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ㅣ 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1
이영훈 지음 / 백년동안 / 2018년 3월
평점 :
자극적인 제목 때문에 거부감이 들었던 책이다.
저자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에 경제사 전공이라는 약력만 보고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경제학자가 섣불리 주류 학계의 이론을 논파하는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너무 재밌고 인상깊게 읽었다.
세종이 추구했던 정책의 역사적 의미라는 주제도 흥미롭지만, 뒷부분에 간략하게 나온 개인의 자유, 그리고 그 자유인이 세운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인상깊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나 역시 학교에서 한 번도 개인의 자유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서양은 개인주의가 만연해 이기주의로 흐르는 게 문제이고 우리는 그에 반대되는 집단주의 성향이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재산권이라는 의미는 제대로 배웠던 기억이 없다.
막연하게 사유재산권은 도덕적이지 않다는 느낌마저 갖고 있었다.
사회주의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도, 개인이 사적으로 재산을 독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국가가 모든 국민들이 잘 살 수 있게 돌봐주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의 가장 핵심 요소가 바로 개인의 자유와 사적 재산권인데 그것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부족하니 21세기에도 여전히 전통사회의 영향력이 강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가 실려 있는데, 요즘 비난받고 있는 뉴라이트 학자인가 궁금해진다.
원래 대중은 어리석고 집단주의적 성향을 지니기 마련이니 책에 나온대로 창조적 소수가 전통문화와의 간극을 좁혀가며 선도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할 듯 하다.
세종은 과연 양반이 지배하는 예치주의 도덕주의 국가의 기틀을 만든 훌륭한 성군임은 분명하다.
저자의 평가대로 그런 국가 정책 덕분에 5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왕조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을 오늘날의 정치적 관점에서 성군으로 평가하는 것은 오류임이 분명하다.
조선과 대한민국은 전혀 다른 사회이기 때문이다.
<서울과 교토의 1만년>이라는 책에서도 읽은 바지만,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한국 사회는 동족이라는 북한과는 매우 상이한 체제를 가졌고 오히려 식민 지배의 경험으로 적대시하는 일본과 훨씬 동질적일지 모른다.
저자가 계속 책을 낸다고 하니 관심을 갖고 읽어 볼 생각이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었던 점은, 과연 훈민정음의 창제가 단순히 중국어 발음을 정확히 표기하기 위한 발음기호의 발명인지이다.
세종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내면화 시키고 국가 정책으로 공고화 시킨 것은 분명하니,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관점에서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아닌 듯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어를 정확히 표기하겠다고 발음기호로 만들었다는 게 쉽게 수긍이 안 간다.
당시 중국어가 오늘날 영어만큼 일반에 널리 쓰인 것도 아니고, 학문이나 외교 문서 등에서 문자로써 통용됐을 뿐인데 굳이 새 문자를 만들어 발음기호까지 달아서 중국어를 표시할 필요성이 그렇게나 컸을까?
의도가 무엇이든 오늘날 한글의 발명이 끼친 엄청난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훈민정음 하나만으로도 세종은 한국사 최고의 위인임은 분명하다.
<인상깊은 구절>
151p
고려는 고구려의 천하관을 계승하였다. 만주와 한반도의 패자로 군림했던 고구려는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자부하였다. 그것은 어느 한 나라가 주도하는 천하가 아니라 병존하는 다원적인 천하였다. 그 같은 천하관은 삼한 고유의 종교적 전통과 결부되어 왕권의 신성을 보증하는 정치철학으로 역할을 하였다. 고려의 국왕은 중국 황제에 신속하였지만, 다원적 구조의 천하관에 상응하는 상대적 우열의 관계를 넘지 않았다. 후술하듯이 고려왕조는 독립국의 상징으로서 하늘에 대한 제사를 고수하였다.
조선왕조의 건립자들이 고려라는 국호를 폐하고 기자조선을 잇는 취지의 국호를 명에 자청한 것은 한국문명사에서 더없이 큰 단절을 의미하였다. 이후 한국사는 중국사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누가 뭐래도 그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 중국과의 사대관계는 정치군사적 명분을 넘어 인간, 사회, 국가, 세계를 포괄하는 형이상학의 질서로 내면화하기 시작하였다.
153p
변계량은 우리 동방의 시조는 단군으로서 원래 천자가 분봉한 나라가 아니며, 지난 1천 년에 걸쳐 천제를 지냈다고 한 다음, 비록 천제가 천자의 예이긴 하나 심한 가뭄을 당하여 제후도 임시변통으로 행할 수 있는 예라고 주장하였다. 태종은 변계량의 주장을 받아들여 천제를 복구하였다. ... 변계량이 수천 년 동안 행해온 예를 폐함은 부당하며, 더구나 조선은 강토가 수천 리로서 중국 내의 백리 제후와 비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에 대해 세종은 "어찌 강토가 수천 리라 하여 천자의 예를 분수없이 행하리오" 하면서 다시 거절하였다. ... 천제는 하늘과의 관계에서, 종묘는 조상신과의 관계에서 국왕의 절대적 권위를 대변하였다. ... 사대는 하는 자나 받는 자나 모두에서 정략적 관계이다. 조선 태종조까지의 사대가 그러하였다. 양국 간에는 군사적 긴장이 잠재하였다. 세종조에 들어오면 분위기가 바뀐다. 한마디로 세종은 지성으로 사대하였다.
