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제 - 전쟁과 대운하에 미친 중국 최악의 폭군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전혜선 옮김 / 역사비평사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그저 너무 재밌다는 말 밖에는...

어쩜 이렇게도 재미난 평전을 쓸 수가 있는지.

보통 평전은 너무 세밀하게 한 인물을 파고 들어 지루하던데, 정말 이 책은 지루할 틈이 없다.

저자가 쓴 <옹정제>도 곧 읽어볼 생각이다.

전작 <중국통사>도 중국 역사 수천 년을 한 권의 책으로 짜임새 있게 압축하여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 책은 마치 한 권의 소설처럼 흡입력이 뛰어나다.

수양제는 망국의 군주로만 알고 있었는데 통일을 이룬 아버지의 업적을 이어가지 못하고 구체제에 머물러 결국 나라를 잃어버린 유약한 인간이었던 듯하다.

저자의 냉정한 비판에 따르면 수문제 역시 당나라처럼 새로운 시대을 열기에는 여전히 구체제적인 인물이었다고 본다.

그러고 보면 당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 놓은 이세민의 능력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북위부터 시작해 북주, 수당까지 이어져 온 무천진 군벌들에 대해서도 개념을 파악하게 됐다.

남북조 시대는 일종의 계엄령 사회로 오직 천자 한 사람에게 전권이 쥐어졌기 때문에 상상하기 힘든 음행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졌고, 중세 송나라 때와는 달리 천자의 존엄성이 절대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누구나 실력이 있으면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다.

왕조가 겨우 50여 년 단위로 바뀌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였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의 청화자기
마시구이 지음, 김재열 옮김 / 학연문화사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책에서 인용한 것을 보고 책바다을 통해 빌리게 됐다.

제목만큼이나 어렵고 지루해 보여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흥미롭게 읽었다.

중국 번역서인 모양인데 익숙하지 않은 한자어가 많고 무엇보다 도판 상태가 안 좋아 제대로 감상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책은 도판이 매우 중요한데, 중국 청화자기의 아름다운 색감을 제대로 보여주질 못한다.

전공자들이 보는 수준이라 어려운 부분은 건너 뛰면서 읽었다.

당송 시대부터 시작된 청화자기는 원대에 성숙했고 명청대 만개하여 오늘날까지 아름다움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원대 대표적인 가마인 용천요의 청자들이 신안 해저선에서 발굴된 이야기도 나온다.

중국의 청화자기들을 보자면, 너무나 문양이 화려하고 빡빡하고 장식적이라 고려나 조선의 단아한 미감과 매우 다른 느낌이고 그래서인지 다소 어색하다.

인공미가 강하다고 해야 할까?

유럽의 화려한 도자기와는 또다른 미감으로 단지 청색과 백색만 가지고도 이렇게 장식적인 자기를 만드나 감탄스럽기는 하다.

송나라 때부터 자기를 수출하기 시작해 원대에는 시박사 등을 운영하면서 도자기 수출로 많은 돈을 벌었고 명청대에는 아예 맞춤형으로 수출용 자기를 만들었다.

아랍 쪽에서 주문을 많이 해 아랍어가 새겨진 청화자기도 서아시아에서 많이 발견된다.

확실히 중국은 쇄국정책을 편 조선과는 다른 세계였던 듯하다.



<인상깊은 구절>

26p

"당송 청화자기는 민요에서 구운 것이 많으며, 청화자기의 초급 생산단계이다. 아직 성숙되지 않아, 소성온도는 비록 1000도 이상이지만, 태질이 치밀도가 낮아 기공계수와 흡수율이 모두 원명 자기보다 크다. 조형은 정연하지 못하고, 유면은 현저히 거칠며, 투명도가 낮다."

