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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의 이사 ㅣ 문지아이들
보탄 야스요시 지음, 김영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평점 :
무용한 쓸모의 유희적 발견
《임금님의 이사》
보탄 야스요시 글·그림 | 김영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
가끔 아내가 보는 그림책을 가져다 보곤 한다. 관심분야가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나는 우리 부부는 각자 다른 책을 보다 가끔 그림책 앞에서 만난다. 안녕!
《임금님의 이사》도 이렇게 만났다. 그림책에는 다양한 형식과 이야기 구조가 있다.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책도 있지만, 생각할 거리들이 많아 각 페이지마다 머물다 책장을 넘기게 되는 책도 있다. 또 그림 한 점 한 점에 시선을 빼앗기다 책장을 넘기는 그림책도 있었다. 그림책이 아이들만을 위한 장르라고 여긴다면 오산이다. 그림과 텍스트 작업은 한 작가가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글과 그림 작가가 협업을 많이 한다. 어떤 경우든 그림책은 그림과 글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다양한 개성을 드러내며 서로 만나는 장이다. 글 없는 그림책이라면 제목이 그림과 잘 어울리는지도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대개의 경우 글 작가와 그림 작가의 작업이 서로 잘 어울리는지, 그리고 그림책의 방향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짐작해보기도 한다. 그림책은 결코 아이들만을 위한 장르가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자(그림 작가)의 화면 구성 혹은 프레이밍이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림 작가의 개성이 텍스트와 얼마나 잘 조응하며 드러나는지 등등, 보이지 않지만 그림책을 통해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책을 볼 때 중요한 건 각자가 자신의 관심사에 맞게 읽어내고 즐기는 일이다.
아이들이 그림책을 읽는 방식이 어떤지 궁금하긴 하다. 어린 독자들은 글보단 그림에 먼저 눈길을 주기 때문에 아이들이 이야기를 통해 그려낸 세계 속에서 여행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흐름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어린 독자들에게는 그림을 통해서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다. 텍스트 역시 문장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리듬감이 독자들에게 쉽게 가 닿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글자와 단어가 세심하게 다듬어져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그림책 작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장르다. 그림책의 대상 독자는 대개 아이를 포함한 폭넓은 독자다. 따라서 더 많은 고민과 연구가 필요하다. 폭넓은 독자의 마음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흔에 읽는 철학책’과 같은 기획과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그림책 작가들은 무엇보다 글과 그림의 결이 맞는지, 그리고 글과 그림의 전달력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지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일 것이다. 한 권의 그림책을 완성하기 위해 수차례 더미북을 만드는 과정이 필요한 이유다. 특히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 작업 과정은 ‘아이라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이다.
《임금님의 이사》는 어느 독자를 대상으로 할까. 특정 연령대의 독자를 정해 두지는 않은 듯하다. 어린 독자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글-그림 해석이 발생할 것이고, 성인 독자 역시 각각의 관심사에 맞는 수용 방식을 따를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그림책이다. 작가 보탄 야스요시는 1971년 오사카 출생으로, 그의 그림은 상당히 섬세하다. 반면 자세히 보면 또한 느슨한 여유가 엿보인다. 간결하게 그린 윤곽에 무심한 듯 채색되어 있는 묘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섬세해 보이는 채색 방식은 자칫 답답하고 경직될 수 있는 반면, 그의 그림에서는 은근하고 느슨한 자유로움마저 느껴진다.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림을 관찰하다가도, 어느 순간 숨통을 틔워준다고 할까. 또 인물이나 동물들에 과도하게 익살맞거나 ‘귀여운’ 인성을 부여하지 않아 좋다. 이건 물론 나의 취향일 뿐이다.
