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트다운 1945 -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 전 116일간의 비하인드 스토리
크리스 월리스.미치 와이스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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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 투하가 결정되던 역사 속 장면들

- 카운트다운 1945



: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 전 116일간의 비하인드 스토리

크리스 월리스(Chris Wallace) & 미치 와이스(Mitch Weiss)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0)

 



최근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가 개봉되었다. 이 책의 원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와 더불어 영화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카운트다운 1945을 읽으면 좋을 것 같아 소개한다. 이 책은 네 번째 미국 대통령을 지내고 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갑자기 사망한 1945412일부터 시작한다. 이 날은 히로시마에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로부터 116일 전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첫 원자폭탄이 거의 완성되어갈 무렵, 장치의 사용을 승인하기까지의 뒷이야기가 보다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원자폭탄 개발 과정에서의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워싱턴을 중심으로 정치계와 군부의 움직임과 고려사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대량학살이 불가피할 이 장치의 사용을 두고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를 급박하게 돌아가던 정계와 군부, 과학계 사이를 엿볼 수 있는 역사책이기도 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갑자기 사망하여, 부통령으로 루스벨트와 일하기 시작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았던 트루먼은 곧바로 대통령의 직을 이어받는다. 이날 트루먼은 이렇게 기록했다. ‘온 세상이 내게로 떨어진 날이라고.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관한 사항을 알고 경악했다. 이 책은 저널리스트의 눈으로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사용되기까지의 정황을 전하고 있다. 주제와 소재는 결코 가볍지 않지만 카운트다운하며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그 가운데 벌어지는 사건들이 책에서 눈을 떼기 어렵게 만든다. 지난 며칠 간 이 책을 읽느라 늦잠을 자기도 했는데, 역사책을 읽는 나의 편협한 시각을 다시 확인해본 시간이기도 했다.

 





한 가지 떠오르는 예는, 원자폭탄을 개발했던 목적과 그 핵무기가 지닌 잠재적 영향력에 대한 문제, 그리고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정당성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가 사람마다 판이하게 달랐던 점이다. 어느 누구도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발생한 참상에 대해 같은 인간으로서 애도와 두려움을 갖지 않는 이가 있을까. 하지만 이미 수십 만 명의 젊은이를 잃은 미국인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저자는 여기서 한 가지 통계자료를 제시한다. 원자폭탄 투하 며칠 후 갤럽 여론 조사에서 미국인의 85%가 이 결정을 지지한다고 대답했다.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첫 폭발실험(트리니티 테스트)에 성공한 후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대다수의 구성원들(소수의 참여자들은 크게 죄책감을 느꼈고, 훗날 많은 과학자들이 죄책감을 느꼈다)이 환호하며 그동안의 성취에 기뻐했던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당시는 국가가 전쟁의 주체였으니 말이다. 물론 오펜하이머가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고, 핵무기 사용에 대해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국제 협의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도 있었다. 핵무기 사용에 따른 공멸의 가능성과 두려움,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는 죄책감은 점점 많은 이들이 실감하게 될 현실이었다.


 

여기서 주목해볼만한 점은 최초의 원자폭탄이 사용된 후, 60년이 지난 2005년에 또 다시 여론 조사가 시행되었는데, 그 결과가 놀랍다. 원자폭탄을 일본에 사용한 사실에 38%는 반대했으나, 여전히 57%는 여기에 찬성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책은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까지 논의된 과정을 엿볼 수 있는데, 이미 패색이 짙어진 일본에 대해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 더글러스 맥아더와 아이젠하워였다. 트루먼도 당시에 참가한 독일의 포츠담 회담 당시에는 원자폭탄 실험 성공 여부에 의구심을 지녔기에, 우선은 일본에 대한 육상 침공을 염두에 있었던 정황이 보인다.


