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생산의 기술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23
우메사오 다다오 지음, 김욱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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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특유의 세밀함이 느껴지는 책이다.

1960년대 출간된 책으로 편지 쓰는 격식이나 타이프라이터로 글을 쓰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요즘 시대와 전혀 맞지 않는 내용도 있지만, 전체적인 주제와 방법론에는 매우 동의하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지적 생산의 기술" 이라는 제목이야 말로 내가 추구하는 삶의 즐거움과 방향성을 너무 잘 대변해 주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독서, 즉 지적 활동 혹은 즐거움만 생각했는데 정보를 창조하는 지적 생산, 즉 글쓰기 측면도 고려해 봐야겠다.


1. 한번에 통독하기

나눠서 읽는 것보다는 한번에 쭉 읽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데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

가벼운 책은 한 시간에 한 권도 가능하지만 보통 한 시간에 50~60 페이지를 읽는다면 최소 6~8시간 정도 소요되므로 이틀은 걸린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밑줄을 긋고 두번째 읽을 때 정리하라고 한다.

확실히 책을 읽는 동안 옮겨 적으면 맥이 끊기긴 한다.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기도 하고 책이 지저분해지는 게 싫은지라 북다트를 꽂아놓고 나중에 옮겨 적는다.

처음 읽을 때는 한 번에 쭉 통독한 후 체크한 부분만 다시 재독을 하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 하다.

이 때 시간차를 두는 게 좋다.

어느 정도 기억에서 흐릿해질 때 다시 읽으면 간섭 효과도 없어지고 훨씬 쉽게 이해가 된다.

독서 노트 쓰는 게 항상 고민이었다.

알라딘에 간략한 기록이라도 남기긴 하지만 정리를 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나중에 보지도 않기 때문에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늘 고민거리였다.

저자에 따르면 새로운 지식들을 전부 카드화 시켜 분류한 후 자주 들여다 봐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고 한다.

저자처럼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학자는 아니므로 그렇게까지 노력을 들일 수는 없지만 기억하고 싶은 내용들은 독서 노트에 간략하게 기록해 자주 봐야겠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하나의 문장으로 기술하라는 것이다.

나 역시 간단하게 적겠다고 키워드만 적다 보면 나중에 읽을 때 무슨 얘긴지 모를 때가 많다.

꼭 지식에 관한 글이 아니라 해도 나의 생각과 감정을 적을 때도 가급적 문장으로 기술하면 하나의 소논문이 될 수 있다고 하니 앞으로는 메모 형식을 바꿔 봐야겠다.


2. 형식을 갖춘 일기 쓰기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일기를 썼는데 어느 순간 감정의 과잉이라는 생각이 들어 중단했다.

나중에 읽어 보면 나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워 기록으로 남기고 싶지가 않았다.

저자는 감정적인 글쓰기 보다는, 나에 대한 하루 일과 보고서를 써보라고 한다.

형식을 갖춰 오늘 경험한 사건들을 나열하고 그에 대한 감상을 간단하게 쓰는 것이다.

나에게 제출하는 경험 보고서라는 형식이 신선하다.

유튜브에서 내면 관찰 일기를 쓰라는 영상이 있었는데 비슷한 맥락 같다.

한 번 시도해 보고 싶다.


3. 자료를 분류하여 자주 들여다 보기

이 책의 핵심이 바로 세분화 시켜 분류하기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생각난다.

요즘은 인터넷 시대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어 수많은 자료들을 분류하는 것도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저자는 강박적일 정도로 세밀하게 자료들을 분류하여 캐비넷 파일에 세워 놓고 필요할 때 바로 꺼내서 사용한다.

컴퓨터 자료 정리처럼 폴더를 만들어 해당 내용물을 보관하고 그 폴더들을 캐비넷 파일에 보관하라는 것이다.

내가 유일하게 탐닉하는 게 바로 책인데도 절대 구입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빌리는 까닭도 이 정리의 문제 때문이다.

특히 책은 부피가 커서 금방 공간을 탐식해 버린다.

공간의 활용과 자료 정리는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문제다.

