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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청화자기
마시구이 지음, 김재열 옮김 / 학연문화사 / 2014년 9월
평점 :
어떤 책에서 인용한 것을 보고 책바다을 통해 빌리게 됐다.
제목만큼이나 어렵고 지루해 보여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흥미롭게 읽었다.
중국 번역서인 모양인데 익숙하지 않은 한자어가 많고 무엇보다 도판 상태가 안 좋아 제대로 감상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책은 도판이 매우 중요한데, 중국 청화자기의 아름다운 색감을 제대로 보여주질 못한다.
전공자들이 보는 수준이라 어려운 부분은 건너 뛰면서 읽었다.
당송 시대부터 시작된 청화자기는 원대에 성숙했고 명청대 만개하여 오늘날까지 아름다움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원대 대표적인 가마인 용천요의 청자들이 신안 해저선에서 발굴된 이야기도 나온다.
중국의 청화자기들을 보자면, 너무나 문양이 화려하고 빡빡하고 장식적이라 고려나 조선의 단아한 미감과 매우 다른 느낌이고 그래서인지 다소 어색하다.
인공미가 강하다고 해야 할까?
유럽의 화려한 도자기와는 또다른 미감으로 단지 청색과 백색만 가지고도 이렇게 장식적인 자기를 만드나 감탄스럽기는 하다.
송나라 때부터 자기를 수출하기 시작해 원대에는 시박사 등을 운영하면서 도자기 수출로 많은 돈을 벌었고 명청대에는 아예 맞춤형으로 수출용 자기를 만들었다.
아랍 쪽에서 주문을 많이 해 아랍어가 새겨진 청화자기도 서아시아에서 많이 발견된다.
확실히 중국은 쇄국정책을 편 조선과는 다른 세계였던 듯하다.
<인상깊은 구절>
26p
"당송 청화자기는 민요에서 구운 것이 많으며, 청화자기의 초급 생산단계이다. 아직 성숙되지 않아, 소성온도는 비록 1000도 이상이지만, 태질이 치밀도가 낮아 기공계수와 흡수율이 모두 원명 자기보다 크다. 조형은 정연하지 못하고, 유면은 현저히 거칠며, 투명도가 낮다."
원명 시대의 성숙한 청화자기의 제작수준에 비해 아직 일정한 거리가 있다. 이 때문에, 청화자기는 당송에서 싹이 터서, 원대에 성숙하고, 명청에 성행하며, 지금까지 오랫동안 전해져 쇠퇴하지 않아, 중국에서 가장 민족적인 특색을 가진 자기가 되었으며, 국내외에 그 영예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0p
부량자국은 전문적으로 제왕을 위해, 관부가 자기번조를 관리하는 기관으로 이의 설립은 경덕진 자업의 향상과 발전을 일으키는데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하였으며, 또한 원대 통치자가 자업을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동시에 원 조정은 일정한 기능을 갖춘 장인들을 보다 중시하여, 관공장은 기타 일체의 차역에서 면제하고 그 직업을 세습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또한 객관적으로 수공업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셋째, 원 조정은 대외 무역을 중시하고 힘써 제창하여, 각종 수공업의 향상과 발전을 대대적으로 자극하여 추진하였다. 제자업은 일찍이 원조 이전에 이미 서역의 아라비아 국가와 무역 왕래가 있었다. 원이 전국을 통일한 후에, 정부는 대외무역을 강화하는데, 기본적으로 송의 제도를 따랐다.
지원 14년(1277)에, 또 천주에 시박사를 설치하고 대외 무역의 관리를 강화하였다. 대외무역의 흥성발달은 의심할 바 없이 전국, 특히 이미 광대한 시장 제자업을 가진 경덕진에게는, 매우 커다란 촉진과 추진 작용을 일으켰다.
53p
이런 대반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지역의 이슬람문화의 음식습관과 관계가 있는데, 통상 음식물을 대반에 담아 두고 여러 사람이 땅이나 탁자에 둘러앉아 공동으로 음식을 드는데 사용된다. 현존하는 전형적인 원 청화자기 중에 대반의 수량이 가장 많아, 국외 소장이 백점을 넘고, 국내는 단지 수점이 있다. 이는 이런 대반이 주로 이슬람지역에 수출하기 위해 생산된 것임을 말해 준다.
203p
선덕 청화자기의 문양 중에, 일부 상당히 서아시아적 풍격을 가진 것이 있다. 이런 문양은 명대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으로, 응당 명초에 중동 제국과 왕래가 빈번하고 문화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예컨대 어루존의 사격문, 서등의 화훼문 등등이, 모두 이슬람 지역의 금은기나 도기에 상견되는 문양이다.
262p
정덕 청화자기의 문양 방면의 두드러진 특징은,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아랍문이나 페르시아문으로 만든 도안들이다. 정덕 청화자기상에 아랍문이나 페르시아문을 쓴 것은 당시 이슬람교가 성행한 것, 특히 정덕황제 본인이 이슬람 풍속을 숭상하고 그의 비와 자식들도 이슬람교를 신봉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들 아랍문이나 페르시아문의 내용은 주로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와 알라신을 찬송하고, '코란' 속의 교의나 도자기의 용도를 설명한 것이다.
334p
둘째, 청대의 제왕, 특히 강희,옹정,건륭 3제는 모두 비교적 자기를 애호하였다. 강희 본인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중시하여, 저명한 법랑채 품종이 바로 강희시에 국외 채료를 도입하여 창소한 것으로, 분채의 대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옹정은 더욱 자기를 중시하여 제자공장들에게 중상(거액의 보너스나 상품)을 수여하는 방법을 채용하여, 자기질의 향상을 촉진시켰다. 건륭은 각종 공예품을 애호하여, 거의 광적인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들 모두가 관요자기의 생산을 신속하게 발전시켰다.
셋째, 청초에 어요창을 회복하고, 감독관을 파견하여 감조와 관리를 하게 하고, '관탑민소(관부에서 민요에 하청을 주어 제작시킴)' 방법을 추진하여 민요 생산의 발전을 꾀하였다. 신품종과 신기술이 끊임없이 생겨났으며, 고품질의 제품이 더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넷째, 청대 국외 수출자기의 수량이 거대해졌으며, 당시의 수출자기는 외국에서 지정한 기형, 문양, 유색, 채색에 맞추어 제작되었다. 더불어 국내 자업시장이 날로 확대되어, 민요제작기술의 향상을 크게 촉진시켰으며, 자업생산 요인이 진일보하였다.
404p
함풍, 동치, 광서, 선통 이 4조는 제국주의의 침입과 내란이 빈번한 세월을 보내면서 사회경제의 상황이 갈수록 나빠져, 경덕진 관요자기의 생산은 쇠락의 경지에 처하였다. 민요 역시 대량 생산하지만, 다수가 조잡한 편이다. 다만 동치, 광서 양조에서 자희태후가 귀족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사치가 극에 다다른 생활을 만족시키기 위해 원가를 아끼지 않고 자기번조에 힘을 쏟아, 크게 중흥의 기세가 있었으며, 관요생산이 진일보 발전하였다. 특히 광서의 관요기는, 품종과 수량을 막론하고, 만청 각조에서 번조한 관요자기 중에 수위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