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퀘그의 진짜 서명은 뭘까?
- 《모비 딕》 9종 판본 비교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을 읽다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소설의 화자인 이슈메일은 동료인 작살잡이 퀴퀘그와 함께 탈 포경선을 알아보다가 피쿼드호에 승선하기로 합니다. 이때 포경선이 만선하여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받게 되는 배당금을 포함한 계약을 하게 됩니다. 배당금은 선원의 경험치와 실력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는데요, 문맹이었던 퀴퀘그가 자신의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문제는 출판사 판본마다 퀴퀘그의 서명(사인)이 다르게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제가 소장하고 있는 9종의 《모비 딕》판본을 비교해보았더니, 퀴퀘그의 서명을 크게 3종류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 영문 X자 모양
(2) 한자의 열십자(十) 모양
(3) 수학 기호 무한대(∞) 모양, 으로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이번에 정리한 9종의 판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비 딕》 판본들 - 각 18장에 나오는 퀴퀘그의 서명
[1] 작가정신(개정판) 《모비 딕》– 영문 X자 모양
[2] 작가정신(아셰트 클래식) 《모비 딕》– 영문 X자 모양
[3] Penguin classics 《Moby-Dick》 (Ch.18 His Mark) – 열십자(十) 모양
[4] 문학동네 《일러스트 모비 딕》– 무한대(∞) 모양
[5] 문학동네 《그래픽노블 모비 딕》 – 무한대(∞) 모양
[6] 현대지성 《모비 딕》– 무한대(∞) 모양
[7] 열린책들 《모비 딕》 (상) – 열십자(十) 모양
[8] 미메시스 《그래픽 모비 딕》– 무한대(∞) 모양
[9] 쿠텐베르크 프로젝트 영문판 《모비 딕》(무료 전자책) – 영문 X자 모양
이렇게 판본마다 작살잡이 퀴퀘그의 서명이 다른 이유는 뭘까를 생각해보았는데요, 어쩌면 출판사마다 번역 또는 출간을 위해 기반으로 한 오리지널 판본 자체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건 각 출판사가 번역본이든 영문판이든 기본 텍스트를 어떤 판본을 썼을까의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요...
《모비 딕》 초판의 판매가 부실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초판을 보관해두었던 창고에 화재가 나서 《모비 딕》 (초판본) 재고가 모두 소실되었다고 하지요. 이후에 멜빌의 탄생 100주년인 1919년에야 비로소 평론가들에 의해 《모비 딕》이 재조명 받게 됩니다. 이때 《모비 딕》이 다시 출간되었을 것이고, 그의 원고를 편집자가 다시 검토하고 제작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원래 멜빌이 의도했던 퀴퀘그의 서명이, 어떠한 이유로 변형되었던 것은 아닐까 추정해봅니다. 마치 유전자가 여러 번 분열을 거듭하고 복제되는 과정에서 유전자 배열에 발생하는 ‘돌연변이’처럼 말이지요. 마치 귀를 막고 특정 단어를 입모양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게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정리하면, 출판사마다 퀴퀘그의 서명이 다르게 나타나는 까닭은 초판을 기반으로 하는 판본과 달리, 1919년에 다시 주목을 받게 되면서 복간되는 판본 작업에서 나타난 작은 실수가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의 상상놀이에 기반 한 가설입니다. (이걸 뭐라고 부를까요? 텍스트 돌연변이 가설? ㅎㅎ)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읽다보면 성경을 비롯한 그리스 고전 등을 필사하는 필경사 사제들이 나옵니다. 한 권의 책을 필사하는 데 8명이 한 팀을 이루어 필사한다는 설명을 본 것 같습니다. 반드시 8명 일리는 없겠으나, 중요한 것은 혼자 모든 과정을 도맡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지요. 그러니까 한 사제가 구술하며 읽어나가면, 다른 사제는 이를 면밀히 듣고 필사를 해나가는 방식이었던 거지요. 또 다른 사제는 이를 검토하는 역할을 하며 검증을 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에서 필경사들의 미묘한 실수가 발생하곤 한다는 점입니다. 때로는 작은 실수로 글자는 비슷하지만 다른 뜻을 갖는 단어로 변경되어 남게 되는 일도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일이라 종종 실수가 발생할 수밖에요.
유전자 복제 과정도 비슷한 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포가 분열할 때, 각 세포에 들어 있던 유전 정보도 둘로 나뉘어 각 세포에 정확히 복제된 유전 정보가 전달되어야 합니다. 물론 복제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기도 하는데요, 잘못 복제된 유전자는 자체적으로 수정·복구되는 기능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복제되는 횟수가 워낙 많다보니 확률적으로 어느 정도의 복제 오류가 발생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거지요. 그렇다면 텍스트라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필사 과정에서 실수가 더 많이 일어났던 모양입니다.
어찌되었든, 출판사마다 퀴퀘그의 서명이 왜 다르게 되었을까하는 궁금증에서 시작한 조사 작업이고, 저의 상상에 기반한 추정이긴 합니다만, 각 출판사에서 어떤 판본을 기반으로 하여 작업했을까 궁금해지긴 합니다. 문학동네와 현대지성은 퀴퀘그의 서명이 무한대 형태인 것으로 보아 같은 판본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을 해보게 되고, 열린책들 판본은 펭귄 출판사가 사용한 판본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은 겁니다. 아무튼 여기까지가 오늘 조사해볼 수 있는 한계인 것 같습니다. ^^;
각 출판사 편집자님들(작가정신/문학동네/현대지성/열린책들/미메시스)께서 이렇게 출판사의 판본마다 퀴퀘그의 서명이 달라진 이유를 알려주신다면 책 읽는 기쁨이 배가될 듯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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