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 탐서주의자 표정훈, 그림 속 책을 탐하다
표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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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남은 , 당신 곁의

 표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혼자 남은 , 당신 곁의 그림 속의 인물이 들고 있는 책이 무슨 책일까하는 궁금증에서 비롯되었다. 저자 표정훈은 2 권의 장서가 있는 자신의 서재에 혼자 남은 , 책이 그려진 화보집을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음직하다. 저자가 밝히고 있는 책의 방향에서 짐작할 있듯이, 독자는 저자의 궁금증을 따라가며 그림 속의 인물, 인물을 그린 화가를 둘러싼 다양하고 흥미로운 사람과 책의 이야기 만나게 된다. 책에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여러 그림이 등장하는데, 그림 속에는 언제나 책이 등장한다. 하지만 대개는 그림 속의 책이 어떤 책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대신 저자는 그림이 그려진 시기를 중심으로, 화가가 알고 있었을 법한 책이나 그림의 인물이 읽었을 법한 책의 제목을 다양하고 폭넓은 지식을 통해 추정해 내고 있다. 마치 셜록 홈즈가 것처럼, 그림 책이 어떤 책인지 추리해나가는 것이다.

 

혼자 남은 , 당신은 무엇을 것인가. 스마트 폰과 TV드라마의 맹공에도 살아남아 당신 곁에 있게 책을 펼쳐 보면 새로운 세상과 만난다. 책에 소개되어 있는 화가 윤덕희의 그림 <독서하는 여인>처럼, 온전한 휴식으로서의 독서도 가능하고, 독자의 정신을 벼리는 독서를 있겠다. 보기 시작하면 끝이 때까지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되는 드라마처럼, 다음에 읽게 책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책에 소개된 에피소드를 읽어나가면 좋겠다.

 


나를 위로하고 그대를 위로하다

 

혼자 남은 , 당신 곁의 에는 그림을 중심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중에서 화가 고흐가 그린 그림으로부터 시작해본다. 저자는 독서광 고흐에게 무엇보다 위로가 되었던 것은 소설이었다고 한다. 언젠가 고흐가 남긴 편지, 특히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노라면, 고흐가 마주했던  고난을 일부나마 엿볼 있었다. 특히 강한 자기애와 현실에서 비롯된 자기비하가 항상 맞물려 나타나는 고흐의 자의식을 발견할 때면, 자신의 일부를 보는 같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고흐의 곁에 소설 남아 그를 위로해주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던가. 책에 등장하는 고흐의 그림 <석고상, 장미꽃, 소설 권이 있는 정물>에는  제목이 적혀있는 권이 등장한다. 바로 기드 모파상의 소설 벨아미 콩쿠르 형제의 제르미니 라세르퇴였다. 대개의 그림에 책은 부수적인 정보를 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고흐가 그린 그림에는 권이 가운데에 배치해있고, 책의 제목이 명백히 기재되어 있다. 책들은 그만큼 고흐에게 의미있는 책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굳이 권이 책일까?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고, 가족의 배척을 받는 분위기에서 언제나 홀로 느낌을 받았을 법한 고흐에게 권의 소설이 무엇보다 그에게 위로가 되었법하다. 게다가 수수께끼같이 그림 속에 여인의 토로소 석고상과 장미꽃이라니. 저자 표정훈은 그림에 보이는 권의 책을 통한 상징성 읽어나간다. 석고상, 장미꽃, 소설 이란 , 생명과 죽음의 본능, 그리고 이야기 있을지 모른다”(164)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저자가 내세우는 상징성으로 파악해보는 방식보다 단순한 이해를 선호한다. 정보(책의 제목) 주어진 권이 그림의 가운데 배치되어 있다는 점으로, 소설이 화가에게 갖는 중요성을 생각해보는 일이다. 특히 소설에 어떤 공통점은 없을까를 생각해봄직하다. 저자가 소개해주고 있듯이, 소설은 여성의 지난한 삶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있을 같다. 공교롭게도 소설에는 남성들(특히 유혹하는 남성들) 의해 (벌거벗은 석고상처럼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낸채) 육체적 쾌락 충족의 대상으로 농락당하고 급기야는 외면 받는 여성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아마도 도덕적 감수성이 극도로 예민했던 고흐는 소설이나마 고통받는 여성들을 생각하며 장미를 놓아두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고흐가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와 비루한 현실의 살아낼 수밖에 없는 여인들을 연민하고 이들을 위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믿고 싶다. 바로 고흐 자신에게 위로를 소설의 여인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연민의 장미 꽃을 건네는 . 비록 그림 뿐이었지만, 무엇보다 진심을 담아 보내는 위로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책을 불태우다

