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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비치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평점 :
《맨해튼 비치》
제니퍼 이건 (Jennifer Egan) 지음 |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이미 많이 나와있다. 하지만 제니퍼 이건의 소설 《맨해튼 비치》에 대한 소개를 읽고 또 뉴욕을 배경으로 쓸만한 것이 남아 있을까하는 의구심은 곧바로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소설의 주요 배경으로 나온 ‘맨해튼 비치’가 어디인지 궁금해졌고, 특히나 뉴욕의 브루클린에 해군 조선소가 있어서 항공모함을 만들기도 했다는 사실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의 시대적인 배경은 금주법 시대(1919-1933)가 막 끝난 시점, 미국의 경제 대공황(1929-1939)이 막 시작되어 진행중이던 1930년대 초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의 1940년대 전반의 대략 10여년 전후의 시기를 아우르고 있다.
이번 기회에 새로 알게된 소설가 제니퍼 이건은 유명한 중견 소설가였다. 한 유명 잡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작가’로 선정되기도 한 인물로서 무엇보다 다양한 소설 형식을 실험해본 소설가라는 소개에 주목했다. 고딕소설의 형식 뿐만 아니라, 한 번에 140자로 한정된 트위터를 통해 SF스파이 스릴러를 연재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리고 이번에 읽게된 《맨해튼 비치》는 역사성과 지역성이 강하게 드러난, 보다 복잡한 사회의 양상을 녹여낸 결과물이다. 나아가 저자가 뉴욕이라는 지역의 역사에 대해 철저히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자료를 읽어낸 과정은 역사소설의 글쓰기가 어떠해야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다이빙 장비를 직접 착용해보거나, 최초의 여성 심해 다이버를 만나 인터뷰하고 구체성을 더한 과정은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해온 작가의 작업에 보다 신뢰감 있는 깊이를 더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뉴욕, 특히 브루클린이라는 특정한 지역을 배경으로한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등장 인물들의 동선과 바라본 풍경이 어떤 것이었을까를 상상하며 지도를 찾아 재구성해 보았다. 소설의 지리적 배경이 되는 주요 장소는 물론 브루클린 남쪽의 대서양을 마주한 ‘맨해튼 비치’이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기나긴 해변으로 유명한 ‘코니아일랜드’가 있으며, 소설의 주요 인물인 애너 케리건이 일하는 해군공창의 위치는 브루클린 북쪽이다. 바로 맨해튼 동쪽과 브루클린 사이를 흐르는 ‘이스트강’이 굽이치는 곳에 해군공창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왼쪽에 점선으로 표시된 영역을 확대한 이미지를 오른쪽에 두었다. 소설책의 내지에 나와있는 옛 해군공창 지도의 윤곽을 보면 여전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음을 오른쪽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스태튼아일랜드와 브루클린 서쪽의 좁아지는 부분이 소설에서 ‘내로우스’라고 표기되어 있고, 이를 중심으로 맨해튼 섬을 향하는 북쪽의 만 영역을 ‘어퍼 베이’, 남쪽의 만을 ‘로워 베이’라고 한다. 대략 이 정도를 파악하면 각 인물들이 이동하는 동선과, 인물들이 바라보던 풍경의 위치를 상상하고 따라가면서 좀 더 흥미있게 읽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역적 상징성 - 계급과 문화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장치】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인 애너 케리건과 그녀의 아버지 에디 케리건, 그리고 덱스터 스타일스는 1934년 브루클린의 남쪽, 맨해튼 비치가 있는 곳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덱스터는 뉴욕의 여러 곳에 나이트클럽을 소유한 암흑가의 보스이며, 이탈리아 이민자의 후손이다. 이탈리아식 이름을 미국식 이름으로 바꾸고, 청교도의 후손인 은행가의 딸과 결혼하여 현재의 위치에 오른 인물이다. 에디는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후손으로서 지역 노동조합장을 맞고 있는 동료 더넬린의 백맨(bagman)으로 일하며 암흑의 세계에서 돈다발을 나르던 사람이었다.
