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 아름다운 우리 땅 그림 순례, 도원을 꿈꾸다 조선 땅을 만나다
이태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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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분량에 비해 이야기는 술술 잘 읽힌다.

제목만 보고 단순히 옛 그림에 나오는 명승지를 찾아 가보는 답사기 같은 포맷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에 대한 본격적인 회화론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정선으로 대표되는 18세기의 진경산수화는 그 전의 관념산수화와 달리 우리 땅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여 관념성을 탈피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저자는 정선의 그림들이 실제 풍경과 거의 일치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정말로 사생에 중점을 둔 실경산수화는 그 다음 세대인 김홍도에서 만개한다.

정선은 화원이 아닌 사대부였기 때문에 풍경을 똑같이 그리기 보다는 신선이 살고 있는 선경이라는 이상향을 추구했고 명승지를 본 후의 느낌을 표현하는 사의성에 중점을 뒀다.

저자는 옛 그림과 실제 풍경을 카메라로 비교하여 얼마나 비슷한지 통계를 내기까지 한다.

진경산수화라는 정선의 경우 실제 풍경과의 일치도가 50% 미만이고 김홍도는 80%가 넘는다.

저자는 정선이 단순히 풍경을 사실대로 묘사하지 않고, 풍경에서 받은 느낌을 확대시켜 그 뜻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음을 지적한다.

소재는 조선 땅이었으나 여전히 풍경 그 자체보다는 성리학자가 추구하는 정신 세계의 조화로운 추구가 목표였던 셈이다.

책에 잠깐 언급되지만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 풍경화와의 비교가 인상적이다.

그러고 보면 조선시대 문인화가들은 예술 자체의 표현보다는 그 정신에 더 중점을 두는 오늘날의 추상화와 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김홍도의 그림이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수많은 그림들이 소개되는데 도판에 절반도 실리지 않아 너무 아쉽다.

강희언이나 이인문 등의 산수화도 정말 훌륭하고 후대의 소정 변관식와 청전 이상범의 현대적 금강산 그림도 너무나 인상적이다.

채색을 겸비한 현대 수묵화의 매력이 대단하다.

마지막에 실린 선조의 사위 신익성에 대한 화론도 흥미롭게 읽었다.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의빈이었으나 대신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기 때문에 경화사족으로써 시서화에 탐닉하고 문화를 후원하면서 예술을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소개된 그림 솜씨도 남다르다.

좀더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면 좋겠다.

 

 

<인상깊은 구절>

19p

겸재가 그린 진경의 현장을 답사하다 보면 과연 실제로 그곳을 보았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닮게 그린 예가 거의 없다. 심지어 가까이 살던 장동팔경을 그린 작품도 실경과 크게 차이가 난다. 보지 않고 그리거나 감정이 지나쳐 과장이 심한 '구라체'라 일컬어도 될 정도다. 혹은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데서 오는 기초 묘사력의 결여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 이로 보면 겸재가 실제 풍경을 통해 현실미보다 성리학적 이상을 그리려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 소동파가 '회화에서 대상의 닮음, 곧 형사를 강조하는 것은 어린애 수준'이라 폄하했던 점이나, '神似'나 '寫意'의 정신성을 강조한 문인화론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다. 겸재 진경 작품의 변형미를 대할 때면, 군자가 산수를 사랑하는 까닭을 설파한 곽희의 '산수 보는 법'이 떠오른다.

24p

'우리 19세기 회화가 단원 화풍을 한 단계 발전시켰더라면' 하는 가정을 떠올릴 만큼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잘 알다시피 단원 이후에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대표작으로 손꼽히듯이, 망막에 어리는 대상보다 심상을 표출해야 한다는 서권기, 문자향의 남종문인화풍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39p

우리의 수묵산수화는 그 재료가 갖는 생래적인 특성 때문에 대상 풍경의 색감이나 질감을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현재 심사정은 <삼일포>를 그릴 때 물과 하늘색을 고려했는지 푸른 옥색 종이를 선택했다. 하지만 갈필의 피마준 선묘와 엷은 담채로 그린 화면에서는 막상 그런 미인의 맛이 나지 않는다. 실경에서 만나는 흰 구름과 파란 하늘, 녹색 숲, 그것들이 비친 호수의 색감이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정선이나 심사정이 그린 삼일포 그림의 약점은 1999년에 서양화 재료로 그린 강요배의 <삼일포>와 비교하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이런 강요배의 채색화가 삼일포의 아름다움, 그 진경의 맛을 보게 해준다. 서양화 안료의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44p

먼저 대상의 외모를 재현하는 일이다. 동양회화론으로는 '형사'에 해당하겠다. 다음으로 그보다는 대상에서 받은 느낌 드러내기, 곧 표현을 강조하는 스타일이다. 대상에서 받은 감정표출을 중시하는, 동양회화론의 '사의' 개념과 흡사하다. 이렇게 보면 기억으로 그리는 일은 사의성에 치우치기 쉽다. 반면 실경 현장에서 스케치한 그림은 형상을 닮게 그리는 형사 기량이 중요하다. 

87p

뛰어난 회화성은 선배인 정선이나 동료화원 김홍도의 총석정 그림에 뒤지지 않는다. 먼 수평선부터 총석정까지 일렁이는 동해의 파도를 생생하게 표현한 그림이다. 이인문은 김홍도와 동갑인 화원으로 김홍도의 명성에 가려 있다. 하지만 <단발령망금강>과 <총석정> 두 진경 작품들의 조형미를 보면, 이인문이 김홍도보다 낮게 평가받을 이유가 없다.

