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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 오브 타임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21년 2월
평점 :
《엔드 오브 타임 Until the End of Time》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 지음 |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그러므로 나는 특별하며 동시에 우주다.’
그리스·로마 신화에는 수많은 신과 영웅들이 등장한다. 불사의 신과 필멸자 영웅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이야기의 주요 소재다. 하지만 이 두 부류는 모두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사랑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 분노의 감정을 갖고 보복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화는 지극히 ‘인간적인 세계관’을 반영한다. 보통의 인간은 신화와 같은 이야기에 주목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서 트로이 전쟁 중에 죽어간 용사들의 이름을 자신의 시에서 일일이 호명했던 현대 시인도 있듯이, 우리 개별적인 존재는 이름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특별해질 수 있는 지도 모른다.
이론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은 초끈이론이론의 관점에서 평생 우주를 설명하는 통일이론을 연구해온 인물이다. 이번에 읽은 그의 저서 《엔드 오프 타임 Until the End of Time》은 우리의 시선을 우주의 시작에서 끝나는 지점까지 안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이라는 존재, 그리고 ‘나’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지금까지 펴냈던 전작들에서도 조금씩은 언급을 하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저자가 몸담고 있는 물리학의 관점에서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노력했었다. 이번에 나온 저서는 자신의 신념에서 출발하여 ‘삶’이라는 과제를 좀 더 폭넓게 조망하고자 했다는 인상을 준다. 《일리아드》에서 영웅과 함께 죽어간 수많은 전사자들처럼, 우리 개별적인 존재들의 삶이 왜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엔드 오프 타임》에서는 빅뱅으로 비롯된 우주의 시작과 엔트로피를 비롯한 물리법칙에 입각한 우주의 진화를 여러 장에 걸쳐 소개한다. 이어 생명체가 등장하고 진화과정을 거친 수많은 생명체 중에서 인간에게 ‘의식’이란 능력이 갖추어지는 정황을 제시한다. 이 의식이란 무엇보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 우리는 모두 유한한 존재라는 자각을 의미할 것이다. 저자가 취한 환원론적인 시각에 따르면, 우리가 특별한 이유는 외부의 환경과 반응하여 내부의 입자들이 개별적으로 ‘특별하게’ 배열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눈여겨 본 지점은 인간사의 모든 현상에 자신의 관점을 고집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특히 ‘마음’은 물리법칙을 따르는 생명체에 기반을 둔다는 입장에 있지만, 물질과 마음의 관계에 있어서 환원주의에 입각한 물리 법칙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저자의 이야기에 계속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주장도 진지하게 고려하고자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브라이언 그린이 젊은 시절에 과학 특히 수학과 물리학을 업으로 삼은 이유가 ‘영원한 가치를 갖는 무언가’를 추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저자는 책에서 자신의 가정사를 간간이 소개하는데, 그 중 흥미로웠던 점은 종교에 몸담고 있는 친형을 언급한 부분이다. 저자가 종교와 과학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유연하고 다양성을 고려하는 입장은 아마도 이런 배경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종교와 물리학은 일상적인 경험을 넘어선 곳에서 불변의 진리를 찾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목적을 이루는 방법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291)라며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여기에서 나아가 저자는 철학자 대니얼 데닛의 견해와 유사한 접근법을 취하며 ‘자유의지’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 ‘자유의지’는 고전물리학(결정론적)이든 양자물리학(확률적)이든 이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저자는 이렇게 자유의지와 물리학의 양립가능성을 취하는 대신, 우리 각각의 내부에 형성된 복잡한 배열이 다양한 행동을 낳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특정하고 다양한 (행동의) 자유를 지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책의 도입부에서 잠시 언급되었지만, 여러 철학자들은 종교와 과학이 ‘죽음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에서 탄생’했다는 관점에 동의한다. 앞에서 언급한 신화 역시 우리가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했기에 나올 수 있는 이야기다. 저자는 지구에 생명이 출현하고 인간으로 진화해온 정황을 이야기하는데, 인간의 모든 활동에서 ‘존재의 유한성’을 찾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신화와 종교,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과 예술에도 이러한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전한다. 인간은 죽음을 아는 존재이기에(그렇다고 ‘유일한’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가치와 목적을 추구하는 여정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영감과 해답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한다”(37)고 선을 긋는다. 이것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분별이 생겨나고, 인식능력을 얻으면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일 듯하다. 