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암실문고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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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고통을 설명할 언어는 없다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을유문화사] (2023)



 

많은 학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타인과 비교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자녀를 지켜본 몇 가지 생리적 현상이나 습관, 기질에 대해서만 적용될 뿐이다. 적어도 자녀가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나이라면, 이미 부모의 이해 범주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부모가 자신의 자녀에 대해 이해하는 데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0여 년 전 미국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발생했던 총기 난사 사건이다. 당시에 총기와 폭발물을 들었던 가해자 2명은 이 학교를 다녔던 10대 청소년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언론 매체는 가해자들을 괴물이라고 표현하며 이들의 어린 시절을 파헤쳤다. 하지만 눈에 띌 정도로 문제가 될 만한 기록을 찾지는 못했다. 가해자들의 부모 역시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자도 아니었고, 자녀를 학대하거나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부모는 자녀에 대해 무관심한 냉혈한이었을까? 전혀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주변 이웃들의 평가에서도 사건의 원인이나 동기가 될 만한 문제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뉴스를 지켜보던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무자비한 폭력이 발생한 원인을 지목하지 못해 어리둥절해했던 기억이 난다. 무난한 환경에서 자랐던 아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 사례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서로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은 바로 이런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책이다. 저자 마리아 투마킨은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는 10대 시절 붕괴하기 직전까지 소련(현재 전쟁이 한창인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지역)의 유대인 집안에서 자랐고,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한 가정의 일원이다. 국경이라는 거대한 경계를 넘고 너무나 다른 삶의 조건과 마주하게 된 저자는 그만큼 외부 세계에 대해 예민하게 관찰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가 성장한 환경 또한 그가 본능에 가까울 만큼 인간의 삶과 운명이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체득하게 한 조건은 아니었을까. 저자의 글쓰기는 그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감지하는지, 세계가 그에게 얼마나 낯설게 느껴지는지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경계를 넘은 경험을 가진 사람의 낯선 글쓰기인 셈이다. 낯설지만 그만큼 굳어진 독자의 시각을 유연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저자가 만난 여러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다룬다. 때로는 고통 받는 당사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그들의 내밀한 속내도 듣게 된 듯하다. 내가 이 책에서 우선 주목한 부분은, 우리의 삶이 지극히 취약하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지역에 뿌리를 두고 활동하는 변호사로서, 가난하고 미약한 이들을 위해 변론하던 밴더와의 교류는 우리가 모르는 세계를 조금 더 열어 보여준다. 삶 자체가 취약한 이들에게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묻는 이도, 들어줄 이 마저 없었다. 이들은 관공서에서 처리할 안건으로 분류되었을 뿐이다. 당사자들은 아무에게도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110) 이들은 침묵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던 이유다. 도움이라는 이름하에 이들의 고통과 슬픔은 공개되고 관리 받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존엄은 왜곡되고 훼손되기 시작한다. 저자가 보여주는 여러 사례들은 우리가 어느 순간에라도 삶이 철저히 망가져버릴 수도 있음을, 그리고 특히 더 취약하고 더 큰 타격을 받는 이들이 있다는 현실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저자는 이처럼 취약한 사람들, 다시 말해 벌거벗은 상태로 완전한 외로움 속에 버려진 사람들에 대해 주목한다. 저자는 취약한 이들’, 그러니까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보호를 자처한 이들로부터 배신을 겪은 이들, 상처와 슬픔이 평생 트라우마가 된 사람들, 그리고 이를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과 고립감으로 고통 받은 이들의 사연을 듣고자 했다. 그는 이들이 지닌 고립감을 우주적인 외로움’(183)이라고까지 표현한다. 나는 여기서 취약한 이들이라고 표현했지만, 저자는 나에게 한 가지 경고를 덧붙이는 듯 했다.


