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나고 - '리어 왕' 역의 이순재 배우가 인사하러 무대로 나오는 모습




우리의 내면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연극 <리어 왕> 관람하고

 



지난 주말에 연극 <리어 왕>을 관람했다. 연극은 내가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분야인데, 오래간만에 연극을 보러 나들이를 했다. <리어 왕>은 셰익스피어 원작의 4대 비극으로 소개되는 작품이다. 이번에 본 연극은 대본을 압축하지 않고 원작에 충실하게 기획되었다. 공연시간만 무려 200분이 넘었다.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는 리어 왕의 대사가 결코 만만치 않다. 아흔에 가까운 나이에 놀라운 집중력으로 맡은 배역을 열연하는 이순재 배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처음 이 연극을 홍보하는 광고를 보았을 때 이순재 배우의 연기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내겐 좀 더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아마도 처음 연극이라는 것을 보았을 즈음일 텐데, 당시 나는 군복무를 마치고 막 복학했던 시기였다. 대학 동기 한 명이 연극표 2장을 구하여 나에게 함께 보러 가지 않겠냐고 했다. 그 때 관람했던 연극이 <세일즈맨의 죽음>이었다. 그 때는 이 희곡의 제목이 익숙하긴 했어도 원작자가 아서 밀러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에 이 연극이 나의 흥미를 끈 이유는 무엇보다 TV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대발이 아빠로 나왔던 이순재 배우가 세일즈맨역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에 이순재 배우가 열연한 <세일즈맨의 죽음>을 관람하고 연극이 끝날 때 즈음에 봇물이 터진 듯 흐르는 눈물을 줄곧 닦았던 기억이 난다. 이야기 자체가 관객의 눈물을 자극하는 요소는 있었지만, 그보다는 전역을 한 달 가까이 남겨놓고 돌아가셨던 아버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화가 많지 않은 부자였다. 게다가 군대에 있는 아들과의 물리적 거리는 부자간의 대화를 더욱 귀한 기회로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세일즈맨의 죽음>을 관람하고 내가 아버지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연극 한 편은 내 안에 아버지라는 미답의 영역이 있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이 계기를 열어준 것이 이순재 배우의 연기였던 셈이다.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는 동안, 늙고 쇠약해진 리어왕을 연기한 배우는 정말 리어왕 자신이 되어 있는 듯싶었다.




















연극을 관람하러 가기 전에 먼저 민음사에서 출간한 리어 왕(최종철 번역)을 읽었다. 다음에 아침이슬 출판사에서 출간한 버전(김정환 번역)을 추가로 조금 읽었다. 연극을 관람할 때 작품의 내용은 이미 익숙했다. 하지만 연극 공연은 시작이 다소 불안했다.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횡설수설 지껄이던 광대가 움직일 때마다 마이크가 지직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 끊임없이 이어지는 긴 대사 때문인지, 일부 배우는 잠시 머뭇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여기에 리어 왕을 연기한 이순재 배우의 조금 낮은 목소리 때문인지 발음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극 공연이 끝난 지금까지 잔잔한 감동이 남는 것은 배우들의 투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랩에 버금갈 정도로 죽 이어지는 대사들에 더하여 문학적인 표현들로 가득차서 배우들에겐 한층 난이도가 높은 연극이기도 하다. ‘리어 왕을 제외하고 연기가 인상 깊었던 역은 왕을 따라다니는 광대와 온갖 고난을 겪고도 지위를 회복하는 글로스터의 맏아들 에드가였다. 광대는 왕에게 격식을 차리지 않고 말해도 되는 유일한 신분이었던 모양이었다. 끊임없이 왕 앞에서 횡설수설하는 광대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가 하는 말은 일말의 진실을 관객에게 전하고 연극이 향하는 방향을 일러주는 듯했다. 존재감은 미미할지 모르지만, <리어 왕>에서 광대의 역할은 꽤나 중요해 보인다. 조금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광대의 역할은 신곡에서 단테에게 지옥을 안내하며 동행하는 시인 베르길리우스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배역을 하나 더 꼽으라면, 에드가를 떠올리겠다. 그는 글로스터 백작의 배다른 동생 에드먼드의 배신과 모함으로 왕의 큰 딸(고너릴)과 둘째 딸(리간) 세력의 추적을 받으며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미치광이 거지 불쌍한 톰을 연기한다. 생명의 위협을 받고 쫓기던 에드가가 두 가지 다른 역할을 신들린 듯 능숙하게 연기하는 모습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글로스터 백작 역시 둘째 아들 에드먼드의 모함으로 리어 왕의 둘째 딸 리건과 남편 콘월 백작으로부터 두 눈을 뽑히는 끔직한 고난을 겪는다. 어쩌면 <리어 왕>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 리어 왕역의 배우뿐만 아니라 글로스터 백작을 맡은 배우의 노련한 연기도 인상 깊었다.