 원명 시대의 성숙한 청화자기의 제작수준에 비해 아직 일정한 거리가 있다. 이 때문에, 청화자기는 당송에서 싹이 터서, 원대에 성숙하고, 명청에 성행하며, 지금까지 오랫동안 전해져 쇠퇴하지 않아, 중국에서 가장 민족적인 특색을 가진 자기가 되었으며, 국내외에 그 영예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0p

부량자국은 전문적으로 제왕을 위해, 관부가 자기번조를 관리하는 기관으로 이의 설립은 경덕진 자업의 향상과 발전을 일으키는데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하였으며, 또한 원대 통치자가 자업을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동시에 원 조정은 일정한 기능을 갖춘 장인들을 보다 중시하여, 관공장은 기타 일체의 차역에서 면제하고 그 직업을 세습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또한 객관적으로 수공업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셋째, 원 조정은 대외 무역을 중시하고 힘써 제창하여, 각종 수공업의 향상과 발전을 대대적으로 자극하여 추진하였다. 제자업은 일찍이 원조 이전에 이미 서역의 아라비아 국가와 무역 왕래가 있었다. 원이 전국을 통일한 후에, 정부는 대외무역을 강화하는데, 기본적으로 송의 제도를 따랐다.

 지원 14년(1277)에, 또 천주에 시박사를 설치하고 대외 무역의 관리를 강화하였다. 대외무역의 흥성발달은 의심할 바 없이 전국, 특히 이미 광대한 시장 제자업을 가진 경덕진에게는, 매우 커다란 촉진과 추진 작용을 일으켰다. 

53p

이런 대반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지역의 이슬람문화의 음식습관과 관계가 있는데, 통상 음식물을 대반에 담아 두고 여러 사람이 땅이나 탁자에 둘러앉아 공동으로 음식을 드는데 사용된다. 현존하는 전형적인 원 청화자기 중에 대반의 수량이 가장 많아, 국외 소장이 백점을 넘고, 국내는 단지 수점이 있다. 이는 이런 대반이 주로 이슬람지역에 수출하기 위해 생산된 것임을 말해 준다. 

203p

선덕 청화자기의 문양 중에, 일부 상당히 서아시아적 풍격을 가진 것이 있다. 이런 문양은 명대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으로, 응당 명초에 중동 제국과 왕래가 빈번하고 문화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예컨대 어루존의 사격문, 서등의 화훼문 등등이, 모두 이슬람 지역의 금은기나 도기에 상견되는 문양이다.

262p

정덕 청화자기의 문양 방면의 두드러진 특징은,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아랍문이나 페르시아문으로 만든 도안들이다. 정덕 청화자기상에 아랍문이나 페르시아문을 쓴 것은 당시 이슬람교가 성행한 것, 특히 정덕황제 본인이 이슬람 풍속을 숭상하고 그의 비와 자식들도 이슬람교를 신봉한 것과 밀접한 관계 있다. 이들 아랍문이나 페르시아문의 내용은 주로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와 알라신을 찬송하고, '코란' 속의 교의나 도자기의 용도를 설명한 것이다.

334p

둘째, 청대의 제왕, 특히 강희,옹정,건륭 3제는 모두 비교적 자기를 애호하였다. 강희 본인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중시하여, 저명한 법랑채 품종이 바로 강희시에 국외 채료를 도입하여 창소한 것으로, 분채의 대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옹정은 더욱 자기를 중시하여 제자공장들에게 중상(거액의 보너스나 상품)을 수여하는 방법을 채용하여, 자기질의 향상을 촉진시켰다. 건륭은 각종 공예품을 애호하여, 거의 광적인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들 모두가 관요자기의 생산을 신속하게 발전시켰다.

 셋째, 청초에 어요창을 회복하고, 감독관을 파견하여 감조와 관리를 하게 하고, '관탑민소(관부에서 민요에 하청을 주어 제작시킴)' 방법을 추진하여 민요 생산의 발전을 꾀하였다. 신품종과 신기술이 끊임없이 생겨났으며, 고품질의 제품이 더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넷째, 청대 국외 수출자기의 수량이 거대해졌으며, 당시의 수출자기는 외국에서 지정한 기형, 문양, 유색, 채색에 맞추어 제작되었다. 더불어 국내 자업시장이 날로 확대되어, 민요제작기술의 향상을 크게 촉진시켰으며, 자업생산 요인이 진일보하였다. 