 

가진 것이 별로 없거나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실은 잃을 것이 아주 많을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인간의 존엄이라는 개념은 큰 의미가 없다.”(194)


 

그러니까 저자가 내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지점은, 취약한 이들(사실 우리 모두가 여기에 해당되기도 한다)이 경제적 어려움만으로 죽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개인에게 재난적인 어떤 상황이 닥치게 되면, 사후 발생하는 고통과 슬픔을 말하거나 풀어 놓을 기회가 없다는 이유로도 사람들은 죽어갈 수 있다고 말이다. 극심한 상실의 슬픔을 놓아둘 애도의 공간이 없어서, 법원이나 공권력이 멋대로 단정하고 요약해버리는 행위에서, 억울함을 호소할 대상이 없어서 죽기도 한다는 것이다. 제도적·구조적인 절차만 마련한다고 이런 상황이 해결될 수는 없다. 개인들이 하나의 처리대상이 되거나 하나의 상징에 머물지 않으려면, 이들의 구체적인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저자는 이를 의도적인 무지라고 말하고 있다. 애써서 묻지 않는다면 결코 조금도 알 수 없다. 인간의 취약함은 애도의 부재와 이를 말하거나 설명할 적절한 언어의 부재로 의도적인 무지가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자가 덧붙이는 것은 인간의 고통이 처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고통에 관한한, 인간은 언제나 미처리된 상태로 머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를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재난과 같은 현실이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를 바꾸어 가며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강하게 운명에 묶여 있다는 감각, 다르게 말해 개인에게 역사가 되풀이 되는 상황은 우리를 무력감에 빠뜨리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저자는 이 과거라는 것이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244)와도 같다고 말한다. 물을 열면 아무도 없지만 당사자에게는 언제나 존재하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유령처럼. 저자가 보기에 과거는 고체가 아니기’(252) 때문이다. “그것(과거)은 보이지 않고 냄새도 색깔도 없는, 폐 속으로 들어와 그 안을 온통 헤집어 놓는 독성 화학 기체”(252)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고통으로 내상을 입은 이들에게 과거는 트라우마의 형태로 영원히 찾아온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당사자의 슬픔과 고통을 내려놓을 애도의 공간이 필요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반복되는 과거의 습격에 조금은 다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말이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저자의 말하기가 꽤나 낯설게 느껴졌다. 이 책의 특징을 어떻게 파악하며 읽어야 할지 처음엔 난감했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저자의 관점을 깨닫게 된 것은 그가 타인의 삶에 벌어진 일들을, 여러 사람들과 끊임없이 지켜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였다. 이 책의 표지나 각 장의 시작마다 제시된, 각기 다른 각도로 찍힌 암석 사진들처럼 말이다. 마치 이러한 모양으로 생긴 암석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212)는 점이다. 나도 책에 소개되어 있는 다양한 사례들을 조금은 다르게 보게 된다. 이들에 대한 인상을 규정하기 전에 뭔가 다른 이유나 원인이 있었을까?’를 의심해보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상대방의 다른 사정들을 설명해주며, 나에게도 섣부른 언어로 규정하지 말고 판단중지를 먼저 요청하는 듯 했다.

 


저자는 인간의 삶에 대해 운명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유전자 혹은 가정환경과 같은 조건이 운명을 정하는 결정론자도 아니다. 다만 인간은 우주 속의 고아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저자는 인간 개개인에게 주어진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만 극히 일부라도알 수 있다는 입장에 가깝다. 사실 인간에게 씌워진 굴레는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다. 우리를 줄곧 끌어당기는 중력장처럼 우리의 인생행로에도 영향을 미친다.

 