94p

정선이 완성한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대지, 나아가 조선의 명승을 통해 더 나은 이상을 꿈꾼 자들의 회화형식이다. 그 중심이념은 물론 성리학이었을 터이고 정선이 역리를 원용하여 그림을 그렸다는 증언과도 맞물린다. 또 정선이 고위관료로서 당시 집권층인 서인-노론계 문사들과 친밀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130p

정선의 금강산 전경도나 부분 명승도들이 실경과 다른 것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외형보다 현장에서 느낀 감정의 리얼리티와 첫인상을 형상화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감식 화면구성과 대담한 변형과 생략, 리듬감 있게 반복되는 붓질은 천석의 울림, 즉 기암 사이에 부는 바람소리와 계곡에 여울지는 소란스런 물소리를 화면에 담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터이다. 이는 신선이 사는 선경을 의미하는, 그래서 당대 사대부들의 은일와유 취미에 걸맞은 진경산수 개념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140p

진경산수와 남종화풍을 개성미 넘치게 융화시켰던 18세기 선비화가들은 19세기 중엽 이후 구체적인 대상 없이 중국 문인화를 모델로 관념적 사의와 문기만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버린 김정희 일파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252p

그렇게 도형화된 지도가 진보한 만큼이나 회화에 버금가는 그림지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지닌다. 도형식 지도가 과학화되면서 그림지도의 형식미는 산천을 사람의 몸과 같이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로 인식했던, 인간과 땅을 동일시했던 전통적인 자연관을 더욱 잘 반증하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우리 국토 곳곳을 빠짐없이 서술한 크고 작은 그림지도가 현지 많이 제작되었다. 나름대로 보기 좋고 이해하기 수월한 그림지도 방식을 창출한 까닭에 당대인들이 추구한 자연과의 친화력을 읽을 수 있다. 

267p

이처럼 정선은 실경을 형사하기보다는 실경에서 받은 감정적 사의를 중시했다. 대상의 외형은 닮게 그리지 않았지만, 실경에서 받은 인상을 정확히 쏟아내려 했던 것이다. 

327p

김윤겸은 명문세도가에서 서얼로 태어나 서출의 사회적 자각과 진출이 두드러지는 18세기에 활동한 화가다. 서출에 대해 개방적이고 학예에 돈독했던 집안의 영향 아래 다행히 화가로서 자신의 길을 열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김윤겸이 기행과 사경으로 진경산수에 일가를 이룬 것은 집안에 전승해온 유묵, 그리고 아버지 김창업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의 명승기행과 세속을 벗어나 자연에 은거했던 사상적 배경도 간과할 수 없겠다. 당대의 능력 있는 사얼 중 일부는 사회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데 비해, 김윤겸 또한 명문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행적이나 기록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얼들의 소극적 행동반경과 그가 화업에 열중한 대신 학문이나 문학 분야에서는 두드러진 존재가 아니었던 데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431p

이들에 의해 일반화되어 유지해온 김홍도 화맥은 근대회화에서 실경산수가 부흥하는 데 기여한 비중이 자못 크다. 즉 말기에 침잠한 상태로 계승된 김홍도의 진경 표현감각이 근대에 향토적인 소재와 색채를 구사한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에게서 새로운 양식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488p

17~18 세기에 새롭게 변신, 창출되는 실경산수는 중국에서 명과 청이 교체된 이후 조선에서 형성된 주자종본주의 내지 소중화적 자긍심으로, 정권의 중심세력에 부각된 서인-노론이 이를 자극하고 발전시켰음을 무시할 수 없게 한다. 17세기 실경산수의 사례가 서인-노론에 집중되고 특히 작품으로 남아 있는 사례가 안동 김씨 집안에 전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들과 정선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정선이 화가로서 위치를 다지게 된 계기가 김수항의 장자이며 집권 노론계의 주요인물인 김창집과 이웃하여 살면서 그의 천거를 받아 비롯되었다고 전해오기 때문이다.

533p

신익성이 17세기 변혁기 새로운 문예의 움직임을 선도한 문인 중 한 사람임을 적절히 시사한다. 평생 유람객으로 자연에 대한 흥신을 녹여낸 시와 기행문, 명대 문예풍 수용과 개성, 그리고 장서와 서화수집 취미, 여기에 덧붙여 서화론과 서화작품은 신익성의 문예사적 위상을 재론케 한다. 

 신익성은 선조의 부마로서 격변기를 겪었다. 대내외로 복잡하게 얽힌 정세변화 속에서 인조반정 참여와 척화로 정치적 명분을 세우고, 조선 후기 사족문화의 한 전형이 되었다. 관료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자연에 귀의하여 탈속한 삶으로 문예에 대한 끼를 맘껏 쏟아냈던 것이다. 또한 이는 탈속한 물외인으로서 이룬 것만은 아니었다. 광주 별서의 논밭과 두미 어장의 튼실한 경제적 기반 아래 '반은 사림에 반은 저잣거리'에 걸쳐 있던 현실인이었기에 가능했을 거라 생각한다.

536p

진산수 사생론과 실경화 <백운루도>는 인조 연간을 대표할 만한 회화 사료다. 한국회화사에서 신익성이 차지하는 위치를 새로이 짚어보게 한다. 또 이들의 참신한 시각과 예술적 성과, 신형식 창출은 커다란 변혁기인 17세기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신익성이 역사의 소용돌이를 딛고 전국 명승을 유람하고 광진과 두미 사이 한강을 오가며 성리학자로서, 시인으로서, 서화비평가와 수장가로서, 서화가로서 조선 문인의 자긍심을 꾸준히 절차탁마한 결과일 터이다. 신익성은 지금까지 미술사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문인화가지만, 조선 후기를 그가 활동했던 인조 연간부터 잡아도 될 만큼 재평가해야 할 인물이다.