404p

함풍, 동치, 광서, 선통 이 4조는 제국주의의 침입과 내란이 빈번한 세월을 보내면서 사회경제의 상황이 갈수록 나빠져, 경덕진 관요자기의 생산은 쇠락의 경지에 처하였다. 민요 역시 대량 생산하지만, 다수가 조잡한 편이다. 다만 동치, 광서 양조에서 자희태후가 귀족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사치가 극에 다다른 생활을 만족시키기 위해 원가를 아끼지 않고 자기번조에 힘을 쏟아, 크게 중흥의 기세가 있었으며, 관요생산이 진일보 발전하였다. 특히 광서의 관요기는, 품종과 수량을 막론하고, 만청 각조에서 번조한 관요자기 중에 수위를 차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제 왕도 익산, 그 미완의 꿈 - 무왕과 왕궁리, 선화공주와 미륵사
이병호 지음 / 책과함께 / 2019년 8월
평점 :
절판


저자의 전작, <내가 사랑한 백제>를 재밌게 읽어서 기대를 많이 하고 본 책이다.

제목이 좀 구태의연한 느낌이지만 표지 디자인은 괜찮고 문장력도 나쁘지 않아 백제 수도 익산의 발굴 과정에 대해 어느 정도 윤곽을 파악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학예사라는 직업 때문인지 학자들처럼 논증 보다는 실제적인 발굴 과정에 초점을 맞춘 점이 특이하다.

무왕은 정말 익산으로 천도를 하였는가?

실제 천도했다는 기록은 <관세음응험기>라는 중국 책에 한 줄 나온 게 전부라고 한다.

역사서에는 천도 얘기가 없으니, 저자가 말미에 설명한 대로 정조가 화성에 아버지의 묘를 옮기고 성곽을 구축했던 것처럼 제2의 수도로 생각했을 것 같기도 하다.

41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동안에도 천도했다는 기록은 없으니 익산을 정조 시대 화성 정도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선화공주 설화의 사실 여부, 또 하나는 익산 쌍릉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이다.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가 발원해 세웠다는 미륵사지에서 서탑 해체 과정 중 사리봉양기가 나왔는데 금자로 명백히 사택왕후가 건립했다고 쓰여 있다.

이 절이 특이하게 3금당 3탑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서탑은 사택왕후가 세웠더라도 동탑과 중탑은 삼국유사에 나온대로 선화공주가 세웠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무왕의 재위 기간이 41년에 달하고 고대에는 왕비가 둘인 경우도 종종 있으니 사택왕후 외에 다른 왕비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바는, 저자 역시 선화공주 설을 부인하고 나 역시 설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미륵사지 사리봉양기가 출토되기 전에도 역사서에 진평왕의 셋째 딸이 백제 무왕에게 시집갔다는 중차대한 사건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설화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명백히 증거도 나온 만큼 선화공주는 허구의 인물이라고 여겨진다.

전에 읽은 책에서는 선화라는 이름 자체가 불교식 용어로 실존 인물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했다.


두 번째 주제는 쌍릉의 피장자 문제다.

솔직히 익산에 쌍릉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대왕묘와 소왕묘가 있는데 이미 고려시대에 도굴돼서 일제가 조사했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덤이었다고 한다.

참 희안한 게 왜 묘지석을 매장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앞선 시대의 무녕왕릉 역시 묘지석이 있어 무녕왕의 생몰연대와 이름까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묘지석은 기본적으로 넣는 부장품일텐데 설마 묘지석까지 다 훔쳐간 것일까?

묘지석은 그저 돌에 불과하니 무겁기만 할 뿐 돈도 안 될텐데 왜 사라진 것인지 궁금하다.

소왕묘에는 묘지석이 있긴 하지만 아무 글자도 쓰여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큰 왕릉급 고분을 만들면서 묘주의 생애에 대해 간단히 기록해 두면 참 좋았을텐데 너무 아쉽다.

