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타이완을 만났다 - 삶이 깊어지는 이지상의 인문여행기
이지상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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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뒤늦은 부고를 들은 날 저녁하늘)




오직 변방으로

- 그때, 타이완을 만났다

 

이지상 지음 | [좋은생각] | (2011)


 


그저께(2023815) 내가 존경하는 한 선생님의 부고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나의 읽기와 쓰기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셨던 분, 세상을 보는 눈과 글쓰기의 모범이 되어주셨던 분이었다. 내가 무심한 사이 그동안 병마와 싸우시느라 얼마나 힘들고 외로우셨을까 싶었다. 선생님이 병상에 누워 지친 몸을 보여주기 싫어하셨다는 것을... 가족분이 선생님의 블로그에 남긴 글을 보고서야 알았다.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도 들었으나 연락을 잊고 있던 것은 나였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생업에 바쁘다는 핑계로 2년이 다 되도록 전화를 드리지 못했던 게 이제 와서 후회스럽다. 언제나 가난과 당당하게 맞섰던 분이었고, 그만큼 떳떳하셨던 분이었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한번 씩 전하하라고 하시던 말씀이 떠올라 더 안타깝기만 하다. 사실 선생님께 오래간만에 연락을 드리게 되었던 것도 온라인 서점에서 선생님의 신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의 신간 소식을 보고 선생님께 축하와 함께 안부 인사를 드렸던 것이다. 오전에는 아마도 한창 집필중일 듯하여 문자만 넣었던 것인데, 반나절이 지나 가족분이 선생님의 번호로 답장을 해주셨다

선생님이 한 달 전에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너무 뜻밖의 답변이라 믿을 수 없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존재가 그 자리를 비우고, 이처럼 공허하게 사라져버린다는 것이... 도대체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모든 생명체라면 결국 겪게 될 이 사태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니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직접 겪어보기 전까진 말이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병상에서 쓰신 마지막 시를 읽어보고 또 읽어보았다. 결코 삶을 구걸하시는 분은 아니었으나, 하고자 하셨던 삶의 목표에 대한 체념이 느껴져 안타까웠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인사였다.


 

늦은 오후에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밖으로 나가 거리를 잠시 걸었다. 저녁 하늘이 활활 타고 줄어드는 장작불처럼 붉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선생님의 짧았던 삶은, 오늘 저녁 하늘 같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의 문장은 언제나 냉철했다. 하지만 그에게 일상은 항상 뜨거운 투쟁이었을 것이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선생님의 비판에 성역이란 없었다. 당신은 오직 변방에서, 변방에 발을 딛고우리 사회를 냉철하게 조망하셨던 분이었다. 사회에 대한 선생님의 비판에 나 스스로가 얼마나 많이 뜨끔했었던가... 반면 타인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웠던 분. 무뚝뚝하셨으나, 제자에게는 언제나 자상했던 분이었다. 선생님이 쓰셨던 책 몇 권을 다시 들쳐보다가 내게 써주셨던 한 마디가 눈에 들어왔다.


 

오직 변방으로


 

언제나 기득권에 기대지 말고, 변방에서 떳떳하게 세계를 지켜보고 목소리를 내라는 말씀같이 다가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제 편이 쉬시기를...





 

 

한동안 들었다 놓았다 했던 타이완 여행기를 마저 읽었다. 여행작가 이지상의 나는 지금부터 행복해질 것이다(2011)였다. 이 책은 출판사가 바뀌어 나온 개정판이 그때, 타이완을 만났다(2015)이다. 저자가 어머니를 병수발하다 돌아가신 후 지치고 삶의 의욕을 잃었을 때 홀로 떠난 곳이 바로 타이완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외여행으로 간 타이완을 다시 찾아 타인들의 삶을 돌아보고 써내려간 여행기이다.

 


책의 끝 무렵에 저자가 신화학자 조셉 켐벨의 신화의 힘에 나온 문장을 재인용 부분이 있어 옮겨본다.


 

사람들은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해요.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함을 느끼게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살아 있음의 경험’, ‘살아 있음의 황홀함을 얼마나 느끼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우리가 잊고 있던 살아 있음의 황홀함을 상기하게 해주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테다. 수행 중에 잠시 잠들 때 내리치는 죽비처럼, 혹은 조상에 대한 예를 올리며 사용하는 향의 연기처럼 살아 있는 존재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이를 명상하게 해주는 것이 여행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죽음과 부재만이 명상의 주재가 아니다. 경계의 반대쪽, 바로 에 방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삶의 여행자가 아닌가. 아마도 저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묵상하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도 여행을 떠나 기록을 남겨 우리에게 보여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남긴 한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발밑의 삶과 한 끼 식사를 사랑하는 자만이 우주의 신비를 볼 수 있다.”(398)

 


이 문장을 읽고, ‘자기 발아래를 살펴야한다’, 고 무뚝뚝하게 당부하곤 하셨던 선생님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1] "타이완의 매력은 그 작은 (낯섦과 호기심에서 오는) 긴장과 편안함 사이를 오가는 데 있었다."(396)

[2] "그러나 삶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생로병사의 고뇌와 사회적·경제적 고민은 끊이질 않는다. 여행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진 않는다. 여행은 단지 불쏘시개다. 그 불쏘시개를 장작불로 훨훨 일구는 것은 일상의 노력이다."(396)

[3] "사람들은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해요.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함’을 느끼게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조셉 켐벨의 《신화의 힘》에서 재인용, 397)

[4] "젊을 때는 거창한 이념, 볼거리들이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며 나는 작은 것들에 매혹된다. 파편 같은 작은 것들과의 소통을 통해 우주적 황홀함을 맛본다. 발밑의 삶과 한 끼 식사를 사랑하는 자만이 우주의 신비를 볼 수 있다."(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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