책에 나온 오픈 파일과 캐비넷을 활용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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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기원과 그 배경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22
시라카와 시즈카 지음, 심경호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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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이와나미 문고 시리즈를 한꺼번에 구입해서 신간 코너에 꽂혀 있었다.

흥미로운 제목들이 아주 많아 여러 권 빌렸다.

우리나라의 살림 문고 느낌이랄까?

책 디자인이나 판형도 독서 의욕을 고취시키게 잘 만든 듯 하다.

저자 이름이 낯익은 듯 해 찾아 보니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던 책이다.

2011년도에 쓴 리뷰가 알라딘에 있어 반가웠다.

다른 번역 탓인지 아니면 독서 능력의 퇴화인지 세부적인 부분은 이해를 다 못하고 대강의 뜻만 알아 먹었다.

일본 학계의 중국사는 깊이가 있고 아주 흥미롭다.

전설 속의 나라 같은 은나라와 주나라, 그리고 많은 제후국들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었고 상형문자인 한자의 어원이 고대의 주술, 즉 제정일치 사회에 있었음을 알게 됐다.

오늘날의 종교나 사상체계와는 달리 고대 사회는 신을 섬기고 이민족 신의 액을 피하는 제액 의식이 주를 이뤘다.

은의 왕들이 왜 무축왕이라 불렸는지 이해가 된다.

갑골문에 새겨진 점복이 곧 나라를 지탱하는 근본 힘이었던 셈이다.

주나라가 세워지면서 인격신인 은의 帝 대신 비인격신인 天 사상으로 바뀐 점도 흥미롭다.

상형문자인 한자가 이집트나 수메르 문자와는 달리 문화의 단절 없이 여전히 중국에서 살아있고, 그것을 기록한 갑골문과 금문의 존재가 고대인의 사상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는 점이 정말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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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明 2018-10-23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글 쓰셨네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읽어 보고 싶은 책입니다.
 
인정사정, 조선 군대 생활사 고전탐독 1
원창애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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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는 흥미로운데 내용은 사실들의 나열이라 지루했다.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사실을 잘 조합해 의미를 찾아 주는 게 좋은 교양서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좋은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면 참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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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1
이영훈 지음 / 백년동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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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적인 제목 때문에 거부감이 들었던 책이다.

저자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에 경제사 전공이라는 약력만 보고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경제학자가 섣불리 주류 학계의 이론을 논파하는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너무 재밌고 인상깊게 읽었다.

세종이 추구했던 정책의 역사적 의미라는 주제도 흥미롭지만, 뒷부분에 간략하게 나온 개인의 자유, 그리고 그 자유인이 세운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인상깊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나 역시 학교에서 한 번도 개인의 자유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서양은 개인주의가 만연해 이기주의로 흐르는 게 문제이고 우리는 그에 반대되는 집단주의 성향이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재산권이라는 의미는 제대로 배웠던 기억이 없다.

막연하게 사유재산권은 도덕적이지 않다는 느낌마저 갖고 있었다.

사회주의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도, 개인이 사적으로 재산을 독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국가가 모든 국민들이 잘 살 수 있게 돌봐주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의 가장 핵심 요소가 바로 개인의 자유와 사적 재산권인데 그것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부족하니 21세기에도 여전히 전통사회의 영향력이 강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가 실려 있는데, 요즘 비난받고 있는 뉴라이트 학자인가 궁금해진다.

원래 대중은 어리석고 집단주의적 성향을 지니기 마련이니 책에 나온대로 창조적 소수가 전통문화와의 간극을 좁혀가며 선도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할 듯 하다.

세종은 과연 양반이 지배하는 예치주의 도덕주의 국가의 기틀을 만든 훌륭한 성군임은 분명하다.

저자의 평가대로 그런 국가 정책 덕분에 5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왕조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을 오늘날의 정치적 관점에서 성군으로 평가하는 것은 오류임이 분명하다.

조선과 대한민국은 전혀 다른 사회이기 때문이다.

