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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인간에 대하여 -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9월
평점 :
《믿는 인간에 대하여》
: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믿음이 사라지는 시대, 종교의 역할을 묻다’
몇 년 전,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에 있는 어느 언덕에 올라 분리장벽 너머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바라본 적이 있다. 장벽 너머에서는 검은 연기가 무언가를 태우며 여기저기 솟아오르고 있었다. 죽음의 냄새를 맡았던 것일까, 독수리 떼는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느끼며 장벽 너머를 바라보는데, 돌연히 총격이 시작되었다. 대응사격이 시작되며 한동안 총소리가 이어졌다. 이들은 공통의 신을 섬기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아니었나. 외모로 서로를 구분하기 힘든 이들이 자신과 다른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향해 공허한 총격을 가하고 있었다.
지금은 첨단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세계다. 인류는 과학 혁명으로 미신을 극복했고, 이성에 힘입어 과학기술의 영향력을 여전히 확장하고 있다. 반면, 오랜 역사를 지닌 종교와 신앙은 긴장감이 감돌던 가자 지구처럼 현실 세계에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면서도 그 입지는 점점 감소했다. 언뜻 보기에 과학과 종교는 공존이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첨단 과학기술 시대에 종교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동일 교수는 《믿는 인간에 대하여》에서 종교적인 믿음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신앙과 종교가 인간과 맺어온 관계를 살피고, 종교와 신앙의 역할을 묻고 있다.
성경에서 아담과 이브를 유혹했던 뱀은 인간의 ‘분별’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리분별은 인간과 세계의 모든 것을 구분하고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인간은 공동체의 규범과 관습을 만들고 법을 제정하여, 수치심과 죄를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초기의 종교는 삶의 조건을 형성한 사회장치 중에서 법, 의학, 과학과 같이 분별이 담긴 산물마저 통합한 형태로 인간의 삶을 규정했다. 오늘날 종교의 입지가 감소한 현상은 초기 종교의 역할이 점차 세분화되며 축소된 것으로 이해된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순간부터 종교의 입지 감소는 필연적으로 예견된 것이 아니었을까. 이 사례는 서구 유럽의 정교 분리 현상과 같은 세속주의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자 지구에서 보았던 평화로운 풍경과 돌연한 총격의 장면, 저자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리조치로 엄마를 만나지 못해 울던 아이를 바라본 경험에 존재하는 모순을 비로소 포착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부조리한 인간이야말로 자신의 욕망을 위해 신을 필요로 했고, 부조리한 신을 만들어 이를 숭배했던 장본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삶이 드러내는 부조리함은 지극히 인간적이면서 본질적이기도 하다. 이는 종교가 오랜 시간 세속의 힘과 권위를 욕망하고 여기에 의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서구 유럽의 세속주의 흐름은 종교가 현실에서 힘과 권위를 하나씩 내려놓게 된 과정이었다.
저자는 종교와 신앙이 인간의 삶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지, 우리의 믿음을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는 오랫동안 서구 유럽인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지배했다. 여기에서 종교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이해를 토대로 생겨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오랜 지혜가 축적된 유산이자 공동체 유지 시스템이기도 했던 셈이다. 따라서 종교가 바라보는 인간은 그 자체로 부조리하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종교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 관용을 사람들에게 제의하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불교의 자비심, 기독교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와 같은 가르침은 종교가 인류에게 제시한 가장 중요한 지혜이기도 하다.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는 신 혹은 절대자의 말을 경청하고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요구했다. 이제 세속적인 권력과 힘을 내려놓은 종교가 신앙이 옅어진 현대인에게 줄 수 있는 메시지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통해 내 삶을 들여다보라’는 주문이 아닐까 싶다. 상대방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 이 깨달음이 종교가 제공하는 인간과 공동체 이해의 핵심이 아닐까. 삶의 부조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다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서로를 소외시키는 유무형의 장벽을 걷어내야 한다.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은 얼굴을 마주하고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저자는 바로 내 앞의 존재에 주의를 기울여 바라보고 경청할 때 비로소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지혜를 일러주었다. 그러면 지금의 종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인류의 오랜 지혜를 환기하고 사람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일이 아닐까.
[1] "인간이 그토록 전쟁과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종교적 신념이 결국 동일한 신에 대한 믿음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는 어딘지 모르게 허무한 비애가 있습니다." (41)
[2] "오, 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여, 나의 고통과 같은 아픔이 있다면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42) - 이스라엘 십자가의 길 초입에 있는 예수가 했다는 말의 라틴어 글귀
[3] "타인을 바라보는 만큼 더 절실히 주의를 기울여 자기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조화로운 질서에 관해 연구하려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진실하고 치열하게, 내면을 바라보는 눈앞에 등불을 켜서 들어야 합니다." (43)
[4] "오늘날 우리는 미래 세대에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 안락한 삶을 사는 법만 강요할 뿐, 실패할 기회를 주지 않고 다시 일어설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65)
[5] "저는 누군가의 아픔, 실수와 실패가 불명예가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이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나 공동체가 불명예스럽다고 느꼈습니다." (84)
[6]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136) - 마태오 12:7에서 재인용한 예수의 가르침.
[7]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데 ‘자유에만 큰 방점을 찍고 행동한다면 사회나 이웃과 불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을 믿고 그 뜻을 따라 살고자 한다면, 나와 내가 속한 종교 공동체의 행동이 이웃에게 고통을 주거나 이웃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더 나아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137)
[8]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단 하나의 차이는 태도의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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