537p

이미 16세기 후반에 경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구체제의 대대적인 개혁을 주장한 바 있는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서인이 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조선 후기 사회를 예시하고 있었다, 뒤이어 일어난 병자년(1636)으로 인하여 일시적 좌절이 있었지만 순정 성리학도를 자처한 사림이 정권 담당자가 됨으로써 양란으로 구체제가 와해된 조선사회를 순수 성리학 이념으로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사림이 되는 일차적 요건이 성리학이라는 학문에 있었기 때문에 신분적 한계나 혈연과 가문이라는 요소가 이차적으로 밀려난 느낌마저 있었다. 조선 후기에 제시된 제반 사회경제정책이 모두 이들의 정치이념에서 도출되었던 것이다. 인조반정이야말로 조선 후기의 기점이 될 수 있는 내재적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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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수 전쟁 - 변경 요서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大戰 경희 고고학 고대사 연구총서 4
이정빈 지음 / 주류성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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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페이지 정도 되는 작은 분량인데 사료 인용이 많고 한자어를 그대로 표기해서 읽는데 다소 어려웠다.

대중서로 펴낸 게 아니었는지, 한자가 한글 표기 없이 그대로 인용되어 당황했다.

<돌궐유목제국사>에서도 읽은 바지만, 유목민족들의 교역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저자는 고구려와 수의 전쟁도 요서 지방의 교역권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본다.

요서라는 지역 설정이 중요하다.

저자는 국경 대신 변경지대라는 표현을 썼다.

전에 다른 책에서도 이런 용어를 본 적이 있다.

고대 사회는 오늘날처럼 국경 개념이 확실한 것이 아니고 특히 민족국가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민족들이 혼재해 변경 지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하의 동쪽, 즉 요동은 고구려의 지배권이 확립됐으나 그 서쪽인 요서, 즉 동으로는 요하로부터 위로는 시레무렌까지, 서로는 난하까지 영역에서는 거란, 말갈, 돌궐 등의 여러 민족이 혼재되어 있었고, 북위 시절에는 고구려도 일정 부분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 때 유목민족과 교역권을 갖고 있었다.

그 후 수가 중원을 통일하면서 요서로 밀고 들어와 돌궐을 복속시키면서 고구려의 교역권을 침해하자 영양왕과 을지문덕 등으로 대표되는 신진귀족 세력들이 이에 반발해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영양왕도 전쟁을 막기 위해 조공 사신을 보내기도 하고, 수 역시 북방을 평정하기 전에는 잠시 평화 모드를 유지했으나 계민가한의 돌궐이 수의 세력으로 들어온 후 태도를 바꿔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했다.

계민가한의 장막에서 마침 순행을 나온 수 양제와 고구려 사신이 마주쳐 조공 체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펴는 고구려를 공격하게 된 사건은 유명하다.

저자는 꼭 이 사건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 게 아니라 돌궐 복속 전에는 수가 잠시 침공을 보류했고 이들을 평정한 후 공격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계민가한 역시 수나라와 고구려 양쪽을 저울질 하다가 고구려 사신을 수 양제에게 오픈시켰다고 본다.

고구려 원정은 결국 을지문덕과 당시 왕제였던 건무, 즉 영류왕이 잘 막아내 오히려 수나라가 망하고 만다.

재밌는 것이, 원정의 보급을 맡았던 사람이 당 고조 이연이었다고 한다.

그 후 당이 중원을 통일하면서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고 당 태종 역시 실패한 후 신라와의 협력을 통해 마침내 그 아들인 고종 때 망하고 만다.

요서라는 변경지대의 정의와, 유목민족과 농경국가의 교역권이라는 관점에서 본 고구려-수 전쟁이 무척 흥미롭다.

특히 수나라 침공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만 유명한데, 다음 왕위 계승자였던 영류왕이 500 결사대를 이끌고 10만 대군을 평양성에서 막아낸 부분은 무척 인상적이다.

과연 왕위를 이을 만한 지도자인데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살해당하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인상깊은 구절>

68p

유목국가의 군주권은 물자의 분배권을 통해 확보되었고, 따라서 군주권의 확보를 위해서는 교역이나 약탈과 같은 대외적인 성과가 요구되었다고 한다. 이를 고려해 보면 타발가한 재위 무렵 5가한 내지 그의 지지세력은 대외적인 성과를 과시해 차기 군주로서의 적격자임을 내세우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경쟁이 주변 세력과의 갈등으로 표출되었다고 해석된다.

93p

평원왕은 수 문제의 새서를 받고 외교문서를 보내 사죄하고자 하였고, 곧이어 즉위한 영양왕은 수의 책봉을 수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고구려의 행동은 수의 우위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수의 고압적인 태도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양국관계의 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기존의 세력권을 보장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층 수세적인 입장에서 기존의 세력범위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590년 수 문제의 새서를 받은 이후, 한동안은 수와의 관계개선에 노력하였다고 판단된다.

116p

590년대 중반 수의 지배층은 요서의 경제적 가치를 인지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일찍이 지적된 것처럼 요서는 동북아시아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요서의 동부에 세력범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볼 때 수의 관롱집단이 고구려 공격을 구상한 것은 요서의 교역권과 관련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5세기 이후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패권적 국가로서 주변 諸國의 교역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보면, 관롱집단은 비단 요서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교역권까지 장악하고자 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598년 고구려의 요서 공격에 수의 관롱집단이 즉각적인 반격을 주장하였고, 대규모 전쟁에 나섰다고 해석된다. 

