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훈련된 외교관의 시각으로 풀어낸 에도시대 이야기
신상목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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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재밌을 수가!

본격적인 연구자가 아닌 아마추어 필자들의 책은 대부분 이른바 수박 겉핥기 식인 경우가 많다.

얼마 전에 읽은 <한국의 일본 일본이 한국>이 대표적인 경우다.

여러 기자들이 모여서 야심차게 준비한 책이겠으나 내용은 너무나 평이한 자료 모음 수준이다.

다양한 자료를 모아 분석과 식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비로소 한 권의 좋은 책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대중서들의 단점은 자료 제시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자료야 인터넷을 보면 널려 있으니 굳이 책을 따로 읽을 필요도 없는 시대다.

특히 칼럼 연재물을 책으로 엮은 경우 매 회를 주어진 분량에 맞추려다 보니 전체적인 통일성이 떨어지고 중구난방인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여러 면에서 훌륭하다.

제목이 좀 자극적이라 어설픈 야사 이야기면 어쩌나 약간 걱정이 됐는데 최근 들어 보기 힘든, 대단히 성공한 독서였다.

일본의 근대화의 배경에 대해 한국인 필자가 이렇게도 적극적으로 분석한 경우를 접한 적이 없어 신선한 충격이었다.

정말 우리는 일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인가 반성이 된다.

식민지 지배를 진정으로 청산하는 길이 친일파 처벌 뿐일까.

300 페이지 정도로 짧은 분량이고 글솜씨도 좋아 마치 소설 읽듯 한 번에 잘 읽힌다.

표지 디자인도 세련돼서 좋고 다만 제목이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저자에게 바라는 바는, 조선 후기사도 같이 연구해서 일본의 근대사와 본격적으로 비교하는 책을 내 보면 좋겠다.

책에 간간히 조선과 일본 사회의 차이점을 설명하기도 하는데 우리 역사 쪽의 분석이 다소 아쉽다.

<현대 일본을 찾아서>를 읽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생각난다.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게 된 바탕에는 에도시대의 참근교대와 천하보청 제도로 다이묘들이 돈을 쓰게 되면서 화폐경제가 이뤄졌고 그 과정에서 조닌층이 상업자본으로 성장해 신분제가 흔들리고 자본주의의 싹이 텄다. 

이런 사회적 바탕 위에 페리의 개항이 이뤄지고 메이지유신으로 갑작스런 근대화에 성공한다.

참근교대가 다이묘들을 약화시키기 위한 제도인 줄만 알았는데 의무적 소비 지출을 통해 에도라는 거대한 도시 문화가 완성되고 숙박업과 운송업 등이 활발해지고 무엇보다 이 행사를 위해 곡식이 아닌 돈이 사용되어 화폐경제가 형성됐는데 정작 다이묘들은 곡식을 봉록으로 받았기 때문에 상인들에게 돈으로 환전하는 과정에서 상인 계층이 급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교환 과정에서 신용을 바탕으로 한 근대 금융업도 성장했다.

천하보청은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쇼군은 징세권이 따로 없어서 다이묘들에게 군역의 확대된 의미로 도시 건설을 요구한다.

도로와 매립지 공사, 급수시설 등 인프라 구축을 다이묘의 돈으로 이룩한 것이다.

에도로 사람이 몰리고 상인 계층이 성장하자 그들의 문화가 만개한다.

유럽을 강타한 우키요에가 그냥 생긴 것이 아니었다.

일본도 목판 인쇄술을 바탕으로 출판 문화가 활발해지고 사회 변화의 주역이 됐는데 왜 조선에서는 상업 출판이 불가능했을까?

문집 한 권을 펴내는 것도 돈이 매우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 쉽지 않았다고 하는데 목판 인쇄가 어려웠던 까닭이 궁금하다.

일본 역시 서양처럼 금속활자가 아닌 목판 인쇄가 주를 이뤘는데 그 차이도 궁금하다.

확실히 일본은 주자학 일변도의 경직된 사회가 아니었고 이미 16세기부터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조선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결국 세상이 서구화, 자본주의화 되었으니 오래 전부터 난학을 수용하고 있었던 일본이 조선을 앞지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나 싶다.