 

실제 공연되는 연극만의 고유한 특징이라면, 아마도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극작가나 배우 나름의 해석이나 장치를 곁들일 수 있는 이 존재한다는 점일 것이다. <리어 왕>이 비극이라고 하더라도 공연 도중에 유머와 위트가 보이는 요소가 여러 번 눈에 띄었다. 리어 왕에게 직언을 하다가 추방당하는 켄트 백작은 자뭇 심각한 역으로 일관될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번 연극에서 켄트 백작이 보여주는 유머러스한 연기는 공연시간이 200분이나 되는 연극에 대한 관객의 몰입도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속하는 <리어 왕>에는 여러 인간들이 평생 살면서 겪을 수 있을 법한 비극적인 사건들이 응축되어 있다. 인간이 나이가 들어 신체와 정신이 쇠약해지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담고 있다. 더불어 다양한 죽음의 모습을 품고 있기도 하다. 자녀의 죽음을 먼저 보아야 하는 부모의 고통, 질투와 탐욕으로 모두가 파멸하는 자매의 모습,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부모와 형제를 배신했지만 그 자신도 죽음으로부터 비껴가지 못했던 인간의 나약한 모습이 한 작품에 담겨 있었다. 또 리어 왕 자신의 운명은 어떤가. 그는 모든 것을 잃었고, 평생 아꼈다고 믿었던 자녀들로부터도 냉대와 멸시를 당한 채 갈 곳을 잃은 인간의 당혹감과 비애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이번 공연이 특별한 건 이순재 배우의 리어 왕연기를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이 끝나면 이순재 배우는 세계 최고령 리어왕으로 기네스북에 등재 신청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1956년에 처음 연극 무대에 데뷔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68년 간 무대에 서온 셈이다. 마지막으로 연기하는 배역 리어 왕을 준비하고 무대에 서는 배우의 감회가 어떨지 궁금하다. 이번 공연은 무엇보다 배우 자신이 겪어온 삶의 모든 경험들이 리어 왕에 녹아들어 있을 것이다. 배우로서 그의 연기는, 버럭 소리를 지르던 대발이 아빠뿐만 아니라 말없이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세일즈맨의 모습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제 노배우는 천둥과 번개가 내리치며 이따금씩 암흑을 몰아내던 광야를 정처 없이 헤매던, 쇠락한 리어 왕의 모습으로도 내 기억 속에 남게 될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설이나 희곡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다. 어떤 이유로 늦은 나이에책을 손에 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게는 삶의 이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주 마련되었다. 여러 직장을 전전하고 불안정한 고용에 일하는 날만큼이나 쉬는 날도 많았기 때문이다. 일이 없을 때는 남들이 출근하던 시각에 모자를 눌러쓰고 알라딘 중고책방으로 출근할 때도 있었다. 엊그제의 일처럼 느껴진다. 오늘의 나는 아마도 중고책방을 발견하면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때 나 자신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문학에 대한 옅은 관심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을 테다. 알라딘 사이트의 구매함을 검색해보니 내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세 가지 버전으로 소장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이 책은 언제 샀지?’ 라고 반문할 때가 있다. 알라딘 서재에 글을 꾸준히 올리는 분들은 아마 익숙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연극을 관람하기 전에 먼저 읽은 버전은 민음사 버전이다. 평생 셰익스피어와 희곡 연구에 매진해 온 최종철 교수의 번역 및 주해 판본이다. 오랜 시간 운문 형식의 문장으로 다듬어 온 역자이기도 하다. 이따금 만나는 문장은 너무 간결하여 어색한 느낌을 줄 때도 있었다. 반면 다시 문장을 음미해볼 때 텍스트로 드러나지 않은 을 채울만한 뉘앙스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크다. 최근에는 최종철 교수가 번역한 셰익스피어 4대 비극 리커버 특별판도 나왔다. 성우들이 참여한 오디오 버전도 나와 있는 모양이다. 다만 독자들의 반응은 호불호가 뚜렷하게 나뉘는 것 같다. 언제나 새로운 시도에서 예상할 수 있는 반응들이다.


