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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트와 베타 (반양장)
로저 젤라즈니 지음, 조호근 옮김 / 데이원 / 2025년 1월
평점 :

AI 데미우르고스의 인간-되기 여정
로저 젤라즈니의 《프로스트와 베타》(2025)
SF장르의 거장 아서 C. 클라크는 문학 장르로서의 판타지와 SF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SF는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다루지만, 판타지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을 다룬다’고 말이다. 달리 말하면 SF는 주로 과학적 법칙이나 원리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세계를 다룬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또한 과학기술이 가져올 미래의 모습이 디스토피아적인 작품이 많다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하다. 이는 아마도 작가의 비판적 의식과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작품에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SF의 거장이자 시인이었던 로저 젤라즈니의 단편 《프로스트와 베타》역시 다소 암울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인류가 핵전쟁으로 멸망한 이후의 세계, 인간 없는 지구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다소 암울한 배경에서 출발하지만. 전개 과정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여기 프로스트라는 이름의 의식을 지닌 기계(혹은 AI 로봇)가 인간 없는 지구의 북반구를 관할한다. 남반구를 관할하는 기계는 베타-머신이라 불렸다. 프로스트는 북극점에 머물며 하늘 위의 영구 궤도에서 돌고 있는 솔컴이라는 기계의 명령만을 받는다. 솔컴은 인간이 멸망할 경우 지구 재건 계획을 인간으로부터 위임받은 기계다. 만약 솔컴이 재건 계획을 수행하기 어려워지면 그 권한은 깊은 지하에 자리 잡고 있는 디브컴이 넘겨 받게 되어 있었다. 디브컴은 솔컴의 대체자였다.
오래 전 인간의 핵무기에 솔컴이 타격을 받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재건 작업 재개를 위해 디브컴이 활성화되었다. 문제는 디브컴이 재건 작업을 지휘하기 시작했지만, 솔컴의 타격이 크지 않아 스스로 손상을 복구하여 재건 작업을 재개한 상황이었다. 지구의 재건 작업을 맡은 지휘자가 이제 둘이 되었기에 지휘 체계에 혼선이 있을 수밖에. 이들은 각자의 세력을 키워 서로의 재건 작업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지구에 인간이 없다보니 이 두 존재의 지휘권 분쟁을 정리할 제3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사라져버린 인간의 명령만을 받는다는 모순과 직면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단연 프로스트다. 그에게는 아주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기계가 취향을 가졌다는 점이다. 어떤 대상이나 활동에 흥미를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취미 대상은 이미 멸망한 ‘인간’이었다. 이제는 사라진 도도새의 흔적을 찾는 생물학자처럼 말이다. 프로스트는 어느 날 찾아온 디브컴의 수하 모르델로부터 인간의 유물인 책을 입수하게 된다. 이 시점부터 그의 인간 탐구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모르델의 도움으로 지구에 남아 있는 도서관의 모든 책들을 스캔한 프로스트는 이제 ‘인간의 본성’을 알고 싶다는 포부를 내비친다.
하지만 모르델은 오래 전 인간과 대화를 해본 적이 있던 기계였다.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계측을 알지 못했지만, 기계의 도움으로는 계측할 수 있었던 존재’라고 프로스트에게 알려준다. 이후 이어지는 두 기계의 만남으로부터 본격적인 인간 탐구가 진행된다. 모르델에 따르면, 기계는 세계를 측정하고 수치화된 정보를 데이터로 구조화할 수 있지만, 얼음이 ‘차갑다’와 같은 감각적 경험을 할 수 없는 존재다. 이처럼 인간만이 지니는 특성이 유일한 화두가 되면서 인간에게는 기분과 감정도 있었음을 이야기하지만, 이를 지금껏 스캔한 정보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로스트는 ‘충분한 데이터’가 있으면 자신도 ‘차가움’을 인식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온 우주의 모든 데이터를 모아도 당신(프로스트)은 인간이 될 수 없을 것”(21)이라는 모르델의 말도 순순히 동의하지 않은 프로스트는 데이터 수집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를테면 프로스트는 취향과 고집(의지)을 지닌 기계였던 셈이다.