책에 소개된 사례 가운데 20세 즈음 아버지의 자살을 겪은 아들 마틴의 이야기가 있다. 저자는 마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삶, 부모의 고난이 되풀이되려는 삶과 부단히 맞서며 살아가는 인물들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 같다. 심지어 유전의 힘으로 아버지와 판박이처럼 닮은 외모는 마틴이 운명에 묶여 있다는 감각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저자는 아버지의 삶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으로부터 분리되려 애쓰며 부서진 삶을 추스르는 한 남자를 지켜보며 가슴아파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조금은 다를 수 있다는 생각, 혹은 희망이 남아 있다면, 마틴이 아버지의 나이에 다다른 시점에서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235)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Axiomatic이다. 이 단어에는 자명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바에 따르면, 이 제목은 우리가 타인의 사정에 있어서 자명한 것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환기시켜주기 위한 반어법인 것이었을까 싶다. 자명해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결코 언어로 말해질 수 없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부각시켜주는 제목은 아니었을까 싶은 거다. 이 해석이 너무 억지 같다면, 조금 다르게 해석해보자. 우리가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는 타인의 곁에 있어주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공리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려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타인에 대한 이해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타인을, 혹은 타인의 고통을 대할 때 기초가 되는 공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란 존재가 지극히 취약한 존재임을 우선 알아차리는 일부터 시작해볼 수 있겠다. 불시의 재난, 불시의 죽음은 대상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장 아메리가 언급한 애도와 기억의 윤리성에 대해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저자는 책에서, 유일하게 윤리적인 태도란 시간의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과거의 소멸에 저항하는 것”(92)이라고 한 아메리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 고통을 마주하고 어루만질 수 있는 기회, 이를 통해 고통을 조금은 덜어놓을 수 있는 기회, 곧 애도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도 되짚어본다. 우리가 당사자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때로 우리는 무력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들의 곁에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뱉어내는 언어를 들어줄 사람 말이다. 곁에 있어주는 이들의 역할은 당사자들의 곁에서 함께 하고, 당사자들이 결코 지워낼 수 없는 고통을 결국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독자에게 고통은 언어로 번역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동물원(C)초란공(현상/아날로그인화/스캔)





"인간의 삶은 언제나 숲속의 새 두 마리다. 

다시 말해 그것은 포착할 수 없고,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본문 3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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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1] "잊으려 애쓴다고 정말로 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와 달리 학교의 제도적 기억 속에는 자살을 위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34)

[2] "나는 어느-청소년의 시신을 검시하는-검시관으로부터 젊은 사람들은 최종성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무도 많은 일이 시행착오일 수밖에 없는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게, 한번 죽으면 우리는 영원히 죽은 채로 남는다는 사실을, 어떤 일들은 지울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64)

[3] "나는 우리가 왜 죽은 이들을 살려 놓으려 애쓰는지 안다. (...) 우리가 그들을 살려 놓으려 애쓰는 건 그들을 우리 곁에 두기 위해서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살려면 죽은 이들을 단념하고, 그들을 보내 주고, 죽은 채로 있게 두어야만 하는 시점이 온다는 것도 알고 있다."(71)
- 조앤 디디온의 말

[4] "아메리 Jean Amery는 유일하게 윤리적인 태도란 "시간의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과거의 소멸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92)

[5] "물론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만약 물어봤더라면, 저는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대답했을 거예요."(110)

[6] "인간들은 자신의 고통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그 고통이 참을 수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모든 선택지가 사라져 버리는 순간은 언제 찾아올까? 철조망 속에 갇힌 상황에서는 어디로 움직여야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112)

[7] "소년이 처해 있던 곤경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행위 역시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 그 의도적인 무지는 어느 정도는 행정 구조적 문제였고, 어느 정도는 관료주의가 지닌 문제였고, 또한 과부하에 걸려 비틀거리던 청소년 구호 체계자체의 문제이기도 ... 아니, 좀 다르게 말해 보자. 그 체계는 좆나게 많은 애들 때문에 포화상태에 다다랐고, 결국 그 애들을 인간답게 대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 것이다."(122)

"이 사건을 둘러싼 의도적인 무지. 이것은 제도의 실패이며 문화의 파산이다."(135)

[8] "그때 그(옐레나 포포비치)는 치안 판사가 된 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이해하게 된 게 있다고 말했다. 바로 자기 앞에 출두하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니라 그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처한 ‘위기’ 속에는 희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150)

[9] "오스트레일리아 남성들은 자동차 사고보다 자살로 더 많이 죽어요. 저는 이렇게 썼어요. 각자 집으로 가서 집에 있는 남자들을 끌어안아 주자고요. 그들은 종종 우리한테 속마음을 말하지도 못한다고요. 그러니까 말해 달라고 하지도 말고, 말해 줄 거라는 기대도 하지 말고 그냥 곁에 있어 주자고요."(165)
- 지역 변호사 밴더의 말

[10] "내가 ‘미처리’라는 표현을 처음 들은 건 킴벌리 지역의 사막 근처에서였다. 그곳에서 ‘미처리’란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들이 사는 땅의 현실을 설명해주는 말이다. 그 땅에서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장례식이 치러진다. 살아 있는 이들에게 죽은 이들을 애도할 시간을 주지 않는 현실. 그런 현실은 내부로부터 붕괴하면서 일종의 기능 마비를 일으키며, 그 마비 또한 타르 구덩이 속에 들어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다."(169)

