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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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비이성을 만날 때, 인류에게 남아있는 것



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2024)

 




매니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벵하민 라바투트의 전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그때 받은 인상을 다시 소환해보자면, 전작은 완전히 SF는 아니라도 테드 창의 소설을 떠올리게 한 단편집이었다.


 

특히 라바투트의 단편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은 테드 창의 단편집 당신의 인생 이야기에 실린 단편 영으로 나누면을 떠올리게 했다. 테드 창의 영으로 나누면은 천재 수학자가 수학의 세계에서 만난 지적 파국의 순간을, 부부관계라는 인간사와 오버랩시키며 해법이 없는 두 세계 속 비이성의 영역을 마치 평행우주처럼 다루었다. 내가 좋아하는 단편이기도하다. 이와 유사하게 라바투트는 그의 단편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에서 천재 물리학자가 물리학의 세계에서 만난 지적 파국의 순간을 다루었던 것이다.


 

이 두 단편 작품은 각각 수학과 물리학에서의 특이점(singular point)’라는 문제를 다룬다는 소재적인 공통점이 있다. 이 특이점이 지니는 공통적인 속성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정의내리기 불가능함(hard to define)’일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 이해하기 힘든, 자연의 근본적인 틈새를 알아본 천재 과학자의 지적 위기를 말하고 있었다. 이런 국면은 매니악에서 등장하는 천재적인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나 수학자 존 폰 노이만에게도 찾아왔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던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야심만만했던 천재 폰 노이만은 한때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통제하고자 꿈꾸었다. 무엇보다 수학으로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길 열망했던 것이다. 이는 그의 첫 소설집부터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큰 주제이기도 하다. 번뜩이는 지성으로 우주를 이해하려 했던 현대의 이카루스들이 지적 파국의 순간 어떤 고뇌와 행동을 하게 될지 고민했다. 안타깝게도 세계의 모든 현상을 수학으로 나타내고자 했던 노이만의 열망은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그 기세가 한풀 꺾이고 만다. 물론 그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넓고 깊게 이 세계에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 놀라운 일이다. 이 뜨거운 지성에 관한 숨은 역사가 바로 라바투트의 두 번째 팩션 매니악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저자는 처음 만나보는 스타일로 자신이 고민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그의 이야기에 금세 빠져들게 되었다.


 

다만 이번 장편소설 매니악은 테드 창의 스타일(내가 느낀 판단으로)을 훌쩍 넘어 자신만의 목소리로 한 발 더 나아갔다는 인상을 주었다. 벵하민 라바투트라는 작가를 모르고 지나갔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저자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야기할 때 많이 소환되는 오펜하이머나 리처드 파인먼, 엔리코 페르미와 같은 물리학자 보다 조금은 덜 주목받았던 존 폰 노이만에 주목했다. 그는 거의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던, 내폭형 원자폭탄(플루토늄을 사용)을 현실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원자폭탄 개발 이후 진행된 수소 폭탄 개발, 컴퓨터 이론을 토대를 놓았고, DNA구조의 발견보다 10년도 전에 자기 복제의 기본 메커니즘을 정확히 설명해내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저자는 이번 작품에서 한 세기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천재적인 인물들(특히 존 폰 노이만)을 깊이 탐구했다. 읽는 내내 신선하고 흥미진진한 독서경험이었다.


 

이야기의 중간 중간에 알고 있던 과학사의 에피소드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모르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저자가 자료조사를 얼마나 치열하게 하며 이야기를 구성해나갔을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에피소드를 읽고, 그동안 크게 관심을 갖거나 잘 알지도 못했던 AI기술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AI알고리즘 마스터에 이르는 인류 이성의 발전과 인공지능 현실이, 파울 에렌페스트와 같은 작고 오래된 특이점과 같은 사건들부터 주목하며, 이 사건들이 결국은 모두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건들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바라보면 가느다란 한 줄기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다만 이세돌-알파고 대국 사건에 기반한 이야기는, 바둑과 같은 두뇌 게임이자 유희이기도 한 인간의 활동에서 인간의 심리/마음이 빠질 때 다다를 수 있는 장면을 미리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일종의 사고 실험처럼 말이다. 우리는 지금 오로지 서구적인 이성의 정복만이 남게 된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첨단 기술에 무지한 독자의 우려일뿐일지도 모르겠다.