암흑가의 보스 덱스터가 살고 있는 맨해튼 비치 서쪽의 저택가는 부유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며, 맨해튼 비치는 사유지였기에 적어도 30-40년대에는 타 지역의 일반 거주자들이 들어올 수 없던 곳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부유하고 성공한 이들이 전유하던 공간이었으며, 흑인들이 전무한 앵글로색슨 백인들의 문화가 지배하는 지역이다. 반면, 맨해튼 비치의 서쪽에 위치한 코니아일랜드는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 해변으로, 모든 거주민들에게 공개되어 있는 공유지였다. 특히 에디의 딸, 애너가 아버지로부터 수영을 처음 배운 곳도 이곳 코니아일랜드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서민들에게는 고향과 다름없는, 추억이 깃들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맨해튼 비치가 보다 백인들의 문화로 한정되어 있는 양상이라면, 코니아일랜드는 이탈리아인, 아일랜드인, 폴란드인, 유대인, 푸에르토리코 등의 카리브해 흑인들이 모여 삶을 나누던 다인종 문화가 형성된 장소로서 대비된다. 아울러 맨해튼 비치는 덱스터가 총을 맞고 사망하게되는 곳이기도 한 반면, 코니아일랜드는 에디 케리건이 추에 묶여 바다에 던져지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맨해튼 비치와 코니아일랜드는 각각 덱스터와 에디의 운명에 큰 변화를 맞는 공간이기도 하며, 애너와 덱스터를 이어주는(맨해튼 비치의 한 보트 창고에서 두 사람은 밀회를 갖는다) 공간이기도 하다. 이 정도 정리를 하게되면 ‘맨해튼 비치’의 지역이 갖는 함의가 좀 더 쉽게 다가올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적/시대적 문제의식 - 성차별과 인종차별】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나 있어 진부한 지적일지 모르겠지만, 《맨해튼 비치》에는 30-40년 대에 동시대인들이 공유하던 문화적 유전자가 소설 속에 발현되어 있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은 연합국에 본격적으로 합류하여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남자의 일’이었던 전쟁에 남자들이 입대하여 전선으로 가고, 후방에는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싶어하던 많은 여성들이 남게된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전쟁 물자를 제작하고 공급하기 위한 노동에 직접 투입되는데, 애너 역시 해군이 사용할 전함을 제작하는 해군공창에서 부품만드는 일에 투입된다. 어느 날 애너가 바지선에서 ‘다이버’를 본 이후, 그녀는 다이버가 되기를 갈망하게 된다. 하지만 꿈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90킬로그램이 넘는 다이빙수트를 입고 작업을 해야하는 힘든 일에 여자들은 애초에 배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 다이버들의 환경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피부색으로 제한된 차별이었다. ‘남자’이긴 하지만 ‘흑인’이었던 말리 역시 노동자들 중에서도 백인보다 멸시받는 또 다른 차별적 위치에 있었다. 애너의 아버지 에디가 선원으로 배를 타고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서 목도한 풍경은 인종 차별에 대한 보다 선명한 이해를 더해준다.
“흑인이 하대 받는 모습이라면 에디도 익숙했다 - 웨스트사이드 부두에서는 이탈리아 출신이 흑인 취급을 당했고 흑인은 그보다 더 멸시받았다.”(458)
이런 사회 환경에 둘러싸여 살아가게 되면, 이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현실이 찾아올 수 있다. 다이빙팀에서 처음 일하기 시작하면서 허드렛일을 주로 하게된 애너(젠더의 굴레)와 말리(인종의 굴레)의 경우, 백인(주로 남성 백인)들이 애초부터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두고 시작했기에 현실에 도전하겠다는 생각이 점점 약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경우 결과에 대한 모든 원인을 자기 자신, 개인에게 전가하게되는 집단 심리의 원형을 찾아볼 수도 있다.
“어떻게 마음이 약해지자 불공정한 처사를 결코 묵과하지 않는 감각도 무뎌졌다.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쪽이 기만당하는 것보다 어쩐지 덜 끔찍했다.”(437)
이처럼 차별적인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채 지내다보면,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 및 심리가 하나의 패턴이 되어 여기에 순응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차별적인 현실을 분명히 감각하면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흔히 겪을 수 있는 심경의 변화일 것이다.