중국식으로 세계화가 됐으면 조선의 운명이 달랐으려나.

중국 외에는 소통하는 세상이 없었고 그나마 청나라가 들어선 후 북벌을 외치면서 배격했던 쇄국정책이 조선을 전근대 국가에 머물게 했던 듯 하다.

천주교가 자생적으로 생겨나 수천 명이 떼죽임을 당할 정도로 강한 신앙심을 보였는데 서양 학문 유입과는 큰 연관이 없었던 듯 하여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14p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에도시대의 일본은 임진왜란 때 납치한 도공이나 조선통신사에게 한 수 배우며 선진 문물을 습득한 문명의 변방국이다. 단언컨대, 일본의 근세 260여 년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32p

같은 시기 서구의 시대상에는 미치지 못할지 모르나, 제도, 관행, 인프라의 형성과 작동이라는 측면에서 동시대 조선의 사정과 비교한다면 그 격차는 엄청나다. 한국인들은 무사가 칼 차고 다니며 공포정치를 펴고, 인민들은 그들의 눈치나 보며 벌벌 떨며 살았다고 알고 있는 에도시대에 이미 일본은 조선을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47p

전근대의 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소수의 중앙 지배층을 정점으로 하는 다단계의 착취적 구조를 기본으로 한다. 교통, 통신이 발달하지 못하고 통치에 민주성이 결여된 전근대이기에 세금은 비효율성도 높고 생산력 확대를 위한 재투자에도 사용되기 어려웠다. 세금은 누군가의 금고로 들어가 사치로 낭비되거나 다 쓰이지도 못하고 소멸되는 국부의 무덤이었다.

73p

전근대와 근대를 구분하는 가장 극적인 차이 중 하나는 이동의 자유에 대한 관념일 것이다. 현대인들은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것이 당연한 권리이지만, 인신이 토지에 부속된 전근대의 보통 사람들은 태어난 곳에서 100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02p

에도시대 출판문화의 특징은 진화 과정에서 '시장원리'가 주효하였다는 것이다. 출판은 상업적인 자생력을 갖춘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고 유통망을 구축하였으며, 이를 통해 독서는 서민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하여 대중화, 생활화되었다. ... 창의적인 비즈니스 기법이 끊임없이 모색된 것은 에도시대를 관통하는 일본 근세의 특징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 사회가 종교, 윤리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고, 지배층도 반역적이거나 지나친 풍속문란이 아니면 관대한 태도를 보인 것도 출판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정보가 특권계층에 의해 독점되지 않고 대중에게 보급되는 것은 불가역적인 사회 변혁의 단초를 제공한다.

141p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지도는 단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이다. 19세기 말에 근대 작도법이 아닌 자체 방식으로 상당한 수준의 지도를 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유럽 문명을 제외하면) 조선의 과학기술 수준이 당시 세계적 수준에 비추어 보아 손색이 없었음을 시사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당시 중국과 조선의 지도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 사상과 사방을 일정한 구획으로 나누어 지리 정보를 표시하는 방격법에 기초하였다. 지리는 철학, 사상, 관념과 분리되지 못하였다. 근대 지도의 요체인 위경도 좌표 개념도 들어서 여지가 없었다. 이노의 지도는 동양의 관념적 지도를 배제한 과학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었다.

185p

백의 선호는 조선의 염색 기술을 답보 상태에 머물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염색천은 제대로 시장이 형성되지 못하였고, 기술자들은 관청에 예속되어 기술적, 예술적 자율성이 제약되었다.

211p

16세기 이후 유럽의 근대국가 성립 과정에서 왕실과 귀족 등 지배층은 '예술의 후원자'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이 통치력 강화에 필수적이었고, 이는 음악, 미술, 문학 등 다방면에서 유럽 문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고급 문화예술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고급 문화예술은 다수에 의해 소비되어 상업적 활력을 갖추기 전까지 그를 애호하고 후원함으로써 취약한 생존력을 보완하고 기술적 축적을 지탱해줄 수 있는 소수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 일본의 도자기 발달사는 이러한 '후원'과 '과시적 소비'가 문화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일본의 도자기문화는 차문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219p

