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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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와 상상력이 비추어 준 인간의 초상

-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2012)

 



아마도 걸리버 여행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소인국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로 도배된 어린이용 도서 이후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본 독자는, 나를 포함하여 매우 드물 것 같다. 이 책의 전체적인 인상을 먼저 이야기해보자면, 1장과 2장은 걸리버가 소인국과 거인국을 만나 거주민들과 교류하며 여러 가지 대비를 보여준다. 특히 걸리버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그가 처한 위상에 따라 다른 행동 양식을 보여준다. 걸리버가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기를 반복한다. 그는 바다 건너 새로운 세계 4(소인국거인국-라퓨타-휴이넘 왕국)에 순서대로 도달하는데, 그가 이곳에서 겪는 167개월의 여정을 보여준다.


 

걸리버가 처음 방문하는 소인국에서 그가 처음 상대하는 작은 인간은 중년의 고위 관리다. 걸리버는 이방인임에도 이곳에서 자신이 지닌 신체적 우월함을 적극 활용한다. 불이 난 궁전 위에서 거대한 폭포수 같은 소변을 누어 화재를 진압하는가 하면, 이웃하는 섬과의 전쟁에 개입하여 상대국의 전함을 한 손에 끌고 옴으로서 전쟁을 종식하는 일에 기여한다. 그는 자신의 우월한 위치에서 왕국을 보호하는 선한 신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다.


 

하지만 걸리버의 지위는 거인국에서 정반대로 뒤바뀐다. 돌봄을 받고 보호받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우월감을 느끼는 거인들 앞에서 작고 무기력해 보이는 존재가 이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이며 주목을 받고, 급기야는 많은 거인들 앞에서 전시되기도 한다. 마치 아프리카의 코이산족(문명 세계에서 부시맨이라는 경멸적인 별칭으로도 불리는) 몇 명이 유럽인들 앞에서 거의 나체 상태로 전시되었던 역사적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1700년대에 유럽의 남성 작가가 소설의 주인공을 내세워서 그를 상대화해보고 다르게 바라보려는 시도는 상당히 신선한 실험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그는 거인국에서 주인집 딸의 돌봄을 받고, 나중에는 여왕에게 기쁨을 주며 돌봄을 받는 피보호자의 신분으로 지내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거인국 브롭딩낵에서 언제나 돌봄을 제공하는 존재는 여성으로 전형화되어 있다.


 

한걸음 나아가 인상적인 장면은 걸리버가 보여주는 남성성의 부재다. 예를 들어 짓궂은 거인 여자 하인이 자신의 가슴 위에 걸리버를 올려놓고 희롱한다던가, 걸리버의 앞에서 거리낌 없이 옷을 갈아 있는 행위는, 그의 존재 자체를 투명인간처럼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자 하인을 보는 걸리버가 불쾌감을 강하게 느끼는 장면을 보고 혹자는 걸리버의 창조자조너선 스위프트가 성불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 모양이다. 여성에 대한 혐오 반응을 보인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의 행위 몇 가지로 작가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기에는 다소 성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이 견해를 알게 되었을 때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표피적인 특징이라는 결론에 가깝다.


 

