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야만을 발견하는 과정
- 《모비 딕》의 여러 번역본 비교와 감상
허먼 멜빌 지음, 레이먼드 비숍 그림,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 (2022)
《모비 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주목을 받는 소설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은 고전이라고 여겨진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고 작품에서 새로운 깨달음과 영감을 얻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날의 미국을 형성한 소설’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도 붙어 있는 이 소설은 작품의 길이 때문에, 심지어 영문학과에서도 수업 교재로 잘 채택하지 않는다고 한다. 본격적인 연구의 대상이 아닌 이상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과 이야기꺼리가 만만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성인이 되어 처음 읽어 본 《모비 딕》은 단순한 ‘고래사냥’이야기가 아니었다. 긴장감이 느껴지는 고래사냥은 사실 마지막 삼일 간의 ‘모비 딕’ 추적 및 대결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다. 나머지 132장에 걸친 이야기는 주인공 이슈메일이 바다로 나가기까지의 과정과 일상적인 선원의 업무, 그리고 고래에 대한 잡다한 지식과 고래 해체 등에 관한 정보로 가득하다. 게다가 최근에는 현대지성 출판사에서 번역한 작품까지 이제는 작품에 대한 번역서가 최소한 세 권 이상이 되고 있다. 고전이라고 불릴만한 책의 번역 작업이 아직 부족하다고 느끼는 독자, 그리고 《모비 딕》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번역서가 이렇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이 무척 반갑다. 번역서 《모비 딕》의 풍년인 시대다. 독자로서는 어떤 번역서를 읽을까 고민이 되긴 하지만, 실력 있는 번역가들의 작품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더 크다.
그동안 타 출판사의 《모비 딕》 몇 종을 흥미롭게 읽었다. 최종적으로 내가 소장하는 도서는 모두 일러스트가 포함되어 있는 버전이다. 작가정신에서 출간한 ‘아셰트클래식’ 시리즈의 《모비 딕》은 일러스트가 책 내용에 충실하면서도 추가적으로 배의 구조와 고래사냥과 관련한 지식, 고래 해체작업과 고래에 따른 분수공과 분수모습의 차이 등을 설명해주는 삽화가 백과사전처럼 가득하다. 여기에 수록된 그림들은 수채화 만의 부드럽고 서정적인 느낌의 매력을 뽐내고 있기도 하다.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소설 구석구석의 장면을 궁금해하고 상상해볼만한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결과물이다. 게다가 김석희 번역가가 아닌가! 믿고 읽을 수 있는 버전이다.
한편 문학동네에서 나온 《일러스트 모비 딕》은 목판화가 록웰 켄트의 그림이 들어간 버전이다. 록웰 켄트의 그림은 매우 강렬하여 인상적이다. 한 장으로 승부를 걸어 독자에게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신문 삽화 같은 그림들이 화가의 해석을 통해 재탄생했다. 여기에 젊고 패기 있는 황유원 번역가의 세심한 번역과 꼼꼼한 주석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정신과 문학동네 버전은 각각 두 번씩은 읽었는데, 이번에 내가 선택하여 읽게 된 현대지성의 《모비 딕》도 목판화가 레이먼드 비숍의 그림들이 수록되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여기에 내가 ‘믿고 읽는’ 이종인 번역가가 참여하여 더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번역가가 작업에 참여했는지도 관심사항이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면, 레이먼드 비숍의 목판화는 록웰 켄트의 그림처럼 강렬한 삽화의 느낌을 주지만, 조금 다른 점은 비숍의 그림이 좀 더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미술에 대해 문외한이긴 하지만 이렇게 미묘한 느낌의 차이가 어디서 온 것일까. 우선 그림에 사용된 ‘선’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록웰 켄트의 그림에는 굵고 곧게 뻗은 선이 많은 편이며, 인물의 자세가 직선적이고 정적이다. 반면 레이먼드 비숍의 그림에는 곧게 뻗은 선이라도 가늘고 단선적이지만 방향성이 강하게 느껴지며, 선이 긴 경우는 곡선을 많이 활용한다. 여기에 등장인물의 동작은 정적인 자세가 아니라 움직이는 어느 순간을 포착한 듯한 장면이 많다. 여기에 극적인 명암대비를 잘 활용한다는 점도 켄트의 그림보다 더 역동적이고 입체감을 더 주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이렇게 다양한 개성을 가진 《모비 딕》을 읽을 수 있게 되어서 독자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다. 수록된 그림의 여러 특징을 고려해볼 때, 현대지성 번역본은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를 많이 지닌 번역서다.
