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풍경과 사유 - 한국고대사의 경험과 인식 학문의 이해 3
이강래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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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가 되는 제목과는 달리 좀 지루했다.

고대인의 사유체계에 대한 이야기이긴 한데 삼국사기 같은 사료를 성실히 분석하는 수준이라 특별히 다른 관점을 얻지 못해 알고 있는 지식의 반복 느낌이다.

다만 고대인들이 사서를 기록할 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시간이긴 했다.

오늘날처럼 역사서를 쓸 때 원인과 결과, 배경에 대해 깊이 고찰하기 보다는 하늘의 뜻이 인간사에 반영된 것은 아닌지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유교적 기준에 합당한지에 중점을 두고 기술하다 보니 요즘 관점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도 많은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사료 비판이 매우 중요함을 새삼 느꼈다.

일식이나 혜성 같은 자연현상 등을 열심히 기록한 것도 17세기 서구처럼 과학적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천재지변이 인간사에 보내는 하늘의 메시지라는, 천인상관설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사료에 나온 기록들을 너무 자연주의 관점에서만 해석해서는 진짜 본질을 놓칠 수도 있을 것 같다.

왕조가 멸망하려면 하늘도 왕을 버렸을 것이라는 게 당대인들의 생각이니 그 징조를 자연에서 찾는 식이다.

그렇다면 설화는 진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여부를 따질 게 아니라 설화에 드러난 당시 생활상에 중심을 둬야 할 것 같다.

저자는 건국 시조들의 여러 이적들에 대해, 아마도 고대인들이 자연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당시로서는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현상에 대해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덧붙여 오랜 전승이 만들어졌을 것이라 추론한다.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 관점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읽고자 하는 철학적 관점에서 자연을 본다면 기적들이 과연 많을 것 같기도 하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기적들이 왜 현대에는 안 일어나냐는 질문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결국 사서란 고대인들의 가치체계에 근거해 기술한 것이고 전승 과정에서 많은 변형이 이뤄졌을테니, 올바른 역사 이해를 위해서는 고고학적 유물과 대조해 봐야 할 것 같다.

물질자료 자체가 역사적 의미를 바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고, 또 사서에 기록됐다고 해서 사실 자체는 아니니 결국 사서의 내용을 고고학적 유물로써 뒷받침 될 때 비로소 완벽한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형사취수혼은 유목 사회에서 혼자 된 형의 아내를 부양하기 위한 제도인데, 자매끼리 연이어 결혼하는 것은 뭔가 궁금했었다.

책을 보니 이런 제도를 자매역연혼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혼인은 집안끼리 일종의 동맹을 맺은 것이라 시집보낸 딸이 죽으면 다시 자매나 조카를 그 집안으로 보내 관계를 존속시킨다.

특히 아이를 낳지 않고 사망하게 되면 남자 집안에 생산을 못해 준 것이므로 이어서 다른 자매를 다시 보내주는 것이다.

누구와 결혼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집안과 혼인을 맺느냐가 중요한, 집단적인 결속의 과정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홍타이지의 첫번째 부인 역시 아이를 못 낳자 그 조카가 다시 시집와 순치제를 낳았던 것 같다.

개인 사생활의 발명은 지극히 근대적인 관점이라가고 하더니만 과연 그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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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새로 읽기
주보돈 지음 / 주류성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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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가야전을 인상깊게 보고 좀더 알고 싶어 선택한 책이다.

300 페이지 정도로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이고 내용도 어렵지 않아 금방 읽을 수 있었다.

기존의 알려진 내용과 약간 다른 부분도 있어 다른 책도 참조해야 할 것 같다.


1) 가라는 대체적으로 고령의 대가야를 가리키는 말이고 대가야가 국가로서의 위상을 거의 정립했던 것으로 본다.

이 부분은 가야전 도록에서도 명시됐었다.

임나는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가야 연맹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금관가야가 고구려의 남정 이후 쇠퇴했고 낙동강 무역량이 감소하면서 내륙의 대가야가 철 생산을 매개하면서 왕국 수준으로 커 갔다고 한다.

보통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온 가라를 금관가야로 보지만, 저자는 대가야로 생각한다.

금관가야가 광개토왕의 남정 이후 몰락하여 고령 지역으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원래 대가야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고 5세부터 부흥했다는 것이다.

남제에 사신을 보낸 가라국왕 하지도 저자는 대가야로 추측한다.

내륙에 있던 대가야는 섬진강을 이용하고 백제와 친선 관계를 유지한다.

저자는 그 밑에 있는 함안의 아라가야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기술한다.

