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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훈련된 외교관의 시각으로 풀어낸 에도시대 이야기
신상목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8월
평점 :
이렇게 재밌을 수가!
본격적인 연구자가 아닌 아마추어 필자들의 책은 대부분 이른바 수박 겉핥기 식인 경우가 많다.
얼마 전에 읽은 <한국의 일본 일본이 한국>이 대표적인 경우다.
여러 기자들이 모여서 야심차게 준비한 책이겠으나 내용은 너무나 평이한 자료 모음 수준이다.
다양한 자료를 모아 분석과 식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비로소 한 권의 좋은 책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대중서들의 단점은 자료 제시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자료야 인터넷을 보면 널려 있으니 굳이 책을 따로 읽을 필요도 없는 시대다.
특히 칼럼 연재물을 책으로 엮은 경우 매 회를 주어진 분량에 맞추려다 보니 전체적인 통일성이 떨어지고 중구난방인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여러 면에서 훌륭하다.
제목이 좀 자극적이라 어설픈 야사 이야기면 어쩌나 약간 걱정이 됐는데 최근 들어 보기 힘든, 대단히 성공한 독서였다.
일본의 근대화의 배경에 대해 한국인 필자가 이렇게도 적극적으로 분석한 경우를 접한 적이 없어 신선한 충격이었다.
정말 우리는 일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인가 반성이 된다.
식민지 지배를 진정으로 청산하는 길이 친일파 처벌 뿐일까.
300 페이지 정도로 짧은 분량이고 글솜씨도 좋아 마치 소설 읽듯 한 번에 잘 읽힌다.
표지 디자인도 세련돼서 좋고 다만 제목이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저자에게 바라는 바는, 조선 후기사도 같이 연구해서 일본의 근대사와 본격적으로 비교하는 책을 내 보면 좋겠다.
책에 간간히 조선과 일본 사회의 차이점을 설명하기도 하는데 우리 역사 쪽의 분석이 다소 아쉽다.
<현대 일본을 찾아서>를 읽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생각난다.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게 된 바탕에는 에도시대의 참근교대와 천하보청 제도로 다이묘들이 돈을 쓰게 되면서 화폐경제가 이뤄졌고 그 과정에서 조닌층이 상업자본으로 성장해 신분제가 흔들리고 자본주의의 싹이 텄다.
이런 사회적 바탕 위에 페리의 개항이 이뤄지고 메이지유신으로 갑작스런 근대화에 성공한다.
참근교대가 다이묘들을 약화시키기 위한 제도인 줄만 알았는데 의무적 소비 지출을 통해 에도라는 거대한 도시 문화가 완성되고 숙박업과 운송업 등이 활발해지고 무엇보다 이 행사를 위해 곡식이 아닌 돈이 사용되어 화폐경제가 형성됐는데 정작 다이묘들은 곡식을 봉록으로 받았기 때문에 상인들에게 돈으로 환전하는 과정에서 상인 계층이 급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교환 과정에서 신용을 바탕으로 한 근대 금융업도 성장했다.
천하보청은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쇼군은 징세권이 따로 없어서 다이묘들에게 군역의 확대된 의미로 도시 건설을 요구한다.
도로와 매립지 공사, 급수시설 등 인프라 구축을 다이묘의 돈으로 이룩한 것이다.
에도로 사람이 몰리고 상인 계층이 성장하자 그들의 문화가 만개한다.
유럽을 강타한 우키요에가 그냥 생긴 것이 아니었다.
일본도 목판 인쇄술을 바탕으로 출판 문화가 활발해지고 사회 변화의 주역이 됐는데 왜 조선에서는 상업 출판이 불가능했을까?
문집 한 권을 펴내는 것도 돈이 매우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 쉽지 않았다고 하는데 목판 인쇄가 어려웠던 까닭이 궁금하다.
일본 역시 서양처럼 금속활자가 아닌 목판 인쇄가 주를 이뤘는데 그 차이도 궁금하다.
확실히 일본은 주자학 일변도의 경직된 사회가 아니었고 이미 16세기부터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조선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결국 세상이 서구화, 자본주의화 되었으니 오래 전부터 난학을 수용하고 있었던 일본이 조선을 앞지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나 싶다.
중국식으로 세계화가 됐으면 조선의 운명이 달랐으려나.
중국 외에는 소통하는 세상이 없었고 그나마 청나라가 들어선 후 북벌을 외치면서 배격했던 쇄국정책이 조선을 전근대 국가에 머물게 했던 듯 하다.
