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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51
로렌스 스턴 지음, 김정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4월
평점 :

우리가 잃어버린 ‘죽마’를 찾아서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
(The Life and Opinions of Tristram Shandy, Gentlman)
로렌스 스턴 지음
김정희 옮김 [을유문화사] (2023)
올해는 책 읽는 속도가 더디다. 하지만 뜨거웠던 지난 여름 밤마다 아껴 읽었던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이하 《트리스트럼 섄디》)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다. 로렌스 스턴의 소설은 아마도 올해 읽은 작품 가운데 3위 안에 들 것 같다.
“나는 불행해지게끔 잉태되고 태어난 사람이다.”(56)
“어르신들께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 책은 다만 울화에 대항하고자 하는 글입니다.”(375)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그저 이 모퉁이에서 저 모퉁이로 이리저리 변통하며 자리 바꾸기를 하는 게 아닐까?”(415)
“마음이 곧은 독자에게 탄원하노니, 나는 인간이 결국 짐승일 뿐이라는 가장 겸허한 신념에서 - 이 질문을 던졌다는 것을 믿어주기 바란다.”(790)
현실의 삶에선 사제이기도 했던 로렌스 스턴의 이 작품은, 프랑수아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 보이는 원초적이고 보다 육체적인 호탕함이 다소 덜할지 몰라도 그 보다는 지적인 언어유희를 비롯한 은근하고 교묘한 장치들로 즐거움을 준다. 화자 트리스트럼이 길 위에서 보여주는 좌충우돌의 모습은 그가 소설 속의 여러 장면에서 언급하는 돈키호테의 모험과도 닮아 있었다.
이 작품이 1700년대에 나온 소설이라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만큼 이 소설은 세련되고 징후적이다. 버지니아 울프나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모더니즘의 징후가 이미 보이는 까닭이다. 화자(아마도 영화 감독 우디 앨런처럼 끊임없이 수다를 떨 수 있는 사제가 아니었을까)는 끊임없이 옆길로 새고야 만다. 산만한 의식을 따르는 그의 글쓰기는 이따금 작품 속에도 개입하여 독자와 상호작용한다. 작품에 메타적인 접근법도 과감하게 시도한다.
화자는 본문에서 “글쓰기란, 그것을 제대로 관리했을 때, (내가 내 글이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당신도 알 것이다) 단지 대화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137)라고 말한다. 이런 장면은 마치 무성영화 시대에 스크린 옆에서 영상 속의 인물들을 여러 목소리로 연기하며 효과음까지 도맡았던 ‘변사’의 역할을 보는 듯하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처음에는 저자의 생몰연도를 여러 번 확인하며 읽었다. 정말 1700년대에 나온 소설이 맞을까 싶었던 것. 그렇지 않으면 다분히 20세기 초의 모더니즘적인 실험 소설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화자(트리스트럼)가 특정한 시각을 쓰는 대목이 두 번 나오는데(1759년 3월 26일 아침 9시에서 10시 사이 & 1761년 8월 10일), 이는 저자가 실제로 해당하는 장을 집필할 때의 시간이었다. 작품 속의 작품, 혹은 작품 위의 작품에서 장면을 바라보듯 제3자의 존재를 전제하는 듯하다. 형식적으로도 매우 실험적이다.
