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가 쓴 인수대비 - 조선 왕실 최고 여성지식인의 야망과 애환
한희숙 지음 / 솔과학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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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식상한 주제가 아닌가 싶으면서도, 학자가 쓴 인수대비는 어떤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못 지나치고 읽게 됐다.

조선 왕비를 대상으로 논문을 많이 낸 전공자가 쓴 책이라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 들 만큼, 깊이있고 당대 사회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인수대비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1) 여성 교육의 선구자이자 여성 저술가로서의 인수대비.

그녀는 왕실 여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여성 교육서인 <내훈>을 발행했다.

내용이 가부장적이라 오늘날에는 크게 의미부여를 못하고 있지만 저자의 평가대로 책 한 권 내기가 매우 어려웠던 시절에 왕실 최고 여인이 교육서를 발간한 것 자체가 큰 의의가 있다.

가부장적 여성상이야 당대의 이데올로기였으니 그것을 추종하는 것이야 너무 당연한 일이다.

비록 여러 책에서 좋은 구결을 따온 편집본이긴 하나 그만큼 많은 책을 읽고 유교적 소양이 풍부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저자는 이런 배경에 중국 황제의 후궁이 된 두 고모의 영향력을 들고 있다.

사실 이 고모들에 대한 조명이 무척 신선했다.

알려진대로 한확의 두 누이는 공녀로 선발되어 영락제의 후궁이 된 여비와, 선덕제의 후궁이 된 공신부인이다.

여비는 불행히도 영락제 사후 순장됐지만 공신부인은 선덕제 사후 손자인 성화제를 보호한 공으로 78세에 사망할 때까지 명 황실에서 존숭을 받았다.

조선에서는 그녀를 외교 채널로 삼아 세조의 등극과 성종비 윤씨의 폐위 등을 주청했고 한확이 큰 역할을 한다.

명으로부터 많은 물품을 하사받은 집안에는 중국 서적들이 많았을 것이고 그 집안에서 자란 인수대비는 당대 최고의 여성 지식인이 되어 훗날 저서까지 편찬하게 된 것이다.

21세에 청상과부가 되어 오직 자녀 교육에만 힘쓰고 시부모를 한결같이 받든 인수대비의 입장에서 첩을 질투하여 남편과 불화하는 며느리 윤씨를 용납하기는 어려웠을 듯 하다.


2) 드라마에서 보면 정희왕후는 문자를 몰라 며느리 인수대비에게 수렴청정권을 넘기는 것처럼 묘사되나 사실 정희왕후는 남편 세조의 반정에 적극 협조하고, 아들 예종과 손자 성종 대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휘두른 여걸이었다.

인수대비는 아버지 한확이 죽고 남편마저 세상을 뜨자 오직 시어머니인 정희왕후에게 의지하여 조심스럽게 처신한다.

정희왕후 역시 며느리를 존중하여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 그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고부간에 잘 협력하여 어린 왕의 치세를 안정시킨다.

단종처럼 어린 나이에 즉위한 성종이 주변 종친에게 권력을 빼앗기지 않고 편안한 종사를 이어간 배경에는 이들 고부간의 화목도 크다고 할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적장자를 낳고도 왕실의 불화를 일으킨 며느리 윤씨를 대비들이 받아들이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훗날 왕비가 되는 정현왕후가 정희왕후의 일족이고 그 아버지가 조정의 고관이었던 것과는 달리, 폐비 윤씨는 아버지가 일찍 죽어 그늘막이 되어 줄 친정이 없었다.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그녀 역시 종 2품 숙의로 입궁한 간택후궁이었기 때문에 양반가의 여식이었으나 집안이 어려웠다.

연산군을 낳은 뒤 4개월 만에 폐비 논의가 있고, 둘째 아들이 태어난 직후 문제를 일으켜 쭃겨난 걸 보면 산후 우울증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특별히 폐비 윤씨만 불쌍한 것은 아닌 듯 하다.

세종은 단지 며느리가 남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상한 방술을 행했다는 모호한 이유로 세자빈을 폐출시켰고 다음 며느리 역시 동성애라는 큰 잘못이 있긴 했으나 어쨌든 또 쫓아냈다.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처는 병이 있다는 이유로 시아버지 세종에 의해 쫓겨났고 제안대군의 처도 시어머니 안순왕후에 의해 쫓겨났다.

이혼당하면 재혼할 수 없는 사회에서 특별히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다른 곳도 아닌 왕실에서 처를 쫓아내는 사례들을 보면 연산군이 왕위에 올라 어머니의 원수를 갚겠다고 피바람을 불러 일으킨 탓에 폐비 윤씨 사건이 크게 각인됐을 뿐이지 폐비 사건이 아주 이상한 경우는 아닌 듯 하다.

숙종도 다음 왕위를 이을 아들 경종의 어머니를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았는가.


<인상 깊은 구절>

58p

그러나 한확은 명나라 사신에게 베푸는 잔치에는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서 한확의 뛰어난 처신술을 볼 수 있다. 한확은 명의 정사임을 내세우지 않았고, 황친이 되었다 하여 결코 오만하지 않았으며, 조선의 신하임을 잊지 않았다. 세종 역시 이러한 점을 높이 사서 그를 중용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가족을 더욱 우대했다. 한확은 청주 한씨 가문의 위상을 거가대족으로 확실하게 굳혔다.

84p

아버지 한확의 죽음은 수빈 한씨에게는 매우 큰 슬픔과 타격을 주었다.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잃은 것이다. 친정 부모를 모두 잃은 수빈 한씨는 미래의 왕비가 되기 위해서는 시부모인 세조와 정희왕후를 잘 섬겨야 함을 왕실 생활 속에서 이미 체험했다. 문종의 두 부인이 세종의 눈에 벗어나 쫓겨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조 내외를 부도로써 섬기며 효부가 되기 위해 더욱 더 노력했다.