122p

고구려는 요서를 통해 내륙아시아의 유목세력과 교섭하였는데, 수가 요서를 장악하고 내륙아시아의 제세력을 통제한다면, 고구려는 국제적으로 고립될 처지에 놓이게 될 수 있었다. 더욱이 5세기 이후 요서는 고구려의 안전판에 비견되듯이 그의 상실은 고구려의 직접적인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영주총관부의 세력확장은 고구려를 압박했다고 생각된다. 즉 요서에서 고구려의 군사력 실력과 세력을 내보임으로써 제종족의 이탈을 방지하고, 고구려와 내륙아시아 유목세력의 통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고 이해된다. 

138p

603~604년 이후 수는 요서에 진, 수를 설치, 정비하며 동진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면 598~607년 고구려와 수의 우호관계는 표면적인 현상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한다. 수의 동진은 고구려의 세력범위를 잠식해 감으로써 가능했을 것으로, 고구려의 위기의식은 차츰 고조되고 있었고, 이로 인한 양국의 갈등은 심화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605년 수 양제가 즉위하면서 양국 간에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은 한층 높아지고 있었다.

144p

고구려의 동돌궐 교섭이 수를 자극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수는 고구려와 동돌궐의 교섭을 공적 조공책봉질서의 외부에서 진행된 사적 외교행위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사적 외교행위를 묵인한다면 수 중심의 조공책봉질서를 앞으로도 계속 도전받을 수 있었다. 

156p

계민가한은 고구려의 사신을 숨기지 못해 양제에게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보다 계민가한은 양제가 방문할 때까지 고구려 사신과 교섭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는 수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고, 마침내 고구려의 사신을 공개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 고구려는 동돌궐을 통해 변경지대의 제종족과 불필요한 갈등을 없애길 바랐을텐데, 그래야 서방 변경지대에서 진행되고 있던 수의 동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동돌궐과의 확고한 동맹관계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대립은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166p

요서의 진, 수는 '유성 밖의 둔전'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진, 수의 설치와 같은 수의 요서정책은 북방정책의 일환이었다고 이해된다. 그 목표는 동북 방면에 대한 통제력의 강화였을 것이다.

 양제의 북방정책은 멸망의 원인으로 지목될 만큼 국가운영에 큰 부담이었다. 예컨대 청해성, 신강성 지역의 진, 수는 둔전만으로 유지가 어려웠고, 이에 서북의 군현으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었고, 그 결과 서북 군현의 농업생산마저 곤란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점은 동북 변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그렇다고 하면 양제대의 북방정책은 변경지대의 정치, 군사적 안정만 아니라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서북방으로는 토욕혼을 공격함으로써 서역과의 교역로를 개척하고자 하였다면, 동북방으로는 고구려를 공격함으로써 서역부터 동북아시아에 이르는 교역로, 다시 말해 실크로드-오아시스로를 장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74p

수에서 교역과 대외전쟁에 적극적이었던 것이 양제만이 아니었다. 예컨대 598년 고구려에 대한 반격시도나 605년 임읍 공격은 관롱집단이 주도하였다. 

 하지만 양제의 즉위 이후 대외전쟁은 대부분 그가 주도하였다. 이를 통해 양제는 관롱집단을 비롯한 주요 정치세력을 통제하고 집권력을 장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양제는 제위계승 분쟁을 통해 즉위하였고, 이에 정통성에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유목사회 계통의 군주는 이러한 불안정한 제위 계승의 한계를 대외적인 성과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는데, 양제의 고구려 공격 역시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수의 고구려 공격계획은 관롱집단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이제 양제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으로 전유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수 양제의 고구려 공격은 동북아시아 교역권의 장악을 목적으로 구상되었고, 그 안에는 황제권의 강화란 양제의 정치적인 목적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양제는 612~614년 고구려 공격이 실패하고, 신료의 대부분이 고구려와의 전쟁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공격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된다. 황제권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228p

619년 당은 장안을 비롯하여 중원지역의 요지를 차지하였다. 그런 만큼 중원지역 안의 여러 세력과 비교해 상대적인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동아시아 최강의 강자는 당이 아니라 동돌궐이었다. 

 사실 수 전성기에 해당하는 십여 년을 제외하면, 6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중원왕조가 아니라 돌궐이 주도할 때가 많았다. 따라서 당이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주도하리란 전망이 확고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구려는 동돌궐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 국제질서가 확립되는 데에도 경계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고구려와 당의 우호관계는 동돌궐 견제란 공동의 목적 속에서 수립되었다고 생각된다. 

247p

책봉호의 수여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조응한 것으로, 이제 당은 명실상부한 책봉-조공관계를 요구하였다고 생각된다. 이 무렵 고구려에 당에 책력을 요청한 사실은 그와 같은 대외정책의 변화에 호응한 것으로, 이로써 양국 관계는 점차 변화하였다고 파악된다. 특히 620년대 후반 이후 당이 동돌궐을 제압하고 동아시아 최강자로 떠오르자 고구려는 한층 순응적인 모습을 보였다. 경관의 철거는 그 연장선생에서 양국 관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판단된다. 

254p

요서 서북부의 거란 諸部 를 둘러싸고 고구려와 수가 경쟁하였다. 그럼에도 요서 제종족에 대한 수의 영향력은 차츰 증가했다. 양국과의 우호관계 역시 지속되기 힘들었다.