160p
고려왕조는 군사국가였다. 그 점에서 도덕국가인 조선왕조와 달랐다. 고려는 3만여 명의 중앙군을 보유하였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고 그로부터 세를 걷어 살았다. ... 고려왕조는 이들 중앙군을 핵심으로 하는 군사공동체였다. 수많은 외침이 있었지만 고려는 자력으로 격퇴하거나 오랫동안 항쟁하였다.
168p
주자가례에 따른 3년상의 확산으로 인해 농촌 품관을 핵심 전력으로 하는 조선초기의 중앙군제가 약화되어 간 것만큼은 부정하기 힘들다. 조선왕조는 군국의 수준조차 흉례가 지배하는 나라로 되어갔다. ... 세종은 천년 이상을 이어온 천제의 거행을 중단하였다. 하늘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포기함으로써 천명의 대리인으로서 군왕의 권위는 중국 황제에 대한 사대를 통해 확보될 수밖에 없었다.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는 것은 하늘이 내린 도로서 인륜이다. 세종은 스스로 인륜의 지극한 모범을 보임으로써 그의 신료와 백성에 대한 군왕의 권위를 확보하였다. ... 조선의 국가체제는 제후 왕, 大夫 관료, 士 양반, 庶 상민, 賤 노비의 위계로 짜였다. 그 위에 중국의 천자가 놓임으로써 완성되는 위계였다. 이 나라는 점점 예의 질서로 유지되는 도덕국가로 순화되어갔다. 그럼에도 국가의 지배력은 강고하였다. 예의 질서가 천자를 정점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15~16세기의 천하는 명 제국을 중심으로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그런 가운데 조선왕조가 구축한 예의 국제질서로서 국가체제는 부동의 안정성을 구가하였다.
173p
세종이 독자의 문자를 개발하게 된 계기는 동시대 조선의 한자 발음과 중국의 그것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 세종은 동시대 북경어 중심의 한자 발음을 정확히 표기할 목적에서 발음기호를 창제하였다. 그것이 훈민정음이었다. 통설대로 훈민정음은 하층 서민이 쉽고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개발된 문자가 아니었다. 한자를 사용하는 지배신분의 사람들이 동시대 중국의 기준에서 정확한 중국어를 구사하고 훌륭한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아름다운 시문을 지을 수 있도록 개발된 발음기호였다. ... 한문 밖의 일상의 조선어도 표기할 수 있음이 확인되자 훈민정음은 더 이상 발음기호가 아니라 표음문자로 바뀌어 보급되어갔는데, 그것을 가리켜서는 언문이라 하였다. ... 중화의 세계로 깊숙이 진입해가기 위해서는 언어, 문자 생활마저 중화의 기준으로 교정할 필요가 있으며, 그를 돕는 보조문자가 필요하였다. 다시 말해 세종의 한글 창제는 15세기적 국제질서에서 조선왕조가 소중화로서 추구한 개성적인, 그래서 역설적으로 민족주의적이기도 한, 문화정책이었다.
188p
조카를 몰아내고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는 군왕의 절대 권력을 확립함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강력한 개혁 의지는 백성에 대한 양반관료의 특권적 지배체제를 겨냥하였다. 세조는 기존의 호적을 모조리 불사른 다음 백지 상태에서 전국의 인구조사를 강행하였다. ... 나아가 세조는 양반관료에 지급하는 토지의 규모와 권리를 대폭 제한하였다. 이 일로 인해 세조는 신하들로부터 폭군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세종은 결코 그런 무리를 범하지 않았다. 그의 통치는 주로 학술, 신분, 예제, 외교를 대상으로 했으며, 그 방면에서 업적을 남겼다. 전술한 대로 그가 정비한 예의 국제질서로서 국가 체제는 이후 5세기를 뻗친 조선왕조의 기틀이 되었다.
191p
조선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농촌사회에 새로운 지배신분으로서 양반이 들어서고, 양반 지배 하의 노비 인구가 증가하고, 노비의 사회적 지위가 약화되고, 그 배경에 신분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유교 이념이 있었다. ... 14세기까지의 고려왕조는 공동체사회임에 비해 15세기 이후의 조선왕조는 양반-노비를 축으로 하는 신분제사회라는 설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사학의 주류는 조선왕조를 유교국가로 설정하고 그 국가체제의 근세적 합리성을 부각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조선왕조는 유교적 민본주의 이념에 입각한 일종의 민주주의 정치체제이며, 국왕과 신하의 권리는 상호견제의 균형을 이루었으며, 16세기 이후 중앙 정치에서 나타난 당쟁은 일종의 정당정치였으며, 농촌사회는 성리학의 보급에 따라 민권 의식의 고양을 보게 되었다는 것 등등이 한국사학의 주류를 점해온 담론이었다. 1980~1990년대 국사 교과서는 조선시대를 '근세 사회'로 시대 구분하였다. 한영우는 조선왕조를 '근세 관료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그 시대의 유교적 문민정치의 전통과 유산이 현대 한국사회의 역사적 바탕을 이룬다는 취지에서이다. ...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보급되 한국사 교과서에서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와 같은 시대로, 곧 '중세'로 구분되어 있다.