그림책 중에는 원화가 궁금해지는 작품이 있다. 내게는 《임금님의 이사》가 그렇다. 대부분의 그림의 파노라마 판형이기에 그림의 절반이 접혀 보이는 경우가 많다. 책으로 그림을 감상하기에는 조금 아쉽다. 투명한 수채화 그림의 발색은 과하지 않으나 선명한 인상을 준다. 섬세하게 그려졌기에 원화가 더욱 궁금해지는 그림들이다. 한편 임금님과 ‘친구들’이 기다란 수레에 엄청난 짐을 싣고 이동하는 장면은 동양과 서양적인 사물들이 모인 ‘호기심의 방’을 연상케 한다. ‘분더카머’, 혹은 ‘쿤스트카머’라 불렸던 서구 근대의 전유물인 ‘호기심의 방’은 유럽 귀족들이 전 세계에서 수집한 동물과 식물, 문명의 유물들을 모아놓은 방을 의미했다. 중국풍의 도자기와 동방의 양탄자 같은 물건이 보이고, 서구적인 의복이나 실내 장식물, 심지어 축음기와 대형카메라까지 보인다. 이런 그림을 좀 더 큰 한 장의 원화로 감상해보고 싶은 것이다.
이야기의 주요 인물은 부끄럼이 많은 임금님과 덤벙대는 ‘친구’ 여섯 명이다. 글에는 ‘친구’라고 나와 있지만, 이들에게 임금은 임금이다. 명령이 내려지면 ‘친구들’은 이를 수행한다. 항상 빨간 망토를 하고 다니는 임금님은 부끄럼이 많다곤 하지만, 그냥 아이 같은 캐릭터다. 그를 규정하는 특징은 무엇보다 동정적이라는 것. 남들이 곤경에 빠졌을 때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 한다. 여기에 ‘거의’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물욕이 없다. 왠지 이야기의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임금님은 좋은 의도(목적)으로 행동하려 했지만, 이를 위해 동원되는 수단은 독자의 기대를 간단히 넘어버리는 것이다.
문제는 덤벙대는 ‘친구들’이 임금님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데서 발생한다. 이들이 좁은 침대에서 자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임금님은 자신의 ‘친구들’을 위한 큰 침대를 만들라고 지시한다. 여기까지는 임금님의 공감과 연민이 빛을 발하는 듯하다. 하지만 해결사 ‘친구들’이 만든 침대는 너무 커서 성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이때 임금은 이 침대를 집어넣을 수 있는 큰 성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한다. 이 장면은 나의 빈곤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자신의 침대를 넣기 위해 더 큰 공간으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임금님과 ‘친구들’ 사이에 정확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계속 새로운 문제를 낳는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임금님이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지시를 내렸어야 한다고 지적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임금님의 속내를 이해하고 행동에 움직였어야 하며, 모르면 물어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모두 틀린 말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은 ‘온전한 소통은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우리에게 던질 수도 있겠다. 이 질문을 조금 다르게 비틀면, ‘타인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가능한가?’라는 문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임금님의 해결사 ‘친구들’을 조금 더 주목해보자.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임금님의 ‘친구들’이지만, 결국 임금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이들이다. 명령을 거부하는 일 없이 따르는 일상에 익숙한 이들이다. 어떤 맥락에선 임금과 신하의 수직적 관계 속에서 맹목적인 명령과 복종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들(소통의 문제를 포함하여)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혹은 ‘묻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 우리의 삶에서 물음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삶에서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 일이 타자를 더 이해하는 데 꽤나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삶에서 갖는 물음은 어떤 대상에 대한 조그마한 관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친구들’이 임금님의 침대를 더 크게 만드는 목적이나 이유에 대해 궁금해 했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림책처럼 간단해 보이는 작품에서도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다양한 문제들과 연관 지어 생각거리를 건져 올릴 수 있다. 우선 단독자와 단독자 사이에 온전한 이해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소통의 간극을 좀 더 줄일 수 있는 것은 ‘보다 나은’ 소통을 위해 양자가 노력하는 일에도 있음을 생각해본다.