워낙 사료가 적어 대부분 추정치이긴 하나 일본서기에 나온 기록을 중심으로, 안라가야는 신라의 공격에 대항하여 안라회의 등을 주최했고 대가야와 함께 일정 부분 세력을 유지했다고 본다.


2) 저자는 369년 근초고왕의 영산강 정복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에 나온 기사에 120년을 더하면 대략 시기가 맞다는 것이다.

과연 근초고왕이 영산강까지 남정하여 마한을 복속시켰는가에 대한 논의는 아직 분분한 것으로 안다.

지난번 여러 학자들의 논쟁을 읽어보면 고고학적으로는 전혀 복속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므로 거의 성왕 시기까지 백제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저자는 마한이 워낙 백제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쳐져 고구려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굳이 마한을 직접 지배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간접 지배 방식으로 내버려 뒀다는데, 상식적으로나 고고학적 관점에서나 공감이 안 되고 국력의 한계였을 것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목라근자가 왜의 군사들을 이끌고 와 마한을 점령한 것으로 나오는데 저자는 근초고왕의 지휘 아래 목라근자가 원정하여, 侯 개념으로 봉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개로왕이 전사한 후 수도를 옮기면서 남쪽으로 내려온 백제는 국력을 키워 영산강 유역을 정복해 갔지만 가장 큰 목표를 한강 유역 탈환이었으므로 신라와 동맹하고 가야와 왜까지 끌어들여 고구려에 맞섰으나 신라의 배신과 관산성 전투 패배로 성왕이 허무하게 죽고 난 후 결국은 망하고 만다.

더불어 백제에 의존하고 있던 가야 역시 신라에 망하고 만다.

제일 먼저 항복한 금관가야는 진골 귀족으로 우대했으나 마지막까지 버틴 대가야는 피지배층으로 복속시켰다.


가야는 삼국처럼 확고한 중앙집권적 왕조 국가를 만들지 못하고 사라져 버려 늘 실체가 모호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윤곽이 조금씩 잡히는 느낌이다.

가야라는 하나의 큰 나라나 연맹체가 있는 게 아니라 낙동강과 섬진강을 중심으로 한 작은 소국들이 서로 연합한 게 바로 가야가 아닐까 싶다.

그 중에서도 금관가야나 대가야, 아라가야 등이 비교적 규모가 커서 역사에 흔적을 남겼던 것 같다.

마한 54개국처럼 가야도 여러 소국들의 집합체이고 독자성을 가졌으나, 신라가 사로국에서 중앙집권국가로 커가면서 점차 잠식되어 사라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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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정유재란 1597
허남린 외 지음, 국립진주박물관 엮음 / 푸른역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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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책 선택을 잘하고 있다.

읽는 책마다 다 재밌고 유익하다.

400 페이지 정도 되고 여러 학자들이 기고한 책이라 어려울까 봐 약간 긴장했는데 술술 잘 읽힌다.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전시회 후 도록 형식으로 발간된 책인가 보다.

한국 학자들이 쓴 부분은 가독성 있게 잘 읽힌 반면 중국과 일본 학자들이 쓴 글은 번역이라 그런지 눈에 쉽게 안 들어와 아쉽다.

그래도 정유재란을 직접 참여한 다른 나라의 시선으로 본다는 점은 신선했다.

중국 학자의 글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조명 연합군이 승리한 이유가 엄청난 은 덕분이었다고 한다.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건 아니고 당시 전쟁에 얼마나 많은 은이 들어갔는지 상세하게 밝히고 있어 약간 지루했지만 하여튼 명나라 재정에 엄청난 타격을 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장거정의 개혁 이후 명 조정이 재정 보충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원정이 가능했다고 한다.

장거정 평전을 읽었을 때도 재정 건실화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상세하게 써 있었다.

어린 황제를 위해 국가 재정을 탄탄하게 만들어 줬건만 만력제는 수년 간 태업을 하더니 이웃 나라 전쟁에 엄청난 돈을 다 써 버리고 결국은 망국의 길로 가고 말았다.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조선의 황제냐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은본위제가 이미 확립이 됐는지 명은 모든 군수물자와 병사들의 월급을 은으로 지급했고 반대로 조선은 은이 있다고 쉽게 물자를 구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달에 애를 먹었다.

선조 하면 무능함의 표본으로 그려지지만 군사력이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와중에 조선 조정도 나름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애를 많이 썼음을 보여준다.

선조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오직 천조국의 군사들 뿐이니, 조선 조정은 명을 계속 참전시키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사실 이 책의 주제는 임진왜란이 아니라 특이하게도 정유재란이다.