<서울과 교토의 1만년>이라는 책에서도 읽은 바지만,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한국 사회는 동족이라는 북한과는 매우 상이한 체제를 가졌고 오히려 식민 지배의 경험으로 적대시하는 일본과 훨씬 동질적일지 모른다.

저자가 계속 책을 낸다고 하니 관심을 갖고 읽어 볼 생각이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었던 점은, 과연 훈민정음의 창제가 단순히 중국어 발음을 정확히 표기하기 위한 발음기호의 발명인지이다.

세종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내면화 시키고 국가 정책으로 공고화 시킨 것은 분명하니,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관점에서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아닌 듯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어를 정확히 표기하겠다고 발음기호로 만들었다는 게 쉽게 수긍이 안 간다.

당시 중국어가 오늘날 영어만큼 일반에 널리 쓰인 것도 아니고, 학문이나 외교 문서 등에서 문자로써 통용됐을 뿐인데 굳이 새 문자를 만들어 발음기호까지 달아서 중국어를 표시할 필요성이 그렇게나 컸을까?

의도가 무엇이든 오늘날 한글의 발명이 끼친 엄청난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훈민정음 하나만으로도 세종은 한국사 최고의 위인임은 분명하다.


<인상깊은 구절>

151p

고려는 고구려의 천하관을 계승하였다. 만주와 한반도의 패자로 군림했던 고구려는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자부하였다. 그것은 어느 한 나라가 주도하는 천하가 아니라 병존하는 다원적인 천하였다. 그 같은 천하관은 삼한 고유의 종교적 전통과 결부되어 왕권의 신성을 보증하는 정치철학으로 역할을 하였다. 고려의 국왕은 중국 황제에 신속하였지만, 다원적 구조의 천하관에 상응하는 상대적 우열의 관계를 넘지 않았다. 후술하듯이 고려왕조는 독립국의 상징으로서 하늘에 대한 제사를 고수하였다.

 조선왕조의 건립자들이 고려라는 국호를 폐하고 기자조선을 잇는 취지의 국호를 명에 자청한 것은 한국문명사에서 더없이 큰 단절을 의미하였다. 이후 한국사는 중국사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누가 뭐래도 그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 중국과의 사대관계는 정치군사적 명분을 넘어 인간, 사회, 국가, 세계를 포괄하는 형이상학의 질서로 내면화하기 시작하였다. 

153p

변계량은 우리 동방의 시조는 단군으로서 원래 천자가 분봉한 나라가 아니며, 지난 1천 년에 걸쳐 천제를 지냈다고 한 다음, 비록 천제가 천자의 예이긴 하나 심한 가뭄을 당하여 제후도 임시변통으로 행할 수 있는 예라고 주장하였다. 태종은 변계량의 주장을 받아들여 천제를 복구하였다. ... 변계량이 수천 년 동안 행해온 예를 폐함은 부당하며, 더구나 조선은 강토가 수천 리로서 중국 내의 백리 제후와 비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에 대해 세종은 "어찌 강토가 수천 리라 하여 천자의 예를 분수없이 행하리오" 하면서 다시 거절하였다. ... 천제는 하늘과의 관계에서, 종묘는 조상신과의 관계에서 국왕의 절대적 권위를 대변하였다. ... 사대는 하는 자나 받는 자나 모두에서 정략적 관계이다. 조선 태종조까지의 사대가 그러하였다. 양국 간에는 군사적 긴장이 잠재하였다. 세종조에 들어오면 분위기가 바뀐다. 한마디로 세종은 지성으로 사대하였다.

160p

고려왕조는 군사국가였다. 그 점에서 도덕국가인 조선왕조와 달랐다. 고려는 3만여 명의 중앙군을 보유하였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고 그로부터 세를 걷어 살았다. ... 고려왕조는 이들 중앙군을 핵심으로 하는 군사공동체였다. 수많은 외침이 있었지만 고려는 자력으로 격퇴하거나 오랫동안 항쟁하였다. 