저자 제니퍼 이건은 여러 인물들의 주요한 문제의식과 갈망들을 놓치지 않고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백인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존재하는 ‘계급적 의식’ 또한 발견할 수 있다. 백인 다이버 동료 폴 배스컴은 약혼자의 부모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다이버 경력을 가지고 해군에 들어가기를 열망한다. 이처럼 전시 체제 하의 군용 선박을 제작하던 해군공창에서, 힘든 노동이 예견되어 있는 다이버들의 세계에서 여러 인물들은 각자 나름의 욕망을 지니고, 이를 얻기 위해 현실에 맞서고 있다. 소설의 말미에 애너의 고모 브리앤이 무명의 상선 선원들 또한 훈장과 같은 명예도 주어지지 않는 처지에서 온갖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이야말로 ‘영웅’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다분히 미국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해군공창의 노동자들 또한 일상의 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애너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순응하기만 하는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따르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이다. 사실 애너는 전장에 나가 자신도 다른 남자들처럼 전쟁을 직접 겪고 싶었으나, 근본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 대신 다이버 생활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전쟁을 ‘느끼고’ 싶어했다. 남성들의 세계에서 이들의 조롱과 무시(“사령관이 말했다. 물리력이 필요한 일이나 극한 조건을 견뎌내야 하는 일은 전부 금지야. 그런 분야의 여자들은 ‘조력자’라고 해”(208))에도 아랑곳없이 ‘다이버’가 되고 싶은 꿈을 위해 힘든 과정을 참아내 성취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애너의 운명은 이미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암시되고 있다. “애너는 부스러기, 어디서건 뿌리내리고 어떤 것도 견디는 잡초였다. 리디아가 고갈시키는 생명력을 애너가 온전히 채워주었다.”(39) 동생 리디아가 선천적인 장애로 몸의 굴레 속에서 평생 갖혀지냈다면, 애너는 자신에게 부여된 여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는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다. 아울러 애너는 남성의 가치관을 내면화해버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을 외면하는 친구 넬(“여자는 절대 일해선 안된다는 게 이이 신조거든. 여자란 남자를 어떻게 홀릴지나 궁리해야 한대.”(345))과 분명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자신만의 길을 간다. 그리고 상당수의 여성들이 가는 길을 벗어나는 일은 대가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녀의 삶은 전쟁의 삶이었다. 전쟁이 곧 그녀의 삶이었다”(620)라고 평가되어 있듯이 여성들이 치러내야 했던 다양한 맥락의 전쟁을 소설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물론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분투’하는 이들이지만, ‘혁명’을 기도하는 영웅의 타입은 아니다. 이들은 평범하고 ‘작은 삶’을 영위하는 우리들의 분신에 더 가깝다.
【물, 바다가 지닌 상징성 - 삶의 양태들을 구분하는 경계로서의 공간】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스콧 F.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도 역시 ‘물’이 등장한다. 그러나 물이 상징하는 양상은 《맨해튼 비치》와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개츠비에게 ‘물’은 장애물에 가까운 대상으로서, 오히려 이를 헤쳐가야하는 존재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덱스터 스타일스처럼 개츠비는 풀장에서 수영하다가 물 주변에서 총에 맞아 죽긴 하지만, 《맨해튼 비치》에서 물-바다가 지니는 상징성은 보다 더 강렬하고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바다는 죽음-삶(재생) 사이를 매개하거나 이 둘 사이를 순환하는 통로 내지는 공간으로서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선 《맨해튼 비치》에서 바다는 소설의 주인공들이 은유적인 의미든, 문자 그대로의 의미든 간에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애너에게 바다는 지상의 세계(차별적 현실)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바라던 것(다이빙을 통해 전쟁을 보다 더 경험하는 일)에 다가가는 길이 되는 공간이다. 곧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던 것과 구별되는 삶(차별에 저항한 여성 다이버)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장소가 바로 바다였던 것이다. 한편 애너의 아버지 에디에게도 바다는 삶과 죽음의 기로가 되고 다른 삶에 이르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에디는 보호소 동기이자 성인이 되어 검사로 일하는 바트 시핸에게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전달했고, 조직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그는 덱스터의 부하들에 의해 의식을 잃고 무거운 추에 묶여 바다로 던져지는 것이다. 바다에 가라앉으면서도 에디는 난국탈출 스턴트맨이자 마술사였던 전설의 해리 후디니처럼, 몸부림을 통해 자신의 몸을 묶었던 사슬을 빠져나와 물위로 떠오른다. 지상의 세계로 올라오면서 그는 이전의 에디가 아니라 이제는 존재하지 않게된 사람으로서, 새롭게 태어난다. 에디는 마침 뉴욕에 도착해 있는 브라질 화물선의 화부(가장 밑바닥 임무를 맡은 이들)가 되어 뉴욕을 떠나 선원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에디는 바다 속의 심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화하고 그림자의 세계/불법의 세계/도덕적 타락의 세계를 벗어던지게 되었으며, 스태튼아일랜드의 어부에게 구출되어 준법의 세계/양지의 세계로 새롭게 태어남을 가능하게 했던 통로는 바로 ‘바다’였던 것이다.