어쩌면 후대의 버지니아 울프가 이 겸허한 작품을 읽으며 자신의 떠다니는 의식을 따라가 보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아닐까 상상해본다. 혹은 스턴과 같은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가 ‘성’의 대상을 지적이고 은근한 언어유희로 전환하는 스턴의 실험에 흥미를 느끼며, 구차하고 억압된 현실 속에서도 인간에 대해 긍정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 물론 어느 한 작품이 수많은 작가의 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적어도 후대의 작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은 주었을 법한 작품이라는 말이다. 이를 테면, 후대의 괴테와 니체는 비판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타자에 대한 연민을 손에서 놓지 않는 지점을 이 작품에서 눈여겨 보았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D.H. 로렌스는 라블레와 스턴의 작품을 통해 ‘생(生)’의 이면인 ‘성(性)’의 참모습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아니었을까, 혹은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보이는 동성애적 욕망의 노출을 보비 삼촌과 그의 하인이자 동지인 트럼 상병과의 친밀한 우정과 연대의 모습들에서 더 밀고 나아갈 수 있는 상상력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그만큼 《트리스트럼 섄디》에는 이 모든 후대의 징후가 담겨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 눈길이 갔던 부분은, 등장인물이 함께 어우러지는 ‘죽마 놀이’다. 트럼 상병과 보비 삼촌이 보여주는 것은, 주인과 하인 관계를 넘어서 보편적인 인간 사이의 유대와 우정, 인간에 대한 관대함을 보여준다. 이런 덕목들은 함께 수행하는 죽마(hobby horse) 놀이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지금으로 치면 말도 안 되는 ‘밀덕’(밀리터리 덕후)인 셈인데, 이들의 일상은 사뭇 ‘진지한’ 유희와 기대로 가득 차 있다. 신체의 상처와 심리적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에게 ‘죽마’는 단순한 취미나 취향의 수준을 벗어난다. 트럼 상병과 보비 삼촌에게 ‘죽마’는 수행적 의식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오히려 ‘죽마’는 우리를 ‘살아있게’해주는 일상의 의식(ritual)이자 일용한 마음의 양식을 대표하지 않는가. 이들의 ‘죽마놀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고, 우연이 가득한 인생에서 잠시나마 삶의 주체가 될 수 있게 해준다. 통제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또 누군가에겐 무익해보여도 각자가 통제 가능한 유희, 지극하고 순수한 즐거움을 되찾게 해주는 의식인 셈이다. 따라서 ‘죽마’는 개인을 자기만의 세계에 고립시키는 소외의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18세기 소설에서 ‘개인’을 발견하는 뚜렷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트림 상병과 보비 삼촌처럼 각자의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세상을 관대하게 품을 수 있게 해주는 것도 바로 이 죽마 놀이로부터 유래한다. 유희의 시간을 함께하는 이들은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와 자연을 통제하고 우리의 손 안에 가두려 하는 동안, 우리의 ‘죽마’는 점점 더 우리의 손에서 빠져나가버린 것은 아닐까. 길지 않은 생애를 살면서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어본 순간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나는가. 애초에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언젠가 잃어버린 나의 ‘죽마’를 다시 찾아 나설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을까? 너는 이 생애에 후회 없이 사랑해 보았는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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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불행해지게끔 잉태되고 태어난 사람이다." - P56
[2] "어르신들께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 책은 다만 울화에 대항하고자 하는 글입니다. 웃음을 통해 횡격막이 보다 자주, 보다 격렬하게, 상승과 하강 운동을 하고, 늑간과 복부 근육이 맹렬히 진동하게 만듦으로써, 우리 신민들의 쓸개와 간, 췌장에서 담즙을 비롯한 쓰디쓴 액체들은 물론 그 액체에서 나오는 모든 적대적 감정도 십이지장으로 몰아내기 위해서 쓴 글입니다." - P375
[3]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그저 이 모퉁이에서 저 모퉁이로 이리저리 변통하며 자리 바꾸기를 하는 게 아닐까? - 이 슬픔에서 저 슬픔으로? - 한 가지 괴로움의 원천을 봉새화면! - 또 다른 괴로움의 문이 열리는 것 아닌가!" - P415
[4] "마음이 곧은 독자에게 탄원하노니, 나는 인간이 결국 짐승일 뿐이라는 가장 겸허한 신념에서 - 이 질문을 던졌다는 것을 믿어주기 바란다. 라블레가 세상에 뿌려 놓은 모든 기지를 내 것으로 만들어 준다 해도 존경스러운 불행의 여신이 계신 자리에서 내가 그렇게 어우리지 않는 농담을 흘리고 다닐 사람이 아니란 것도 믿어 주기 바란다." - P790
[5] "하**님! 하고 어머니가 소리쳤다, 도대체 이게 모두 무슨 이야기지요? - 수탉과 황소 이야기지요하고 요릭이 말했다 - 그리고 내가 들어 본 그런 이야기 중에선 최상인데요." - 마지막 문장 - P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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