 

반면 상당수의 군사 전문가는 원자폭탄의 사용을 지지했던 것도 알 수 있다.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에 지지했던 이들의 논리는 대체로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다. 육상 침공을 할 경우, ‘수십 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사망할 것으로 예측되었고, 원자폭탄은 한 방에 이들의 생명을 구하고, 미국의 아들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다. 대신 일본인들은 희생되어야 하는 것에는 탐탁지 않지만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입장이다. 다음 진술을 보면 실감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빠른 (전쟁의) 종결을 보장하고 수천 명의 미국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토머스 패럴 장군, 223)


 

20-30만 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은 일본의 도시 몇 개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트루먼 대통령, 227)

 


국가의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을 끌어와 전쟁에 쏟아 붓고 있던 전쟁의 주체 입장에서 전쟁을 승리로 빨리 끝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함에 있어 일본인(여기에는 강제 동원되거나 생계를 위해 살고 있던 조선인, 여러 국적의 외국인도 있었다)의 목숨과 미국인의 목숨이 비교되고, 이것이 불가피한 행위로 시행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죄책감을 느끼던 미국인들과, 그럼에도 미국의 아들이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오길 바라는 전쟁 주체 국가의 국민들의 지녔던 양가적 감정도 찾아볼 수 있다.


 

인류에게 대량 학살 무기를 사용한 행위에 대한 역사가들의 반성적 평가는 이후 중요한 논쟁 주제였다. 카운트다운 1945에 따르면, 1958<내셔널 리뷰>의 한 기사에서 폭탄의 진짜 목표는 일본이 아니었다’, 라는 주장이 나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불에 탄 일본인 수만 명은 전쟁을 끝내거나 미국인 및 일본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희생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소련에 대한 미국의 외교력을 강화하기 위해 희생된 것이다.”(354)라는 것이다.


 

이런 의견은 1960-70년대에 알페로비츠와 같은 역사가들의 견해와 같은 맥락을 이룬다.

 


원자폭탄은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을 향한 초기 경고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트루먼은 그 카드를 쓸 태세가 돼있었다.”(354)


 

이미 공개된 문서에 의하면, 19457월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회담에서 스탈린은 일본으로부터 받은 항복 타진 메시지를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일본의 암호를 해독하여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다시 정리하면 일본의 표면적으로 군벌세력을 중심으로 끝까지 저항하라는 의지를 보이긴 했지만, 천황 중심으로는 항복을 소련에 타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포츠담 회담을 통해 스탈린의 영토에 대한 야욕을 재확인한 트루먼은 동아시아에도 눈길을 주던 스탈린에 대한 경고도 필요했으리라 보인다. 따라서 트루먼의 원자폭탄 사용이 전쟁을 빨리 종결한다는 보기 좋은 명분이외에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에 대해 경고할 수 있는 좋은 카드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원자폭탄 사용 결정에 대해 보다 공격적으로 비판하는 역사가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은 이 무기의 위력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일본인의 희생을 대가로 극적인 를 만들어버렸다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항복한 후라면 원자폭탄을 사용할 뚜렷한 명분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트루먼이 원자폭탄의 작동 여부에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트리니티 실험을 재촉했던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지 않은가.


 

이런 맥락에서 당시 세계의 정황을 보여주는 기록은 포츠담 회담 이후 트루먼의 참모총장이었던 레이히 제독의 결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포츠담은 두 거대 이념의 투쟁에 대한 세계의 날카로운 주목을 이끌어냈다. 하나는 앵글로색슨의 민주주의적 정부 원리이고, 또 하나는 스탈린주의 소련의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인 경찰국가 전략이다. 그것은 냉전의 시작이었다.”(261)


 