오히려 그가 밝힌 바는 없지만, 동성애적 성향 같은 퀴어한 성향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말이 지배하는 휴이넘 왕국에서 인간을 닮은 야만적인 야후들중 한 암컷 야후가 강에서 목욕하는 걸리버를 덮치려고 했을 때, 지극히 혐오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나, 휴이넘의 왕국에서 마지막으로 고향인 영국에 돌아왔을 때 동료 인간을 혐오하고 심지어 아내를 야만적이고 냄새나며 더러운 존재로 경원시하는 장면을 보면 말이다. 겉으로 드러난 인간의 모습이나 행위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걸리버의 몇 가지 모습만으로 저자를 성불구라고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좀 성급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에서 더 들여다볼 때 걸리버가 보여주는 행동은, 성적불쾌감을 주는 대상이 남성이나 여성의 구분이 없음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불쾌감을 주는 주체가 남성만도 아니며, 이는 특정 상황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우월적인 지위 아래 이루어지는 역학 관계라는 것, 나아가 인권에 관한 문제라 파악할 수도 있겠다. 이쯤 되면 소인국의 세계는 남성적인 규범과 질서의 수호자로서 걸리버를, 거인국에서는 제한적이나마 여성적 규범과 미덕이 두드러지는 세계의 수혜자로서 걸리버를 발견할 수도 있겠다. 한편으로 작가 스위프트는 걸리버가 처하게 되는 환경의 스케일을 달리함으로써 세계를 파악하는 감각과 인식의 경계 넘기를 시도한 셈이다. 이는 자신을 극단적으로 상대화하는 실험을 해본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소설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걸리버가 확연히 다른 왕국 네 곳을 여행하고 다시 복귀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우연한 기회로든 자연의 거대한 힘에 의해서든, 걸리버는 새로운 왕국에 갈 때마다 그곳의 언어를 빠르게 배우며 소통에 성공하고야 만다. 18세기임에도 보기 드문 현지 적응 능력이다. 이 점이 너무나 매끄럽다고 느껴지긴 한다. 또한 그의 자세는 낯선 곳에 처음 발을 디딜 때 나는 문명화된 유럽 국가에서 왔다는 자의식을 놓지는 않는 듯하다. 소인국에서는 소인들과 그 왕국에 대한 우월감으로 활약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그리고 거인국에서는 보살핌을 받으며 다소 무력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이성으로 이룩된 문명국에서 왔음을 끝없이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열심인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내가 여기서 주목한 지점은, 걸리버가 어느 왕국을 가더라도 그 지역의 공동체에 뿌리내리고 있는 나름의 악습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악습의 종류는 다르지만 말이다. 심지어 그가 휴이넘의 왕국에서 마지막으로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마치 인간 혐오자가 되어 돌아온 듯하다. 인간 존재 자체를 악에 물들기 쉬운존재로 규정하며 꽤나 냉소적인 인간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걸리버가 이런 관점과 태도를 유지하는 한, 그가 n번의 여행을 더 하고 돌아온다 하더라도 결국엔 인간에 대한 신뢰를 되찾을 수 있을까? 나는 이 점이 의문이었다. 소설에 소개된 네 군데의 왕국은 어쩌면 인간의 다른 모습을 비춰주는 일종의 거울일 수 있기에, 그가 수많은 여행을 더 하고 돌아온다 해도 나는 그가 어김없이 인간의 부정적인 면모와 악습을 더 많이 발견할 것만 같다. 따라서 걸리버가 수많은 세상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배워온다 한들, 개인의 내면이 자기 종족인 인간에 대한 혐오와 멸시, 냉소로 채워진 인물이 무엇을 새로 배우거나 건설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이 문제는 걸리버 자신이 발을 딛고 선 그 자리에서, 그리고 그 자신의 내부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선 인간에 대한 혐오와 냉소를 거두고 작은 희망을 되찾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테다. 또 어떤 사회의 규범이 그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과 충돌할 경우, 그 규범의 존재 가치를 재평가하고 수정해 나가거나 새로운 규범까지도 고민할 필요가 있겠다.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한 욕구를 가진 사람들을 모두 만족시키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걸리버가 동료 인간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잘 이해하고 포용하여 인간애를 되찾을 수 있다면 소설의 마지막에서 말하듯 영국에서 살고 있는 야후들의 악덕에 가득한 사회를,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나는 이 여행기를 쓰게 되었다.”(375)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악덕이 가득해 보이는 세계에 살면서도 이따금 희망이 닿는 지점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닌가.





