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다, 경계에서 저항하다’
(다시 쓰기 혹은 속편)
-《야만인을 기다리며》(2019), 《시간 時間》(2020)을 읽고
작년 말에 일러스트 《모비 딕》, 그래픽 노블 《모비 딕》,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묶어서 간단한 리뷰를 써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오늘은 《모비 딕》을 제외하고, 일본 작가 혼타 요시에의 장편소설 《시간 時間》(2020)을 더하여, 전에 썼던 리뷰의 구조를 그대로 차용해서 리뷰 다시쓰기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번 글은 큰 틀에서 보면 작가 또는 작중 인물의 ‘경계 넘기’와 ‘경계에서 저항하기’의 구도 속에서 다른 두 소설에 대해 다시 써보려고 했던 시도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J.M. 쿳시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경우, 이전의 리뷰에서 대부분 가져오되, 홋타 요시에의 《시간 時間》과 비교해보며 읽어본 것이다.
‘경계를 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백인’ 작가 쿳시는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이었던 ‘아파르트헤이트’가 법률로 공식화된 1948년보다 조금 이른 1940년 태어났다. 그리고 이 소설은 야만적인 인종차별 정책이 한창이던 1980년에 출간되었다. 외견상 소설의 시간 및 공간상의 배경은 배제되어 있지만, ‘작가의 시공간’을 염두에 두고 읽어 나갈 수 있다. 소설을 관통하는 배경은 제도의 경계 밖에 있던 존재를 ‘야만’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정복하고자 했던 ‘문명’의 제국주의적 맥락과 닿아있다. 백인 작가 쿳시는 ‘내부고발자의 시선’으로 문명과 야만의 경계 넘기를 시도하며 화자의 입으로 문명의 야만성을 고발한다.
소설의 화자는 제3제국에 고용되어 변방에서 30년을 보낸 치안판사다. 이 변방은 제국이 구축한 식민지에 요새를 만들어 스스로를 ‘가둔’ 곳이기도 하다. 치안판사는 변방에서 ‘아무 일 없이’ 권태롭지만 조용하게 살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취미로 유목민들의 폐허를 발굴하고, 이따금 유곽을 들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앞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제3제국 소속 경찰 졸 대령이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뒤바뀌어 버린다. 졸 대령의 임무는 ‘야만인’들을 정복하고 몰아내어 야만인들의 위협으로부터 ‘문명’ 세계를 보호하는 일이었다.
제3제국 경찰 졸 대령이 보이지 않는 유목민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르고 잡아들였던 것은 무지로 인한 공포가 만들어 낸 증오 때문이다. 치안판사가 제국의 경계를 넘어가 졸 대령이 잡아들였던 유목민 여자를 유목민에게 넘겨주고 복귀하자, 치안판사는 ‘적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수감된다. 이처럼 사회의 질서,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계를 지우고, 경계의 ‘안쪽’에 자리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치안판사는 졸 대령이야말로 ‘문명’에서 온 ‘야만인’이라고 비판하고, 경계의 어느 쪽에 서기를 거부한다. 그는 이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꿈꾸었기에 고초를 당해야 했다.
치안판사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사라져버린 백성에게조차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것이 치욕의 원인이라고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254)라고 지나간 시간을 회상한다. 그렇다면 치안판사가 ‘야만인을 기다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기록된 역사의 표면 아래에 묻힌, 진정한 삶과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문명이 야만으로 규정한 유목민의 시간은 문명과 상관없이 도도히 흐른다. 계절의 법칙에 따라 오고 가는 ‘아이들과 같은 시간’ 속의 삶을 살 뿐이다. 제3제국의 경찰의 만행으로 유목민의 삶이 파괴되고 땅은 생산력을 잃어버린다. 판사는 건강하고 진솔한 삶을 바랬기에 부조리한 이데올로기, 관습의 억압을 통과하지 못하고 수모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제국이 보여주는 무자비한 만행을 지켜보는 치안판사의 시선은 인종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슈미얼의 시선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앞선 리뷰에서 언급한《모비 딕》에서는 문명화된 퀘이커교도가 소유하여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포경선의 이름이 백인들의 정복활동으로 멸종한 인디언 부족 ‘피쿼드’에서 따온 것임을 상기해보았다. ‘문명’화된 백인들이 ‘야만인들’을 몰아내고자 스스로가 ‘야만인’이 되어버린 역설을 두 소설에서 발견한다. 쿳시가 소설에서 구체적인 시공간을 배제한 이유도 제3국의 하수인들이 보여주는 행동이 특정 시기, 특정 사회의 문제만이 아님을 제시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 문제는 백인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문명사회가 지니는 편견과 억압적 관습에 관한 것이며, 쿳시는 이 문제의 본질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쿳시의 소설에서 검은 선글래스를 쓰고 나타난 ‘문명인‘의 모습은 일본 작가 홋타 요시에의 《시간 時間》에서 ‘검은 뿔테 로이드 안경’을 쓴 일본인 장교 기리노 중위와 오버랩 된다. 이 소설의 시공간은 1937년 중국 난징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중국을 점령한 일본군이 수 개월간 자행한 학살사건이 소설의 배경이다. 소설의 화자는 중국군 정보 장교 천잉디. 그는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 하인까지 데리고 모두 탈출한 형의 가족을 배웅했다. 반면 화자는 탈출하지 않고 집에 남아 일본군에 의해 임신한 아내와 아들을 잃는 고초를 겪는다. 