다행히 대왕묘에서 100여 점의 인골이 발견되어 검사 결과 50대 이상 남성의 뼈라는 것이 밝혀져 무왕의 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단순히 인골의 추정 나이만 가지고 무왕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소왕묘에는 그마저도 없는데, 소량 남은 공예품의 양식으로 봤을 때 소왕묘가 대왕묘 보다 먼저 만들어졌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소왕묘는 혹시 먼저 죽은 선화공주의 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운을 남긴다.

사택왕후는 무왕보다 늦게 사망했기 때문에 그 전에 먼저 죽은 왕비의 묘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둘 다 확실한 명문이 없기 때문에 그저 추정에 불과하다는 점이 아쉽다.


익산이 백제 때 이렇게 중요한 곳이었는지 처음 알았다.

하긴 마을 이름부터가 왕궁리니 뭔가 왕도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하다.

고조선 때 준왕도 위만에게 패해 바닷길을 타고 내려와 익산에 정착해 마한을 세웠다고 한다.

이 부분도 조선시대 쓰여진 문헌기록만 있을 뿐 실제 고고학적 증거가 확실한지는 의문이긴 하다.

어쨌든 저자의 표현대로 익산은 경주, 공주, 부여와 더불어 4대 고도 중 하나이니 좀더 연구되고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인상깊은 구절>

208p

한눈에도 서역풍으로 느껴지는 쇼소인 유물에 대해 일본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서역 페르시아 계통의 유물이 실크로드 교류를 통해 중국에 유입된 뒤 일본에 직접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유리잔의 손잡이에 해당하는 금속받침 부분에 베풀어진 소라고둥 문양의 장식과 당초문 및 어자문이 미륵사지 금동제외호 문양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이를 근거로, 쇼소인 유리잔은 중국에서 일본에 전래된 물건이 아니라 백제에서 제작되어 일본에 선물로 보낸 것이 오늘날까지 남겨진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백제와 일본 왕실 사이 밀접한 친분 관계를 고려할 때 백제에서 제작한 다수의 공예품이 일본에 선물로 보내졌고, 특히 백제 멸망 이후 다수의 백제 왕족과 장인들이 일본에 건너간 점을 감안해보면 이 쇼소인 유리잔 역시 백제에서 가공되어 일본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12p

고대 한반도에서는 진주가 생산되지 않았다. 당시 진주의 주요 생산지는 동남아시아의 베트남과 서역의 페르시아였다. 베트남 지역은 중국 강남 지역에서 광동성 방향으로 해로를 타고 쉽게 내려갈 수 있는 곳이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미륵사지에서 나온 다량의 진주는 백제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지역 사이 교류를 보여주는 자료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225p

선화공주의 존재를 긍정하는 연구자 중에는 사리봉영기가 미륵사지 서탑에서 나온 것에 주목해, 사택왕후는 서원의 창건만 발원했고 미륵사 3원의 발원자가 각기 달랐을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견해 역시 부정되는데, 사리봉영기에는 분명 "造立伽藍' 이라고 해서 가람 전체를 건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만큼 사택왕후가 미륵사 가람 전체를 발원해 건립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반박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동서 양탑에 관한 중수 기록이 남아 있는 불국사가 미륵사지의 비교 사례로 제시된다. 이 기록들에 따르면, 두 탑 모두 김대성이 주도해 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건립된 것으로 나온다. 미륵사의 삼원병렬식 가람 역시 불국사처럼 한 사람이 발원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화공주의 실체를 부정하는 이러한 입장은 사리봉영기 발견 이후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견해라 할 수 있다.

231p

서동설화는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무왕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비범한 인물로 표현하고 성스럽게 만들기 위해 기존의 구전설화를 차용해 무왕 개인의 이야기로 정착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설화를 무왕 개인의 이야기로 정착시킨 집단이나 지역 즉 설화의 생성자와 향유자는 어디의 누구였을까. 밤손님 설화가 옛 백제 영역권 내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연구가 이에 참고된다. 또 서동설화가 백제 특히 익산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이야기라는 것은 사료에 기록된 대로다.