 590년대 후반 고구려는 요서에서 수의 세력확장을 경계했다. 수의 세력범위에 속한 제종족에 대한 군사행동까지 취했다. 그러나 수가 진까지 병합하고 동아시아 최고의 강국으로 부상한 589년 이후 고구려의 요서정책이 팽창 위주의 것이었다고 보이진 않는다. 고구려는 수의 우위를 인정하고 양국관계의 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기존의 세력범위를 보장받고자 했다. 

255p

607년 고구려는 동돌궐과 교섭했다. 이는 수 중심의 조공책봉질서를 위반한 사건으로, 향후 수의 전쟁의 명분으로 제시되었다. 하지만 수의 전쟁 명분이 곧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아니었다. 수는 고구려의 동돌궐 교섭에 위기의식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감을 내비치면서 고구려 국왕의 입조를 요구했다. 위기의식을 가진 쪽은 고구려였다. ... 고구려의 여러 귀족세력은 전쟁에 동의하고 그에 따른 인력과 물자를 부담하였는데, 이는 요서정책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6세기 이후 영역확장과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한계를 보이며, 요서정책과 요서를 통한 교역의 중요성이 한층 높아진 까닭에 전쟁을 감수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고구려-수 전종앤 수의 고구려 공격에서 비롯되었지만, 한편으로 고구려 지배층의 정치적 선택이 작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 645년 고그려-당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당의 동진은 급진적이지 않았다. 고구려 역시 무리한 세력확장은 피했다. 변경 요서를 사이에 둠으로써 갈등을 완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서를 둘러싸고 고구려와 당 또한 경쟁했고, 이는 또 다른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283p

이와 같은 병력규모의 증가는 병력동원 대상의 확대를 기반으로 하였다. 3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지배층을 중심으로 병력을 구성하였다고 한다면,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이후 병력동원의 대상을 일반 民으로 확대하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통시대의 병종구성은 신분과 무관치 않았다. 대체로 기병은 지배층이 보병은 피지배층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4~5세기 새롭게 병력으로 동원된 민은 주로 보병을 구성하였다고 짐작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이후 고구려 병력동원 대상의 확대는 보병의 증원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추정은 4~5세기 고분벽화에 보이는 보병과 기병의 비율이 3:1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 6세기 중반 이후 쇠뇌와 아울러 장궁이 보급되고 운용된 것은 보병의 수적 증가만 아니라 그 전술의 비중도 높아진 사실을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 이와 같은 보병의 확대는 중앙집권적 군사조직의 정비를 전제로 하였다. 전국적으로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고 운용하기 위해서는 중앙의 통제력이 요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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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veattack 2019-06-13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즈 명칭대로 ˝연구총서˝니까요.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 - 개정판
김봉렬 글, 관조스님 사진 / 안그라픽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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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 좋고 글고 간결하고 읽기 편안하다.

보통 저자가 직접 사진을 찍는 경우가 많아 이런 종류의 기행문은 사진이 아쉬운데 이 책은 전문 사진 작가에게 따로 의뢰해서인지 절을 소개하는 사진들이 아주 시원하고 좋다.

다만 큰 사진은 한두 장이고 나머지는 도판들이 작아 아쉽다.

책이 200 페이지 정도로 적은 분량이라 사진을 좀더 큼직하게 실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저자가 불교 신자인 듯 한데, 절을 단순히 기행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불교라는 종교적 관점과 사찰을 함께 생각해 글마다 애정이 있고 불교에 대한 이해도 같이 전달하고 있어 유익했다.

특히 불교와 조형예술이라는 마지막 해설이 참 좋았다.

저자의 표현대로 유교는 형이상학적 관념성, 추상성을 추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사실적 조형주의를 추구하는 불교와는 전혀 다른 미감을 갖고 있었듯 하다.

화려한 고려 청자가 담박한 조선 백자로 변하는 것만 봐도 쉽게 이해가 된다.

앞서 읽은 "조선왕실 원의 석물"에서도 느낀 바지만 확실히 조선은 조각 측면에서는 수요가 적어서인지 기술적인 면에서 많이 퇴보한 것 같다.

석굴암과 능에 서 있는 석물을 비교해해 보면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알 수 있다.

서양에서 조형미술이 발달한 것도 기독교가 숭배의 대상을 눈으로 보여주는 종교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상깊은 구절>

103p

일본의 사찰들에도 내부에 토착적인 신사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초심자들은 불교의 종교적 정체성이 무엇인가 의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그만큼 너그러운 포용력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토착 신앙들을 흡수할 수 있었고, 국제적 거대 종교로 성장하면서도 기존 사회와 충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지역의 주도적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도적 종교로 성장한 것은 그 종교가 보편성이 있고 고등종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토착화 문제는 포교에 도움이 되나 교리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가톨릭이 처음에는 제사 문제와 충돌하지 않고 중국에 선교 사업을 진행했으나 후에 우상숭배로 여겨져 박해를 받았던 것과 비슷한 예이다.)

