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경계를 부단히 넓히고자 했던 삶의 여행자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민음사] (2004)
출근하면서 슬쩍 읽은 구절.
“자신의 몸 주변을 바다로 둘러 싸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세계라는 개념도, 세계와 자신의 관계도 이해할 수 없다. 이 위대하고도 단순한 선(線, line)은 풍경 화가로서의 나에게 전혀 새로운 사상을 불어넣어 주었다.”
문인이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리고 필연적으로 면밀한 관찰자였던 괴테는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자들 역시 자신의 개성/고유성/취향을 발견하고 이를 고양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하지 않나. 그렇다면 이런 비판자들도 괴테의 ‘방황’과 ‘부단한 노력’에서 배울만한 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괴테를 연구하거나 특별히 좋아한다고 말하는 독자들 외에 인간으로서 괴테를 이야기하는 이는 많이 보질 못했다. 한 인간은 출신성분으로만 요약되기에는 너무나 복잡다단한 존재다. 만일 괴테가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이토록 성공했다면 우리나라의 정서상 더 많은 영감을 주었을까도 싶지만, 그럼에도 이 때문에 인간 괴테로서 많이 간과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앞서 인용한 이 구절은 나폴리에 머물던 괴테가 시칠리아로 가는 길에 쓴 여행 기록의 한 구절이다. 일기를 보면 괴테가 시칠리아로 가게 된 것도 미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시칠리아에서 배가 도착하는 시일 직전까지 로마로 돌아갈지, 아니면 시칠리아로 떠날지를 미처 결정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신이 마련해놓은 섭리 속에서 신이 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합리적 이성이 자신을 길을 찾느라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나폴리를 떠나기 전까지 갈까-말까를 망설이던 젊은 시절의 괴테를 엿볼 수 있었다.
이 여행에서 그는 오래전에 쓴 <이피게니에>와 <타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고쳐 쓰는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다. 독일의 대문호라는 이름의 (일회적) ‘아우라’와 달리, 그는 평생 자신의 글이든 그림이든, 어떤 목표(destination)라는 지향점을 향해 부단히 다가가고자 노력했던 인간의 모습을 후세에게 남겨놓았다.
독문학자 전영애 교수의 말에 따르면, <파우스트>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때 떠올릴 수 있는 구절은 “지향이 있는 한, 인간은 방황한다.”라는 문장이다.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가 사망하기 두 달 전까지이던가... 이 작품을 어떻게 하면 좀 더 낫게 다듬어 나갈 수 있을지 숙고했던 인물이었다. 말년에 이르러 대문호가 발견한 중요한 인생의 진실 하나가 이 문장이라면, 어쩐지 김이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한 문장에서 발견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가여운 인간’의 모습으로 읽혔다. 그렇다. 자연의 최상위 층에 자리를 잡고, 놀라운 이성의 디딤돌 위에서 자연 세계를 군림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무한한 연민을, 이 귀족 출신의 대문호는 거대한 아코디언처럼 주름잡힌 <파우스트> 속에 감추어두었던 셈이다. 이 책에서 내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에 대한 회의와 삶의 덧없음,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애정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오늘 출근하며 읽은 여행기의 한 구절에서도 세계를 바라보는 한 인간의 시선, 움벨트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다. 움벨트(umwelt)는 독일어로 ‘환경, 주변 세계’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개인에게 보여 지고 지각되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결국 그의 <이탈리아 여행기>는 여행을 통해 자신의 ‘움벨트’를 확장해나간 한 인간의 발자취다. 때로는 머뭇거리기도하고, 망설이기도 하지만, 결국 어느 쪽으로든 발길을 내딛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주어진 특별한 삶의 조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 조건들이 나의 조건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한 인간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폄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에는 ‘움벨트’라는, 한 인간에게 주어진 시선이자 제약 조건이기도 한 이 ‘경계’를 평생 부단히 넓히고자 노력했던 여행자 괴테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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