우선 내가 현대지성 번역본이 마음에 든 점은 번역가의 역할에 있다. 특히 번역가가 직접 작성한 해제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일반적으로 많이 제공되는 작가에 대한 배경이나 작품 배경에 대한 설명 외에, 소설을 읽으며 궁금해 하던 사항들을 많이 제공하고 있다. 특히 《모비 딕》은 나타니엘 호손과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번역가는 이 점을 놓치지 않고 상세한 도움 설명을 해준다. 뿐만 아니라 서양 사상의 원류가 되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곧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성경)와의 연관성도 놓치지 않고 주목한다. 이 점은 본문을 읽어 가다보면 어렵지 않게 서구의 두 가지 문화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의 1장부터 등장하는 기독교 비판적인 시각은 육지와 바다를 넘나드는 ‘경계인’의 시각으로 우리 사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가능성을 마련해 놓는다. 개인적으로는 흰 고래 ‘모비 딕’의 상징성이 소설을 읽는 동안 줄곧 궁금했더랬는데, 번역자는 이 점에도 주목하고 이 부분 역시 상세히 다룬다. 정리하면 이 책의 가장 눈에 띄는 장점인 번역가의 해제에서 번역가는 독자가 이 소설을 단순히 고래잡이를 소재로 한 해양소설로 이해하는 한계를 넘어 설 수 있도록 가이드를 제시해준다.
번역가의 선정 외에 책의 구성에 있어 다른 번역서와 달리 눈에 띄는 점은, 번역가의 주석이 각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많은 번역서의 역주가 책의 마지막에 정리되곤 한다. 하지만 《모비 딕》처럼 두꺼운 서적의 경우, 독자가 주석을 읽지 않고 건너뛰며 읽는다면 큰 상관은 없다. 반면 나는 책을 천천히 읽는 편이다. 이왕 천천히 즐기면서 읽는다면 주석까지 꼼꼼히 읽곤 하는데, 역자의 주석 수백 개가 책 뒤에 있을 때, 매번 두꺼운 책장을 넘기면서 주석을 확인하기에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분명히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문제일 수 있겠지만, 주석이 제공된다면 나는 각주로 정리되어 있어 해당 내용을 같은 페이지 내에서 해결하며 읽기를 선호한다. 현대지성의 번역서는 천천히 읽는 독자의 독서 흐름을 크게 방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반대로 현대지성 번역서가 아쉬운 점은, 작품의 무게감과 물성을 고려할 때 하드커버로 나오면 좋겠다는 점이다. 책이 무겁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지성 시리즈의 공통점으로 종이가 얇아서 반대쪽 그림이나 글이 비친다는 점이 아쉽다. 소설에서 선원들이 고래 해체작업을 할 때, ‘고래 지방을 성경처럼 얇게 썬다’고 표현하는데, 뒷면이 비칠 정도로 얇은 지면으로 되어 있는 부분이 개선되었으면 좋겠다.
소설을 읽으며 떠올린 ‘흰 고래 모비 딕’의 의미
앞에서 번역가의 해제에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는 자세한 설명이 있음을 이야기 했다. 우선 향유고래의 ‘거대한 흰 색’이 주는 인상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일반적인 향유고래가 흰 색이 아니라면, 정상성에서 벗어난 흰 색 고래가 무엇보다 대자연의 존재가 지닌 ‘성스러움’과 ‘불길함’을 동시에 표상할 것이다. 또 흰 색은 검은 색과 더불어 모든 색을 덮고 무화할 수도 있는 극단의 색으로도 볼 수 있다. 검은 색과 함께 흰 색은 그 색을 지닌 존재 자체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 대상을 알지 못한다는, 무지에 대한 두려움이 공포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여기에 이슈메일이 설명해주고 있듯이 고래의 ‘얼굴 없는’ 특성에 이르면 ‘거대한 흰 색 생명체’에 대한 공포감은 배가 된다.