 

내가 구매한 민음사 버전은 2012년에 나온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세트다. 각 권의 표지는 유명 화가들이 작품을 읽고 그린 그림들이 있다. 리어 왕의 경우, 화가 포드 매덕스 브라운(Ford Madox Brown)이 그린 <리어와 코딜리아>(1848-49)가 표지로 사용되었다. 이 그림의 장면은 아마도 밤새 폭풍우 몰아치던 광야를 헤매고 정신과 기력이 쇠해버린 리어 왕을 모신 후, 침대에 누워 잠든 아버지를 바라보는 셋째 딸 코딜리아의 모습으로 보인다. 바다 건너 프랑스 왕과 결혼한 코딜리아가 직접 프랑스군을 이끌고 브리튼 섬에 상륙하여 큰 언니 고너릴와 둘째 언니 리간의 진영과 결전을 치르기 직전의 모습일 것이다. 아버지의 재산과 영토, 권력을 받기 위해 화려하지만 속이 텅 빈 언어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꾸며내던 두 언니와 달리 막내 딸 코딜리아는 할 말 없음으로 아버지의 오해와 미움을 사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코딜리아의 사랑은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진실을 품고 있는 듯하다. 해당 표지 그림은 이런 배경을 담아낸 듯한데, 막내 딸 코딜리아의 심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평생 셰익스피어를 연구한 국내 정상급 학자가 원작을 비판적으로 읽어 내고 자세히 정리한 작품 해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민음사 버전의 큰 장점이다.


 
















또 흥미로운 건, 펭귄 클래식 판 리어 왕의 표지 그림 역시 같은 화가인 포드 매덕스 브라운이 그렸다는 점이다. 이 그림의 제목은 <코딜리어의 운명>이다. 같은 화가가 리어 왕을 모티브로 그림을 그렸다지만 그림이 주는 느낌은 꽤나 다르다. 아마도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모습 보다는 인쇄된 그림의 색감에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그림이 묘사하는 자체 정황도 사뭇 다르다. 민음사 버전의 표지 그림은 근경과 원경이 층을 이루며 함께 나타난 중세의 그림 스타일을 닮았다. 반면 펭귄 버전 리어 왕 표지 그림은 동화책 일러스트의 느낌이 강하다. 장면에 대한 몰입감이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물을 그린 스타일이 어떤 면에선 단테의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를 그리기도 했던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의 그림과도 닮았다. 정면을 향한 인물이 약간 아래로 내린 시선과 타오르는 듯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베아트리체의 모습 때문이다. 펭귄 판 표지 그림의 <코딜리어의 운명>에서도 코딜리어로 보이는 여인은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채 몽롱한 시선을 비스듬히 아래로 내린 모습이다.


 

한편 코딜리어의 왼손을 두 손으로 붙들고 있는 남자는 그녀와 결혼한 프랑스 왕으로 보인다. 옅은 코발트색 옷을 입고 왕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코딜리어의 왼쪽에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을 오른손에 쥔 리어 왕의 모습이 보인다. 상심에 따른 분노를 억누르는 듯 의자의 팔걸이를 꼭 붙들고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영락없이 노쇠한 남자의 모습이다. 이들의 바로 뒤에 보이는 인물은 코딜리어와 결혼하기 위해 프랑스 왕과 경쟁하던 버건디 공작일 것 같다. 이 인물은 붉은 색 점박이 옷을 입고 손을 입에 갖다 대었는데, 리어왕으로부터 아무런 재산도 물려받지 못하게 된 코딜리어 공주와 결혼을 망설이는 버건디 공작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푸른 옷을 입은 왕은 코딜리어의 손을 잡고 위를 올려다본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나온 플라톤처럼 말이다. 반면 손으로 땅을 가리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세처럼, 땅 위의 유한한 존재와 재물에 대한 욕망을 추구하던 버건디 공작은 눈을 살며시 내리고 고민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펭귄 판의 표지 그림에 나온 장면은 프랑스 왕이 아버지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지니고 있던 코딜리어를 선택하겠다고 결심하는 장면 같아 보인다. 이 희곡에서 프랑스왕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지만 사랑의 형이상학을 믿고 선택하는 인물이다. 이 부분은 내게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던져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래 인간에게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펭귄 클래식 버전의 리어 왕이 지닌 특징이라면, 외국의 셰익스피어 전문가가 제공하는 서문 및 주해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라는 대작가를 배출해 낸 장소의 후손이 어머니의 언어로 읽어낸 작품은 어떤 것일까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국내의 학자가 해석한 작품의 의미를 또 다른 시각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왜 세 권의 리어 왕버전을 샀는지 궁금해 하다가도 각각의 버전을 다시 들여다볼 때 비로소 이해가 되기도 한다.


