임진왜란 때 명의 참전으로 물러간 후 4년 동안이나 강화 교섭이 이뤄지지만 실패하고 다시 1597년도에 재침한 것이 정유재란이다.

이 정유재란은 왜 일어난 것일까?

도요토미가 다음 해 8월에 죽었으니 조금만 교섭을 더 끌었어도 재침은 없었을텐데 참 아쉽다.

교섭을 이끌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런 사실을 흘리며 조선 조정에 좀더 시간을 끌어달라는 언질도 수차례 준다.

그런데도 조선 조정은 강화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고 오직 명군이 복수를 해주길 바라며 일본 측 제안은 무응답으로 일관한다.

사실 이 부분이 이 책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정유재란은 강화 교섭의 실패 때문에 벌어졌는데 그 원인은 무엇인가?

책의 대표저자인 듯한 분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측의 무응답이 원인이다.

철군 명분을 찾던 도요토미 입장에서는 아무 성과도 없이 물러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적당한 명분을 찾기 위해 다시 침략했고 이 때는 전라도 경상도 지역의 실제 지배를 목표로 삼는다.

살육전을 통해 조선 조정을 압박해서 눈에 보이는 항복 표시를 받아내려 한 것이다.

오히려 임진왜란 때는 중국을 치러 가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최단시간에 북상하고 조선인들과는 크게 부딪치지 않았으나 정유재란 때는 처음부터 남부 지방 점령이 목표라 지역 사회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코를 베어 가는 등의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다.

일본은 조선을 무시한 채 명나라와 강화 교섭을 시도하지만 명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이 전쟁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책봉 이상의 조건은 들어줄 수 없었고 조선 역시 일체의 강화 시도를 전부 무시한 채 외교적으로 명 조정에 압박을 넣어 이들을 섬멸해 달라고 하니 결국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조선 백성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가 막히고 끔찍했을까.

무응답으로 응한 조선 정부의 작전도 결과적으로는 옳았다고 저자는 평가하지만 민중 입장에서 보면 재침을 외교적으로 못 막은 것이니 끔찍한 실패가 아닐까?

도요토미 역시 전국을 통일하고 그 역량을 내치에 쏟아 도쿠가와 막부 같은 튼튼한 중앙정부를 만들었으면 늦게 본 아들이 끔찍하게 죽지는 않았을텐데 허황된 판단으로 동아시아 전체를 전쟁에 휩싸이게 했으니 실패한 정치가인 셈이다.

인상적인 부분은,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승전했음에도 이미 전라도 남부 해안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육군 때문에 정박하지 못하고 물러났다는 점이다.

해전의 승리만 강조했을 뿐 이런 디테일한 전후 사정은 언급하는 책이 없어 아쉽다.

순천왜성에 갇혀 있던 고니시 부대가 일본으로 탈출하기 위해 명의 장수 유정과 진린에게 많은 뇌물을 쓰고, 구원하러 온 시마즈 부대와 합류하던 중 벌어진 전투가 노량해전이다.

이순신 입장에서는 적이 달아나는데 원조국이라고 온 군사들이 그대로 보내주려 하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싶다.

오죽하면 총대장이 앞장서서 함대를 지휘하고 그 와중에 사망하게 됐을까.

나중에라도 정조 때 이 훌륭한 위인의 업적이 평가받게 되서 정말 다행스럽다.

정유재란 당시 한중일 세 나라의 국제정세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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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20-04-15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 사둔게 있는데, 어서 읽어봐야 겠네요.ㅎㅎ

marine 2020-04-16 08:33   좋아요 0 | URL
임진왜란이 아니라 정유재란에 초점을 맞춘 게 흥미로웠습니다.
왜 다시 재침이 일어났느냐 그 부분을 분석한 게 흥미로워요.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6
박훈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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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렇게 재밌을 수가!

오랜만에 별 다섯 개를 줘 본다.

"너무너무너무" 재밌다.

<현대 일본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일본 근대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었는데 그 책은 번역서이기도 하고 솔직히 내 수준에서 좀 어려웠다.

반면 이 책은 나 같은 일반 대중의 수준에 딱 맞춰 너무나 쉽고 재밌게 그러면서도 깊이 있게 설명해 준다.

이런 교수들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는 하나같이 정말 수준이 높고 무엇보다 지루하거나 어렵지 않다.

교양인들을 위한 강의로 딱 맞는 시리즈라 적극 추천한다.

신상목씨의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본사>와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세계사>를 읽으면서 일본 사회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커 갔고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메이지 유신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도와주는 책이다.

사실 제목 때문에 어려울까 걱정했는데 누구나 쉽게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이라 더 좋다.