인간이 본래적으로 고독한 존재라고 여겨지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9장과 10장에서는 앞에서 설명한 물리법칙, 특히 엔트로피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우주의 진화를 최신의 연구 성과를 더하여 설명한다. 그것도 아주 머나먼 미래에 우주가 겪게 될 운명을 말이다.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인간의 사고(생각하는) 행위가 엔트로피와 열이 서로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행위도 먼 미래의 우주에서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를 소개하는 부분은 상당히 흥미로운 사고실험이었다. 저자는 지극히 먼 미래의 일이긴 하지만 열역학적 관점에서 사고활동을 포함한 생명활동이 정지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제시한다. “우주에서 오랫동안 우주를 생각해온 생명과 사고는 언젠가 반드시 종말을 맞이할 것”(436)이라는 저자의 결론은 이해가 가면서도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막연하게 수긍하는 것과 분명하게 자각하는 행위는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종교, 과학, 철학, 예술 등)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결국 우주와 함께 사라질 운명을 지닌다. 그렇다면 우린 거대한 우주라는 무대에 잠시 등장하여 사라질 ‘양자적 잡음’에 불과한가라는 다소 회의적인 물음이 떠오른다. 저자는 앞서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에 대답을 했지만, 그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특별함이 ‘지금 여기의 삶’에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개별적인 존재가 취할 수 있는 다양한 행위들 말이다. 환원주의적 시각에서 각 존재는 입자들의 독특한 배열로 이루어진 존재로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점에 더하여 우리는 각자만의 자유로운 몸짓,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특별하다는 관점이다. 이 부분은 물리법칙이 예측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영화 <애니 홀 Annie Hall>에서 주인공이 “앞으로 수십억 년만 지나면 우주가 팽창하다가 찢어져서 모든 게 사라진다는데(빅립, Big rip을 의미), 숙제는 해서 뭐하게요?”(453)라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 대신 자녀가 오늘 숙제를 해야 할 이유를 고민하는 학부모라면, 자녀가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우주가 시작한 시점이나 종말을 인식할 수조차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있는 ‘지금 여기’가 특별하고 의미를 지닌다는 저자의 견해는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칼 세이건의 말마따나 ‘우주의 먼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브라이언 그린의 설명대로 우주의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주다’라고 할 수 있겠다. 불확정성에 근거한 ‘양자적 요동’으로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입자가 형성되었고, 입자들이 구름이 되어 뭉쳐 중력과 핵력의 영향으로 에너지가 분출하면서 별과 행성 뿐 아니라 생명체의 출현을 예비했다. 엔트로피의 열역학법칙을 고려할 때 생명은 다소 이례적으로 ‘물질에 갇힌 엔트로피를 해방시키는 하나의 수단’(116)으로서 역할을 한다. 통계역학 및 열역학적 관점에서 유전 물질의 안정성과 구조적 규칙성을 탐구한 에르빈 슈뢰딩거와 비교할 때 더 큰 스케일에서 생명을 바라본 셈이라고 이해해볼 수 있겠다.
이 책은 칼 세이건의 역작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에서 제시했던 것과 유사한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우주가 빅뱅을 통해 입자들이 등장하고, 은하와 별, 그에 딸린 행성들이 어떻게 생겨나며, 생명체의 존재가 어떻게 진화를 거쳐 인간이 등장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지점은 《엔드 오프 타임》과 유사하다. 그러나 칼 세이건은 이 지점에서 인간의 존재란 어떤 존재인지 그 본성을 추적하면서 인간의 가까운 미래를 염려한다. 미국이 구소련과의 냉전이 아직 진행중이던 시기에 쓴 저작이기에, 특히 핵문제를 비롯한 문제 상황을 염두에 두며 읽어야 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결과물은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칼 세이건은 인류의 생존을 염려하며 인간의 연대, 연결됨의 중요성에도 주목했다.
반면 《엔드 오프 타임》에서 저자는 인간의 출현까지 설명한 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 보다는 의식의 출현, 그리고 우주 전체의 종말에 이르는 보다 포괄적인 범위를 전망한다. 나아가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의미 찾기에 보다 큰 의미를 두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저자의 말마따나 우리가 우주에 관한 진실을 알았다면, ‘지금 여기’의 삶에서 우리가 어떤 의미를 찾을지는 각자에게 달린 문제다. <애니 홀>의 앨비 싱어가 취한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할지, 아니면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인간의 삶은) 두 어둠 사이에 빛이 새어 들어오는 작은 틈”(33)이라고 한 것처럼, 우주 속의 ‘작은 존재’에 희망을 걸지는 각자의 선택지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이 ‘선택의 가능성을 우리가 지니고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특별한 이유가 아닐까. 이 책을 읽고 내가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언젠가 만났던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바로 자살이다”라는 카뮈의 문장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는 점이다. 브라이언 그린은 ‘우리는 존재 자체로 경이로운 일’(456)이라고 했지만, 카뮈는 이 존재의 ‘의미 찾기’과정을 이미 한 층 더 진지하게 밀어붙였던 것 같다.