168p

주자가례에 따른 3년상의 확산으로 인해 농촌 품관을 핵심 전력으로 하는 조선초기의 중앙군제가 약화되어 간 것만큼은 부정하기 힘들다. 조선왕조는 군국의 수준조차 흉례가 지배하는 나라로 되어갔다. ... 세종은 천년 이상을 이어온 천제의 거행을 중단하였다. 하늘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포기함으로써 천명의 대리인으로서 군왕의 권위는 중국 황제에 대한 사대를 통해 확보될 수밖에 없었다.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는 것은 하늘이 내린 도로서 인륜이다. 세종은 스스로 인륜의 지극한 모범을 보임으로써 그의 신료와 백성에 대한 군왕의 권위를 확보하였다. ... 조선의 국가체제는 제후 왕, 大夫 관료, 士 양반, 庶 상민, 賤 노비의 위계로 짜였다. 그 위에 중국의 천자가 놓임으로써 완성되는 위계였다. 이 나라는 점점 예의 질서로 유지되는 도덕국가로 순화되어갔다. 그럼에도 국가의 지배력은 강고하였다. 예의 질서가 천자를 정점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15~16세기의 천하는 명 제국을 중심으로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그런 가운데 조선왕조가 구축한 예의 국제질서로서 국가체제는 부동의 안정성을 구가하였다.

173p

세종이 독자의 문자를 개발하게 된 계기는 동시대 조선의 한자 발음과 중국의 그것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 세종은 동시대 북경어 중심의 한자 발음을 정확히 표기할 목적에서 발음기호를 창제하였다. 그것이 훈민정음이었다. 통설대로 훈민정음은 하층 서민이 쉽고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개발된 문자가 아니었다. 한자를 사용하는 지배신분의 사람들이 동시대 중국의 기준에서 정확한 중국어를 구사하고 훌륭한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아름다운 시문을 지을 수 있도록 개발된 발음기호였다. ... 한문 밖의 일상의 조선어도 표기할 수 있음이 확인되자 훈민정음은 더 이상 발음기호가 아니라 표음문자로 바뀌어 보급되어갔는데, 그것을 가리켜서는 언문이라 하였다. ... 중화의 세계로 깊숙이 진입해가기 위해서는 언어, 문자 생활마저 중화의 기준으로 교정할 필요가 있으며, 그를 돕는 보조문자가 필요하였다. 다시 말해 세종의 한글 창제는 15세기적 국제질서에서 조선왕조가 소중화로서 추구한 개성적인, 그래서 역설적으로 민족주의적이기도 한, 문화정책이었다.

188p

조카를 몰아내고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는 군왕의 절대 권력을 확립함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강력한 개혁 의지는 백성에 대한 양반관료의 특권적 지배체제를 겨냥하였다. 세조는 기존의 호적을 모조리 불사른 다음 백지 상태에서 전국의 인구조사를 강행하였다. ... 나아가 세조는 양반관료에 지급하는 토지의 규모와 권리를 대폭 제한하였다. 이 일로 인해 세조는 신하들로부터 폭군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세종은 결코 그런 무리를 범하지 않았다. 그의 통치는 주로 학술, 신분, 예제, 외교를 대상으로 했으며, 그 방면에서 업적을 남겼다. 전술한 대로 그가 정비한 예의 국제질서로서 국가 체제는 이후 5세기를 뻗친 조선왕조의 기틀이 되었다. 

191p

조선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농촌사회에 새로운 지배신분으로서 양반이 들어서고, 양반 지배 하의 노비 인구가 증가하고, 노비의 사회적 지위가 약화되고, 그 배경에 신분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유교 이념이 있었다. ... 14세기까지의 고려왕조는 공동체사회임에 비해 15세기 이후의 조선왕조는 양반-노비를 축으로 하는 신분제사회라는 설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사학의 주류는 조선왕조를 유교국가로 설정하고 그 국가체제의 근세적 합리성을 부각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조선왕조는 유교적 민본주의 이념에 입각한 일종의 민주주의 정치체제이며, 국왕과 신하의 권리는 상호견제의 균형을 이루었으며, 16세기 이후 중앙 정치에서 나타난 당쟁은 일종의 정당정치였으며, 농촌사회는 성리학의 보급에 따라 민권 의식의 고양을 보게 되었다는 것 등등이 한국사학의 주류를 점해온 담론이었다. 1980~1990년대 국사 교과서는 조선시대를 '근세 사회'로 시대 구분하였다. 한영우는 조선왕조를  '근세 관료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그 시대의 유교적 문민정치의 전통과 유산이 현대 한국사회의 역사적 바탕을 이룬다는 취지에서이다. ...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보급되 한국사 교과서에서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와 같은 시대로, 곧 '중세'로 구분되어 있다. 