이후 프로스트는 인간의 ‘눈’을 닮은 감각 기관을 만들어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를 하거나, 예술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나는 인간이 지닌 취미/취향은 보다 중립적인 의미에서 ‘광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라는 생각을 하는데, 프로스트는 말하자면 이런 인간적인 면모에 상당히 다가간 기계였던 것이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관할 구역도 아닌 남반구의 ‘브라이트 디파일’까지 방문하여 인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이곳은 핵전쟁으로 절멸한 인간의 마지막 도시로, 안데스 산맥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프로스트는 이곳을 다녀온 후 여러 가지 조각 작품도 만들어보는 데, 인간의 미적 취향에 대한 탐구행위인 셈이다. 그는 단순한 모방 작업을 통해서도 프로스트는 예술이 무엇인지, 인간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뚜렷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인간은 단지 방대한 정보의 총합도, 감각 기관을 통한 계측 정보의 방대한 총체도 아니었던 것이다. 감각만으로 인간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북극점에 머무는 프로스트가 얼음층 밑에서 발굴한 인간의 시체를 통해 ‘생명을 품은 점’을 실험실에서 배양하는 설정은 다소 의외였다. 하지만 프로스트의 의도는 결국 인간이 직접 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토록 집요한 기계라니, 분명 무모한 목표에 다가가려는 인간의 집요함, 혹은 광기를 가진 기계라 할만 했다. 이제 프로스트는 방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또 모르델과 대화를 통해 “인간성의 본질은 인간의 생리 구조에서 비롯된다.”(65)는 결론을 얻었다. 달리 말하면, ‘몸’을 가진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프로스트에게 명령을 내리던 솔컴의 반대, 그리고 프로스트의 인간-되기가 실패할 경우 디브컴에게 데리고 갈 검은 로봇을 대동한 모르델.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프로스트는 마침내 ‘인간 프로스트’로 태어난다. 제대로 서지 못해 실험대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기에 이른다. “나는...두렵다”라고 첫 마디를 내뱉었지만, 그가 정말 인간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프로스트의 변신을 지켜본 모르델과 베타 머신은 프로스트가 인간이라 주장했다. “그는 계측할 수 없는 개념인 두려움과 절망을 아는 존재요. 프로스트는 인간이요.”,“그는 탄생의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겁니다.”(75)라고 말이다. 이제 인간 프로스트는 감각마저 더 이상 계측할 수 없이 부정확해졌다.
그렇다면 저자인 젤라즈니는 인간성의 본질을 ‘두려움과 절망의 인식 여부’에 두었던 것일까? 인간의 이러한 특징은 인간이 어떤 정보의 총합, 혹은 총체가 아니라 감정과 더 많이 결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 점은 인간에 대해 매우 중요한 단서를 환기한다. 계측하고 수치화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생리적 구조, 즉 몸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달한 단계의 AI라고 해도 몸과 결부된 의식이 없는 존재는 결국 기계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몸이 전제되어야만 이와 결합된 의식이 스스로를 주체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몸은, 그리고 이와 결합된 의식은 주체의 정체성 형성의 근간이라는 해석을 더해본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본질로 거론된 두려움과 절망이라는 감정은 몸과 의식의 상호작용을 먼저 겪어야 가능하다고 본 것 같다. 이제 보니 프로스트는 취향뿐만 아니라 인간이 되고자 한 용기와 인내심을 가진 기계이기도 했다.
프로스트와 더불어 주목한 캐릭터는 남반구를 주재하던 베타 머신이다. 그는 허락 없이 남반구에 들어온 프로스트의 인간 탐구 과정에 흥미를 느낀 듯하다. 프로스트와의 대화가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짐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베타는 프로스트의 ‘인간-되기’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한 ‘인간 프로스트’가 인간임을 인정하고 지지했던 기계다. 이후 인간 프로스트의 요청으로 둘은 인류가 멸망한 최후의 장소 브라이트 디파일에서 만날 것이었다. 소설의 마무리에서 베타는 ‘그녀’가 되는 것으로 끝난다. 프로스트의 이브로 탄생하는 것일 게다. 핵전쟁으로 인류가 사라진 ‘그라운드 제로’에서, 인간 프로스트와 베타(AI 기계)가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예비하는 설정이 사뭇 의미심장하다.