 익산에 이런 설화가 남게 된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익산이 접경지대에 위치한 '위태로운 변경'으로 표현되듯 군사적,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전쟁의 종식과 평화의 도래를 바라는 익산민의 열망에서 비롯했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백제와 신라 두 적대적 왕실의 혼인을 통한 국가 평화의 실현은 신라와의 진출입로에 자리한 전략적 요충지에 살고 있던 익산 지역 민중들이 상상해서 만들어낸 평화를 위한 전략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무왕 대 백제는 신라와 모두 13차례 전쟁을 벌일 정도로 관계가 좋지 않았다. 따라서 민간에 널리 퍼져 있던 설화의 주인공인 셋째 딸을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로 대치해 백제와 신라 사이 해묵은 갈등을 해소하려는 양국 민중의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의 극한적 대치 속에서 양국이 신랑과 각시, 각시와 신랑처럼 금슬 좋은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양국 민중의 간절한 꿈과 소망이 서동설화로 남겨졌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242p

미륵사지의 경우 중원과 서원과 동원의 조영 순서에 약간의 시기차가 있다고 해도, 이들 3원은 일정한 배치 계획을 가지고 조영된 만큼 건립 초기부터 이미 일관된 기획안이 마련된 상태에서 공사가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미륵사지 3원이 약간의 시기차를 두고서 순처적으로 조영되었다고 해도 이를 반드시 발원자의 차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295p

최근에는 익산의 전략적 거점이나 군사적 중요성이 강조된다. 무왕 대 백제의 최대 현안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신라 지역으로 진출하는 전략적 거점지상 중요했던 익산이 개발되었다는 견해들이다. 그리고 무왕이 신라와의 대규모 전투를 치르기 위해 익산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 왕궁을 건설하고, 부처님의 힘을 빌려 신라를 제압하기위해 미륵사를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익산이 신라와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위태로운 변경'이었던지라 이곳에 의도적으로 거대한 사원이나 국가시설을 건립해 국가의 권위를 과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익산 개발 배경을 설명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익산이 만경강과 금강을 통해 서해로 나가는 수로 교통의 요지라는 점이다. 그래서 익산은 청동기시대 이래 마한과 백제의 우수한 문화가 다른 곳보다 먼저 유입되는 지역이 될 수 있었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었다.

 익산은 또한 금강이나 만경강의 수로를 활용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에 입지하고, 신라나 왜의 사신들이 부여로 들어갈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중요한 길목이기도 했다. 백제의 익산과 금강 또는 부여 사이의 관계는 신라의 경주와 울산항 사이 관계, 일본의 아스카와 나니와쓰 사이 관계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 지역들은 외국의 사신이 오거나 물자가 수도로 유입되기 직전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 항구이자 무역항이었다.

 그런데 익산의 경우는, 이 지역들과 달리, 왕궁리 일대에서 특이하게도 대규모 왕실 공방이 운영되고 있었다. 공방에서 생산된 고가의 물품들은 당시 백제의 수도인 부여나 지방뿐 아니라 외국으로도 유통되었을 것이다. 익산에 마련된 국가시설들은 이러한 물류를 지원하고 국가적 의례가 이루어지는 장으로서 백제의 위용을 과시하는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무왕의 익산 개발 과정은 조선 정조의 화성 개발 과정과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익산은 6세기 말~7세기 초 새로 개발된 지역으로 대왕묘와 소왕묘가 조영되었고, 화성은 18세기 최고의 건축 기술이 집적된 신도시로 융릉과 건릉이 조영되었다. 사비기 백제의 최고 기술이 집적된 익산의 위상을 고대사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생각할 때 조선시대 화성의 사례를 반드시 함께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제와 영산강
성정용 외 지음 / 학연문화사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에 너무 호기심이 생겨 책바다를 통해 빌려 읽었다.

책들이 생각보다 금방 절판되는 것 같아 놀랬다.

책의 주제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제목이다.