194p

1899년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은 만세불변의 전제정치라는 헌법을 제정하였다. 황제는 탐욕스럽게도 국가의 주권을 자기의 가산으로 움켜쥐었다. 불행하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그 왕조는 망했으며, 2천만 생령을 다른 민족의 노예로 넘겨주고 말았다. ... 자유인이 자기 의지와 계산으로 노동하여 취득한 재산은 그 누구도 탈취하거나 처분할 수 없는 그의 절대적 권리이다. ... 먹고 살 만한 최소한의 재산은 인간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든다. 근대 국가는 '소유권 절대의 원칙'과 '계약 자유의 원칙'에 입각한 민법을 제정하여 자유인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있다. 민법은 인간을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의 주체로서 자기 문제를 자율로 처결하는 '사적 자치의 주체'로 상정하고 있다. ... 오늘날의 세계는 이 같은 애덤 스미스와 칸트의 가르침에 따라 영구평화와 영구번영의 길을 걷고 있다. 바로 그 길이 지난 18~20세기를 이끈 세계 지성의 주류였다. 1948년 대한민국이 성립하고 오늘날까지 그런대로 볼만한 성취를 이룩한 것은 그 세계사의 주류에 훌륭하게 올라탔기 때문이다. 누가 그 길을 인도하였는가. ... 이 나라의 건국헌법은 그의 국민을 자유인으로 선언하였다. 다소간의 흠결이 없지 않았지만 이후 이 나라의 국민은 자유인으로서 그의 삶을 영위하였다. 그 역사가 거의 70년이다. ... 나는 교과서들이 우리 조상이 소년기에 읽은 <동몽선습>이나 <소학>의 현대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세계사적으로 '근대'라고 부르는 문명의 기초 요소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적 자치의 주체'로서 개인, 개인의 자유와 독립, 그 기초조건으로서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 자유인의 정치적 통합으로서 민주공화국, 자유인의 경제체제로서 시장경제, 자유인의 국제질서로서 자유통상 등은 어느 교과서 어디에도 그림자초자 비치지 않는다. ... 전통 성리학의 세계에서 '개인'은 없었다. ...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가 지난 40여 년간 왜적과 쉬지 않고 싸운 것은 개인의 자유활동과 자유판단권을 위해서였다고 강조하였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독립운동을 하였던가. 그저 "대한 독립 만세!"가 아니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더욱 아니었다. 다름 아닌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위해서였다. 자유인의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 그 '개인의 근본적 자유'는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전통 성리학의 세계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만이 아니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유교문명권 전반에서 개인의 자유라는 정치철학의 범주는 결여되었다. 그것은 하늘이 달라져야 보이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었다. 서양도 종교개혁 이후에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선 세계를 주도하는 선진문명으로 올라서기 시작하였다. ... 초대 대통령은 신생 대한민국의 기초가 되는 정치이념이 서양민주국에서 유래했음을 숨기지 않았다. 이후 지금까지 어느 정치가도 역사와 국민 앞에서 이렇게까지 정직해본 적은 없었다. 이 나라는 서양민주국을 모범으로 하여 1919년 3.1운동 이후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꾸준하게 실천해온 결과로 세워진 나라이다. 이 나라는 앞으로 자유인의 공화국으로 발전해갈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갈 길이다. ... 이 나라는 미국과 같은 자유인의 공화국으로 발전해갈 것이다. 상이한 이해관계의 인간들을 신뢰와 통합으로 이끄는 삶의 원리에 있어서 더없이 큰 변화의 선언이었다. 2천 년을 이어온 한국 문명사의 대전환이었다. ... 그럼에도 건국의 주체가 선택한 자유통상의 경제체제는 이후 50년간 미국 헤게모니의 세계체제 속에서 엄청난 물질적 성취를 이룩하였다. 경제성장은 민족중흥의 깃발로 추진되었으며, 민족의 우수한 역량으로 설명되었다. 개인과 그의 자유는 천박하게 들리는 이기심에 대한 매도와 더불어 슬슬 위축되었다.  "우리의 도덕적 개인은 서양의 이기적 개인보다 훌륭해." 앞서 소개한 유교국가론의 대두와 더불어 이런 이야기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덧 세종의 애민정치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적 원류로 선양되기 시작하였다.