유럽의 지식사에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 도덕과 정치를 분리한 것이 근대 정치의 토대를 닦았듯이, 소라이가 통치철학으로서의 유학이 교조적 관념론, 도덕론에 치우지지 않고 실증과 실용의 끈을 놓치 않도록 한 것은 근대 정치의 발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228p

막부의 쇄국정책은 '폐문정책'이 아니라 막부가 외부와의 사람, 물건, 정보의 교류를 통제하는 '창구독점정책'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에도시대의 쇄국정책은 서양의 것을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조선의 위정척사류의 이념형 고립정책과 같지 않다. ... 막부는 서양의 정보를 통제하였지 배척한 것이 아니다. 배척은커녕 민감하게 그 동향을 주시하였다. ... 일본의 지식인들은 근대 유럽문명이 가져온 물질적 혜택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혜택을 어떻게 흡수하여 인간의 삶을 이롭게 할 것인가? 그것이 당시 난학을 대하난 지식인들의 태도였다.

254p

전근대에서 근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가 금융 근대화이다. 에도시대의 료가에쇼들은 근대 금융업에 필적하는 자체 신용금융제도를 오랫동안 발전시키면서 노하우를 축적해왔다. 이러한 근세기 민간 주도 금융의 발달은 근대화시기 서양 금융제도의 일본 내 수용과 자체적 변용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이는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 성공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265p

막부의 화폐 지배력이 절대적이었다면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막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힘을 축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막부가 화폐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화폐 공급량을 늘여야 했으나, 화폐의 개념이 금, 은 본위화폐 주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막부는 자신의 정치적 권위로 신용을 창출하여 그를 화폐로 전환시키는 발상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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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 - 시대를 앞선 통찰로 불운하게 생을 마감했던 우리 과학자들
이종호 지음 / 사과나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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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대한 이야기.

과학자라기 보다는 실학자로 봐야 할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과학자들, 뉴턴이나 갈릴레오처럼 과학적 업적을 이룬 위인들 이야기는 아니고, 여러 서책과 일상생활의 기술들을 모아 책으로 펴낸 수준이다.

이 정도만 해도 성리학 위주의 나라에서 뭔가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던 점은 가치가 있을 듯 하다.

그렇지만 저자가 정약용의 기중기가 실제로 유용하게 쓰이지 않았음을 지적한 것처럼, 근본적인 서구의 과학 혁명과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결과적으로 조선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되지는 못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가 인상적이다.

고위관료이면서도 낙향했던 오랜 기간 동안에 임원경제지라는 백과사전을 편찬한 열의가 놀랍다.

실제로 농사를 지어 성리학 서적이 아닌 일종의 기술서를 펴냈다는 행보가 독특하다.

저자가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비교적 성실하게 기술해서 재밌게 읽었다.

다만 조선시대 과학이라는 표현도 좀 과대포장된 거 아닌가 싶은데, 거기에 순교자라고까지 제목을 붙이는 건 오버지 않나 싶다.

과학의 발전을 위해 체제와 맞서 싸운 과학자라 부를 만한 사람은 없고, 다른 이유로 유배 등 불우한 삶을 살았고 야인으로 있는 동안에도 열심히 학문을 연마해 저작을 남긴 이들이다.

순교자라고 하면 천주교인처럼 체제의 강압에 대항해 목숨을 바치는 전사가 아닌가.

그러기에는 다들 너무 점잖은 인물들이다.

맨 마지막 참고 문헌 수준이 아쉽다.

학자가 아니니 이해는 되지만, 네이버 캐스트나 신문기사, 잡지가 참고문헌이라니.

책은 자료모음집 수준을 넘어서야 하는 것인데, 아쉽다.

혹시나 싶어 참고문헌으로 실린 기사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그대로 옮긴 문장들이 많다.

참고문헌으로 표시했으니 상관없는 문제인가?


<인상깊은 구절>

67p

<동의보감>은 약 400년 전의 의학 수준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동의보감>에 실려 있는 내용이 모두 맞을 까닭이 없으며 허준이 현대의학을 뛰어넘는 의학자일 수도 없다. 허준은 4세기 전의 훌륭한 의학자일 뿐이며 <동의보감>은 4세기 전의 의학을 잘 정리해 준 유용한 의학서라는 것이다.