230 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인데 딱 두 시간 밖에 안 걸렸다.

번역서가 아닌 책들은 가독성이 있어서 참 좋고 저자의 문장력도 읽기에 아주 좋다.


페리 제독의 방문 이전부터 일본에서는 개항에 대한 충분한 사회적 논의가 있었다.

한국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붙어 있고 삼면이 바다인 반도국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안보 우산에 안주하여 대외 침략에 대한 걱정없이 19세기 말까지 국제정세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쇄국정책 속에서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반면 일본은 중국에 기댈 수도 없는 나라였고 오히려 임진왜란 이후 명이 쳐들어 올까 걱정했을 정도였으며 바다로 둘러싸여 러시아나 서양 함대의 공격 가능성에 매우 예민해진 상태였다.

무사의 나라이니 외적의 공격 가능성에 대해 조선보다는 훨씬 민감했을 것이고, 이미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등과 무역을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서양 세력이 세계를 지배해 가고 있는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페리 제독이 내항하기 전부터 러시아가 극동 정책으로 캄차카 반도까지 진출하자 이미 조정은 러시아 침공 가능성에 대해 민감해진 상태였다.

지나친 기우였지만 혹시나 하는 가능성으로 위기론이 고조된 가운데 페리 제독이 강압적으로 통상을 요구했으니 막부는 개항을 결정하고 나라의 체제를 변혁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이 막부의 태도 변화가 일본 근대화의 핵심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앙시앵 레짐, 즉 프랑스 왕정이나 조선 왕실 같은 구체제는 보통 개혁에 저항하고 혁명이나 외세에 의해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도쿠가와 막부는 서양의 개항 압력에 대해 쇄국으로 일관하지 않고 체제 변혁을 시도하면서 유럽에 유학생을 보내고 해군을 창설하며 서구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많은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개항 이후 사쓰마와 조슈 번의 내전을 치루면서도 15대 마지막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대정봉환을 단행한다.

저자는 이 결단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어찌 보면 도쿠가와 막부의 권력을 반납했으니 그가 가문을 멸망시킨 것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매우 높이 평가받을 만한 결단이었던 셈이다.

이로써 프랑스 혁명이나 신해 혁명처럼 큰 피를 흘리지 않고 내부의 동요를 최소화시켜 근대화에 매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다.

저자는 권력층에 있는 이들의 개혁적 선택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반체제의 개혁 노력도 중요하지만 권력층에 있는 이가 개혁 쪽을 택한다면 그 영향력은 훨씬 크고 개혁에 따른 혼란도 최소화할 수 있다.

일본 엘리트들은 이 시대적 조류 변화에 아주 능동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대처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런 변화에 대해 18세기 이후 일본 무사들 사이에 퍼진 유학의 역할을 언급한다.

솔직히 이 부분은 다 공감하지는 못했다.

유학이라고 하면 근대화와는 매우 동떨어진 학문이고 조선이 바로 유학 중에서도 가장 완고한 주자학의 대표적인 나라인데 쇄국정책으로 일관해 근대화에 실패하지 않았던가.

일본이 택한 주자학은 사무라이들을 士 로 변신시켜 봉록만 받고 평화시대에 할 일이 없었던 그들을 지사로 만들어 변혁의 시대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론을 형성했다고 본다.

사실 조선의 언관 제도는 좋게 보면 강력한 공론의 정치가 아닌가.

붕당 역시 긍정적인 쪽으로 보면 오늘날의 정당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유학의 붕당이 갖는 한계점에 대해서도 명확히 선을 긋는다.

붕당은 기본적으로 군자당이 있을 뿐이라 오늘날의 다당제 개념이 아니었다.

군자당의 반대는 소인당이니 이들은 나라의 해가 되므로 없어져야 한다.

그러니 서로 군자당임을 주장해 사화로 수많은 이들이 죽고 결국은 왕권의 약화와 더불어 한 가문이 독점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고 만다.

저자는 각주에도 오늘날 한국 사회에 정당정치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것에 대해 "현인지배의 선정정치" 라는 유교적 이념이 자리잡은 탓이라고도 밝힌다.

매우 동의하는 바다.

조선보다 늦게 유학이 전수되서인지 일본에서는 유학을 조선처럼 내제화 신념화시킨 것이 아니라 경세치용 관점에서 이용했기 때문에 보다 열린 자세로 일부 가문에서 독점했던 정치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다고 평가한다.

유교적 교조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교식 혼례나 제례도 없었고 난학 같은 서양 학문도 쉽게 받아들였다.

과연 유학이 일본 사회의 근대화에 얼마나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살펴보고 싶다.


