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왕도 익산, 그 미완의 꿈 - 무왕과 왕궁리, 선화공주와 미륵사
이병호 지음 / 책과함께 / 2019년 8월
평점 :
절판


저자의 전작, <내가 사랑한 백제>를 재밌게 읽어서 기대를 많이 하고 본 책이다.

제목이 좀 구태의연한 느낌이지만 표지 디자인은 괜찮고 문장력도 나쁘지 않아 백제 수도 익산의 발굴 과정에 대해 어느 정도 윤곽을 파악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학예사라는 직업 때문인지 학자들처럼 논증 보다는 실제적인 발굴 과정에 초점을 맞춘 점이 특이하다.

무왕은 정말 익산으로 천도를 하였는가?

실제 천도했다는 기록은 <관세음응험기>라는 중국 책에 한 줄 나온 게 전부라고 한다.

역사서에는 천도 얘기가 없으니, 저자가 말미에 설명한 대로 정조가 화성에 아버지의 묘를 옮기고 성곽을 구축했던 것처럼 제2의 수도로 생각했을 것 같기도 하다.

41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동안에도 천도했다는 기록은 없으니 익산을 정조 시대 화성 정도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선화공주 설화의 사실 여부, 또 하나는 익산 쌍릉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이다.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가 발원해 세웠다는 미륵사지에서 서탑 해체 과정 중 사리봉양기가 나왔는데 금자로 명백히 사택왕후가 건립했다고 쓰여 있다.

이 절이 특이하게 3금당 3탑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서탑은 사택왕후가 세웠더라도 동탑과 중탑은 삼국유사에 나온대로 선화공주가 세웠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무왕의 재위 기간이 41년에 달하고 고대에는 왕비가 둘인 경우도 종종 있으니 사택왕후 외에 다른 왕비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바는, 저자 역시 선화공주 설을 부인하고 나 역시 설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미륵사지 사리봉양기가 출토되기 전에도 역사서에 진평왕의 셋째 딸이 백제 무왕에게 시집갔다는 중차대한 사건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설화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명백히 증거도 나온 만큼 선화공주는 허구의 인물이라고 여겨진다.

전에 읽은 책에서는 선화라는 이름 자체가 불교식 용어로 실존 인물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했다.


두 번째 주제는 쌍릉의 피장자 문제다.

솔직히 익산에 쌍릉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대왕묘와 소왕묘가 있는데 이미 고려시대에 도굴돼서 일제가 조사했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덤이었다고 한다.

참 희안한 게 왜 묘지석을 매장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앞선 시대의 무녕왕릉 역시 묘지석이 있어 무녕왕의 생몰연대와 이름까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묘지석은 기본적으로 넣는 부장품일텐데 설마 묘지석까지 다 훔쳐간 것일까?

묘지석은 그저 돌에 불과하니 무겁기만 할 뿐 돈도 안 될텐데 왜 사라진 것인지 궁금하다.

소왕묘에는 묘지석이 있긴 하지만 아무 글자도 쓰여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큰 왕릉급 고분을 만들면서 묘주의 생애에 대해 간단히 기록해 두면 참 좋았을텐데 너무 아쉽다.

다행히 대왕묘에서 100여 점의 인골이 발견되어 검사 결과 50대 이상 남성의 뼈라는 것이 밝혀져 무왕의 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단순히 인골의 추정 나이만 가지고 무왕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소왕묘에는 그마저도 없는데, 소량 남은 공예품의 양식으로 봤을 때 소왕묘가 대왕묘 보다 먼저 만들어졌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소왕묘는 혹시 먼저 죽은 선화공주의 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운을 남긴다.

사택왕후는 무왕보다 늦게 사망했기 때문에 그 전에 먼저 죽은 왕비의 묘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둘 다 확실한 명문이 없기 때문에 그저 추정에 불과하다는 점이 아쉽다.


익산이 백제 때 이렇게 중요한 곳이었는지 처음 알았다.

하긴 마을 이름부터가 왕궁리니 뭔가 왕도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하다.

고조선 때 준왕도 위만에게 패해 바닷길을 타고 내려와 익산에 정착해 마한을 세웠다고 한다.

이 부분도 조선시대 쓰여진 문헌기록만 있을 뿐 실제 고고학적 증거가 확실한지는 의문이긴 하다.

어쨌든 저자의 표현대로 익산은 경주, 공주, 부여와 더불어 4대 고도 중 하나이니 좀더 연구되고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인상깊은 구절>

208p

한눈에도 서역풍으로 느껴지는 쇼소인 유물에 대해 일본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서역 페르시아 계통의 유물이 실크로드 교류를 통해 중국에 유입된 뒤 일본에 직접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유리잔의 손잡이에 해당하는 금속받침 부분에 베풀어진 소라고둥 문양의 장식과 당초문 및 어자문이 미륵사지 금동제외호 문양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이를 근거로, 쇼소인 유리잔은 중국에서 일본에 전래된 물건이 아니라 백제에서 제작되어 일본에 선물로 보낸 것이 오늘날까지 남겨진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백제와 일본 왕실 사이 밀접한 친분 관계를 고려할 때 백제에서 제작한 다수의 공예품이 일본에 선물로 보내졌고, 특히 백제 멸망 이후 다수의 백제 왕족과 장인들이 일본에 건너간 점을 감안해보면 이 쇼소인 유리잔 역시 백제에서 가공되어 일본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12p