81p

동양 사상에서는 사체를 절개하고 해부하여 장기를 들여다 본들 거기서 얻은 지식이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다. 죽은 사람에 대한 지식은 살아 있는 사람의 육체에 적용하거나 이용할 수 없는, 그야말로 죽은 지식이라는 뜻이다. ... 동양의 의학자들 가운데도 실제로 해부를 해본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동양에서의 해부는 그야말로 일시적은 호기심 차원에 그쳤을 것이라고 했다. ... 전유형의 해부는 파격적이고 그 자체로 의학의 본질에 접근한 것이지만 역사상에서 그의 시도는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해부 사건이 크게 부각되지 않은 것은 전유형이 억울하게 참형을 당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인들이 해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이후로 조선에 제2, 제3의 전유형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보면 해부 경험이 치료에 별다른 이익을 주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의아하겠지만 충분한 근거는 있다. 

108p

"아아. 사대부가 때를 만나지 못하면 갈 곳은 산림뿐이다. ... 그러므로 한 번 사대부라는 명칭을 얻으면 갈 곳이 없다. 그렇다고 사대부의 신분을 버리고 농,공,상이 되면 안전해지고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그런즉 천하에 지극히 좋은 것이 사대부라는 이름이다. 사대부라는 이름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옛 성인의 법을 준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공상을 막론하고 사대부의 행실을 한결같이 닦는 것이 마땅하다."

204p

그러나 학자들은 보다 엄밀한 설명을 요구한다.  ... 1인당 분담되는 에너지는 대략 10.3kg이라고 계산했다. 이 무게는 일반적인 사과 한 상자의 무게인 15kg에도 못 미친다. 사과 한 상자는 보통 사람도 들 수 있는 무게이므로 이 무게를 들기 위해 거중기와 같은 거창한 기구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원 화성을 쌓을 때 거중기는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몸체가 워낙 커서 이동을 위해 분리, 조합하는 데 너무 많은 품이 들기 때문이다. ... 박제가가 서양인들을 초청하자는 원론적인 주장을 했지만 정약용은 서양의 앞선 과학기술을 배우려면 어떤 구체적인 조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237p

정약용은 농사를 전혀 짓지 않고 농업 원론만 얘기한 반면 풍석 서유구는 직접 농사를 지은 체험을 토대로 구체적인 농사 기술을 제안했다. ... 물론 다산도 자신의 생각에 합리성을 부여했는데, 자신의 경세학은 당장의 활용보다는 이상적 통치 이념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 다산의 이 같은 태도에 대해 풍석은 강력하게 비판했다. 서유구도 이상을 추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이 땅의 현실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철저한 현실론을 견지했다. ... 장기간을 열악하게 살았다고는 하지만 방대한 양의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당대 누구보다도 저술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배를 곯고 직접 농사를 지어 생계를 해결하면서도 글을 쓸 시간이 있었고 또한 참고문헌에 900여 권이나 적을 정도로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311p

최한기는 의학 자체애 대한 관심은 없었다. 즉 의사로서의 과학성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사상가로서의 이론에 치중했다. 다시 말해 새로운 과학 지식을 받아들여 자신의 사상 체계의 토대로 삼기는 했으나 새로운 과학 지식의 창조자가 되지는 못했다는 설명이다. 이를 두고 강신익 박사는 "최한기의 의학사상은 있지만 최한기의 의학은 없다"고 말한다.

355p

현대의 기준에서 본다면 당시의 발명가 수준은 아마추어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다. 당시 발명가들(곧 과학자들)의 수준을 잘 보여주는 한 예는 영구동력기관에 대한 그들의 집착이다.


<오류>

36p

<미암일기(국보 400호)>의 저자이기도 한 유희춘이

->미암일기는 보물 260호다.

