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넘어서 - 순교자 이순이의 옥중편지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5
정병설 지음 / 민음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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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 참 글 재밌게 잘 쓰신다.

저자의 전작 <권력과 인간>도 재밌게 읽었는데 이순이라는 조선시대 천주교 순교자를 주제로 학술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그려낸다.

이 시리즈는 서울대학교 인문 강의 시리즈인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 강좌인 모양이다.

좋은 대학에 다니면 이렇게 좋은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서울대 학생들이 참 부럽다.


이순이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시부모와 남편 등 일가가 다같이 순교한 집안의 여인이다.

여성 순교자라고 하면 강완숙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소상히 알게 됐다.

그러고 보니 리델 주교에 관한 책에서 동정을 지킨 부부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바로 그녀였던 것 같다.

이순이는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의 후손으로 남인 명문가였으나 아버지가 천주교에 입문하여 심문 과정의 후유증으로 일찍 사망하였고, 외삼촌이 바로 조선 천주교의 지도자였던 권철신이다.

그 역시 고문 후유증으로 순교하고 만다.

이런 집안의 여식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믿음을 키우고 동정을 서약했으나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주문모 신부의 중매로 전주에 사는 거부인 천주교인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에게 시집가게 된다.

19세 동갑내기로 결혼한 이들은 23세에 함께 순교할 때까지 동정의 서약을 지켰다.

전주의 어마어마한 부자였던 유항검은 왜 모든 집안이 다 천주교도가 되어 재산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전 식구들이 몰살되었을까?

현세보다는 내세에 소망을 두고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은 이들을 저자는 당시 조선 사회의 새로운 인간형이었다고 평가한다.

순교가 과연 숭고하고 아름답기만 한 행위인가?

어찌 보면 광신과도 통하지 않을까?

거룩해 보이는 순교도 권력을 잡게 되면 마녀사냥으로 변질될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 니체의 이러한 비판을 함께 소개한다.

이성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어리석고 독단적이고 편협한 행위라고.

이것이 더 발전하면 십자군 전쟁이나 오늘날 이슬람의 자살 폭탄 테러가 되지 않겠는가?

그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순교자 개인의 삶은 눈시울을 붉히는 감동을 준다.

어제 종교철학에 관한 책에서도 읽은 바지만, 교리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자신을 희생하고 신을 영접함으로써 내 인격이 변하고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 때 내가 믿은 신앙이 보편성을 얻게 되고 남에게 감동을 주는 전도의 과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조선으로 선교하러 온 파리외방선교회 신부들도 자국에서의 편안함과 명예를 다 버리고 극동의 낯선 나라로 오직 하나님을 전교하겠다는 목적만 가지고 들어와 20대의 젊은 나이에 참수당하고 만다.

누가 등떠민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선택한 복된 삶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순교자들도 서양인들의 포교 활동과 관계없이 진리를 찾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 끝에 하나님을 접하고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니체의 비판처럼 순교가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의 복락을 버리고 믿음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한 개인의 굳은 신념은 감동을 준다.

옥중편지가 가족에게 보내는 여성의 편지라 그런지 너무나 애틋하고 마음이 절절하게 아파왔다.

열 살도 채 안 된 자식 셋이 부모의 죄에 연좌되어 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처형터로 가는 길에 그 자식들을 잊지 못해 마음아파 하는 시어머니에게 이순이가 세상의 고통은 이미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잊어버리시고 하나님을 만날 기쁨만 생각하라고 위로한다.

믿음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회복할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됐는데 그 믿음마저 흔들리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니 하나님에 대한 마음만이라도 굳세게 붙잡고 위로를 얻으라는 말이 절절하게 와 닿았다.

기독교는 유일신을 섬기는 매우 배타적인 종교였기 때문에 주자학이 국시였던 폐쇄적인 조선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서양의 위협이 가시화 된 상황에서 위정자들이 단순히 남인을 공격하기 위한 명분 정도로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박해를 지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정자들은 기독교가 조선 사회의 근간을 흔들게 될 것을 본능적으로 간파했던 듯하다.

흥선대원군은 스케일도 크게 병인박해 때 무려 만여 명의 신자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당시 조선 인구가 1500 만명 전후였다고 하니 정말 흥선대원군의 쇄국 의지는 대단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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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쏙 세계사 - 인류 탄생부터 소련 해체까지 역사를 바꾼 300장면을 만나다
릴리스 지음 / 지식서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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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도 상당하고 도판도 많고 그러면서 가격도 안 비싸고 알차겠다는 기대를 했으나, 너무 지루하다.

전문 역사학자가 아니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인데 간과했던 것 같다.

세계사에 처음 관심을 갖기 시작한 중고생 정도 수준의 사람들이 읽으면 맥락을 익히는 데는 도움이 될 듯 하다.