<오류> 

142p

"웃치긴은 칭기즈칸의 막내아들이다"

-> 웃치긴은 칭기즈칸의 막내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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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가 쓴 인수대비 - 조선 왕실 최고 여성지식인의 야망과 애환
한희숙 지음 / 솔과학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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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식상한 주제가 아닌가 싶으면서도, 학자가 쓴 인수대비는 어떤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못 지나치고 읽게 됐다.

조선 왕비를 대상으로 논문을 많이 낸 전공자가 쓴 책이라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 들 만큼, 깊이있고 당대 사회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인수대비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1) 여성 교육의 선구자이자 여성 저술가로서의 인수대비.

그녀는 왕실 여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여성 교육서인 <내훈>을 발행했다.

내용이 가부장적이라 오늘날에는 크게 의미부여를 못하고 있지만 저자의 평가대로 책 한 권 내기가 매우 어려웠던 시절에 왕실 최고 여인이 교육서를 발간한 것 자체가 큰 의의가 있다.

가부장적 여성상이야 당대의 이데올로기였으니 그것을 추종하는 것이야 너무 당연한 일이다.

비록 여러 책에서 좋은 구결을 따온 편집본이긴 하나 그만큼 많은 책을 읽고 유교적 소양이 풍부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저자는 이런 배경에 중국 황제의 후궁이 된 두 고모의 영향력을 들고 있다.

사실 이 고모들에 대한 조명이 무척 신선했다.

알려진대로 한확의 두 누이는 공녀로 선발되어 영락제의 후궁이 된 여비와, 선덕제의 후궁이 된 공신부인이다.

여비는 불행히도 영락제 사후 순장됐지만 공신부인은 선덕제 사후 손자인 성화제를 보호한 공으로 78세에 사망할 때까지 명 황실에서 존숭을 받았다.

조선에서는 그녀를 외교 채널로 삼아 세조의 등극과 성종비 윤씨의 폐위 등을 주청했고 한확이 큰 역할을 한다.

명으로부터 많은 물품을 하사받은 집안에는 중국 서적들이 많았을 것이고 그 집안에서 자란 인수대비는 당대 최고의 여성 지식인이 되어 훗날 저서까지 편찬하게 된 것이다.

21세에 청상과부가 되어 오직 자녀 교육에만 힘쓰고 시부모를 한결같이 받든 인수대비의 입장에서 첩을 질투하여 남편과 불화하는 며느리 윤씨를 용납하기는 어려웠을 듯 하다.


2) 드라마에서 보면 정희왕후는 문자를 몰라 며느리 인수대비에게 수렴청정권을 넘기는 것처럼 묘사되나 사실 정희왕후는 남편 세조의 반정에 적극 협조하고, 아들 예종과 손자 성종 대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휘두른 여걸이었다.

인수대비는 아버지 한확이 죽고 남편마저 세상을 뜨자 오직 시어머니인 정희왕후에게 의지하여 조심스럽게 처신한다.

정희왕후 역시 며느리를 존중하여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 그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고부간에 잘 협력하여 어린 왕의 치세를 안정시킨다.