101p

이중환은 성호 이익의 재종손(사촌형제의 손자)이면서

->재종손은 사촌이 아니라 6촌 형제의 손자이다. 즉, 이중환의 할아버지인 이영은 이익과 4촌이 아니라 6촌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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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로드 - 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손호철의 세계를 가다 2
손호철 글.사진 / 이매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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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가 별로라 읽을까 말까 했던 책인데 역시 그냥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400 페이지의 긴 분량인데 그저 장정 루트를 따라간 순수 기행문일 뿐 대장정에 대한 내용이 너무 부족하다.

정치학자의 책이라면 어느 정도 배경 지식을 제공해 줘야지 않을까.

앞서 읽은 <길 위에서 읽는 중국 현대사 대장정>이 훨씬 도움이 됐다.

어쩜 이렇게 순수한 기행문으로만 일관하는지.

맨 마지막 장에 마오쩌둥과 문화혁명을 비판하는 부분만 인상깊게 읽었다.

요즘 분위기로 본다면 이 정도 비판도 상당히 용기있다고 해야지 않을까.

중국의 빈부격차에 주목하면서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이 원했던 바는 단순한 부국강병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들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이 인상깊다.


<인상깊은 구절>

388p

재미있는 것은 마오 말고 덩샤오핑, 저우언라이 등 중국공산당의 1세대 지도자는 거의 모두 해외 유학파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러시아가 아니라 프랑스 등 유럽 유학파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부잣집 자식들인 '강남 좌파'는 아니었다. 일하면서 공부하는 근로 유학 프로그램을 이용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프랑스 공산당에 들어가 좌파가 됐다. ... 이 사람들과 달리 마오는 어학에 소질이 없고 노동도 싫어해 근로 유학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자본론>보다는 <수호지>나 <삼국지> 그리고 중국 역대 왕조의 통치술을 다룬 <자치통감>을 더 좋아했다. 이런 특징이 중국혁명에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기능했을 것이다. ... 그러나 동시에 세계와 경제에 어두웠고 국수주의적 경향도 있었다.

397p

고향인 후난성을 방문한 펑더화이는 대약진운동으로 농민이 굶주리고 있는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 빈농 출신이라는 자신의 배경 때문에 펑더화이는 농민의 고통에 어느 누구보다도 예민했다.

401p

장정의 고난과 목숨을 건 혁명의 피와 땀이라고는 겪어 보지도 못한 10대 홍위병들이 혁명의 백전노장 펑더화이와 류사오치를 '우파'라고 부르며 자술서를 쓰게 하고 고문하는 희극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그 많은 전투 속에서 적의 총알을 뚫고 살아남은 뒤 혁명 동지이자 두목인 마오의 손에 목숨을 잃으며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404p

물론 13억 인구가 서구식 민주주의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확대하지 않고는 일류국가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 사실 규범적 측면뿐만 아니라 지금 같은 경제자유화 속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계속 묶어두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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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사의 길을 가다 - 압록강 넘은 조선 사신, 역사의 풍경을 그리다 이상의 도서관 51
서인범 지음 / 한길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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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라 부담스러웠는데 본격적인 학술서라기 보다는 일종의 역사기행문이라 부담없이 쉽게 읽힌다.

다만 너무 상세하게 사신로를 탐방하는 바람에 다소 지루하다.

또 유명한 지역들이 아니라 정확히 어디를 지칭하는지 금방 와 닿지가 않는다.

지명을 한자어로 표시하고 있어 구글 지도에서 찾기도 힘들었다.

직접 가보지 못하고 글자로만 상상하는 독자를 위해 좀더 소상히 주변 지역을 설명해 주면 이해하기가 더 쉬웠을 것 같다.

그럼에도 꼼꼼한 기행문을 당시 역사와 어우러져 흥미롭게 읽었다.

연행로라고 하면 단순히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얼마나 지난하고 힘든 일이었는지를 저자가 세심하게 그려낸다.

몇 달에 걸치는 긴 여정의 힘든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동등한 국가가 아닌 부모의 나라로 떠받드는 이른바 상국으로 가는 지라 끊임없는 뇌물 요구에 시달렸다.

사신은 공식적인 사절들이니 가는 길에 적어도 숙소 정도는 마련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잠자리는 커녕 비적들의 습격까지 감당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고 지역을 통과할 때마다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

중국의 사신들도 조선에 올 때 이렇게 힘들었을까?