92p

그녀는 세조 부부에게 신임을 얻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에게 더욱 더 잘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대저 사람의 타고난 복과 나라에서 주는 녹봉은 數가 있는 것이며, 재력은 오로지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사치를 숭상하면 반드시 재물을 다하는 데 이를 것이다." -세조실록

'엄격' '강직' '강인' 이런 단어들은 자식을 둔 양반가 과부들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 '애비 없는 자식' 과부 자식'에 대한 편견과 상실감을 극복하는 길은 어머니의 강한 도덕성과 자식에 대한 엄격성에 있었다. 

102p

단종의 폐위를 직접 경험했던 정희왕후는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왕실의 안정을 위해 원상 한명회의 힘을 필요로 했다.

154p

여성 교육에 목적을 둔 책이지만 제시된 구체적 사례들은 상당수 아들이 그 부모에게 효도한 이야기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 내용은 부모에게 효도할 것과 아내를 잘 관리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165p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는 후궁을 대접함에 있어서도 너그럽고 대범하여 도에 맞았으며 양로연이나 설과 같은 내전의 연회 때에도 의례가 모두 법도에 맞아 모두 칭찬했다고 한다. 최고의 가문을 친정으로 둔 권세가 한명회의 딸답게 자신감 있는 의연하고도 기품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윤씨는 아버지 없는 가난한 집안의 후궁출신이었기에 자신감 부족인 듯 내명부를 장악하지 못했다. 성종의 후궁들로부터 최고의 권위와 존경을 받기에는 아직 일렀다. 또한 20세 초반의 한창 젊은 성종은 산고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왕비보다 후궁들을 더 총애했다. 윤씨는 이러한 성종의 행위를 참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위치가 다른 후궁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협과 피해의식까지 느꼈다. ... 내명부와 외명부의 귀감이 되어야 하고 왕실 여성들의 기강을 다스려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갖고 있는 왕비가 투기를 일삼는 것은 왕권 강화에 흠집을 내는 것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8p

대간들의 주장이 이렇게 강한 것은 대간제도를 통하여 유교적 이상 정치를 달성하고자 하는 정치의식이 확대되어 갔기 때문이었다. 국왕이 반대하는데도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성종대의 대간은 유교적인 이상 정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 이러한 이념적이고 이상적인 당위성에는 어느 누구도 심지어 국왕조차도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213p

그녀는 왕비가 되고, 대비가 되어 왕을 고를 수 있는 권리를 놓치지 않았으며, 결코 최고의 권력자가 할 수 있는 수렴청정을 며느리에게 넘겨주고 뒷방 늙은이로 물러날 여성이 아니었다. 남편 세조와 함께 한 세월 속에서, 그리고 아들 예종이 왕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녀는 현실 정치 속에서 많은 것을 터득하고 단련했다. ... 정희왕후는 인수대비에 대해서 매우 우호적이었고, 그 위상을 높여주기 위해 애썼다. 정희왕후는 시어머니였지만 인수대비의 든든한 지원자였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며느리로서의 효도와 임무를 다했다. 두 사람은 성종을 사이에 두고 왕실의 안정과 왕권강화를 위해서 서로 조력자였다. ... 왕실은 계급질서로 운영되는 곳이다. 인수대비는 웃전인 정희왕후를 믿고 의지했고, 정성을 다했으며 한시도 그녀의 옆을 떠나지 않았으며, 그녀의 뜻에 순종했다. 그것이 왕실의 권위와 안녕을 지키는 길이자 곧 자신과 자식들을 보호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296p

정통성이 부족한 채 왕위에 올랐던 성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대간들과 치열한 정쟁을 했듯이, 폐비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무시를 당해야 하는 능상지풍의 분위기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연산군은 대간들과의 정쟁 속에서 폭군이 되었다.  궁극적으로 성종과 대간들의 대립 속에서 왕권 강화를 위해 단행되었던 폐비 사사 사건은 연산군을 폭군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인수대비의 노년은 불행했다.

301p

효를 강조하는 유교 문화 속에서 연산군이 어머니의 신원을 회복시키는 것은 곧 효의 실천이었고,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었다. ... 그의 아버지 성종이 대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생부인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생모 수빈 한씨를 인수대비로 추숭한 것과 같이, 연산군 역시 많은 반대와 제지에도 불구하고 생모 폐비 윤씨의 신원을 회복시키기 위해 추존, 추숭 사업을 적극 시행했다. 

329p

여성 참여가 부정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녀 역시 모든 여성들이 그랬던 것같이 정치적 훈련을 받을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대비로서 막상한 권력을 갖고 왕실의 공적 기능과 사적 기능의 혼재 속에서 국정 참여에 있어 정치적 미숙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것은 그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아들의 입을 통해서만 정치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남성 중심적인 시대의 유산이자 여성이 처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오류>

191p

도표에서 윤번의 둘째 아들은 윤사균이 아니라 윤사윤이다.

209p

단종 즉위년(1452)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기 위해 거사를 하려 할 때

->계유정난은 단종 1년, 즉 1453년에 일어났다.

245p

인수대비는 자신보다 먼저 죽은 딸의 죽음에 그 누구보다도 슬펐다. 이때 인수대비의 나이는 43살이었다.

->명숙공주는 1482년에 사망했고, 인수대비가 1437년생이므로 딸의 사망 당시 나이는 43세가 아니라 46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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