백제가 언제부터 영산강 유역을 실제로 지배하였는가, 가 이 책의 주제이다.

3국 시대에 가야까지 넣어야 한다는 말은 가끔 들었는데 마한의 존재는 처음 알게 됐다.

책의 저자 중 한 분은 마한까지 넣어 5국 시대라고 부르자고도 했다.

그렇지만 또다른 저자의 주장대로, 나라 이름이 없어졌으니 신라, 백제, 고구려라는 3국 시대에 끼워 넣기는 어려울 것 같다.

가야 역시 완벽한 고대 국가라기 보다는 여러 소국들이 모인 연맹체 같아서 3국과는 그 위상이 다른 듯하다.

마한 역시 54개의 소국이 모인 마한연맹체이므로 마한이라는 국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마저도 369년 근초고왕의 남정 이후 역사책에 더이상 국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노중국 교수는 이런 이유로 백제가 4세기 후반부터 직접 지배를 하였다고 주장하고, 그 외 다른 학자들은 토기나 고분, 취락 같은 물질적 증거를 바탕으로 6세기는 되서야 지방관을 파견하는 직접 지배가 실시됐다고 한다.

610년에 쓰여진 목간의 발견으로 7세기 때는 확실하게 영산강 유역을 지배했음이 문서로써 드러난다.

백제가 망한 게 660년인데 겨우 그 때서야 전남 지역을 완전하게 지배했다니, 알고 있는 상식과 달라 충격적이다.

드라마 <근초고왕>을 너무 재밌게 봐서 이 책의 내용이 더더욱 흥미로웠다.

중원을 공격한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들도 있었지만 고구려의 남진이나 백제의 마한 공격 등은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졌던 듯하다.

드라마에서도 침미다례가 끝까지 반항하여 전원을 몰살시켰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역사서에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남정의 기록도 우리 역사책이 아닌 <일본서기>에 쓰여 있다고 하니 문헌자료 부족이 너무나 아쉽다.

아무리 고고학적인 유물, 유적이 있어도 문헌자료가 없으면 송국리 유적, 이런 식으로 밖에 부를 수 없다는 말이다.

왜 계통의 전방후원분에 대해서는, 일본의 정치적 지배라기 보다, 무역 쪽의 교류가 활발했다고 설명하고 넘어가서 이 부분에 대해 더 알고 싶다.

어쨌든 영산강 유역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해 왔고 결국은 백제에 흡수됐던 듯하다.

고향이 광주라서 가끔 국도를 지날 때 거대한 고분들을 볼 때가 있었는데, 바로 반남 고분군 같은 유적이었던 모양이다.

마한의 흔적들이라니 새삼 신기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명의 세계사 - 성과 이름의 역사를 찾아 세계일주!
쓰지하라 야스오 지음, 김미선 옮김 / 창조문화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200 페이지 정도의 얇은 책인데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서양의 성을 주로 밝히는 책이라 다소 지루했다.

뒷부분에 중국과 한반도에 성이 정착하는 과정은 흥미롭게 읽었다.

확실히 일본 사람들은 서양의 전통이나 문화, 관습 등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듯하다.

일본인이 서양의 인명사를 이렇게 세세하게 밝히나, 신기하다.

성과 개인명으로 이뤄진 성명 체제는 너무나 당연한 양식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착한지 얼마 안 된 형태라고 한다.

특히 아직도 이슬람이나 버마, 말레이시아, 태평양의 섬 등에서는 따로 성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성이란 가족의 혈통을 밝히는 것이므로 씨족 중심으로 모여 살던 전통사회에서는 굳이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가문이 중요했던 상류층 외에 정치적 활동을 할 필요가 전혀 없는 농민들은 굳이 성을 표시할 필요없이 개인명만으로 구분이 가고, 가문이라는 개념 자체도 희박했을 듯하다.

마을 공동체 내에서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누구의 아들이라는 부칭이 흔하게 쓰였다.