성리학적 이상을 통치 이념을 삼았던 조선시대가 되면, 한국 불교는 극심한 탄압으로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고려시대의 불교적 전통만을 고수한다면, 교단은 물론 개개 사찰마저 사라져 버릴 환경이 되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불교의 포용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서산대사는 선교 합일은 물론, 유불선 삼교의 통합 이론까지 제창했다. 이미 세속의 사상과 풍속이 유교화된 시대에 어쩔 수 없이 유교를 포용하려는 노력을 불교의 변질로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려는 대승적 목표를 생각한다면 사회와 유리된 불교란 무의미하다. 따라서 서산대사의 삼교합일 노력은 불교 자체의 생존 전략일 뿐 아니라, 유교 사회에서 중생 구제라는 불교의 존재 목적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107p

흔히 조선 후기는 불교의 쇠락기로 여기기 쉽고, 따라서 이 시기의 불교 건축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보잘 것 없다고 평가하기 쉽다. 그러나 현존 불교 건축의 95% 이상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것으로, 조선 후기를 불교 건축의 또 다른 융성기였다. 물론 불교시대인 고려조와는 비교하기 어렵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교계에서는 자발적인 노력으로 많은 가람과 불전들을 재건했었다. 흔히 조선 후기의 불교는 종파도 교단도 없고, 계통적인 법맥도 찾기 어려운 통불교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그만큼 불교를 둘러싼 사회적 여건들이 극한적으로 어려웠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찰 내에는 대중적인 모든 신앙들이 수용될 수밖에 없었고, 그래야만 몇 안 되는 인근 신도들의 신앙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사찰의 면모를 지킬 수 있었다. ... 이러한 수탈 속에서 사찰이 살아남는 방법은 조직화된 수도 생활뿐이었다.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면서, 가급적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도록 건물들을 방어적으로 지울 수밖에 없었다.

117p

이 지적인 보살은 원래 귀족적 풍모가 강했다. 조선시대에 오면, 불교의 주 신도층을 구성했던 농민들은 지식적인 문수보살보다 대중적인 관세음보살에게 더 큰 의지를 했고, 관세음을 위한 원통전이나 관음전은 지어졌지만, 문수전은 극히 드물었다.

175p

이전의 사찰들에서는 (불국사가 대표적으로) 가람 전체가 불국토를 상징하도록 구성되었지만 이제 그 상징화의 범위가 법당 내부로 축소되었다. 그만큼 불교세가 위축되었음을, 그러나 정토에 대한 희구는 본질적인 소망임을 보여준다.

196p

선암사의 승방들이 보존된 것은 스님들의 생활이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암사 스님들의 노력과 수행 생활이 없다면 선암사의 그 아름다운 승방들도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승방 건축은 왜 아름다운가? 거기에는 스님들의 치열한 수행과 체계적인 생활과 여유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204p

이 사회적 사상은 불교의 자비 정신으로 승화되었고, 고대 인도의 재편기에 사회적 실세였던 거상들과 부호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새로운 사회적 이상으로 수용되었다. 이 자비와 평등의 사상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치면서 '대중구원, 사회구원'의 대승불교로 심화되어 소수 지식층의 종교가 아닌 대중 종교로 확대되었다.

207p

사찰의 건축 구성이 복잡하고, 건물의 장식이 화려한 까닭은 조형적 감동을 통해서 종교적 신심을 끌어내기 위함이다. 물질과 관념을 엄격히 구분했던 유교적 세계와는 달리, 불교도에게 물질은 곧 관념이고 관념이 곧 물질이다. 존재와 무 사이의 차별이나 물질과 관념 사이의 이원론을 인정하지 않는 불교적 인식론은, 감각적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조형 예술을 발전시킨 근원적인 이유가 되었다. 

223p

조선 사찰은 외래 종교 건축으로서의 이국성을 탈피하여, 한국 고유의 성격을 획득한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 시기의 한국 건축계는 외국과의 교류가 거의 단절된, 가장 폐쇄적인 시기였다. 그러한 폐쇄성은 역설적으로 한국적 고유성을 형성하게 된 동인이 되었다. 그 폐쇄된 세계 안에서 한국 불교의 신앙과 건축은 자생적인 변화를 겪어 하나의 유형을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 유형의 건축적 완성도와 보편적 가치는 별개의 차원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오류>

89p

지리산 화엄사는 544년 (신라 진흥왕5) 연기 조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연기조사는 인도의 승려라는 설이 있었으나 1979년 '신라백지묵서대광불화엄경'이라는 사경이 발견되면서 발문에 연기가 황룡사 출신의 승려이며 경덕왕인 8세기 무렵 인물이라는 사실이 고증됐다. 그러므로 진흥왕 5년에 연기가 창건했다는 기록은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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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 원의 석물
김이순 지음 / 한국미술연구소CAS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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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해보이고 딱딱한 제목과는 달리 내용이 충실하고 사진이 아주 선명하며 방계로의 왕위 계승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정말 유익했다.

보통 능에 대한 연구서만 있지 본격적으로 원에 대해 쓴 책은 못 본 것 같다.

원은 대부분 아들이 방계로써 왕위를 이은 후 그 사친을 나중에 추숭한 경우라 그 과정이 흥미롭다.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의 묘를 소령원으로 봉원한 것이 처음인데 대부분은 1870년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왕권강화 목적으로 봉원됐다고 한다.

왕위 계승의 정통성 확보와 사친 추숭을 통한 효의 실천을 위해 조선만의 새로운 궁원제가 생긴 셈이다.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출신 컴플렉스 때문에 영조가 소령원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을지 짐작이 간다.


<인상깊은 구절>

43p

인조는 생부를 추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것과 달리, 아들의 경우에는 '원'이라는 단어조차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사실은 소현세자의 아들 즉, 원손을 세자로 삼지 않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사실과 함께 인조와 소현세자 간의 갈등관계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했다. 부대빈은 왕비보다는 아래지만 빈보다 한 단계 높은 지위로, 사친 추숭을 위해 만든 새로운 제도였다. 조선시대에 대빈의 작위를 받은 사람은 희빈 장씨가 유일하다. 숙종이 1701년에 내린 "빈어가 후비의 자리에 오를 수 없도록 하라"는 하교로 인해 왕비로 추숭은 어려웠다. 이때 묘를 원으로 추숭할 수 있었으니 봉원하지 않았고, 현재 서오릉 경내로 이장되어 대빈묘로 칭해지고 있다.