천주교가 자생적으로 생겨나 수천 명이 떼죽임을 당할 정도로 강한 신앙심을 보였는데 서양 학문 유입과는 큰 연관이 없었던 듯 하여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14p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에도시대의 일본은 임진왜란 때 납치한 도공이나 조선통신사에게 한 수 배우며 선진 문물을 습득한 문명의 변방국이다. 단언컨대, 일본의 근세 260여 년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32p
같은 시기 서구의 시대상에는 미치지 못할지 모르나, 제도, 관행, 인프라의 형성과 작동이라는 측면에서 동시대 조선의 사정과 비교한다면 그 격차는 엄청나다. 한국인들은 무사가 칼 차고 다니며 공포정치를 펴고, 인민들은 그들의 눈치나 보며 벌벌 떨며 살았다고 알고 있는 에도시대에 이미 일본은 조선을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47p
전근대의 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소수의 중앙 지배층을 정점으로 하는 다단계의 착취적 구조를 기본으로 한다. 교통, 통신이 발달하지 못하고 통치에 민주성이 결여된 전근대이기에 세금은 비효율성도 높고 생산력 확대를 위한 재투자에도 사용되기 어려웠다. 세금은 누군가의 금고로 들어가 사치로 낭비되거나 다 쓰이지도 못하고 소멸되는 국부의 무덤이었다.
73p
전근대와 근대를 구분하는 가장 극적인 차이 중 하나는 이동의 자유에 대한 관념일 것이다. 현대인들은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것이 당연한 권리이지만, 인신이 토지에 부속된 전근대의 보통 사람들은 태어난 곳에서 100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02p
에도시대 출판문화의 특징은 진화 과정에서 '시장원리'가 주효하였다는 것이다. 출판은 상업적인 자생력을 갖춘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고 유통망을 구축하였으며, 이를 통해 독서는 서민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하여 대중화, 생활화되었다. ... 창의적인 비즈니스 기법이 끊임없이 모색된 것은 에도시대를 관통하는 일본 근세의 특징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 사회가 종교, 윤리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고, 지배층도 반역적이거나 지나친 풍속문란이 아니면 관대한 태도를 보인 것도 출판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정보가 특권계층에 의해 독점되지 않고 대중에게 보급되는 것은 불가역적인 사회 변혁의 단초를 제공한다.
141p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지도는 단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이다. 19세기 말에 근대 작도법이 아닌 자체 방식으로 상당한 수준의 지도를 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유럽 문명을 제외하면) 조선의 과학기술 수준이 당시 세계적 수준에 비추어 보아 손색이 없었음을 시사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당시 중국과 조선의 지도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 사상과 사방을 일정한 구획으로 나누어 지리 정보를 표시하는 방격법에 기초하였다. 지리는 철학, 사상, 관념과 분리되지 못하였다. 근대 지도의 요체인 위경도 좌표 개념도 들어서 여지가 없었다. 이노의 지도는 동양의 관념적 지도를 배제한 과학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었다.
185p
백의 선호는 조선의 염색 기술을 답보 상태에 머물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염색천은 제대로 시장이 형성되지 못하였고, 기술자들은 관청에 예속되어 기술적, 예술적 자율성이 제약되었다.
211p
16세기 이후 유럽의 근대국가 성립 과정에서 왕실과 귀족 등 지배층은 '예술의 후원자'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이 통치력 강화에 필수적이었고, 이는 음악, 미술, 문학 등 다방면에서 유럽 문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고급 문화예술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고급 문화예술은 다수에 의해 소비되어 상업적 활력을 갖추기 전까지 그를 애호하고 후원함으로써 취약한 생존력을 보완하고 기술적 축적을 지탱해줄 수 있는 소수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 일본의 도자기 발달사는 이러한 '후원'과 '과시적 소비'가 문화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일본의 도자기문화는 차문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219p
유럽의 지식사에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 도덕과 정치를 분리한 것이 근대 정치의 토대를 닦았듯이, 소라이가 통치철학으로서의 유학이 교조적 관념론, 도덕론에 치우지지 않고 실증과 실용의 끈을 놓치 않도록 한 것은 근대 정치의 발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228p
막부의 쇄국정책은 '폐문정책'이 아니라 막부가 외부와의 사람, 물건, 정보의 교류를 통제하는 '창구독점정책'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에도시대의 쇄국정책은 서양의 것을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조선의 위정척사류의 이념형 고립정책과 같지 않다. ... 막부는 서양의 정보를 통제하였지 배척한 것이 아니다. 배척은커녕 민감하게 그 동향을 주시하였다. ... 일본의 지식인들은 근대 유럽문명이 가져온 물질적 혜택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혜택을 어떻게 흡수하여 인간의 삶을 이롭게 할 것인가? 그것이 당시 난학을 대하난 지식인들의 태도였다.
254p
전근대에서 근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가 금융 근대화이다. 에도시대의 료가에쇼들은 근대 금융업에 필적하는 자체 신용금융제도를 오랫동안 발전시키면서 노하우를 축적해왔다. 이러한 근세기 민간 주도 금융의 발달은 근대화시기 서양 금융제도의 일본 내 수용과 자체적 변용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이는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 성공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265p
막부의 화폐 지배력이 절대적이었다면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막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힘을 축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막부가 화폐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화폐 공급량을 늘여야 했으나, 화폐의 개념이 금, 은 본위화폐 주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막부는 자신의 정치적 권위로 신용을 창출하여 그를 화폐로 전환시키는 발상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