좋은 책을 읽는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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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20-04-15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약간 흥분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얼마전에 동 저자의 책(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이 한 권 나와서 어서 구입을 하긴 했는데 읽는 건 계속 미뤄지네요. 기대는 상당히 하고 있는데 언제나 읽을 수 있을런지...^^;;;

marine 2020-04-16 08:32   좋아요 0 | URL
혹시 <현대 일본을 찾아서> 라는 책 읽어 보셨는지요? 좀 두껍긴 한데 이 책도 정말 재밌습니다.
 
속속들이 이해하는 서양 생활사
김복래 지음 / 안티쿠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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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부분은 지루해서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했던 책이다.

리뷰가 좋아서 끝까지 붙들고 있었는데 중세편부터는 너무너무 재밌다.

그리스 로마는 워낙 고대라 사료가 적어서인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만 나와 지루했던 것 같고, 중세 시대부터는 근대의 기원이 될 만한 것들이 등장해 정말 재밌었다.

오늘날 국민국가들의 원형이 형성된 시기이고 가톨릭 문화가 지배하던 시절이라 친숙해서 더 호기심이 생긴다.

르네상스 이후 시기도 말할 것도 없이 정말 흥미진진하다.

저자의 전작들도 몇 권 읽었을 때, 오류가 종종 보였던 듯 한데 이번에는 전혀 못 찾아서 꽤 신경써서 편집한 듯 해서 더 좋았다.

도판도 많이 실려 무척 책이 예쁘다.

중세와 근대의 서양인들의 삶이 궁금한 사람들이 읽으면 많은 흥미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기억에 남는 몇 가지

1) 왜 그리스 시대에는 동성애가 많았을까?

나도 항상 이런 게 의문이었다.

동양 역사서에서는 별로 못 본 것 같은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일종의 문화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동성애가 많았던 듯하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는 오직 남성만이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었는데 신체를 과감하게 드러내는 문화였기 때문에 동성애가 발달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여성들과의 만남이 금지된 군대에서 동성애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주연이나 운동 경기 등에서 반라나 전라 상태로 남성들과 사회적 활동을 하다 보면 우정을 넘어 육체적 사랑까지 발달하기 쉬운 환경이었다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사랑이란 동등한 상대와 하는 게 아니라 남성이 미소년이나 여성, 노예 등 자기보다 낮은 사람과 이뤄졌다고 한다.

성인 남성끼리의 동성애는 거의 없고, 미소년을 데리고 다니면서 일종의 후견인처럼 돌봐 주고 더불어 육체적 감정도 나눴다고 한다.

여성들의 지위가 워낙 낮아 강간도 흔했다고 한다.

최근까지도 여성이 강간을 당하면 오히려 당한 여자를 비난하던 우리 문화도 그런 구습의 형태일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제우스가 왜 그렇게 여자들을 잘 건드리나 했더니 이런 여성 비하가 깔려 있었던 셈이다.

약육강식의 고대 시대였으니 어쩔 수 없는 사회적 현상이었던 모양이다.


2) 저자는 상층 문화와 하층 문화를 나눠서 설명한다.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하층의 민중 문화는 기록이 많지 않아 자세한 묘사는 적었지만 상류층 귀족 문화와 민중 문화는 따로 기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중세편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집단주의 사회였다는 점이다.

너무 당연한 것 같기도 한데, 하다못해 귀족들의 성에서조차 따로 식당이 있는 게 아니라 식사가 시작되면 간이 식탁을 만들고 밤이 되면 치우고 거기에 누울 자리를 만들어 준다.

개인의 공간을 갖는다는 건 중세에세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고 한다.

개인주의란 아무리 빨리 잡아도 르네상스의 소수에서부터 시작해 겨우 19세기는 되야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어렸을 때 안방에서 할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잤고 내 방을 가진 게 고등학생이 된 후 방 네 개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간 다음에서야 가능했던 것 같다.

개인의 공간에 대한 욕구가 중세에서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축사를 집 안에 들여 가축들과 함께 자기도 할 정도였으니 오늘날의 시각으로 시각으로 당시를 이해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귀족들은 개인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지 모르나, 적어도 민중들은 집단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낙오되고 보호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라 상상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가난한 민중의 억눌린 욕구를 표출시키기 위해 축제가 중요했고, 절기마다의 이교도적 축제를 기독교적으로 바꾸기 위해 교회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린다.

크리스마스가 괜히 로마 태양신 축제에서 비롯된 게 아닌 모양이다.

근대는 개인의 발명이 이뤄진 시대라는 말이 실감난다.


중세와 근대인들을 이해하기에 너무나 좋은 독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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