또 에디가 상선(엘리자베스 시먼호)의 3등 항해사로 배에 올라 파나마운하로 향하던 중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고 조난당했을 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허우적대던 공간 역시 바다였다. 이 시기에 딸 애너는 다이빙을 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굳건히 지켜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는 에디와 딸 애너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로서의 역할도 겸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 에서 주인공 이슈메일이 바다로 나가려는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 내지는 운명을 언급하는 대목이 1장에 나온다.
“하지만 보라! 더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뛰어들기라도 할 것처럼 곧장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 이상하기도 하지! 육지 가장 끝자락에 서는 일 말고는 그 무엇도 그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다니.”
-《모비 딕》 1장, 황유원 옮김, [문학동네]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덱스터의 장인인 ‘노인장’이 기회가 될 때마다 물가로 나오려고 하는 자신을 보고 바로 《모비 딕》의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이 물-바다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모비 딕》과 《맨해튼 비치》역시 서로 상당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시 육지로 - 소설의 정서】
소설《모비 딕》이 영미문학의 3대 비극 중 하나라고 여겨지곤 하지만, 작품 전반에서 묻어나는 정서는 《맨해튼 비치》와는 분명 다르다. 책을 덮고 나서 내게 느껴진 정서는 오히려 제니퍼 이건의 소설이 ‘슬픔 혹은 비애감'이란 정서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설명하긴 쉽지 않지만, 《모비 딕》에선 에이해브 선장 자신이 추구하는 개인적 복수에 대해 동조한 등장 인물들에 대해 운명이 내린 벌과 같은 인상으로 다가온다면, 《맨해튼 비치》에서는 운명적인 한계를 분명히 자각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보편적인 체념이 느껴져서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이것은 작가가 의도했다기 보다는 피할길 없는 인간이란 존재로서 보편적인 ‘삶의 한계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미약한 존재들의 삶이 느껴져서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필멸의 존재로서 언제나 삶-죽음의 경계를 위태롭게 걸어가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그림자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에디가 덱스터의 집을 다녀온 후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 어린 딸을 바라보며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 아이를 안아올릴 수 있을까?”라고 되뇌일 때 느껴지는 그런 ‘슬픔’의 정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혹은 《맨해튼 비치》에서 소설을 관통하는 ‘슬픔’의 정서의 정체는 ‘빈곤’이란 무형의 실체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뒤흔들 수 있으며, 파괴할 수 있는지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끊임없이 다가오고 오버랩되어 겹겹이 쌓이는 슬픔들, 혹은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체화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을 지닌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보편적인 정서가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인간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피할 길 없이 끊임없이 줄타기를 계속 해야만 하는 존재들일 것이다. 이 ‘작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에디와 애너와 같은 이들에게는 그나마 ‘맨해튼 비치’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다른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애너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에디의 껌딱지 처럼 따라다니기를 좋아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어디를 가건 늘, 의식하지 않을 때조차 애너는 아버지의 손아귀에 자기 손을 밀어 넣었다.”(282) 그렇다. ‘코니아일랜드’를 이용해야했던 사람들 사이에는 무엇보다 이런 인간에 대한 신뢰감 혹은 유대감이 남아있었다. 이건 ‘맨해튼 비치’의 사람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소설의 마지막이 되는 배경은 대륙의 반대편, 캘리포니아에 있는 조선소 주변의 해변이다. ‘안개가 기억상실증처럼 온 도시를 집어삼키며’ 에디와 애너 부녀에게 다가 오고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애너는 에디의 손을 잡으며 “이리로 오네요”라고 말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 부녀 두 사람에게 안개처럼 다가오는 새로운 운명 앞에서 새로운 유대감이 형성되고 있음을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