46p

정조가 즉위한 직후에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올리고 궁호를 경모궁으로 정했으며 무덤을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추숭했는데, 이는 세자로서가 아니라 정조의 사친으로서 추숭된 것이다.

100p

능묘 석인은 점점 양식화되어 시각적인 사실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석의물로서의 전통에 충실했다. 새로운 양식을 도입하는 것은 전통을 중시하고 국가적 역량이 모이는 왕릉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실의 무덤이라 하더라도 원이나 묘는 능에 비해 사적이었기 때문에 왕의 개인적 의지에 따라 새로운 솜씨를 지닌 장인을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7p

뒷면에는 음기가 새겨져 있는데 비문과 글씨는 모두 영조가 직접 글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영조가 영빈 이씨를 얼마나 애틋하게 생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220p

동그랗게 뜬 눈과 삼각형 귀,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 등으로 무서운 느낌이 들도록 표현하려 시도한 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석양에 비항 실제감이 부족하고 조각 수준이 떨어지는데, 이는 호랑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긴 결과로 보인다.

248p

이처럼 명성황후 사후에 실질적인 황후의 역할을 한 엄귀비가 고종의 계비인 황후로 올라가지 못한 것은 앞서 숙종이 후궁을 올려 정궁으로 삼는 것을 금하는 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종은 1870년에 세자묘를 승원할 때 후궁에게는 원호를 쓰지 못하게 했었다.

275p

원이 능에 비해 간소한 것은 영조가 소령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조선왕실의 엄격한 법도와 절제의 미덕이 낳은 결과로 볼 수 있다. 반면 고종시대에 일어난 대규모 봉원은 정치적으로 불안하던 시대에 명분을 중시하고 왕권의 정통성을 부여받고자 하는 의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276p

원제 무덤의 대상 범위가 왕의 사친에서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세손까지 확대된 것은 원이 사친추숭 및 계승강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사친추숭은 임승대통한 왕이 어버이에 대한 효의 윤리를 몸소 실천함으로써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궁극적으로는 유교 국가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계승강조는 당연히 대통을 이었을 세자와 세손을 높임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종통이 이어지는 군주체제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 대부분 합장이 아닌 단독 墳 으로 조성되었고, 순창원과 흥원만이 예외적인 경우이다. 이는 원의 피장자의 배우자와 사회적 신분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거나 배우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류>

105p

소령원 조성 시에 인조로부터 순혜왕후 공릉 문무석인 개수(1648)에 공이 있다는 이유로

-> 공릉은 순혜왕후가 아니라 예종비 장순왕후의 능이다. 또 1648년 실록 기사를 찾아보니 공릉이 아니라 성종비 공혜왕후의 순릉 개수가 이뤄졌다. 

141p

조말룡은 순혜왕후 공릉이 문무석인 개수에 공이 있다는 이유로

-> 공혜왕후 순릉을 개수했다.

202p

영빈 이씨는 21세에 영조의 후궁이 되고 정2품 숙의에 봉해졌다.

->1696년생인 영빈은 31세가 되는 1726년에 종2품 숙의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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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예술에 미치다 - 무색미학으로 본 한국인의 미의식
전기열 지음 / 아트북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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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도자기, 특히 조선 백자에 대한 이야기다.

전에는 고려 시대 청자를 만들던 훌륭한 기술이 조선 건국 직전 혼란한 상황을 거치면서 맥이 끊겨 더이상 만들이 못하고 분청사기와 백자로 돌아섰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자사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고려와 조선은 추구하는 미학과 감성이 달랐기 때문에 선호하는 그릇의 형태도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비단 도자기 뿐이 아니라 조선은 사치를 배격하고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담박한 미학의 사대부 취향의 문화를 추구했던 듯 하다.

요컨대 화려한 고려청자 보다는 단아하고 자극적이지 않는, 이 책의 저자의 표현대로 튀지 않는 색감의 중간색을 더 편안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저자가 설명하는 조선 백자의 단순미, 소박미, 자연스러움 등에 공감이 가고 비단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 같은 하층민 뿐 아니라 나라를 이끌어 가는 상층의 사대부들이 추구하는 미학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일본의 일기일회, 다선일미 문화에 대한 설명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왜 일본에서 이도다완 같은 평범한 막사발을 국보로 숭앙하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저자의 설명을 듣고 보니 아 그렇구나 무릎이 쳐진다.

조잡한 그릇에 와비의 정신을 구현해 가치를 만드는 차인을 통해 그 미학이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은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달린 것이고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미학은 없는 것일까?

솔직히 저자의 백자 예찬론에 공감이 가면서도 중국 도자기를 낮게 보는듯한 발언에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중국 도자기를 접할 기회가 없어 잘 몰랐는데 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펴낸 중국도자도록을 보고 정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비단 중국 도자기 뿐 아니라 유럽 도자기 등도 그 놀라운 형태미와 색채감, 세련됨에 정말 감탄했다.

비교 설명은 이해를 돕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이 만든 예술작품에는 나름의 철학과 미학이 베어 있을테니 다른 문화에 대한 섣부른 비판은 삼가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조선 도공이 이름을 남기지 않는 것을 두고 허명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해석하던데 이 문장에도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저자가 앞에서 설명한대로 조선 사회에서는 공예품이나 예술품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가치를 크게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이름을 남긴다는 의식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이 오늘날 조선 백자가 전통문화에 함몰되어 실생활에서 생명력을 얻지 못하고 박물관의 유물로 갇혀 있는 게 아닐까? 