오늘날 서양 이름의 미들 네임에 부칭이 많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강력하게 인민을 통제해 온 중앙집권제를 추구한 중국에서만 기원전부터 성명을 써 왔다.

한반도에서는 중국과 교류하면서 성명제를 받아들였는데 성이 널리 퍼진 것은 유교 문화가 정착된 고려시대부터라고 한다.

결혼하면 남편성으로 바꾸는 서양과는 달리 여자가 본인의 성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우리나라의 여권이 높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전혀 관련이 없다.

동아시아에서 부부별성제를 유지한 것은 대를 이어야 한다는 관념과, 동성동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혹시라도 세대가 넘어가면서 같은 혈족과 혼인하게 될까 봐 결혼 후에도 친정 姓 을 유지했다고 한다

서양이나 중동 지역에서는 사촌끼리의 혼인도 흔할 걸 보면 동성동본 혼인을 터부시하는 것도 독특한 문화라는 생각이 든다.



<인상깊은 구절>

16p

서양에서는 개인명(세례명)을 우선으로 하고 그 다음에 성(가명)을 붙인다. 왜냐하면 성이 세례명의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는 발상이 뿌리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가명을 중시해 '성.개인명' 순으로 이름을 지었던 동아시아의 문화권과 대조를 이룬다. 동아시아는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상을 모시는 전통적인 가문으로 되돌아가려는 의식이 강했다.

 성을 만드는 관습은 예루살렘 성지의 십자군 원정의 귀도에 따라 이탈리아부터 프랑스, 영국, 독일 등으로 서서히 보급되었는데 모두 상위계급만 사용하였으며 하위계급으로 퍼지기까지는 아직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도 세례명만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장기간에 걸쳐 애칭과 별명을 불렀으며 어쩌다 그것이 성으로 승격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33p

유교정신을 살아 있는 규범으로 삼아온 중국과 한국, 근세 일본을 보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과거 천 년 이상 부부별성을 원칙으로 하고 결혼을 해도 아내는 친정의 성을 그대로 따랐다. 혈통을 명시하여 대가 끊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고대 중국 등 동아시아의 일부를 제외한 성의 역사는 겨우 수백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성이 없었던 민족에게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69p

이 지역에서는 부칭사 대신 고유명사 앞에 '~출신' '~근처', '~저편'과 같은 전치사를 붙이는 어형이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독일어의 von 과 네덜란드어 van, 프랑스어 de 는 출신 지역을 나타낸다. 이것은 원래 귀족과 중세영주가 광대한 장원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관명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떨치기 위해 다투어 차지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76p

현재는 길고 긴 부칭을 사용하는 관습은 사라지고 보통 세례명과 성만 사용한다. 성의 일부에 네덜란드어 van~과 프랑스어 de~ 에 해당하는 '~출신의'를 나타내는 전치사 da- 또는 라틴어 de- 를 붙이는 관습이 남아있다.

139p

헤이안 중기 이후, 본적지에서 사람들이 잇달아 실종되고 법령 제도가 약화됨으로써 호적을 작성하지 않게 되자 대대로 성을 물려주는 습관이 차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유재산이 없는 빈농층은 이름만 가지고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 불편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자신의 출신이나 성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결국 성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무가와 공가 등 상류계급은 출신이나 가문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성 관습을 더더욱 강조했으며 오늘날 성의 원형은 무로마치시대 중엽에 모두 만들어졌다고 한다.

144p

신을 중심으로 개인적인 평등을 존중해 온 그리스도교 문화권과는 달리 유교문화권에서는 <논어>를 기초로 한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조상과 혈통을 중요시한다. 게다가 임금과 가부장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완고한 혈연관계와 가족중심사회 이루어왔다.

 일족의 유대를 나타내는 성이 개인명보다 더 중요시해야 하는 존재로 비춰진 것도 어쩌면 자연적인 현상일 것이다. 이와 같은 유교사상과 한자문화의 영향을 받은 한국, 일본, 베트남, 캄보디아 등(특별한 예로 헝가리)에서는 성, 이름 순으로 표기한다.