단종처럼 어린 나이에 즉위한 성종이 주변 종친에게 권력을 빼앗기지 않고 편안한 종사를 이어간 배경에는 이들 고부간의 화목도 크다고 할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적장자를 낳고도 왕실의 불화를 일으킨 며느리 윤씨를 대비들이 받아들이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훗날 왕비가 되는 정현왕후가 정희왕후의 일족이고 그 아버지가 조정의 고관이었던 것과는 달리, 폐비 윤씨는 아버지가 일찍 죽어 그늘막이 되어 줄 친정이 없었다.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그녀 역시 종 2품 숙의로 입궁한 간택후궁이었기 때문에 양반가의 여식이었으나 집안이 어려웠다.

연산군을 낳은 뒤 4개월 만에 폐비 논의가 있고, 둘째 아들이 태어난 직후 문제를 일으켜 쭃겨난 걸 보면 산후 우울증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특별히 폐비 윤씨만 불쌍한 것은 아닌 듯 하다.

세종은 단지 며느리가 남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상한 방술을 행했다는 모호한 이유로 세자빈을 폐출시켰고 다음 며느리 역시 동성애라는 큰 잘못이 있긴 했으나 어쨌든 또 쫓아냈다.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처는 병이 있다는 이유로 시아버지 세종에 의해 쫓겨났고 제안대군의 처도 시어머니 안순왕후에 의해 쫓겨났다.

이혼당하면 재혼할 수 없는 사회에서 특별히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다른 곳도 아닌 왕실에서 처를 쫓아내는 사례들을 보면 연산군이 왕위에 올라 어머니의 원수를 갚겠다고 피바람을 불러 일으킨 탓에 폐비 윤씨 사건이 크게 각인됐을 뿐이지 폐비 사건이 아주 이상한 경우는 아닌 듯 하다.

숙종도 다음 왕위를 이을 아들 경종의 어머니를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았는가.


<인상 깊은 구절>

58p

그러나 한확은 명나라 사신에게 베푸는 잔치에는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서 한확의 뛰어난 처신술을 볼 수 있다. 한확은 명의 정사임을 내세우지 않았고, 황친이 되었다 하여 결코 오만하지 않았으며, 조선의 신하임을 잊지 않았다. 세종 역시 이러한 점을 높이 사서 그를 중용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가족을 더욱 우대했다. 한확은 청주 한씨 가문의 위상을 거가대족으로 확실하게 굳혔다.

84p

아버지 한확의 죽음은 수빈 한씨에게는 매우 큰 슬픔과 타격을 주었다.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잃은 것이다. 친정 부모를 모두 잃은 수빈 한씨는 미래의 왕비가 되기 위해서는 시부모인 세조와 정희왕후를 잘 섬겨야 함을 왕실 생활 속에서 이미 체험했다. 문종의 두 부인이 세종의 눈에 벗어나 쫓겨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조 내외를 부도로써 섬기며 효부가 되기 위해 더욱 더 노력했다.

92p

그녀는 세조 부부에게 신임을 얻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에게 더욱 더 잘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대저 사람의 타고난 복과 나라에서 주는 녹봉은 數가 있는 것이며, 재력은 오로지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사치를 숭상하면 반드시 재물을 다하는 데 이를 것이다." -세조실록

'엄격' '강직' '강인' 이런 단어들은 자식을 둔 양반가 과부들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 '애비 없는 자식' 과부 자식'에 대한 편견과 상실감을 극복하는 길은 어머니의 강한 도덕성과 자식에 대한 엄격성에 있었다. 

102p

단종의 폐위를 직접 경험했던 정희왕후는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왕실의 안정을 위해 원상 한명회의 힘을 필요로 했다.