소설은 화자가 대학살 전후 1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기록한 일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작가의 색다른 ‘경계 넘기’에 있다. 작가 요시에는 대학을 졸업한 뒤, 태평양전쟁 당시 징집되어 중국에서 복무 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복자’가 아닌 ‘피정복자’의 시선에서 소설을 써내려갔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역사소설과 다른 이 소설만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소설의 몇 군데에 일본인의 무의식이 드러나긴 하지만, 작가는 ‘입장(인식)의 경계를 넘어’ 피정복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고자 했다. 작가가 이러한 시도를 하지 않고, 몇 개월 만에 자국의 군대가 30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했던 만행을 고발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길가에 있던 시체의 목을 물어뜯던 짐승들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경계에서 저항하다’
홋타 요시에의 소설 《시간 時間》은 1955년에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나에게도 충격이자 울림으로 다가오지만,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가해국의 작가가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상상해보려 했다. 작가의 ‘경계 넘기’는 목숨을 거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작가의 ‘경계 넘기’와 화자인 천잉디의 ‘경계에서 저항하기’가 대비되는 지점에도 주목해본다. 천잉디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인간(사랑)과 물질의 수준(질서/비인간성) 사이의 경계 넘기를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인간으로 남길 선택하는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집을 점거한 기리노 중위의 하인으로 지내면서도, 엄혹한 ‘운명 속에서 익사해서는 안 된다’(138)고 다짐하며, ‘노예적인 숙명과 파괴적인 인생관에 굴종하지 않기’(109)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쿳시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도 치안판사는 ‘경계에서 저항하기’를 시도한다. 쿳시가 ‘인식의 경계 넘기’를 시도하는 반면, 소설의 화자는 문명과 야만, 비인간과 인간 사이의 경계에서 저항한다. 치안판사는 제3제국 경찰들에게 몽둥이로 얻어맞아 손이 부러지고, 코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잡혀 와서 노예처럼 끌려온 유목민들을 보고 “우리는 위대한 생명의 기적이야! (...) 이 사람들을 봐라! (...) 사람들이다!”(177)라고 항변한다. 그리고 치안판사가 “나와 졸 대령은 다르다”(76)라고 생각했을 때의 인식은 《시간 時間》에서 천잉디가 인간/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넘지 않고자 했던 양심이 내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시간 時間》의 마지막에 이르러 화자는 ‘비인간적인 세상과 인간의 세상, 그 둘 사이의 경계를 헤매고’(125) 갖은 고초를 겪고 살아남아 회복 중이던 사촌 동생 양양에게서 생명의 강한 회복성과 희망을 발견한다. 인간은 각자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야 해야 하는 것’(250)이라고 보고, 엄연한 생의 질서를 한 번 더 믿기를, 그리고 인간의 존엄에 대해 한 번 더 의지하고자 한다. 곡식을 수확하는 것처럼 ‘인생은 몇 번이라도 발견’(250)되는 것임을 믿는 것이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마지막에서는 야만의 시기가 지나가고 다시 평온을 되찾은 변방에 첫 눈이 내린다. 치안판사가 눈사람을 만드는데 열중해있는 아이들을 향해 나아가는 장면은 긴 여운을 남긴다.
지금까지 전편의 리뷰와 마찬가지로 ‘경계 넘기’ 그리고 ‘경계에서 저항하기’의 관점에서, 인종차별과 대학살을 다룬《야만인을 기다리며》와 《시간 時間》을 함께 읽어보고자 했다. 흥미로웠던 것은 이 작품들에서 파악되는 대립되는 세계가 어떤 경계에서 충돌하되 어느 접점, 곧 정지와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지난 리뷰에서 읽어본 허먼 멜빌의《모비 딕》을 떠올릴 때, 나는 이 소설의 이야기가 끝나면 지면의 한계를 벗어나 또 다시 바다에서의 삶이 이어질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아가 이것이 ‘경계에서의 저항하기’를 너머 ‘경계를 무화하기’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언급했다. 마찬가지로 《야만인을 기다리며》와 《시간》에서는 야만적인 문명에 의해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가 훼손되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여기에 저항하는 인간의 ‘꿈틀거림’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계속되는 삶과 질서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다시 해가 뜬다는 엄연한 질서를 한 번 더 믿는 것이라 믿었던 천잉디의 독백처럼 말이다.
책을 덮고 나는 성년이 한참 지나 읽기 시작한 책읽기, 그리고 소설 읽기란 내게 무엇을 의미할까 생각해보았다. 책을 펼칠 때마다 나는 책을 경계로 나와 다른 세계와 마주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아마도 어떤 종류의 ‘경계’에 다가가고, 때론 이를 넘는 시도를 상상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 작업이 경계의 자리를 ‘선택’하거나 혹은 그 경계를 ‘무화’시키는 노력을 요구하기도 할 것이다. 문학작품에서 이질적인 두 세계가 있을 때, 두 세계는 으레 그 경계에서 팽팽한 긴장 관계를 이루며 존재한다. 이 세계의 ‘안과 밖’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내가 ‘경계의 자리’를 가늠하고, 그 경계를 넘을 것인지, 혹은 경계의 어디에 설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는 작업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