《엔드 오프 타임》에서 제시된 과학 이야기는 모두 흥미롭다. 다만 무엇보다 내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부분은 우리의 오랜 과거나 머나먼 미래보다는 ‘가까운 미래를 포함한 우리의 현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으며, 나는 네가 아니고 왜 나인가?’라는 문제를 독자와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우리가) 왜 특별한가?’라는 문제를 두고 앞으로 더 생각해보라는 과제를 받은 느낌이다. 이 책의 주제를 관통하는 저자의 메시지를 잘 표현한 예술 작품을 꼽으라면, 난 폴 고갱(Paul Gaughuin)의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떠올리겠다. 이 작품은 고갱이 자살을 시도 했다가 실패한 후 남긴 대작이기에, 카뮈의 문제의식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그린의 관점에 따라 생각해보면, 고갱은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삶을 진지하게 탐구한 사람이었다.
Paul Gaughuin (1897년 작)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인간의 삶이 유한한 것처럼 모든 생명 현상과 정신도 유한하다." - P22
"별과 행성, 그리고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우주를 생각할 때, 지금 이 시대는 참으로 특별하다." - P35
"분자의 수가 작거나, 온도가 낮거나, 점유 공간의 부피가 작으면 엔트로피가 작고, 부자의 수가 많거나, 온도가 높거나, 점유 공간의 부피가 크면 엔트로피가 크다." - 엔트로피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의 결론 - P57
"지금도 우주 곳곳에서는 증기 기관 내부의 엔트로피가 주변 환경으로 방출되는 것과 유사한 사건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계의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과정을 ‘엔트로피 2단계 과정‘이라 부르기로 하자." - P72
"모든 동물의 세포는 서로 비슷하다. 현존하는 모든 다세포 생물은 먼 옛날에 존재했던 단세포 생물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이다." - P134
"모든 생명 현상은 최후의 쉼터를 찾아가는 전자(electron)의 여정이다" - 생명이 에너지를 처리하는 과정의 핵심이 ‘산화환원‘ 반응임을 의미한다. - P142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시행차오를 통한 혁신에 가깝다." - P151
"우리는 입자의 상호 작용으로부터 감정이 생성되는 과정은 모른다. 곧 ‘마음이 없는 입자가 어떻게 마음을 만들어내는가?‘라는 문제는 환원주의에 입각한 물리 법칙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 P187
"자유의지는 우리의 통제 영역을 벗어난 물리 법칙에서 온 것이 아니다."(219)
"당신의 행동은 자유의지와 무관하다 해도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484, 미주46) - P219
"인간의 감정은 문화적 적응이 아닌 생물학적 적응과정의 산물이다." - 찰스 다윈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에서 재인용 - P302
"예술이란 불멸을 추구하는 행위다."(319) - 키스 해링 Keith Haring
"예술가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영원을 향한 갈망을 창조적인 작품으로 구현한다."(342) - 브라이언 그린이 키스 해링의 표현을 조금 바꾸어 표현한 듯한 문장 - P319
"생명 현상(두뇌활동 포함)은 엔트로피 폐기물(폐열 waste heat)을 외부로 방출해야만 한다." -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이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먼 미래의 생명과 마음을 예측하는 논문의 기본 전제
"사고체 thinker가 생각과 휴식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면 영원히 생각할 수 있다" - 다이슨 논문의 핵심 주장(사고 행위가 필연적으로 열을 낳기 때문임) - P386
"우리 우주에서 오랫동안 우주를 생각해온 생명과 사고는 언젠가 반드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 P436
"모든 사람들이 정체성을 잃었다. 죽음이 없으면 단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한다...나는 신이며, 영웅이며, 철학자이며, 악마이며, 세상 자체다. 이는 곧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 루이스 보르헤스 <불멸 The Immortal>에 나오는 표현으로 보르헤스의 통찰이 감동적이기도 하고 놀랍다. - P447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일이다." - P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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