[책속으로]

[1] "적어도 덕성을 지닌 사람이 잘 몰라서 실수를 하게 될 경우에도, 악덕한 기질이 가지고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적당히 처리하거나 변호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의 행위처럼 사회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69, 제1부 릴리퍼트 기행) - P69

[2] "이 일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친절한 독자들은 용서를 해주기 바란다. (...) 매사를 깊이 사고하려는 현명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야말로 자신의 사고와 상상력을 깊고 풍부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개인이나 사회인으로 생활하는 데 있어서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여행을 비롯한 여러 여행기를 세상에 내보내는 이유다."(116, 제2부 브롭딩낵 기행) - P116

[3] "왕은 로열 서브린 호의 돛만큼 커다란, 하얀색의 왕홀을 가지고 뒤에 기립해 있는 대신을 향해 몸을 돌리고 ‘인간의 위대함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와 같이 작은 벌레도 그것을 흉내 낼 수 있다니 말이다."(132, 제2부 브롭딩낵 기행) - P132

[4] "그대의 이야기와 내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종합해 보았을 때, 그대의 민족 대부분이 세상의 표면에 기어 다니게 된 생물 중 가장 유해하고 밉살스러우며, 작은 벌레들의 모임인 것으로 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167, 거인국 국왕이 걸리버에게 한 말) - P167

[5] "이러한 사실 때문에 영국의 독자들은 그의 인품에 대해 낮게 평가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큰 사람들의 이러한 결함이 무지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물질문명이 이룩한 것처럼 정치를 하나의 과학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171, 제2부 브롭딩낵 기행) - P171

[6] "많은 세대를 거치는 동안 그들(거인)도 인류 전체가 겪고 있는 똑같은 악습으로 인해 시련을 겪었던 것이다. 귀족은 권력을 위해, 시민들은 자유를 위해, 왕은 절대적인 지배력을 위해 서로 다투어 왔다."(174, 제2부 브롭딩낵 기행) - P174

[7] "그들을 서로 비교해보니, 로마의 원로원은 영웅과 반신반인의 모임처럼 보였으며, 오늘날의 국회는 봇짐장수, 소매치기, 강도, 깡패들의 집단처럼 보였다."(249, 제3부 라퓨타 기행-글럽덥드립) - P249

[8]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가지게 된다면,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인가에 대해 나는 가끔씩 생각하고는 했다. 스트럴드블럭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는 행운이 온다면, 영원한 생명과 죽음 사이의 차이점을 이해함으로써 나는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내가 가장 함께 있고 싶은 사람들은 불사신들이다."(266-267, 제3부 라퓨타 기행-글럽덥드립) - P266

[9] "죽지 않는 생명을 얻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을 최대의 적으로 여기면서 하루만이라도 더 살았으면 하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도망을 치게 마련이다."(269, 제3부 라퓨타 기행-글럽덥드립) - P269

[10] "혈연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싸우고 싶은 욕망은 커지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는 궁핍하고, 부유한 나라는 교만하다. 교만과 궁핍이 부딪히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군인은 가장 명예스러운 직책으로 간주된다. 군인이란 그를 결코 공격한 적이 없는, 그와 같은 종족을 가능한 많이 죽이도록 고용된 야후이기 때문이다."(315, 제4부 브롭딩낵 기행) - P315

[11] "나는 돈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하얀 것을 검다고, 검은 것을 하얗다고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노예나 다름없다."(318, 제4부 브롭딩낵 기행) - P318

[12] "나는 주인을 따라서 모든 허위나 기만에 대해 완전한 혐오감을 드러내게 되었다. 진리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고 결심했다."(329) - P329

[13] "정부와 법률 체계는 막대한 결함을 지니고 있는 이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331, 제4부 브롭딩낵 기행) - P331

[14] "호수나 샘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게 될 때, 나는 한 마리의 야후에 불과한 자신에 대해 증오와 혐오감을 감출 수 없었다. 나 자신의 모습보다는 차라리 야후들의 모습을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나를 참을 수 없었다."(353, 제4부 브롭딩낵 기행) - P353

[15] "훌륭한 이성을 지니며 살고 있는 휴이넘은 자신들의 좋은 덕성에 대해 교만스러운 자만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튼튼한 다리와 팔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만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같다. 다리나 팔이 잘린다면 슬픈 일이지만, 어떠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다리와 팔이 건강하다고 해서 교만한 마음을 먹지는 않을 것이다.
영국에서 살고 있는 야후들의 악덕이 가득한 사회를,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나는 이 여행기를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도덕함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날 생각조차 하지 않기를 이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경고한다."(375, 마지막 문장)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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