고대 한반도에서는 진주가 생산되지 않았다. 당시 진주의 주요 생산지는 동남아시아의 베트남과 서역의 페르시아였다. 베트남 지역은 중국 강남 지역에서 광동성 방향으로 해로를 타고 쉽게 내려갈 수 있는 곳이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미륵사지에서 나온 다량의 진주는 백제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지역 사이 교류를 보여주는 자료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225p

선화공주의 존재를 긍정하는 연구자 중에는 사리봉영기가 미륵사지 서탑에서 나온 것에 주목해, 사택왕후는 서원의 창건만 발원했고 미륵사 3원의 발원자가 각기 달랐을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견해 역시 부정되는데, 사리봉영기에는 분명 "造立伽藍' 이라고 해서 가람 전체를 건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만큼 사택왕후가 미륵사 가람 전체를 발원해 건립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반박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동서 양탑에 관한 중수 기록이 남아 있는 불국사가 미륵사지의 비교 사례로 제시된다. 이 기록들에 따르면, 두 탑 모두 김대성이 주도해 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건립된 것으로 나온다. 미륵사의 삼원병렬식 가람 역시 불국사처럼 한 사람이 발원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화공주의 실체를 부정하는 이러한 입장은 사리봉영기 발견 이후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견해라 할 수 있다.

231p

서동설화는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무왕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비범한 인물로 표현하고 성스럽게 만들기 위해 기존의 구전설화를 차용해 무왕 개인의 이야기로 정착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설화를 무왕 개인의 이야기로 정착시킨 집단이나 지역 즉 설화의 생성자와 향유자는 어디의 누구였을까. 밤손님 설화가 옛 백제 영역권 내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연구가 이에 참고된다. 또 서동설화가 백제 특히 익산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이야기라는 것은 사료에 기록된 대로다.

 익산에 이런 설화가 남게 된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익산이 접경지대에 위치한 '위태로운 변경'으로 표현되듯 군사적,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전쟁의 종식과 평화의 도래를 바라는 익산민의 열망에서 비롯했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백제와 신라 두 적대적 왕실의 혼인을 통한 국가 평화의 실현은 신라와의 진출입로에 자리한 전략적 요충지에 살고 있던 익산 지역 민중들이 상상해서 만들어낸 평화를 위한 전략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무왕 대 백제는 신라와 모두 13차례 전쟁을 벌일 정도로 관계가 좋지 않았다. 따라서 민간에 널리 퍼져 있던 설화의 주인공인 셋째 딸을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로 대치해 백제와 신라 사이 해묵은 갈등을 해소하려는 양국 민중의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의 극한적 대치 속에서 양국이 신랑과 각시, 각시와 신랑처럼 금슬 좋은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양국 민중의 간절한 꿈과 소망이 서동설화로 남겨졌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242p

미륵사지의 경우 중원과 서원과 동원의 조영 순서에 약간의 시기차가 있다고 해도, 이들 3원은 일정한 배치 계획을 가지고 조영된 만큼 건립 초기부터 이미 일관된 기획안이 마련된 상태에서 공사가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미륵사지 3원이 약간의 시기차를 두고서 순처적으로 조영되었다고 해도 이를 반드시 발원자의 차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295p

최근에는 익산의 전략적 거점이나 군사적 중요성이 강조된다. 무왕 대 백제의 최대 현안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신라 지역으로 진출하는 전략적 거점지상 중요했던 익산이 개발되었다는 견해들이다. 그리고 무왕이 신라와의 대규모 전투를 치르기 위해 익산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 왕궁을 건설하고, 부처님의 힘을 빌려 신라를 제압하기위해 미륵사를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익산이 신라와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위태로운 변경'이었던지라 이곳에 의도적으로 거대한 사원이나 국가시설을 건립해 국가의 권위를 과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익산 개발 배경을 설명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익산이 만경강과 금강을 통해 서해로 나가는 수로 교통의 요지라는 점이다. 그래서 익산은 청동기시대 이래 마한과 백제의 우수한 문화가 다른 곳보다 먼저 유입되는 지역이 될 수 있었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었다.

 익산은 또한 금강이나 만경강의 수로를 활용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에 입지하고, 신라나 왜의 사신들이 부여로 들어갈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중요한 길목이기도 했다. 백제의 익산과 금강 또는 부여 사이의 관계는 신라의 경주와 울산항 사이 관계, 일본의 아스카와 나니와쓰 사이 관계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 지역들은 외국의 사신이 오거나 물자가 수도로 유입되기 직전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 항구이자 무역항이었다.

 그런데 익산의 경우는, 이 지역들과 달리, 왕궁리 일대에서 특이하게도 대규모 왕실 공방이 운영되고 있었다. 공방에서 생산된 고가의 물품들은 당시 백제의 수도인 부여나 지방뿐 아니라 외국으로도 유통되었을 것이다. 익산에 마련된 국가시설들은 이러한 물류를 지원하고 국가적 의례가 이루어지는 장으로서 백제의 위용을 과시하는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무왕의 익산 개발 과정은 조선 정조의 화성 개발 과정과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익산은 6세기 말~7세기 초 새로 개발된 지역으로 대왕묘와 소왕묘가 조영되었고, 화성은 18세기 최고의 건축 기술이 집적된 신도시로 융릉과 건릉이 조영되었다. 사비기 백제의 최고 기술이 집적된 익산의 위상을 고대사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생각할 때 조선시대 화성의 사례를 반드시 함께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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