 옛날부터 유교정신을 중요시하여 선조의 가명과 가계를 대대로 이어 내려왔기 때문에 부부별성문화가 중국에서 정착하게 된 것이다. 혼인으로 아내의 성이 사라진다면 언젠가는 동성불혼에 저촉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인구가 급증했던 기원전 3세기의 전국시대말경부터 성과 씨의 구별이 모호해지기 시작하면서 秦조 이후는 가명과 성이 단일화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가족단위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전한시대 초기부터 차츰 평민도 성을 가지는 관습이 생겨났고 기원전 1세기에는 모든 한인이 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평민에게 주어진 성은 장, 왕, 이, 조, 유의 대성이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이 이후에 만들어지는 성은 거의 없었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성이 이 시대에 정착했다고 할 수 있다.

149p

한족의 중국과 만주지방의 수렵민 등은 선사시대부터 한반도를 왕래하면서 다양한 문물을 교류했다. 중국은 기원전 108년, 위만왕조(고조선)를 멸망시킨 전한의 무제가 낙랑군 등 4군을 설치하면서 한반도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후 한자문화와 유교사상을 기초로 하는 관습을 통해 중국의 성명문화가 한국에 서서히 침투하기 시작했다. 세 개의 한자로 된 중국식 성명표기는 4~7세기의 삼국시대에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적어도 지배층 이외의 백성들은 7세기 후반 통일신라가 생기기까지 성이 없었을 것이다. 그 전에는 계백, 소회, 영랑과 같이 개인명을 한자로 음역하는 방법을 따랐다.

 936년, 통일국가가 된 고려는 국가 조직을 빠르게 정비하기 위해 유교를 기초로 한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며 평민의 이름에도 한 글자로 된 한자 성과 두 글자의 이름으로 된 중국식 성명양식을 따르도록 했다.

 유교를 국교로 정한 조선시대에는 1485년 호적대장에 해당하는 <경국대전>을 실시하면서 성명을 의무적으로 기장하도록 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성명제도를 확립했다.

151p

한국은 대부분 중국인의 성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성만으로 중국계와 한국계를 구별하기 힘들다. 성명구성은 중국형식을 받아들였지만 인명은 민족고유의 방식을 고집했던 일본과는 큰 차이가 있다.

 다만 박씨 성은 한족에 드물기 때문에 민족색깔이 묻어난 한국 고유의 성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건국신화에서 시작된다.

 박씨 성은 신라의 시조 혁거세에서 유래된다.

174p

건조지대인 중동지역 주민 대부분은 예로부터 유목생활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들은 공동체사회에서 정착을 전제로 한 농경민과 달리 특정지역에 뿌리를 내리지 않기 때문에 독창성의 기준을 '혈족'에 두었다. 아울러 가혹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는 지혜와 강한 지도성을 발휘하는 가부장을 선출하고 부계혈족을 중시하는 가부장적 씨족제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의 인명표기는 일족과 씨족의 혈통서라고 할 수 있는 계보적인 구성을 띠고 있다.

192p

원칙적으로 이 지역은 성이 없다. 따라서 가계를 명백히 밝히려면 '아무개의 아들'이라는 부칭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는데 부칭은 차츰 고정화되어 최근에는 세습제 가명으로 그 형태가 바뀌는 추세다. 멜라네시아와 폴리네시아의 일부에서는 실명을 밝히기를 꺼려하며 '아무개의 아버지'로 부르는 테크노니미 관습이 아직도 뿌리깊이 박혀 있다. 테크노니미(친족용어)를 사용할 수 없는 어린이나 미혼자는 보통 별명을 부르는데 대부분 태어날 때의 사건이나 외견, 용모, 버릇, 직업 등에서 유래한다. 단 아이를 가지게 되는 것과 동시에 별명을 부르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며 테크노니미로 불리면서 처음으로 성인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개인명은 전도사의 선교활동과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성인명과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명에서 따오는 사례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유럽언어의 발음과 거리가 멀고 원어민의 발음이 바뀌는 경우가 많아 원형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