 

책을 찬찬히 읽어나가다보면 놀라운 그림들을 많이 보게 된다. 특히 15세기 말에 그려진 페드로 베루게테의 그림 < 도미니크와 알비파> 보면서 동양의 진시황만 책을 불태운 것이 아님을 알게된다. 그림은 기득권을 가진 종교 세력에 의해 이단으로 지목된 교단의 서적을 파괴하고 제거하도록 이들을 불태우는 폭력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책을 파괴하거나 불태우는 행위는 문자를 읽어 있는 식자층의 사상을 통제하고 공포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사건에서도 농서 등을 제외하고 각종 서적을 불태웠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수백명의 유생들도 생매장 당했다고 하니, 이만저만한 폭력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책을 불태우는 일이 오래 전의 일만은 아니다. 20세기 들어 알려진 분서사건 또한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1933 5 10, 나치 독일이 광장에서 자행한 분서사건은 비독일적이라고 지정된 책들을 대상으로 했다. 저자에 따르면 마르크스를 비롯한 공산주의 계열의 도서, 하인리히 하이네, 에리히 케스트너, 하인리히만, 베르콜 브레히트 많은 독일 작가들의 책이 불에 타버렸다고 전한다. 여기서 나의 흥미를 것은 독일의 소설가 W. G. 제발트가 소설 이민자들(‘막스 페르버, 233) 사건을 보도한 독일 신문의 보도 사진이 나온다는 점이었다. 바로 사건 당일(5 10) 저녁,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 광장에서 비독일적으로 지정된 책들을 불태우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제발트는 사진이 조작된 것임을 소설 화자의 입으로 언급한다.  당시 책을 불태우던 시각이 저녁이었기 때문에 너무 어두워서 사건 현장의 모습을 제대로 찍을 없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전에 같은 광장에서 개최된 집회 행사의 사진에 거대한 연기기둥을 만들어 넣었다는 것이다. 제발트의 소설은 소설이기는 하지만, 소설에 사용된 사진과 사진의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제발트가 직접 주인공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수집한 사실에 입각하여 쓴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보도된 신문 사진은 조작된 것으로 판명난 사실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책을 불태우며 사상을 통제하는 행위에 더하여, 책에 등장하는 사진, 책의 내용이 독자를 얼마나 기만할 있는지 또한 보여주고 있다. 권력을 지닌 이들이 사람들을 분서 대변되는 가시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통제할 있음과 동시에 조작 거짓 내용을 유포하는 방법을 통해 비가시적이고 조용한 대중 통제 방법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어떤 매체인지 우리에게 존재를 드러내고 영향을 주는 방식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사례로 읽을 있겠다.

 


책장을 보면 사람을 있다

 

저자는 이광수의 무정나오는 경성학교 영어교사 이형식의 책장을 묘사한 대목을 인용한다. ‘새로 사온 책을 읽기로 유일한 벗을 삼는이형식은 독서가라는 칭찬을 듣고, 학생들의 존경 받는다. 이유가 책장에 정리되어 있는 어려운 영문 도서와 독문의 금박 입힌 도서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책장에 꽂힌 책을 통해 주인을 짐작할 있음 말하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도 견해에 공감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나아가 좀더 구체적으로 도서 주인의 욕망을 읽어 있다고 생각한다. ‘욕망이란 한편으로 결핍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예로, 연암 박지원 선생이 청나라를 다녀와 3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정리했던 열하일기에서 청나라를 방문한 조선 사대부들이 북경 책방거리 유리창에서 책을 사오는 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필사와 돌려보기 이외에 책을 자유롭게 구하기 힘든 시절, 나아가 모든 책을 국가에서 편찬하는 시스템을 유지했던 조선의 현실에서 유교 경전을 구하는 일은 전문 브로커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브로커 역할을 했던 이들이 청나라 사신 행렬을 따라갔던 상인들이나 사대부들이었다. 이들이 사신 행렬을 따라 사들여왔던 서적들로 사대부들은 자신의 서재를 자랑삼아 꾸미게 것이 유행이 것이다. 만약 조선 후기 사대부들이 만들어 놓은 서재를 살펴볼 있다면 우리는 서재의 책들을 통해 이들의 욕망과 결핍의 자의식 또한 읽어낼 있었을 것이다.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이유로, 나는 소박한 책장을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보여주기 민망함을 느끼곤 한다. 경우는 소장의 빈약함 때문이 아니라 내가 욕망하고 내가 결핍을 느끼는, 때로는 내가 열등감을 갖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타인에게 거침없이 읽히기 때문이다. 타인이 책장을 때면 나는 으레 꼭꼭 숨겨둔 나만의 속물근성과 숨겨둔 욕망을 들킬 것만 같아 부끄러운 것이다. 어떤 사람의 책장 전체를 유심히 있다면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읽어낼 있다는 저자의 말은 그래서 공감하게 된다.

