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 탄생 193주년에
-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
크리스티나 로세티 지음 | 김군 옮김 | [별책부록] | (2023)
시를 잘 감상하지 못하면서도 기회만 되면 시집을 들쳐보고 시 주변을 기웃거려보는 것은 아마도 갈증을 느끼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학창 시절에 국어와 문학이라면 학을 떼던 것을 생각하면 지난 시간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 분야는 내게 언제나 가까이하고 싶은 분야다. 그나마 성인이 되어 늦게라도 읽기 시작한 책이 있으니, 언젠가는 문학에 더 가까이 갈 기회를 엿본다.
나는 서점의 매장에서 책을 구태여 들쳐보지 않더라도 책의 제목과 표지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책의 디자인을 구경하고, 제목을 곱씹어 보면서 책의 내용을 상상해보는 시간이 재미있는 것이다. 대체로 사진을 책의 표지로 삼은 디자인은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드물게 표지로 사용된 사진과 책이 잘 어울린다고 느끼는 책을 만나면 반갑기도하다. 그림책의 경우, 특히 번역된 도서는 원작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종이의 선택과 글꼴의 선택을 눈여겨보기도 한다. 작은 독립 책방에서 책을 펼쳐 읽지도 않고 책만 멀뚱히 지켜보다 이동하는 중년 남자가 있다면 아마도 나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라는 작은 책도 이만큼 작은 독립 서점에서 한 달 전 즈음 이렇게 만났다. 로세티의 시 몇 편을 읽어보고 시인에 대해 알아보다가 오늘(2023년 12월 05일)이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탄생 193주년이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사실 로세티라는 이름은 그동안 ‘붉은 머리의 여인’을 그린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민음사에서 출간된 단테 알레기에리의 《새로운 인생》의 표지 그림을 그린 사람, 또 몽스북에서 출간된 《사랑의 쓸모》의 표지 그림을 그린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지점이 여기였다. 이 그림들을 그린 사람은 로세티가 맞지만 화가의 정확한 이름은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로 남자였다. 흥미로운건 그가 바로 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큰 오빠였다는 점이다. 화가이자 문인이었던 단테이가 4남매인 집안의 첫째였고, 시인 크리스티나가 막내였다. 큰 오빠 단테이는 문학사에서 오래 지속된 것은 아니지만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라고 분류된 당대의 몇몇 문인들의 모임에 속해있었다고 한다. 로세티는 이들과 교류하면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탈리아 가문인 로세티 집안이 영시를 쓰고 영어로 작품 창작을 한 것이 흥미로웠는데, 로세티 집안은 과거에 정치적 이유로 영국으로 망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문학적 소양을 중시하여, 일상이 문학을 가까이하고 글쓰기를 장려하던 집안에서 크리스티나 로세티가 나올 수 있었다. 그녀가 193년 전 오늘,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난 배경이다.
이번에 읽은 작은 시집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는 영문학을 공부한 '김군'이라는 필명의 번역가가 로세티의 시를 선별하여 번역했다. 이 책에 소개된 시의 대부분이 민음사판 《고블린 도깨비 시장》에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이 책에 주목하게 되는 특징 하나가 있다. 바로 영국의 문인 버지니아 울프가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30년 12월 5일을 기리며 쓴 산문 한 편이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글의 제목이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였던 것. 이 글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메리 샌더스라는 작가가 쓴 로세티 평전 《The Life of Christina Rossetti》(1930)에 대한 버지니아 울프의 리뷰인 셈이다.
“누구나 그렇게 느끼겠지만, 전기biography 읽기에는 저항할 수 없는 큰 매력이 있다. 주의 깊게 쓰인, 그래서 상당히 만족할 만한 샌더스의 책을 한 장 한 장 펼치자마자 오랜 착각이 우리를 엄습해 온다. 어떤 마법 통에 담겨 있듯 여기에 과거와 그 안에서 사는 모든 것이 신비롭게 봉인되어 있다.”(162p,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
‘자신만의 방’에 앉아 100년 전에 태어났던 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전기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었을 버지니아 울프의 모습을 상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 리뷰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평전의 저자 샌더스가 쓴 로세티에 대한 인상을 인용하는 대목이 나온다.
“크지 않은 몸에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인이 갑자기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방 한가운데에 섰다. 이윽고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 I am Christina Rossetti'라고 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엄숙하게 자신이 누구인지 말했다. 그리곤 다시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170p,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에서 재인용)
버지니아 울프는 이 글에서 ‘조용하고 원칙에 충실한 소녀’였을 로세티의 모습을 상상한다. 파티라면 질색하고, 언제나 수수한 옷만 입고 다녔으며, 자신은 글을 쓰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믿던 한 젊은 시인의 모습을 말이다. 로세티는 사람을 피해 다니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에 둘러싸여 행복했던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평생 깊은 신앙심을 가졌던 만큼 그녀의 작품에는 종교적 감수성과 분리하기 힘들 것이다.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를 소개하고 번역한 김군의 소개에 따르면, 로세티는 낭만주의 시, 어린이를 위한 시, 종교 시 등 다양한 경향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여기에 종교 산문이나 소설 창작에도 힘썼다고 한다.
올 가을에 출간된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을 구매하기 전에 나는 로세티가 어린이를 위해 쓴 시집 《Sing-Song: A Nursery Rhyme Book》을 이전에 먼저 구입했었다. 아직 나는 시 읽기가 익숙하지 않지만, 어린이를 위한 시다보니 단어나 구조가 어렵지 않고 간결한 반면, 시어의 리듬감을 보다 잘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조금만 읽어보아도 상당히 규칙적인 운(rhyme)과 언어유희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아주 간결한 문장들이지만, 단어의 소리와 의미가 바로 그 자리에서 조응하도록 다듬은 감각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보다 긴 시 「고블린 시장」 역시 극도로 간결하게 다듬고 선별한 시어가 배치되어 있는 인상을 준다. 환상 동화와 같은 이야기 구조가 상상을 자극하기도 한다.
민음사에서 나온 《고블린 도깨비 시장》은 보다 많은 로세티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로세티의 큰 오빠인 화가 단테 로세티의 그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로세티 남매의 재능을 보다 실감나게 즐길 수 있다. 단테 로세티의 그림에 많이 등장하는 붉은 머리의 여성은 누구를 모델로 그렸을까 궁금한 적이 있는데, 그의 두 여동생을 모델로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여러 여성들의 초상 가운데 적어도 동생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얼굴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확실히 ‘이탈리아인’다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올 법한 모습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오늘은 시인 우연히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탄생 193주년임을 알게 되어 시인과 관련한 시집, 관련 도서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평생 깊은 신앙심을 지녔으며 검은색 옷을 즐겨 입었다는 크리스티나를 생각하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본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담은 영화 <조용한 열정 A Quiet Passion>이 생각났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남성중심적인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 저항했던 디킨슨이 평생 흰 옷을 입었던 것, 나아가 죽어서도 흰 옷을 입고 땅에 묻혔던 시인임이 기억났다. 여러 면에서 로세티와 대비되는 점이 많은 것 같다. 지금 검색해보니 에밀리 디킨슨이 크리스티나와 같은 해인 1830년인 것을 알았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긴 했지만, 동갑내기 시인으로서 두 사람의 삶과 시를 좀 더 알아 가면 좋을 것 같다. 김군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번역가가 앞으로 더 로세티나 에밀리 디킨슨의 시와 같은 영문학 작품을 소개해주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