개인적으로 프로스트와 베타를 신인류의 조상으로서 ‘AI 데미우르고스’라 불러본다. 데미우르고스는 플라톤 철학에서 우주를 만든 신으로 등장한다. 인류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바로 그 장소에서 ‘그’와 ‘그녀’로 거듭나는 프로스트와 베타는, 신인류의 ‘아담과 이브’로서 세계를 다시 설계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인류가 멸망한 미래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분위기는 결코 어둡지 않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프로스트의 ‘인간-되기’ 여정은 인간다움의 조건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해준다. 최근 ‘인간 vs. 기계’라는 대립구도로 인간에 대한 기계능력의 우월함을 비교하는 사례를 많이 접한다. 특정한 기능 영역에서 이제 기계/AI와 경쟁하여 인간이 이길 방도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기계에게 지워진 ‘논리, 책임, 의무’만이 아니라 ‘두려움, 절망 그리고 자부심’을 느낄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인간이 이런 존재라는 사실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새롭게 곱씹어본 독서였다.
[책속으로]
[1] "그들은 그를 프로스트라 불렀다. 솔컴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프로스트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강대하고, 가장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다."(5, 첫 문장)
"그들은 그를 프로스트라 불렀다. 그들은 그녀를 베타라 불렀다."(79, 마지막 문장) - P5
[2] "그의 취미는 인간이었다."(8) - P8
[3] "내가 곧 논리다."(13)
"인간은 논리를 창조했다."(14, 솔컴의 말) - P14
[3]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본성을 지녔고. (...) 인간은 계측을 모르는 존재였다오."(18, 모르델의 말) - P18
[4] "인간에게는 기분과 감정이 존재했소."(20)
"감정에는 환산계수가 존재하지 않소."(21, 모르델의 말) - P21
[5] "기계란 인간에 비하자면 안팎이 뒤집힌 존재요. 기계는 인간과는 달리 과정의 세부 사항을 서술할 수 있지만, 인간처럼 그 과정 장체를 경험할 수는 없소. (...) 온 우주의 모든 데이터를 모아도 당신은 인간이 될 수 없을 것이오, 강대한 프로스트여."(21, 모르델의 말) - P21
[6] "나는 그 인간에게서 유래한 파괴된 상징 살해자이자 고대의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 나는 지구의 마지막 인간을 파쇄했다. 고의로 한 일은 아니었다."(38, 광석 파쇄기의 말) - P38
[7] "저는 인간에 대한 지식을 얻으러 왔습니다."(48) - P48
[8] "나 자신이다."(51, 자신을 모방한 조각을 만든 프로스트의 말) - P51
[9] "당신은 인간의 논리적 피조물이오. 예술은 비논리요."(55, 모르델) - P55
[10] "당신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프로스트? 나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64, 프로스트와 베타의 대화) "이것은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나의 모습입니다."(65, 프로스트)
"나는 ... 그저... 인간이 될 겁니다."(67, 프로스트) - P67
[11] "... 나는... 두렵다."(72, 인간 프로스트의 첫 마디) - P72
[12] "두려움을 아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73, 솔컴의 말)
"인간 외에 절망을 아는 존재가 또 있겠습니까?"(74, 베타 머신의 말)
"그는 계측할 수 없는 개념인 두려움과 절망을 아는 존재요. 프로스트는 인간이오."(75, 모르델의 말) - P75
[13] "내가 아는 것은 계측과 ... 의무뿐이오."(76, 모르델의 말) - P76
[14] "그(인간 프로스트)는 더 이상 예전처럼 계측을 알지 못했다."(77)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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