194p
1899년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은 만세불변의 전제정치라는 헌법을 제정하였다. 황제는 탐욕스럽게도 국가의 주권을 자기의 가산으로 움켜쥐었다. 불행하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그 왕조는 망했으며, 2천만 생령을 다른 민족의 노예로 넘겨주고 말았다. ... 자유인이 자기 의지와 계산으로 노동하여 취득한 재산은 그 누구도 탈취하거나 처분할 수 없는 그의 절대적 권리이다. ... 먹고 살 만한 최소한의 재산은 인간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든다. 근대 국가는 '소유권 절대의 원칙'과 '계약 자유의 원칙'에 입각한 민법을 제정하여 자유인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있다. 민법은 인간을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의 주체로서 자기 문제를 자율로 처결하는 '사적 자치의 주체'로 상정하고 있다. ... 오늘날의 세계는 이 같은 애덤 스미스와 칸트의 가르침에 따라 영구평화와 영구번영의 길을 걷고 있다. 바로 그 길이 지난 18~20세기를 이끈 세계 지성의 주류였다. 1948년 대한민국이 성립하고 오늘날까지 그런대로 볼만한 성취를 이룩한 것은 그 세계사의 주류에 훌륭하게 올라탔기 때문이다. 누가 그 길을 인도하였는가. ... 이 나라의 건국헌법은 그의 국민을 자유인으로 선언하였다. 다소간의 흠결이 없지 않았지만 이후 이 나라의 국민은 자유인으로서 그의 삶을 영위하였다. 그 역사가 거의 70년이다. ... 나는 교과서들이 우리 조상이 소년기에 읽은 <동몽선습>이나 <소학>의 현대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세계사적으로 '근대'라고 부르는 문명의 기초 요소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적 자치의 주체'로서 개인, 개인의 자유와 독립, 그 기초조건으로서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 자유인의 정치적 통합으로서 민주공화국, 자유인의 경제체제로서 시장경제, 자유인의 국제질서로서 자유통상 등은 어느 교과서 어디에도 그림자초자 비치지 않는다. ... 전통 성리학의 세계에서 '개인'은 없었다. ...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가 지난 40여 년간 왜적과 쉬지 않고 싸운 것은 개인의 자유활동과 자유판단권을 위해서였다고 강조하였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독립운동을 하였던가. 그저 "대한 독립 만세!"가 아니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더욱 아니었다. 다름 아닌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위해서였다. 자유인의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 그 '개인의 근본적 자유'는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전통 성리학의 세계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만이 아니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유교문명권 전반에서 개인의 자유라는 정치철학의 범주는 결여되었다. 그것은 하늘이 달라져야 보이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었다. 서양도 종교개혁 이후에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선 세계를 주도하는 선진문명으로 올라서기 시작하였다. ... 초대 대통령은 신생 대한민국의 기초가 되는 정치이념이 서양민주국에서 유래했음을 숨기지 않았다. 이후 지금까지 어느 정치가도 역사와 국민 앞에서 이렇게까지 정직해본 적은 없었다. 이 나라는 서양민주국을 모범으로 하여 1919년 3.1운동 이후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꾸준하게 실천해온 결과로 세워진 나라이다. 이 나라는 앞으로 자유인의 공화국으로 발전해갈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갈 길이다. ... 이 나라는 미국과 같은 자유인의 공화국으로 발전해갈 것이다. 상이한 이해관계의 인간들을 신뢰와 통합으로 이끄는 삶의 원리에 있어서 더없이 큰 변화의 선언이었다. 2천 년을 이어온 한국 문명사의 대전환이었다. ... 그럼에도 건국의 주체가 선택한 자유통상의 경제체제는 이후 50년간 미국 헤게모니의 세계체제 속에서 엄청난 물질적 성취를 이룩하였다. 경제성장은 민족중흥의 깃발로 추진되었으며, 민족의 우수한 역량으로 설명되었다. 개인과 그의 자유는 천박하게 들리는 이기심에 대한 매도와 더불어 슬슬 위축되었다. "우리의 도덕적 개인은 서양의 이기적 개인보다 훌륭해." 앞서 소개한 유교국가론의 대두와 더불어 이런 이야기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덧 세종의 애민정치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적 원류로 선양되기 시작하였다.
<오류>
142p
"웃치긴은 칭기즈칸의 막내아들이다"
-> 웃치긴은 칭기즈칸의 막내 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