오히려 그들이 한 번 조선에 오면 엄청난 뇌물을 바치느라 허리가 휜다고 들었다.

조선은 왜 이렇게도 열심히 명나라를 섬겼을까.

성리학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사대가 단순히 오늘날의 외교 차원이 아니었을 듯 하다.

오늘날의 대등한 국제적 외교관계로 조선시대를 읽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여진족에게 사행로가 점령당하자 바닷길을 따라 조공을 하고 처음 가는 행로라 배가 난파되어 사신들이 죽는 참변까지 벌어진다.

망해가는 나라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험한 해로를 헤쳐 나가던 당시 조선 위정자들의 모습이 후손의 눈으로 보면 안타깝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인 듯 한데, 비교적 화질이 선명해서 보기가 좋다.


<인상깊은 구절>

469p

이처럼 많은 애로사항 중에서도 사신을 가장 피로하게 했던 건 일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일이 끝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인정물품을 요구하는 중국의 관료, 환관, 서리들이었다. 적은 외교비용을 가지고 압록강을 건넌 사신의 주머니는 점차 줄어들었다. 북경에 도달했을 때 그 행낭은 거의 텅 빈 상태였다. 물론 북경에서의 본격적인 외교전을 앞두고 사신을 괴롭게 한 것이 비단 부족한 비용뿐만은 아니었다. 부주의한 언사 한마디도 외교활동을 수포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이처럼 엄중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나라 선조들은 오로지 왕명을 완수하려 고군분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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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신병주 지음 / 책과함께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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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근무할 당시 썼던 책인 모양이다.

뻔한 이야기일까 봐 안 읽었던 책인데, 인터넷 검색하다가 궁금한 문장이 있어 읽게 됐다.

세종조의 성비와 공비에 대한 기사였는데 이 책을 봐도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고 인용만 됐을 뿐이라 아쉽다.

검색해 보니 성비는 태조의 후궁 원씨이고, 공비는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였다.

앞쪽의 그림이나 지도 등은 너무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고 있는 그대로의 설명 뿐이라 지루했고 뒷부분의 저작 소개가 흥미롭다.

지봉유설이나 반계수록 같은 책들은 이름만 들어봤지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줄은 처음 알았다.

실학자들이 근본적으로는 성리학자였으나 명분론, 의리론과는 다른 실제적 학문을 논한다는 점에서 좀더 살펴볼 가치가 충분한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03p

우리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써야 오랑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박제가의 발상. 북학 선구자의 이미지에 극단적인 중국 신봉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기에 충분하다. 박제가는 북학에 대한 확신범처럼 일생을 살았다. 중국의 선진문화를 동경하면서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보잘 것 없는' 조선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논리가 <북학의> 곳곳에 나타나 있다.

147p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이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크게 다른 것은 토지, 호구, 군사 항목이 없는 대신에 인물이나 제영의 비중을 늘린 점이다. 이는 성리학 이념이 조선 사회에 점차 확산되면서 이에 충실했던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널리 전파하고, 관리나 학자들이 쓴 시문들을 알려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이 학문과 문화를 중시하는 사림파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이러한 점이 더욱 강조되었다.

307p

지봉유설에서 이수광은 "우리나라 사람의 일로서 중국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부녀자의 수절, 천인의 장례와 제사, 맹인의 점치는 재주, 무사의 활 쏘는 재주"를 들었다. 

330p

대개 실학자와 성리학자를 구분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 조선시대의 대표적 실학자들 모두 출발전은 성리학이었다. 그 점에서 이들은 성리학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390p

그러나 중인들은 양반 중심의 신분사회를 극복하기보다는 양반을 닮으려는 안일한 입장에 머물렀다. 시문집이나 전기 편찬에 주력한 것은 이들의 한계였다. 결국 중인들은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서 역사적 기능을 하지는 못하고, '그들만의 리그'라 할 중인 문화를 형성하는 데 그쳤다.


<오류>

29p

인헌왕후(효종의 할머니)의 친가인 능성부원군 댁에 보낸 것이다. 

->인헌왕후의 아버지 구사맹은 능성부원군이 아니라 능안부원군이다. 능성부원군은 구치관으로 세조 시대 영의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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