[11] "가진 것이 별로 없거나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실은 잃을 것이 아주 많을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인간의 존엄이라는 개념은 큰 의미가 없다."(194)

[12] "레이먼드 게이타가 말했듯, "고통에 취약하다는 우리의 특성을 슬픔 속에서 알아채는 일"이 "죄에 어울리는 처벌을 하라"는 슬로건보다 더 나은 행동 지침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취약함. 고통에 대한 취약함. 우연에, 불운에, 유전자에, 당신이 태어난 가족에, 당신이 사는 지역에 대한 취약함."(202)

[13] "한 인간에 관한 사실들은 대개 타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중 대부분은 애초에 타인들이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무시하면 타인들은 곧 상징의 집합체로 변해 버린다. 우리 자신이 좋아하는 음료만 골라 담은 물통으로, 일종의 도구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타인을 온전한 인간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그의 어떤 점이 우리와 다른지 알아차리는 것이며, 또한 그 다른 점을 굳이 비틀어 숭고함에 가까운 무언가로 왜곡하지 않는 것이다."(212)

[14] "우리(저자와 변호사 밴더)는 하늘에 떠 있는 한 쌍의 풍선 같다. 그 풍선 안을 채우고 있는 건 헬륨도 아니고 우리 자신도 아니다. 바람과 차가운 공기가 우리를 대기 속으로 더 멀리 밀어낸다. 때가 되면 우리는 스파게티 면발처럼 갈기갈기 찢어진 풍선 조각으로 변해 땅으로 되돌아올 것이다."(215)

[15] "‘자살 유전자’는 ‘연쇄 자살’보다는 어감 상 더 쉽게 와 닿는 표현이지만, 여전히 나는 이 단어를 접할 때마다 움찔한다. 자살이 남길 수 있는 것들을 멋대로 요약해 버리는 무리하고 어설픈 언어들은 진짜 언어가 나타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세워진 대역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이리저리 목을 꼬며 기다리지만 진짜 언어는 여기 없다."(231)
- 언론이 시인 실비아 플라스와 아들 니콜러스 휴즈의 자살에 대해 ‘자살 유전자’라는 표현을 쓰며 소비하는 것에 대해 저자가 한 말.

[16] "마틴은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신체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챙겨 주지만 감정적으로 곁에 있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35)
- 20세에 아버지의 자살을 경험했던 마틴의 사례.

[17] "마틴이 맞서고 있는 문제, 즉 부모의 고난이 자식에게서 다시 되풀이된다는 그 문제는 하늘의 별들이나 율법을 써넣은 서판이 전해 주는 숙명처럼 절대적이지는 않다."(239)

[18] ""과거는 현재를 빚어낸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빚어낸다? 그보다는 과거가 현재 안으로 스며들고, 물들고, 불어넣어지는 것에 더 가까울 것 같다. 과거는 고체가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고 냄새도 색깔도 없는, 폐 속으로 들어와 그 안을 온통 헤집어 놓는 독성 화학 기체다."(252)

[19]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에서도 곧잘 발견되는, 인간은 타인을 조금도 알아낼 수 없다는 끔찍한 사실의 피해자."(280)
-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 부모와 인터뷰한 앤드류 솔로몬이 남긴 말.

[20] "동시에, 당신은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대화는 오직 몇 명의 동료 생존자들과 함께일 때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당신이 아는 것은 언어로 옮길 수 없고, 따라서 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전체 경험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당신이 그것을 말해 버리면 남들은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당신은 말하거나 침묵하기를 스스로 택할 수 없는 다른 이들을 배신하게 된다. (...) 이런 말하기는 사람을 소진시키고 텅 비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증언하는 일은 너무나도 무거운 부담을 지는 작업이며, 심지어 그 서사 자체도 극심할 정도로 가혹하다."(327)

[21] "인간의 삶은 언제나 숲속의 새 두 마리다. 다시 말해 그것은 포착(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일을 가리키는 이 단어는 언뜻 보기에는 친절하게 느껴진다)할 수 없고, 완전히 이해(타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가리키는, 마찬가지로 겉으로만 친절한 표현이다)할 수도 없다."(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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