 다짐을 한다. ‘관리의 대상’으로서의 메르스는 방송을 통해 ‘국민의
안전이 위기’에 내모는 주범이 되었다. 심지어 ‘질병관리본부’에서는
메르스에 대처하는 방법과 같은 광고를 여기 저기 붙여놓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현재 대한 민국 사회에 번져있는 메르스에 대한 필요
이상의 공포는 언론과 대중 매체라는 ‘도구’가
우리에게 주는 반생산성의 산물이라 볼 수도 있겠다. <피로사회>에서 제시하듯 배타적 타자에대한 면역반응으로서 ‘공산주의’에대한
혐오와 공포가 20세기 대한민국을 지배한 언론과 대중 매체 그리고 권력의 합작품이었다면, 메르스에 대한 공포는
21세기에 대한민국 사회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신경증적인 폭력이라고 볼수도 있다. 이반 일리치는 “오늘날 중대한 위협은 건강에대한 병적인 추구 그 자체”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주인공은 다음과 같은 독백을 하고 있다.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삶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숙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그 숙제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남아 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 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독백에서 주인공이 말하는 ‘필요 이상’은 이반 일리치가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가 반(反)생산성을 갖기시작하는 두 번째
분수령을 넘어선 상태에 상응할 것이다. 소설 속 한 개인의 자각을 통해 이반 일리치가 지적하고 있는 도구의
부작용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과 <피로사회>에서는 모두 ‘머무는 삶’, ‘사색적
삶’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반면 이반 일리치는 개인의 자각을 넘어서서 ‘연대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개인의 소박하고 절제하는 삶과 더불어 가속화되고 반생산적인 역기능을
통제할 ‘공생을 위한’ 도구로서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
제도와 적정 수준의 기준을 마련해야할 필요성을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그가 책에서 언급한 방대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대상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라는 정신이다.
참고도서
- 이반 일리치∙데이비드 케일리,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권루시안 옮김
- 한병철, <피로사회> 김태환 옮김
- 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