우리가 역사책을 읽는 까닭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듣고 싶어서인데 이 책은 좀 거칠게 말하자면 그냥 연대표 나열에 관련 그림들을 실은 정도다.

저자는 블로그에서 그림 설명을 열심히 하시는 분이고 나도 종종 방문해서 즐겁게 구경하곤 했다.

그래서 책이 나온다길래 일부러 도서관에 신청해서 보게 됐다.

차라리 원래 본인이 잘 하는 그림에 포커스를 두고 책을 내면 어땠을까 싶다.

모든 도판에 전부 출처 표시를 한 점은 높이 산다.

오류도 많지 않아 저자가 꼼꼼하게 확인한 것 같아 신뢰도가 생긴다.


<오류>

252p

도판의 주인공은 <로렌초 데 메디치>즉 위대한 로렌초가 아니라 그 손자인 로렌초 2세이다.

395p

1810년 4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의 딸인 19세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루이 16세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딸이다.

-> 프란츠 2세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로, 그 딸인 마리 루이즈는 조카 손녀이다.

413p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딸과 결혼하면서 피에몬테 전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 앙리 2세의 딸이 아니라 프랑수아 1세의 딸, 즉 앙리 2세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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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가 된 신화
게리 그린버그 지음, 김한영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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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해서 한 번에 쭉 읽어야 하는데 며칠 나눠서 봤더니 맥락이 끊겨서 뭘 얘기하려는 것인지 헷갈린다.

저자는 아마도 정통 신학자는 아닌 것 같다.

성경 혹은 유대 민족의 고고학적 증거를 밝히는 책인가 했는데 문헌 분석에 초점을 맞춰 성경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신화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논증하고 있다.

나는 유대인들이 외부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한 적이 없고 원래부터 거기 살았던 주민들이고, 이집트로 끌려간 적도 없다는 이스라엘 핑컬스타인의 최소주의설을 믿기 때문에, 출애굽을 역사적 사실로 전제하고 있는 저자의 주장에 확 동의하지는 못했다.

다만 훨씬 후대에 쓰여진 이 경전이, 당연히 주변 선진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리라고는 생각한다.

당장 대홍수 전설만 해도 메소포타미아에 널리 알려진 전승이 아닌가?

이집트 신화라고 하면 우리의 단군 신화처럼 세상의 근원을 밝히려는 일종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수천 년간 체계를 다듬어 온 심오한 종교라는 것을 알게 됐다.

오늘날 이 다신교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막연히 동물을 신으로 섬기는 고대인의 수준낮은 하급 종교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의 우르로부터 가나안으로 향한 것은, 진짜로 우르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라는 오래된 지역 출신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이를테면 우리가 오래된 문명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설명한다.

천지창조의 과정이 애매했던 것도 네 가지 정도 성경의 원전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성경의 원전이 넷이라는 사실은 다른 책에서도 본 적이 있다.

이집트 신화를 어떻게 차용했는지 설명을 듣다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자의적인 해석 같기도 하고 애매하다.

오시리스와 세트의 싸움을 야곱과 에서의 갈등으로 해석하는 식이다.

유대교는 일신교를 주장하기 때문에 여러 신들의 속성만 남겨두고 신의 형상은 지워버렸다고 한다.

일신교 역시 아크나톤의 발명을 차용한 것으로 본다.

성경은 기원전 7세기 무렵 요시야의 종교개혁 때 정리가 됐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세계관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선명하게 주제 의식이 잡히지는 않지만 성경의 이집트적 기원이라는 측면에서는 신선한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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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2
이태하 지음 / 책세상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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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도에 두 번 읽었다고 책 앞장에 기록되어 있다.

13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인데 책 곳곳에 밑줄과 나의 생각들을 메모한 흔적이 있어 굉장히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기독교인에서 무신론자로 바뀌는 과정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읽으면서 무신론자가 됐는데 (더불어 과학이 단순히 학문이라기 보다는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고 작동하는지 그 원리를 찾아가는 다른 의미의 "진리"라고 생각하게 됐다. 과학만능주의 이런 식의 말장난으로 가볍게 지칭할 수 없고, 자연철학이라고 해두자) 여전히 종교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즉 죽음이라는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더불어 근본주의적 신앙을 갖고 있는 엄마의 눈물어린 전도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의 유익성에 대해서라면 엄마의 경우 충분히 공감이 된다.

윤치호의 일기에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내가 기독교인인 이유는, 기독교를 믿는 서구 사회가 잘 살고 현재 나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리주의적인 관점에서 공감하는 바다.

엄마를 보면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아 왔으면서도 인격적으로 너무나 훌륭하고 타의 모범이 되고 무엇보다 본인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내적 충만감이 매우 강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믿음을 타인에게, 특히 가족처럼 심리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까운 이들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이 책처럼 철학적 관점 정도의 전도라면 귀기울여 볼만 한데, 지구 6천년 설을 믿고 진화론을 부정하고 종말이 살아 생전에 올 것이라고 믿는, 이단적 요소가 다분하다는 점에서 거부감이 강하게 든다.