 

성경에는 자연을 정복하라라는 말이 없다고 한다. 셈어든 히브리어든 원래 성경에 나온 표현을 정복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섬기다라 번역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 비교문학 연구자로부터 들은 말이다. 다만 초기 서구 지배 세력은 이 번역어에서 정복이란 용어를 선택한 것뿐이다. 번역이란 어떤 의미에서 얼마나 정치적인 행위인지, 혹은 폭력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일화다. 그러니 번역이라는 이 정치적행위는 하나의 역사적 초기 조건이 되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만들었다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또는 우리가 사는 현실은 이렇든 무수히 가능한 경로 중 하나인 시뮬레이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이성만을 앞세운 서구적 정복의 도도한 역사와 그 진행과정을 생생히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후대의 과학자나 대중은 스티븐 호킹이 ‘AI는 극히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며 경고한 것을 비웃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런 우려를 느끼고 우리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AI알고리즘이 근본적으로 지니는 결함 혹은 오류의 가능성을 말이다. 검은 타인을 공격하고 방어하는 도구이지만, 나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물건인 것이다. 다만 수학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었던 현대판 파우스트에게 인간의 마음이 남아 있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될 수 있을지 상상해볼 수는 있었을 것이다. 폰 노이만의 행적과 그가 남긴 유산을 검토해보면 말이다.

 


AI알고리즘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것들을 데이터삼아 학습하고 모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AI알고리즘은 없다. 이건 분명하다. 그러면 우리는 이 데이터의 성격에 대해 우선 질문해야 할 것이다.


 

이 데이터라는 것이 과연 객관적이고 공평한 것인지 의심해야 한다. 내가 던진 이 질문에도 가치를 묻는 표현이 들어가듯, 인간이 만든 데이터에 인간의 편견과 왜곡이 빠질 수 없을 테다. 그럼 이를 학습하는 알고리즘은 결국 어떻게 될까? 나도 답은 모른다.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네 번째 대국에서 망상에 빠졌던 것처럼, ‘정신줄을 놓게될 것인지 아니면 어떤 문턱을 넘어서 인간의 이해로는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초이성의 존재가 나타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벵하민 라바투트의 이야기는 새로운 궁금증과 물음을 독자에게 던져주는 듯하다.


 

파울 에렌페스트는 어쩌면 지나친 공감능력과 연민의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유대인과 장애인을 학살하던 나치 시대에 장애아들을 먼저 죽이고 자살했으니 말이다. 반대로 폰 노이만은 시대를 앞서 태어난 AI 알고리즘과도 같은 존재처럼 보였다. 암으로 죽어가던 말년에 딸이 질문했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소련에 핵 공격을 먼저 단행해 수많은 이를 몰살할 방안을 태연히 고안했으면서, 자기 죽음을 대면할 때는 왜 평정심과 품격을 차리지 못하느냐”(283)고 묻는 딸에게 노이만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전혀 다른 문제지”(283)라고. 그에겐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을지 모르나, 인간에 대한 존중, 곧 연민이 부족했던 것 같다. 이런 맥락은 AI알고리즘을 다루는 서구의 과학자들이 오로지 인간을 이기기 위해 바둑을 학습하는 AI를 만든 사례와 다를 바 없을 테다. 과연 인간은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나 역시 결론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으로 감상을 마무리해본다. 어쩌면 아주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과학자가 비이성의 덫에 걸릴 때, 우리의 손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애정, 곧 연민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연민 혹은 공감 능력을 습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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