트루먼의 앵글로 색슨 민주주의 정부는 소련만큼이나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인 경찰국가였지만, 레이히 제독의 평가는 냉전의 성격을 파악하고 언급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 원자폭탄 사용과 관련한 뒷이야기에서 내가 눈여겨보았던 사항은 그 결정 과정이다. 군부와 정치권 내에서 트루먼은 최종 결정을 내리기까지 사용에 반대하는 인사들의 의견도 두루 듣고 논의했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 정치권도 이런 논쟁의 과정이 사라지고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현재 우리의 경우는 보다 심각하다고 여겨진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일이나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필요한 과정, 이를테면 다른 의견을 함께 들어보고 고려하는 절차가 현재 우리에게는 부재하다고 느낀다. 그것이 여기에 투입된 재정 및 인적·물적 자원의 낭비뿐만 아니라 그 결과가 이후 오랜 시간 이 과정에서 배제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가 관여한 여러 프로젝트를 살펴보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모순 속에서, 모순과 함께 이를 견디는 관용도와 문제를 조율하며 해결해나가는 절차가 부재하다는 것이 큰 문제다. 역사책을 읽으면서 예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된다. 서술하는 역사가의 입장에 따라 도달하는 방향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거리를 두고 들여다보게 해주는 것이 역사책 읽기의 중요성이기도 하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라는 말이 있다. 어쩌면 이 말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그 교훈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싶기도 하다. 특히나 아픈 역사가 똑같이 반복되는 일을 피하려면, 후손들은 역사를 더 잘 살펴야 할 일이다.   



1944년 로스 앨러모스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한 로버트 오펜하이머(가운데)와 핵물리학자 빅터 바이스코프(오른쪽)





(히로시마에 최초의 원자폭탄(리틀보이)을 싣고 투하했던 폭격기 '에놀라 게이'(B-29)의 조종사 티베츠 대령. '에놀라 게이'는 어머니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1] "온 세상이 내게로 떨어진 날"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집으로 가서 가능한 한 많은 휴식을 취한 뒤 당해야 할 일을 마주하는 것이라고."(14)
-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하고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날 쓴 트루먼의 기록.

[2] "세계는 그 기술 발전과 대비한 도덕적 진보의 현재 수준으로 볼 때 결국 그러한 무기 앞에 속수무책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대 문명이 완전히 파괴될 수 있습니다."(59)
- 국방부 장관 로버트 스팀슨이 트루먼에게 전한 문서 내용.

"이 폭탄은 단순한 새로운 무기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은 ‘인간의 우주에 대한 관계에서 혁명적인 변화’라고 그는 경고했다. 그것은 ‘문명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119)
- 국방부 장관 스팀슨의 말 재인용.

[3] "원자 에너지는 주요 평화 애호국이 통제하면 앞으로 수년 동안 세계 평화를 보장할 것입니다. 만약 잘못 사용되면 그것은 우리 문명을 절멸로 이끌 수 있습니다."(71)
-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의 말.

[4] "모든 사람은 첫 번째 원자포탄 투하가 세계에 이 무기의 중요성을 완전하게 인식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극적이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그들은 연합국의 폭격을 받지 않은 곳들을 살펴보았다. 일본인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여전히 번화한 도시들이다. 그들은 목표물이 될 수 있는 다섯 곳을 골랐다."(91)
- 목표물선정위원회(오펜하이머의 사무실에 모인 폭격 조종사들을 비롯한 군부인사들이 모인 회의)에서 1945년 5월 10-11일에 결정한 사항. 히로시마의 운명은 이날 결정되었다.

[5] "우리는 이제 빠른 종결을 보장하고 수천 명의 미국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됐습니다."(223)
- 토머스 패럴 장군의 말.

"스팀슨, 화약이 뭐요? 하찮은 것이오. 전기가 뭐요? 무의미해요. 원자폭탄은 분노의 재림이오."(223)
- 처칠이 미국 국방부 장관 스팀슨에게 한 말.

[6] "우리는 세계 역사상 가장 무시무시한 폭탄을 찾아냈다. 그것은 노아와 그의 전설적인 방주 이후, 유프라테스강 유역 시대에 예언된 불의 파괴일 것이다."(225)
- 트루먼의 7월 25일자 일기.

"20만-30만 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은 일본의 도시 몇 개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228)
- 트루먼의 기록.

[7] "20세기의 핵무장 경쟁은 1945년 7월 24일 오후 7시 30분 체칠리엔호프 궁전에서 시작됐다."(230)
-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사용을 최종 승인한 시점.