한편 이 소설이 탄생한 이후 ‘모비 딕’이 표상할 수 있는 대상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거론되기도 했다. 이러한 특징은 인간 사회가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특질 무언가에 대응될 수 있기에 시대를 지나오면서도 여전히 살아남게 된 것이 아닐까싶다. 일단 소설이 작가의 손을 떠나 세상에 나오면, 작품에 대한 해석은 독자들에게 주어지기 마련이다. 다만 여기에서 역사적인 맥락을 고려하여 살펴볼 수 있는 단서 한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연대기-역사적인 관점인데, 이 소설이 1851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미국 전역과 서구 유럽을 들썩이게 했던 사건 하나가 바로 1849년의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이다. 소설에서도 잠시 언급되는바, ‘골드 러시’ 시대의 막이 오르게 된 직후였던 것이다. 이 때는 많은 사람들이 벼락부자의 꿈을 안고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하던 시기다. 그러니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모비 딕’은 ‘금’으로 대표되는 황금만능주의의 표상일 수도 있고, 고래를 쫓는 에이해브는 금을 찾아 달려드는 광기어릴 정도의 욕망에 굶주린 사람들로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오늘날 물신주의에 물든 정도가 지나쳐 인간성을 상실하고 메말라가는 사람들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내게 ‘모비 딕’이 상징할 수 있는 대상은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가 지적한 바 있는 ‘허구’적인 존재일 수도 있겠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허상’을 만들어 내고 이를 믿게 만드는 존재다. 특히 이 ‘모비 딕’을 서구 백인 문명이 만들어 낸 모든 불합리한 기준과 규범으로 볼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모디 딕’에게 복수하겠다고, 자신의 다리 한 쪽을 앗아간 고래에게 응징을 다짐하는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해브는 편집증에 붙들린 인간 사회에 대응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 에이해브의 편집증은 특히 서구 기독교의 일신교적인 독단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때 작품을 관통하는 또 다른 맥과 이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이런 에이해브의 일신교적인 광기가 서구 사회에만 존재할 리 없다. 어쩌면 우리의 근현대사를 뒤흔든 이데올로기 역시 바로 이런 맥락과 연결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모비 딕’과 이를 집요하게 쫓는 에이해브의 광기는 보다 보편적인 표상을 얻을 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지 인간이 이루는 집단 내에서 부조리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제도적인 면, 사상적인 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모순은 문명의 야만성을 그대로 반영하기도 한다. 멜빌이 《모비 딕》 1장에서부터 언급하는 ‘노예제도’가 한 가지 예가 될 수 있겠다. 인간의 문명은 계급을 구분하고, 노예를 만들어 사회를 통제해왔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제1장에서 이슈메일이 “세상에서 노예가 아닌 자가 어디 있는가?”(40)라고, 세네카가 한 말을 굳이 재인용하면서 외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고전은 인간 사회에서 부조리한 모순이 암묵적으로는 상식이 되고 합리성이 되어 버렸음을 간파하고 독자가 상기하게 해준다.
고전은 시대를 거쳐도 다양하게 해석되기도 하며 문화와 지역을 떠나 인간 사회의 공통적인 특질을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기 때문이다. 고전의 생명력은 여기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읽은 《모비 딕》은 인간의 문명이 부조리함을 만들어 내고, 이 부조리함을 유지하도록 문명을 통제하고 만들어왔음을 새삼 일깨워 준다. 이러한 진실을 더욱 분명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모비 딕’의 카발라적인 순환구조다. 육지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고자 한 이슈메일은 오랜 모험과 항해 끝에 홀로 생존하여 다른 포경선에 의해 구출된다. 다시 육지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유대교 신비주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이 순환 구조는 더 나아가면 서양 사상의 원류가 되는 플라톤의 영혼회귀와도 연결지을 수 있다. 이는 이 소설에서 서양 사상의 지혜와 원류를 재확인하는 발견을 독자에게 주기도 한다. 소설은 이슈메일의 구출과 회상에서 끝나지만 언젠가 이슈메일은 또다시 바다로 나갈 것 같지 않은가. 소설에 언급된 것과 같은 이유로 말이다. 그러므로 멜빌의 《모비 딕》은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 내는 문명의 야만성이 ‘역사는 되풀이 되듯’ 어떤 형태로든 되풀이 되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소름 돋는 우화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속성이자 우리를 매어 놓는 속박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