 


책을 덮으며

 

  혼자 남은 , 당신 곁의 에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특히 화가 소포니소바 앙귀솔라나 샤틀레 후작 부인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자화상을 그리며 자신의 그림 속에 혼인하지 않은 처녀 자신이 그린 소포니소바 앙귀솔라라고 적어 넣은 화가를 상상해본다. 그리고 때가 1554년임을 상기해보라. 저자는 그림 속의 문구를 하나의 인간 선언으로 읽어내고 있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을 살다 여인은 글쓰고 책읽고 연주하고 그릴 아는 여성임을 당당하게 드러냈고, 자신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임을 선언했다.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세계관이 오히려 구식으로 느껴질 만큼 멋진 여성의 자취를 만났던 기회였다.

 

이것만이 아니다.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연인이자 후원자였으며 학문적 반려였던 샤틀레 후작 부인이 뉴턴의 프린키피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았다는 또한 눈여겨 볼만한 짜릿한 사례였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이 번역이란 언어의 치환 혹은 표현 대체하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원문 도서에 대한 내용을 읽고 이해하고 깊이 생각한 후에 덧붙일 있는 것이 주석이다. 사학자 박상익이 번역은 반역인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외국의 고전 문헌을 우리말로 옮기고 주석을 다는 행위가 대학원에서 학위로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을 떠올려 보게 된다. 국내의 학계가 제대로 번역 연구작업(주석 달기를 포함한) 대해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풍토가 계속 되는 우리 문화의 수준이 표피적인 수준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까 우려가 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샤틀레 후작 부인이 번역한 프린키피아  프랑스 학계에서 표준 프랑스어판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21세기에 사는 우리를 더욱 분발하게 해준다.        

    

책을 천천히 읽어나가며 책에 소개된 그림을 둘러싼 인물들(화가와 그림 인물) 그림 책이야기를 능숙하게 써내려가는 저자의 글쓰기에 상당히 매료되었다. 단순한 배경지식과 정보들을 모으는 것만으로 내놓기 힘든 결과물이다. 그림 점마다 화가와 대상의 삶과 당대의 현실이 교직하는 지점을 저자는 날카롭고 흥미롭게 찾아내고 고찰한다. 여기에 저자의 경험과 깨닳음이 더해져 앎의 기쁨과 지혜를 독자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저자가 자신의 장서가 있는 서재에 혼자 남아 현실과 거리를 내면을 성찰하는 관조의 순간 상상해보게 된다.




밤이다.
구석방에 홀로 있다.
그런 당신 곁에 책이 있다.
혼자이되 외롭지 않으리라. - P5

"노년의 가낭 큰 어리석음은 젊은이들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어리석음이다." - P40

"그림 읽기와 소설 읽기는 시선의 놀이다." - P52

"그녀의 어떤 성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녀의 다른 성품에 기뻐할 것이라"
- <코란>(무슬림이 수집한 하디스, no. 1469) - P127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 그것을 피하거나 무시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정면으로 마주하며 숙달하고 정통해야, 즉 무언가를 ‘마스터해야‘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지며 나아가 새로운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창조할 수 있다. 아무나 스타일을 창조할 수 없듯이, 아무나 책을 찢을 수 없다." - P207

"독서는 세상과 타인을 좀 더 깊이 넓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지만, 그것의 가장 깊은 차원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 독서는 곧 자기 성찰이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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