임금님과 ‘친구들’이 이사 가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곧이어 일행이 비를 피한 집에서 비가 새기 시작한다. 동정심 많은 임금은 집주인에게 도움을 주라는 어명을 내린다. 임금의 말에 ‘친구들’은 임금의 그릇을 모두 꺼내 빗물을 모으는 데 사용해버린다. 이 때 빗물이 만들어내는 ‘톡 토독 토동’하는 소리에 모두가 즐거워했다는 점이 놀랍다. 임금님이 이번에는 비를 쫄딱 맞은 아이를 보고 “흐음, 옷을 입혀 주어라.”라고 말하니, ‘친구들’은 마을에 있는 조각상에 임금의 옷을 모두 꺼내 입혀준다. 임금님이 이런 모습에 흥겨워하는 모습은 이 그림책이 내놓는 또 다른 반전이다. 현실의 방식과는 달리, 그림책에서는 이런 소통의 어긋남이 꽤나 유쾌하게 이어진다. 차분하고 진지한 듯한 분위기 속에 스며든 해학이 엿보인다. 엉뚱한 상상력이 뜻하지 않은 장면에서 웃음을 주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온전한 소통의 부재’라는 문제는 남는다. 다만 임금님은 시종일관 그림책에서 보이는 소통의 어긋남이 만들어낸 이벤트를 더 좋아하는 듯하다. 심지어 즐기기까지 하는 것 같다. 이제 더 큰 성에 도착한 임금님과 ‘친구들’ 일행에는 임금님이 원래 사용하던 침대 하나만 남았다. 더 큰 성에 애써 왔는데, 남은 물건은 쓰던 침대 하나라니. 어쩌면 우리의 경직된 일상에서 가끔, 혹은 자주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유희적 순간이 아닐까 싶다. 이 그림책은 소통의 문제를 던져줄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삶을 더 흥겹게 만들어주는 유희성에 좀 더 방점이 있는 듯하다. 나는 이를 ‘무용한 쓸모의 유희적 발견’이라 정리해본다. 우리의 일상에서 생산적이지 못한 행위나 활동은 ‘무용하다’고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견고한 규범과 관습이 만들어낸 경직된 세계에서 우리에게는 인간다움을 유지하게 해주는 ‘놀이’의 요소, 유희성이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최근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을 보았는데, 정체가 모호하게 느껴졌던 학교 교장선생이 아이에게 해준 말이 기억났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 이런 의미였다. “모두가 누릴 수 없다면, 그건 행복이 아니야”라고. 《임금님의 이사》 역시 우리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제안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엉뚱해 보이는 상상력으로 독자의 관성적인 사고를 ‘가볍게’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매력을 꼽으라면, 나는 무용한 쓸모를 유희적으로 발견하는 경쾌함, 바로 이 ‘가벼움’을 선택하겠다. 공동체의 삶에 약간의 상상력이 가미된 ‘가벼움’은, 마치 허세 가득한 남자들의 경직된 세계에서 구성원 사이의 긴장을 느슨하게 해주는 방향제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사람들의 숨통을 틔워주고 종종 미소도 짓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규범의 경계를 훌쩍 넘는 일탈도 감행해보기도 하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임금님과 ‘친구들’이 한 침대에서 함께 잠드는 장면(나라면 사양하겠다)은, 우리의 삶에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듯하다. 임금님은 큰 침대를 집어넣기 위해 큰 성으로 이사를 감행했다. 하지만 결국 이들에게 남은 것은 임금님이 원래 쓰던 침대 하나. 그럼에도 그는 ‘친구들’과 함께 행복할 수 있었다. 이 마지막 장면은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해 보이는 요소들은 많아도,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주기도 한다. 삶의 에센스가 뭔지 따져본다면 ‘함께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 권의 그림책을 보다 옆길로 들어가 나만의 세계에서 놀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다. 저자는 독자에게 이런 발견의 기회를 마련해보라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톡 토독 토동
이 소리를 들은 임금님은 주위를 둘러보고 깜짝 놀랐어요!
방 안 가득 임금님의 그릇이 놓여 있지 뭐예요.
컵에 톡 접시에 토독 냄비에 토동
빗물이 연주하는 멜로디를 모두 함께 들으니 왠지 즐거워졌답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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