조선 백자가 평등을 추구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구현했다는 말도 공감이 어려웠다.

조선이야말로 신분질서를 예로써 표현하는 사대부들의 나라가 아니었던가.

오히려 무애심이라는 표현이 더 공감된다.

저자가 다완이나 자기를 단지 감상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실생활에서 직접 사용하면서 그 멋과 맛을 음미하는 점도 인상깊다.

저자의 표현대로 원래 우리 자기는 감상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실생활에서 사용할 때 가치가 배가될 듯 하다.

마지막 장에서 자신이 소유한 여러 자기들을 소개하면서 품평한 것도 인상깊게 읽었다.

자신만의 애장품에 대해 이렇게 깊은 철학을 가지고 음미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수집가는 얼마나 행복한가.


<인상깊은 구절>

65p

동양의 화가들은 오래전부터 여백을 편재하는 氣의 표상으로 여겨왔다. 편재는 '두루 遍'자, '있을 在'자를 쓰는데, 말하자면 널리 퍼져 있음을 뜻한다. 위아래, 동서남북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함을 의미한다. 바로 이 '두루 존재함'에서 여백은 중국의 화가들이 산수를 그릴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산수의 '기상'을 표현한 의도적 장치로 사용했다. 이 시기의 여백은 한 방울의 먹을 사용함에도 심사숙고하는 惜墨이나 사물의 본바탕을 간결한 필치로 그려내는 동양화 화법 가운데 하나인 減筆과 더불어 표현 억제의 의미로도 쓰였다.

105p

조선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원색 계통의 화려하고 강렬한, 즉 눈을 자극하는 색상 사용은 무척 꺼린다. 색깔 종류는 다양하게 구사하지만 거의가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중간색 계통만을 쓴다. 

137p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 사회의 '이치고이치에 一期一會' 문화는 다선일미의 진리를 실천하는 문화다. 우리는 일본인들이 만남이나 헤어짐에 있어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불편할 정도로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습성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는 그것이 친절심에 나온 것이 아니라 이치고이치에 정신의 직접적인 발현임을 알 수 있다. "본래 다도의 모임은 이치고이치에라고 해서, 여러 번 같은 주객이 서로 만났다 하더라도 오늘 모임은 일생에 단 한번뿐인 만남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다도 모임의 정신을 풀이하고 있다. 이 정신에 의해 일본인은 매번 눈이 마주치는 순간마저 생애에 단 한번뿐인 만남이라 여겨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하는 것이다.

141p

우리 생각에는 일본 차인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다완이고, 와비차의 핵심 매개체라는 점에서 오오이도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가 않다. 즉 차와 와비의 미를 모르는 조선시대 초기의 이름도 알 수 없는 도공이 만든 그릇을, 차와 와비의 미를 알고 있는 일본 차인이 그 조잡함을 발견하고 그냥 취했다고 본다.

 우리는 여기서 이에 대해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오이도를 우리 선조가 만든 것이란 이유로 민족적 우월감 내지는 자족감에 들뜨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와비차는 본래 그렇게 시작한다. 정말 보잘것없는 것에서부터 도구를 찾는다. ... 오오이도는 조선에서 만든 조잡한 그릇이지만 일본의 차인이 가치를 추구하는 다완으로 채용함을써 훌륭한 그릇이 되었다. 만약 그 그릇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면 어찌 될까? 다시 조잡한 조선의 사발이 된다

 미의식에 불교를 담은 와비관은 다실에서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초라한 누옥이지만 그 속에서 차회가 열릴 때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치 충만한 공간이 된다. 와비차의 다실에서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귀하고 천한 신분에 상관없이 니지리구치를 통해 낮은 자세로 기어들어 갈 수밖에 없다.

145p

일본인의 미관은 그야말로 내용이 충실하면서도 품격까지 갖추었다. 이민족의 그릇에서 자기 민족의 가치관을 찾아낼 줄 아는 혜안을 지닌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술을 스스럼없이 사랑하고 존경할 줄 아는 미덕도 갖추었다. 아마도 지구상에서 조선 예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민족은 정작 우리가 아니라 일본인이 아닐까 싶다.

166p

우리 민족은 본래 다른 민족과 달리 고미술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족했다. 전래 유물이 극히 드물다는 것은 유물의 가치 인식에 대한 역사가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일본인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조상의 유물에 대한 가치가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보물이 되고, 환금성이 생기면서 전국에 골동성이 우후죽순으로 들끓었다.

229p

가령 차 문화에 지도적 입장에 있는 차 선생이나 사기장은 녹차와 다완을 매개로 하여 우리 차 문화가 고급 전통문화라 자랑하기를 좋아하나, 나는 그들이 왜 우리 민족이 녹차의 맛을 소중히 여겨야 하고 다완을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매개체가 지향해야 할 가치관도, 미관도 부재한 상태에서 무턱대고 전통만을 강조한 격이다. 일본 다도는 가치관과 행다법을 통해 깨달음에 들어서는 고급 정신 문화로서 굳건히 전통의 길을 이어가고 있는 데 반해, 우리 차 문화에는 도무지 이렇다 할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다. 굳이 평하자면, 그저 차맛을 음미하고 차맛의 깊이를 논하는 樂 정도라 할까. 조선시대 풍류를 즐기는 선비의 유희 수준에 머문 것이라 하겠는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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