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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
오찬영 지음 / 북드라망 / 2020년 8월
평점 :
《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
오찬영 지음 | [북드라망]
‘문학이 철학이 되다’: 가벼운 삶을 발견하는 고전 활용법
“당신은 삶을 즐거운 우주적 놀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고 있는가?”(134) 저자의 이 돌연한 물음에 나는 무심코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내 삶이 ‘놀이’와 같던 적이 있던가? 나의 삶이 극적으로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놀이 같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내 삶이 놀이 같던 시절은 어릴 때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내가 느끼는 삶의 무거움은 사회의 관습과 규칙이 규정한 삶의 조건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 삶이 놀이처럼 가벼울 까닭이 없었다.
저자 오찬영의 책 《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는(이하 《항해로》)은 미국의 고전 문학 《모비딕》을 면밀히 읽고, 다시 쓰는 과정을 통해 자기 탐구의 방향을 보여준 책이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개인적인 신앙 해체의 경험을 한 저자는 읽고 쓰는 공부를 통해 철학을 만나고, 자신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 책 《항해로》는 《모비딕》의 두 주요 등장인물인 에이해브와 이슈메일을 삶에 대한 태도라는 관점에서 비교하며 철학하기를 시도한다. 저자는 작품의 배경인 당대 미국 사회의 모순적인 면면을 마주하지만, 그의 공부는 문학 작품의 분석에서 끝나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시선을 자신에게 수렴하고, 자신을 관통하도록 이끈다.
저자는 《모비딕》을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키워드를 제시한다. 하나는 기독교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다. 이 키워드는 허먼 멜빌의 미국 사회를 비롯하여 오늘날의 미국을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하다. 기독교라는 키워드를 보면, 저자는 성경이 부여한 정복의 자연관을 미국의 가치관으로 읽어낸다. 여기에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 투영된 보편적 코드를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에 저자는 멜빌이 자신의 ‘웅장한 책’에서 절대적 기표로 고정되어 있던 성경적 질서를 자신만의 기의로 변용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한편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는 멜빌의 시대에 끓어 넘치기 직전의 인종차별, 노예 문제와 연결 지을 수 있다. 《모비딕》 초반에 등장하는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우정, 땅딸막한 삼등항해사 플래스크와 거구의 흑인 다구에 관한 묘사(“조그만 백인을 받쳐 든 위풍당당한 흑인!”)는 백인 사회의 편견과 계급의 존재를 드러낸다. 멜빌은 모순투성이의 미국을 이미 읽어내고 작품에 담아냈다. 170여 년 전의 미국 사회에서 이 소설이 미국인들에게 얼마나 껄끄럽게 다가왔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저자가 주목한 기독교와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는 다시 ‘모비 딕’이라는 상징으로 수렴된다. 소설에서 이 거대한 흰 고래는 남성성의 끝을 보여준다. 이는 백인 남성이 구축해 놓은 미국사회로도 읽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이 공고한 백인 남성의 질서에 도전하는 이는 누구든 살아남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모비 딕의 비밀을 감히 요구하며 도전한 인물이 바로 에이해브였다. 그 결과, 그는 여전히 감춰진 고래의 비밀과 함께 심연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이 지점에서 에이해브가 미국사회의 모순과 광기를 드러내주는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보다 저자 오찬영이 ‘완전히 마초이즘의 관점’에서 쓰인 이 소설을, 그리고 파멸하는 에이해브를 철학하기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등장인물의 호감 여부를 떠나 저자의 철학하기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지점이다. 저자는 미국사회를 읽는 매우 중요한 열쇠가 《모비딕》에 담겨 있음을 탁월하게 전달한다. 이 작업은 미국사회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한국사회의 모습도 읽어낼 보편성으로, 그리고 나에 대한 앎으로도 이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도입부에서 저자는 문학을 통해 자기 탐구를 향한 철학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특히 두려움을 자양분으로 삼곤 하던 신앙이 자기 안에서 해체된 경험을 통해, 자신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지점이 바로 ‘문학이 마침내 철학이 되는 지점’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알려고 하는 의지에 주목한다. 그가 제안하는 앎의 항해로 나아가기는 지식까지 물신화되어버린 현대 사회에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저항이자 삶의 주체로서의 의무가 된다.
저자는 《모비딕》 다시쓰기를 통해 우리의 삶을 ‘우주적 놀이’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내 삶에도 무거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뻗어나가며, 다른 존재와 접속하고 교차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나의 결핍을 자각한 자리는 철학이 시작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이라면, 누구든지 보다 가벼워져 우주적 놀이가 된 자신의 삶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름의 배움과 공부가 그 신체를 통과하여 축적되지 않는 이상, 그 존재성은 절대 유지되지 않는다." - P18
"그 동안의 삶의 방식에 어떻게 아니오를 외치고 반격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로 철학아닐까?" - P49
"어린 고전이긴 하지만 <모비 딕>을 통해 시대를 들여다본다는 건 역사적 개념으로 분칠된 미국을 한꺼풀 벗겨 낸 뒤 그 안의 모순, 갈등, 위선이 우글우글 들끊는 괴이한 미국의 면면을 마주한다는 뜻이다." - P73
"미국인들은 이스라엘 히브리 민족의 선민 의식을 그대로 물려받은, 야훼의 나라다. (...) 기독교와 민주주의는 <모비 딕>에서 빠뜨릴 수 없는 키워드다." - P75
"허먼 멜빌은 좀비나 소행성 같은 설정 없이도 바다 위의 포경선 한 척에 미국인들의 종말주의적 신체를 완벽히 구현해 냈다." - P98
"로고스란 자신의 현장에서 배움의 스펙트럼, 앎의 그물망에 끊임없이 접속하고 연결되는 것이고, 이는 타나토스와는 다른 양태의 에로스의 가능성이다." - P110
"자연에 대한 관찰과 앎은 결코 인간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 앎이 확장될수록, 역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 P124
"결국 삶과 운명에 대한 질문은 결국 존재에 대한 이해와 직결된다. (...) <모비 딕>에서 발견한 것은 두 가지의 존재론적 인식이다. 열정과 광기의 타나토스, 웃음과 일상의 로고스." - P138
"<모비 딕> 한 권만으로 다른 텍스트를 읽는 눈이 바뀌어 버린다." - P145
"모든 과정은 반복되지만 결코 동일하지 않은 반복으로 계속해서 오고 간다." - P163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망각하고 있는지, 바로 코앞에 두고 눈 감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 과연 무엇인지 알려고 해야 한다. 이 알려고 하는 의지만이 무지로 인해 마비된 좀비로부터 당신의 생명력을 흔들어 깨울 것이고, 삶과 죽음을 비롯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순간과 운명의 흐름들을 온전히 누리게 되는 기예를 알려줄 테니까."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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