[8] "포츠담은 두 거대 이념의 투쟁에 대한 세계의 날카로운 주목을 이끌어냈다. 하나는 앵글로색슨의 민주주의적 정부 원리이고, 또 하나는 스탈린주의 소련의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인 경찰국가 전략이다. 그것은 ‘냉전’의 시작이었다."(261)
- 트루먼의 참모총장 레이히 제독이 포츠담 회담에 대해 내린 결론.

[9] "프리시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축하한다는 게 ‘엽기적’이라고 생각했다. (...) 그들은 여전히 자기네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338)
-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물리학자 오토 프리시(Otto Frisch)에 대한 기록.

[10] "우리는 첫 번째 섬광이 지나간 뒤 안경을 벗었지만 빛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온 하늘을 두루 비추는 청록색의 빛이었다. (...) 그것은 더 이상 연기나 먼지나 심지어 불의 구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였다.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믿을 수 없게도 태어난 새로운 종의 생명체였다."(340)
-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을 실은 B-29폭격기에 동승하여 취재했던 <뉴욕 타임스>기자 윌리엄 로런스가 묘사한 폭발 모습.

[11] "미국인은 파괴와 동의어가 되었다. (...) 그것은 우리에게 승리를 보다 빨리 가져다주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광범위하게 증오의 씨앗을 뿌릴 것이다."(347)
- <뉴요커>의 군사 분야 편집자 핸슨 볼드윈의 우려 메시지.

[12] "나는 내 인생에서 커다란 잘못 하나를 저질렀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만들라고 권고하는 편지에 서명한 일입니다."(349)
- 아인슈타인이 1954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한 말.

[13] "그곳은 거대한 증기 롤러가 지나가 짜부라뜨려 존재 자체를 소멸시킨 듯했다. (...) 이 원자폭탄의 첫 시험장에서 나는 4년간의 전쟁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소름 끼치는 폐허를 보았다."(351)
- 오스트레일리아 기자 월프레드 버쳇이 미국의 언론 통제를 피해 모스부호로 런던에 기사를 내보내 9월 5일 발표된 신문 기사의 한 대목.

[14]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불에 탄 일본인 수만 명은 전쟁을 끝내거나 미국인 및 일본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희생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소련에 대한 미국의 외교력을 강화하기 위해 희생된 것이다."(354)
- Mohan과 Tree가 Journal of American-East Asian Relations라는 학술지에 게재한 원폭 사용에 대한 평가.

[15] "전쟁을 벌이고 있는 세계에서, 또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나라들이 핵무기를 새로운 무기의 하나로 추가한다면 그때 인류는 로스 앨러모스와 히로시마라는 이름을 저주할 것입니다."(371)
- 오펜하이머의 말.

[16] "우리 군대에게 화력을 마음껏 사용하는 일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접근법이며 처음부터 써온 방법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에 대한 폭격이 좋은 사례입니다. 일본을 상대로 원자폭탄을 사용한 것은 그저 이런 접근법의 최종 단계였을 뿐입니다. (...) 나는 어떠한 후회도 없으며 2차 세계대전을 끝내기 위해 우리가 한 일에 결코 변명하지 않을 것임을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인간의 전쟁은 모순입니다. 전쟁은 당연히 야만적입니다. 죽이는 방법이 용인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유감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전쟁의 명분과 전쟁 자체의 근절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 억제는 지금까지는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383)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가는 폭격기에 모두 탑승했던 레이저 전문가 제이컵 비저의 말.

[17] "나는 이 무기 덕분에 미국과 연합국이 일본을 침공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침공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고 확신합니다. 얼마나 많은 수였을지는 감히 추측할 수 없지만, 나는 그것이 전쟁을 빨리 끝냈다고 생각합니다. (...) 폭발의 결과로 잃은 생명들은 전쟁 사상자이며, 그것은 전쟁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384)

"전쟁을 하게 되면 그 목표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사용해 전쟁에서 이겨야 합니다."(385)
-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를 싣고 날아간 B-29 ‘에놀라 게이‘의 조종사 폴 티베츠 대령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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