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도 좋다, 그림책 - 여기 다정한 인사가 있습니다 한줄도좋다 8
구선아 지음 / 테오리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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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가는 어른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


한 줄도 좋다, 그림책

: 여기 다정한 인사가 있습니다

구선아 지음 | [테오리아] | (2021)




작가는 그림과 그림책을 좋아하는 책방지기다. 책방 이름은 연희인데, 위치는 홍대입구역근처에 있다. 지난 주말에 야외에서 진행된 도서 관련 행사에 가서 업어온 책이 한 줄도 좋다, 그림책이었다. 저자가 읽어나간 그림책 24권에 대해 간결하게 글로 남겨놓은 책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눈이 점점 나빠지는 반면, 점점 읽고 싶은 책은 많아지니 조바심내며 책을 찾게 된다. 이 책은 손에 들면 잠시 숨을 고르듯 보게 되는 책이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아내를 따라 그림책을 조금씩 보다보니, 이 책에 소개된 몇 권은 다행히 본 책이어서 저자의 감상에 보다 공감하며 읽었다.   




여러 글 중에서 어른이 되는 일의 어려움을 이야기한 대목이 기억난다. 나의 이십 대를 떠올려본다. 그 때 내 모습은 어땠을까. 아마도 이십 대의 내가 십대였던 동생에게 이러저러하게 살아한다고 훈수두었을 것이다. 나아가 삼십 대의 나는 이십 대에게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얘기하며 지냈을 테다. 웃음이 피식 나온다. 재미있는 건, 사실 난 지금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저자 역시 어른이 되는 일의 지난함을 이야기한다.



여전히 난 어른이 아니다. 어른의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어른은 어렵다. 이십 대엔 삼십대가 되면 어른의 삶으로 살 줄 알았고, 삼십 대엔 사십 대가 되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어쩌다보니 사십 대가 되었다. 어이쿠, 맙소사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십 대가 되며 나는 특별하지 않다라는 걸 깨달았다.(32)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나의 질문이 애초에 잘못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다만 어떻게 살아야 할가에 대해 한 가지 실마리를 한 줄 발견했다.



살면서 포기하지 않는 것을 가져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다.(47)



이 문장을 보는 순간 확 공감이 되었다. 그렇지. 살면서 우리는 사회의 규범에 신경쓰고 이를 쫓느라 소진해버리기도 한다. 특히 내가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에 많은 시간을 무의식적으로 허비해버린다. 나아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나의 결정을 스스로 검열하기도 하지 않은가. 나의 나이와 역할을 고려하면, 재테크를 어떻게 할지, 아파트는 몇 평짜리를 얻을지, 자가용은 어떤 브랜드로? 우리는 스스로를 개성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산업사회의 다양한 기성품에 길들여진 획일적인 질서 속에 속박되어 있는 셈이기도 하다. 문명은 이런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열정과 활력을 갉아먹는다. 살면서 우리 안에 무언가에 몰두할 만한 무언가를 하나 지니지 못한 삶은 우리를 얼마나 메마르게 만드는가. 곰곰이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 안의 작은 열정을 붙드는 대상, 아무리 여건이 어려워도 포기하기 힘든 무언가를 지닐 수 있다면 얼마나 든든한 삶일까. 나는 저자의 이 한 마디가, 내가 나다운 시간일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얘기해주는 듯 싶었다.




그냥 나는 나의 삶으로 살고 있다.(66)



이 문장은 슥 지나치기 쉬운 문장인 듯 하지만, 또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동그란 털실같은 문장처럼 다가왔다. 저자가 오롯이 경험하고 느낀 삶의 고갱이들이 동그랗게 모인 털실말이다. 그래서 눈길이 오래 머무는 한 줄이다. 무엇보다 내 삶을 오롯이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어른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생긴다. 그래야 내 주변의 가족을 돌 볼 수 있을 테니말이다.



일하는 엄마는 회사에서 퇴근하면 집으로 출근한다고 한다.(117)



, 그렇다. 뜨끔한 문장이다. 어쩌면 많은 가정이 각자의 이유로 불행하기도 한 이유는 행복한 가정 이미지가 엄마/아내 한 사람의 희생으로만 유지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반문해본다. 이 문장을 보고 눈길을 회피하는 남자 가장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이 상황은, 물론 당연한 것이 아니다. 평등이라는 거창한 용어까지 들먹이지 아도, 가정은 구성원 모두 함께 만들어나가는 공동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저자는 이것이 구성원들 모두가 자신 잃지 않는 삶의 모습이라고 내게 말해주는 듯했다.




저자는 아파트 층간 소음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위층에서 전화기 진동소리가 들리고, 화장실 물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기숙사 같은 건물이다. 층간 소음의 고통을 호소하는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나아가 아이가 있는 세대의 부모는 언제든 조마조마하기 일수다. 의도하지 않아도 아이가 불가피하게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소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배려는 없다. 배려의 시작엔 공감이 필요하다. 공감empathy은 타인의 상황과 기분 등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누가 어떤 삶을 사는지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누군가의 삶의 한 모퉁이를 공감하게 되면 층긴소음도 그 삶의 한 소리로 들릴까. 소음은 매우 주관적이다. 누군가에겐 시계 소리가, 누군가에겐 발걸음 소리가, 또 누군가에겐 웃음소리가 소음일 수 있다.(133)




소음은 주관적이며, 배려에 공감이 필요하다 말에 공감한다. 같은 크기와 높낮이의 소리라고 해도, 상황과 맥락에 따라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소음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의 아파트 앞집, 옆집에 누가 사는지 무관심한 채 소통이 단절된 이웃이 모여 사는 환경에서는 이웃으로 삶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소음 이유를 애써 알 길이 없다. 이웃을 위해 배려하는 길이 때론 참 멀게 느껴지는 이유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긴 했지만, 생각은 이미 여러 갈래로 많아지고 있다.





[1] "여전히 난 어른이 아니다. 어른의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어른은 어렵다. 이십 대엔 삼십대가 되면 어른의 삶으로 살 줄 알았고, 삼십 대엔 사십 대가 되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어쩌다보니 사십 대가 되었다. 어이쿠, 맙소사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십 대가 되며 "나는 특별하지 않다"라는 걸 깨달았다."(32)

[2] "살면서 포기하지 않는 것을 가져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다."(47)

[3] "그냥 나는 나의 삶으로 살고 있다."(66)

[4] "일하는 엄마는 회사에서 퇴근하면 집으로 출근한다고 한다."(117)

[5] "무조건적인 배려는 없다. 배려의 시작엔 공감이 필요하다. 공감empathy은 타인의 상황과 기분 등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누가 어떤 삶을 사는지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누군가의 삶의 한 모퉁이를 공감하게 되면 층긴소음도 그 삶의 한 소리로 들릴까. 소음은 매우 주관적이다. 누군가에겐 시계 소리가, 누군가에겐 발걸음 소리가, 또 누군가에겐 웃음소리가 소음일 수 있다."(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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