그래서 항상 기독교의 끈을 놓지 못하고 인격적 신의 부재를 확신하는 내 믿음이 올바른 것인지 회의적인 관점에서 돌아보게 된다.


이 책에서도 신의 존재를 딱히 철학적으로 확실하게 증명하지 못한다.

사실 합리적인 이성으로 논증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이고 우주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으므로 혹시라도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도박 논증 정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엄마도 항상 얘기한다.

죽어서 혹시라도 천국과 지옥이 있으면 어떻게 하냐, 밑져야 본전이니 믿어라는 식으로.

그러면 나는 왜 꼭 사후세계가 기독교적 세계라 단정하는가? 신이 정말 있다면 그것이 반드시 기독교적인 형태가 아닐 수도 있지 않는가?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다 이런 식의 반발심이 생긴다.

복잡한 철학적 논증을 거치지 않더라도 선사시대부터 종교라는 제도가 있어 온 걸 보면, 종교심은 인간의 본능이라 생각한다.

마치 양심이나 도덕이 인류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신이 있냐 없냐 이런 근본적인 논의보다는, 그것이 과연 반드시 특정 종교의 형태여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강하다.

책에도 가난한 자들을 위한 투쟁이 우선이라고 나온다.

어떤 교리가 옳은지 따지기 보다 (왜냐면 인간의 이성으로 정확히 판단하기 너무나 어려운 주제이므로) 우선 실천적인 측면에서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는 게 먼저라는 것이다.

이단일수록 보편성에서 벗어나고 극단적으로 신자들을 몰아세워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결국 소멸하게 된다.

제사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조선시대에 종교가 없었던 이유가 바로 조상신을 섬기는 제사, 즉 주자학이 종교를 대신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전 세계적인 보편적 종교로 성장하고 유교는 소멸한 이유가 무엇인가?

보편성, 확장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밖의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한 가톨릭은 좀더 보편적으로 열린 종교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종교는 공리주의적인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일까?


대체적으로 책의 내용에 공감했으나 사회윤리적인 측면에서 종교의 역할을 강조한 부분은 동의하기 힘들었다.

현대 사회는 너무나 복잡하고 수많은 이익집단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과연 종교가 그들을 선도할 능력이 되는지 매우 회의적이다.

오히려 어설픈 종교적 입장 표명이 세속과 종교의 분리를 막고 인간의 구원이라는 본질을 훼손시킨다고 생각한다.

국제사회는 개인의 도덕이 의미가 없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임에도 조선시대 때 대명의리론을 주자학적 관점에서 주장했기 때문에 병자호란의 불행을 맞지 않았는가.

현대사회야말로 종교는 자신들의 한계를 인지하고 개인의 구원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의 의미, 신의 존재 등에 대해 생각해 본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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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온 2020-03-23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도킨스와 하라리 책을 읽고 무신론자요! 전직 재정담당 집사^^
 
조상 제례 빛깔있는책들 - 민속 10
임돈희 / 대원사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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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도 5월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구입했던 책이라고 앞에 쓰여 있어 한참 옛날 생각에 젖었다.

공간 문제로 책을 구입하지 않고 빌려 읽는데 추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소장해도 괜찮을 것 같다.

100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인데 내용이 견실하고 사진도 많아 흥미롭다.

우리나라 전통을 쉽고 깊이있게 소개하는 좋은 시리즈 같다.

요즘은 제사 지내는 집이 있나 싶을 정도로 급속하게 사라져 가는 전통이라 이제는 고유의 문화로 보존해야 할 정도라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큰아버지 집에 가서 할아버지 제사를 지냈던 기억이 생생한데 지금은 다들 기독교인이 되면서 제사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제사 과정을 보면 서양의 기독교처럼 조상신을 섬기는 일종의 종교 행위라는 생각이 들고, 현묘한 조상을 뒀다는 점이 곧 신분을 증명하기 때문에 전통사회에서는 매우 중요시 됐던 것 같다.

이제는 개인이 훨씬 중요한 정체성이 됐기 때문에 집단의 일원임을 보여주는 여러 제사 행위가 사회적 위상을 잃어가고, 특히 서구식으로 세계화 됐기 때문에 제사를 더 이상 종교 의식처럼 정성을 다해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1년에 수차례 시간과 노동력과 비용을 들여 제사를 지내는 행위가 무가치하게 느껴지지만, 따지고 보면 예술품을 수집한다거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는 것도 생산적인 일이 아님에도 매우 높은 정신적 가치로 숭상되고 있다.

보편성을 획득했느냐 하지 못했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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