154p

여성 교육에 목적을 둔 책이지만 제시된 구체적 사례들은 상당수 아들이 그 부모에게 효도한 이야기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 내용은 부모에게 효도할 것과 아내를 잘 관리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165p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는 후궁을 대접함에 있어서도 너그럽고 대범하여 도에 맞았으며 양로연이나 설과 같은 내전의 연회 때에도 의례가 모두 법도에 맞아 모두 칭찬했다고 한다. 최고의 가문을 친정으로 둔 권세가 한명회의 딸답게 자신감 있는 의연하고도 기품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윤씨는 아버지 없는 가난한 집안의 후궁출신이었기에 자신감 부족인 듯 내명부를 장악하지 못했다. 성종의 후궁들로부터 최고의 권위와 존경을 받기에는 아직 일렀다. 또한 20세 초반의 한창 젊은 성종은 산고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왕비보다 후궁들을 더 총애했다. 윤씨는 이러한 성종의 행위를 참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위치가 다른 후궁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협과 피해의식까지 느꼈다. ... 내명부와 외명부의 귀감이 되어야 하고 왕실 여성들의 기강을 다스려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갖고 있는 왕비가 투기를 일삼는 것은 왕권 강화에 흠집을 내는 것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8p

대간들의 주장이 이렇게 강한 것은 대간제도를 통하여 유교적 이상 정치를 달성하고자 하는 정치의식이 확대되어 갔기 때문이었다. 국왕이 반대하는데도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성종대의 대간은 유교적인 이상 정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 이러한 이념적이고 이상적인 당위성에는 어느 누구도 심지어 국왕조차도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213p

그녀는 왕비가 되고, 대비가 되어 왕을 고를 수 있는 권리를 놓치지 않았으며, 결코 최고의 권력자가 할 수 있는 수렴청정을 며느리에게 넘겨주고 뒷방 늙은이로 물러날 여성이 아니었다. 남편 세조와 함께 한 세월 속에서, 그리고 아들 예종이 왕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녀는 현실 정치 속에서 많은 것을 터득하고 단련했다. ... 정희왕후는 인수대비에 대해서 매우 우호적이었고, 그 위상을 높여주기 위해 애썼다. 정희왕후는 시어머니였지만 인수대비의 든든한 지원자였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며느리로서의 효도와 임무를 다했다. 두 사람은 성종을 사이에 두고 왕실의 안정과 왕권강화를 위해서 서로 조력자였다. ... 왕실은 계급질서로 운영되는 곳이다. 인수대비는 웃전인 정희왕후를 믿고 의지했고, 정성을 다했으며 한시도 그녀의 옆을 떠나지 않았으며, 그녀의 뜻에 순종했다. 그것이 왕실의 권위와 안녕을 지키는 길이자 곧 자신과 자식들을 보호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296p

정통성이 부족한 채 왕위에 올랐던 성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대간들과 치열한 정쟁을 했듯이, 폐비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무시를 당해야 하는 능상지풍의 분위기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연산군은 대간들과의 정쟁 속에서 폭군이 되었다.  궁극적으로 성종과 대간들의 대립 속에서 왕권 강화를 위해 단행되었던 폐비 사사 사건은 연산군을 폭군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인수대비의 노년은 불행했다.

301p

효를 강조하는 유교 문화 속에서 연산군이 어머니의 신원을 회복시키는 것은 곧 효의 실천이었고,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었다. ... 그의 아버지 성종이 대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생부인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생모 수빈 한씨를 인수대비로 추숭한 것과 같이, 연산군 역시 많은 반대와 제지에도 불구하고 생모 폐비 윤씨의 신원을 회복시키기 위해 추존, 추숭 사업을 적극 시행했다. 

329p

여성 참여가 부정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녀 역시 모든 여성들이 그랬던 것같이 정치적 훈련을 받을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대비로서 막상한 권력을 갖고 왕실의 공적 기능과 사적 기능의 혼재 속에서 국정 참여에 있어 정치적 미숙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것은 그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아들의 입을 통해서만 정치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남성 중심적인 시대의 유산이자 여성이 처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오류>

191p

도표에서 윤번의 둘째 아들은 윤사균이 아니라 윤사윤이다.

209p

단종 즉위년(1452)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기 위해 거사를 하려 할 때

->계유정난은 단종 1년, 즉 1453년에 일어났다.

245p

인수대비는 자신보다 먼저 죽은 딸의 죽음에 그 누구보다도 슬펐다. 이때 인수대비의 나이는 43살이었다.

->명숙공주는 1482년에 사망했고, 인수대비가 1437년생이므로 딸의 사망 당시 나이는 43세가 아니라 46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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