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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0자 - 김인국 칼럼집 ㅣ 철수와 영희를 위한 사회 읽기 시리즈 1
김인국 지음 / 철수와영희 / 2019년 6월
평점 :
《2230자》
김인국 칼럼집 | [철수와영희]
단 하루라도 아무런 사건없이 평온한 날이 있을까. 오죽하면 천주교 신부가 날 선 글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비판하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230자》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일원인 김인국 신부가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국내 일간지에 기고한 서른세 편의 칼럼을 모은 책이다. 날카로운 비판보다 원색적인 비방과 공격이 난무하는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을 고려해볼 때, 김인국 신부의 칼럼에 주목하게 된다. ‘2230자’는 저자가 기고하는 칼럼에 대한 분량제한인 듯하다. 저자는 사회의 크나큰 이슈들에 대한 생각을 한정된 분량의 지면에 풀어 놓는다. 그의 목소리는 사회의 일반 구성원이자 시민의 입장에서 나오고 있다. 때로는 목소리를 높여 준엄하게 권력을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어두운 현실에서 희망을 전하고자 한다.
나는 그리 길지 않았던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요지경 세상을 체험했다. 신문에서만 보던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아마 오랜 시간을 사회 속에서 지낸 사람들은 사회의 부조리한 면들이 이미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졌을지 모르겠다. 백남기 농민을 ‘전문 시위꾼’이라 욕하던 회사의 임원도 있었고, ‘우리 나라가 일제 강점기 때 해방이 안되었으면 지금 더 잘 살았을 것’이란 말을 하여 나를 놀라게 했던 거래처 임원을 만나기도 했다. 또 어느 중소기업 업체 사장은 요새 젊은이들 중에 ‘빨갱이들이 너무 많다’라며, 자신의 아파트 매매가격이 15억 이하로 떨어졌다며 정부를 욕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때론 큰 기업의 하청업체의 입장에서, 때로는 또 다른 외주업체에 일을 맡기는 작은 회사의 회사원으로서, 좋은 환경에서 전문직으로 살았다면 접하기 힘든 값진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난 이런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과 합리적인 일처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일이 아닌 다른 문제에 관해서 이들은 어떻게 이런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회사생활을 하며 만났던 이들을 단순히 비난하기만 하는 일은 매우 쉽다. 하지만 언젠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장 쉬운 비난하기를 일단 접어두고, 이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생각과 주장을 하게 되었고, 나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판단이 선다면, 보다 긍정적인 변화를 미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는 이미 익숙해진 사실인 ‘언론의 글은 무엇보다 그 결론이 이미 정해진 상황에서 글이 쓰이거나 다듬어진다는 사실’을 염두해둔다면, 언론의 보도에 대해서도 좀더 비판적인 시각으로 검토해보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나는 앞서 예를 든 사람들의 ‘논리’에 대해 이를 비판하고 내 의견을 갖출만한 논리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 이 발견으로 나는 나에 좀더 알게 된 부분도 있다. 나라는 사람의 감정과 지적인 한계에 대해 깨닫게 되면 여기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2230자》을 읽어나갈 때, 사회의 부조리에 비판하는 사람이 필요한 이유를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된다. 일본사회의 상황을 예를 들어보아도 그 중요성을 바로 알 수 있다. 재일조선인 서경식 교수는 아베 정권과 여기에 동조하는 일부 세력이 기획하고 휘두르는 망동에 그동안 일본 사회내에서 비판기능이 상당히 약해져버렸음을 지속적으로 지적해왔다. 특히 90년대 이후 진보세력으로 자처하는 리버럴 세력의 붕괴현상으로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더욱 입지를 찾기 힘들어 졌다. 오늘날 아베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내는 일 자체가 힘든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아베를 비판하는 공무원은 상당수 퇴출되었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서경식 교수에 따르면 이 모든 결과의 근본원인으로 일본의 ‘식민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 그리고 이들과의 화해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점점 더 큰 거짓말을 하다가 이제는 걷잡을 수 없게 된 형국이다.
김인국 사제의 비판은 우리 사회의 민감한 부분을 곧바로 겨냥하고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머리글에서부터 “어차피 고운
말씨, 고운 말씀은 못 될
것입니다. 그래도 언제나 이 땅을
사랑하시고 이
땅의 형편때문에 자주 끙끙
앓으시는 하느님의 애끓는 심정이 어느 한구석 한 글자에라도 묻어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그의 글은 비판적이면서도 한 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럽기도 하다. 사랑을 전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떠올리기도 하며,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비판과 포용을 하는 모습도 읽게 된다. 우리의 삶이 부조리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름대로 만족’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만족도는 사회가 더 부조리하게 변해갈 때, 더 열악한 사회의 상황에 적응해갈 뿐이다. 당연해보이는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이유다. 그리고 《2230자》의 저자는 사회에 당연해보이는 일에 곧바로 목소리를 높여 의문을 던지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칼럼 하나에 담긴 저자의 모든 주장에 공감이 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보다 다양한 생각과 비판적 검토가 독자들 내부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칼럼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2230자》가 독자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한 글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사회의 해당 문제와 시간·공간적으로 멀어지기 시작할 때, 우리의 기억을 되살리고, 생각하게 하는데 그 역할이 있을 것 같다. ‘세월호 사건’도 우리 사회에 크나큰 충격과 경종을 주게된 사건이다. 그러나 사건의 배후에는 보다 거대한 어른들의 부조리가 함께 도사리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저자는 ‘이제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타박하는 이들에게 이를 계속 기억할 계기를 준다. 보다 근본적인 사회의 문제점들을 개선하고 바꾸기에 그 변화는 아직 느리기에, 김인국 사제가 사회에 던지는 경종은 더 소중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