 

다 읽지는 못했지만 김정환 번역가가 내놓은 아침이슬 출판사의 리어 왕버전도 있다. 이 책은 우선 크기가 작지만 책은 무척 예쁘다. 가방에 넣고 다니기에 튼튼하고 부담이 가지 않는다. 표지의 간결한 그림도 마음에 든다. 아쉬운 점은 책의 크기가 작은 만큼 폰트가 작다는 점이고 역자의 해설이 짧다는 것. 그럼에도 운문 형식을 위해 엄격하게 문장을 다듬고 줄인 민음사 버전보다 문장이 친근하게 다가오고 이해가 쉬운 편이라는 장점이 있다. 글자 크기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처음 셰익스피어를 접하는 이들이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판본으로 추천할 만 하다. 특히 김정환 번역가는 프로필만 보더라도 정말 다재다능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책을 번역만 한 것뿐만 아니라, 시와 산문, 평론을 쓰기도 했으며, 음악에 대한 방대한 애정과 지식을 가진 분임을 알 수 있다. 우선 붉은 색 양장본이 마음에 들어서 번역가가 전부 번역해놓은 셰익스피어 작품 시리즈를 기회 될 때마다 모으고 있다. 언제 다 모을지 모르겠지만, 가끔 원작에 충실하게 기획된 셰익스피어 연극을 공연하게 되면 다시 꺼내 읽어 보려한다.

 


누군가의 번역 작업을 통해 작품과 만나는 독자에게는 어느 한 번역가의 작업이 언제나 독보적으로 월등한 경우는 아직 없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같은 작품을 여러 번역가가 번역해 놓은 고전 작품의 경우, 어느 문장, 어떤 장면에서는 한 번역가가 탁월하게 표현해내더라도, 다른 번역가가 또 다른 부분에서 더 멋지게 표현해내는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어떤 특정 번역가가 한 작업이라서 믿고 사보는번역서라도 독자의 마음에 드는 문장과 그렇지 않는 문장은 언제나 공존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번역가나 독자에 따라서도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만큼 번역본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명확한 기준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어떤 번역가의 특정 표현에 일희일비하기 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해석과 표현을 만날 수 있다는 마음가짐도 필요할 것 같다. 그러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라고 공감하면서도 나라면 어떤 표현을 쓸 수 있을까 도전해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3시간이 넘는 연극 공연이 드디어 끝나고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환호를 받으며 걸어 나오는 리어 왕이순재 배우가 박수를 받으며 들어 갈 때 관객에게 보이던 그의 뒷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7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무대 위에서 관객과 교감해온 배우는 그의 존재가 바로 당신이 역을 맡았던 모든 이들을 닮았을 것 같다. 아이들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머물지 못하고 끝없이 방랑하던 가장이자 세일즈맨이었던 모습이다가도, 밤새 폭풍우 몰아치던 광야를 헤매던 초라한 왕의 그것이기도 했다. 동시에 배우의 이마와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어느 새 돌아가신 아버지의 주름을 떠올려주었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부대를 나와야 했던 아들의 모습은 얼마나 초라했을까. 아들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던 아버지의 이마를 어루만져 보았다. 24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그 온기와 촉감을 떠올리곤 한다. 누구나 삶에서 가벼워지거나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란 있기 마련인가보다.


 

문학이란, 또 연극이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상상하게 해주는 사고 실험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 아닌가. 평생 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배우의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일생일대의 배역이라고 언급하기도 한 큰 무대를 마무리하는 배우의 심정을 상상해보려 하지만, 적어도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순재 배우의 마지막 리어 왕연기를 보고 밖으로 나왔다. 무대에 서기까지 부단한 노력과 치열함을 붙들고 관객들과 만나온 모든 연극인들에게도 작은 인사와 커다란 마음의 응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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