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 - 시대를 앞선 통찰로 불운하게 생을 마감했던 우리 과학자들
이종호 지음 / 사과나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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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대한 이야기.

과학자라기 보다는 실학자로 봐야 할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과학자들, 뉴턴이나 갈릴레오처럼 과학적 업적을 이룬 위인들 이야기는 아니고, 여러 서책과 일상생활의 기술들을 모아 책으로 펴낸 수준이다.

이 정도만 해도 성리학 위주의 나라에서 뭔가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던 점은 가치가 있을 듯 하다.

그렇지만 저자가 정약용의 기중기가 실제로 유용하게 쓰이지 않았음을 지적한 것처럼, 근본적인 서구의 과학 혁명과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결과적으로 조선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되지는 못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가 인상적이다.

고위관료이면서도 낙향했던 오랜 기간 동안에 임원경제지라는 백과사전을 편찬한 열의가 놀랍다.

실제로 농사를 지어 성리학 서적이 아닌 일종의 기술서를 펴냈다는 행보가 독특하다.

저자가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비교적 성실하게 기술해서 재밌게 읽었다.

다만 조선시대 과학이라는 표현도 좀 과대포장된 거 아닌가 싶은데, 거기에 순교자라고까지 제목을 붙이는 건 오버지 않나 싶다.

과학의 발전을 위해 체제와 맞서 싸운 과학자라 부를 만한 사람은 없고, 다른 이유로 유배 등 불우한 삶을 살았고 야인으로 있는 동안에도 열심히 학문을 연마해 저작을 남긴 이들이다.

순교자라고 하면 천주교인처럼 체제의 강압에 대항해 목숨을 바치는 전사가 아닌가.

그러기에는 다들 너무 점잖은 인물들이다.

맨 마지막 참고 문헌 수준이 아쉽다.

학자가 아니니 이해는 되지만, 네이버 캐스트나 신문기사, 잡지가 참고문헌이라니.

책은 자료모음집 수준을 넘어서야 하는 것인데, 아쉽다.

혹시나 싶어 참고문헌으로 실린 기사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그대로 옮긴 문장들이 많다.

참고문헌으로 표시했으니 상관없는 문제인가?


<인상깊은 구절>

67p

<동의보감>은 약 400년 전의 의학 수준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동의보감>에 실려 있는 내용이 모두 맞을 까닭이 없으며 허준이 현대의학을 뛰어넘는 의학자일 수도 없다. 허준은 4세기 전의 훌륭한 의학자일 뿐이며 <동의보감>은 4세기 전의 의학을 잘 정리해 준 유용한 의학서라는 것이다.

81p

동양 사상에서는 사체를 절개하고 해부하여 장기를 들여다 본들 거기서 얻은 지식이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다. 죽은 사람에 대한 지식은 살아 있는 사람의 육체에 적용하거나 이용할 수 없는, 그야말로 죽은 지식이라는 뜻이다. ... 동양의 의학자들 가운데도 실제로 해부를 해본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동양에서의 해부는 그야말로 일시적은 호기심 차원에 그쳤을 것이라고 했다. ... 전유형의 해부는 파격적이고 그 자체로 의학의 본질에 접근한 것이지만 역사상에서 그의 시도는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해부 사건이 크게 부각되지 않은 것은 전유형이 억울하게 참형을 당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인들이 해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이후로 조선에 제2, 제3의 전유형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보면 해부 경험이 치료에 별다른 이익을 주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의아하겠지만 충분한 근거는 있다. 

108p

"아아. 사대부가 때를 만나지 못하면 갈 곳은 산림뿐이다. ... 그러므로 한 번 사대부라는 명칭을 얻으면 갈 곳이 없다. 그렇다고 사대부의 신분을 버리고 농,공,상이 되면 안전해지고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그런즉 천하에 지극히 좋은 것이 사대부라는 이름이다. 사대부라는 이름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옛 성인의 법을 준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공상을 막론하고 사대부의 행실을 한결같이 닦는 것이 마땅하다."

204p

그러나 학자들은 보다 엄밀한 설명을 요구한다.  ... 1인당 분담되는 에너지는 대략 10.3kg이라고 계산했다. 이 무게는 일반적인 사과 한 상자의 무게인 15kg에도 못 미친다. 사과 한 상자는 보통 사람도 들 수 있는 무게이므로 이 무게를 들기 위해 거중기와 같은 거창한 기구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원 화성을 쌓을 때 거중기는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몸체가 워낙 커서 이동을 위해 분리, 조합하는 데 너무 많은 품이 들기 때문이다. ... 박제가가 서양인들을 초청하자는 원론적인 주장을 했지만 정약용은 서양의 앞선 과학기술을 배우려면 어떤 구체적인 조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237p

정약용은 농사를 전혀 짓지 않고 농업 원론만 얘기한 반면 풍석 서유구는 직접 농사를 지은 체험을 토대로 구체적인 농사 기술을 제안했다. ... 물론 다산도 자신의 생각에 합리성을 부여했는데, 자신의 경세학은 당장의 활용보다는 이상적 통치 이념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 다산의 이 같은 태도에 대해 풍석은 강력하게 비판했다. 서유구도 이상을 추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이 땅의 현실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철저한 현실론을 견지했다. ... 장기간을 열악하게 살았다고는 하지만 방대한 양의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당대 누구보다도 저술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배를 곯고 직접 농사를 지어 생계를 해결하면서도 글을 쓸 시간이 있었고 또한 참고문헌에 900여 권이나 적을 정도로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311p

최한기는 의학 자체애 대한 관심은 없었다. 즉 의사로서의 과학성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사상가로서의 이론에 치중했다. 다시 말해 새로운 과학 지식을 받아들여 자신의 사상 체계의 토대로 삼기는 했으나 새로운 과학 지식의 창조자가 되지는 못했다는 설명이다. 이를 두고 강신익 박사는 "최한기의 의학사상은 있지만 최한기의 의학은 없다"고 말한다.

355p

현대의 기준에서 본다면 당시의 발명가 수준은 아마추어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다. 당시 발명가들(곧 과학자들)의 수준을 잘 보여주는 한 예는 영구동력기관에 대한 그들의 집착이다.


<오류>

36p

<미암일기(국보 400호)>의 저자이기도 한 유희춘이

->미암일기는 보물 260호다.

101p

이중환은 성호 이익의 재종손(사촌형제의 손자)이면서

->재종손은 사촌이 아니라 6촌 형제의 손자이다. 즉, 이중환의 할아버지인 이영은 이익과 4촌이 아니라 6촌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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