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원의 석물
김이순 지음 / 한국미술연구소CAS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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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해보이고 딱딱한 제목과는 달리 내용이 충실하고 사진이 아주 선명하며 방계로의 왕위 계승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정말 유익했다.

보통 능에 대한 연구서만 있지 본격적으로 원에 대해 쓴 책은 못 본 것 같다.

원은 대부분 아들이 방계로써 왕위를 이은 후 그 사친을 나중에 추숭한 경우라 그 과정이 흥미롭다.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의 묘를 소령원으로 봉원한 것이 처음인데 대부분은 1870년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왕권강화 목적으로 봉원됐다고 한다.

왕위 계승의 정통성 확보와 사친 추숭을 통한 효의 실천을 위해 조선만의 새로운 궁원제가 생긴 셈이다.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출신 컴플렉스 때문에 영조가 소령원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을지 짐작이 간다.


<인상깊은 구절>

43p

인조는 생부를 추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것과 달리, 아들의 경우에는 '원'이라는 단어조차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사실은 소현세자의 아들 즉, 원손을 세자로 삼지 않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사실과 함께 인조와 소현세자 간의 갈등관계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했다. 부대빈은 왕비보다는 아래지만 빈보다 한 단계 높은 지위로, 사친 추숭을 위해 만든 새로운 제도였다. 조선시대에 대빈의 작위를 받은 사람은 희빈 장씨가 유일하다. 숙종이 1701년에 내린 "빈어가 후비의 자리에 오를 수 없도록 하라"는 하교로 인해 왕비로 추숭은 어려웠다. 이때 묘를 원으로 추숭할 수 있었으니 봉원하지 않았고, 현재 서오릉 경내로 이장되어 대빈묘로 칭해지고 있다.

46p

정조가 즉위한 직후에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올리고 궁호를 경모궁으로 정했으며 무덤을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추숭했는데, 이는 세자로서가 아니라 정조의 사친으로서 추숭된 것이다.

100p

능묘 석인은 점점 양식화되어 시각적인 사실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석의물로서의 전통에 충실했다. 새로운 양식을 도입하는 것은 전통을 중시하고 국가적 역량이 모이는 왕릉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실의 무덤이라 하더라도 원이나 묘는 능에 비해 사적이었기 때문에 왕의 개인적 의지에 따라 새로운 솜씨를 지닌 장인을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7p

뒷면에는 음기가 새겨져 있는데 비문과 글씨는 모두 영조가 직접 글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영조가 영빈 이씨를 얼마나 애틋하게 생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220p

동그랗게 뜬 눈과 삼각형 귀,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 등으로 무서운 느낌이 들도록 표현하려 시도한 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석양에 비항 실제감이 부족하고 조각 수준이 떨어지는데, 이는 호랑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긴 결과로 보인다.

248p

이처럼 명성황후 사후에 실질적인 황후의 역할을 한 엄귀비가 고종의 계비인 황후로 올라가지 못한 것은 앞서 숙종이 후궁을 올려 정궁으로 삼는 것을 금하는 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종은 1870년에 세자묘를 승원할 때 후궁에게는 원호를 쓰지 못하게 했었다.

275p

원이 능에 비해 간소한 것은 영조가 소령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조선왕실의 엄격한 법도와 절제의 미덕이 낳은 결과로 볼 수 있다. 반면 고종시대에 일어난 대규모 봉원은 정치적으로 불안하던 시대에 명분을 중시하고 왕권의 정통성을 부여받고자 하는 의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276p

원제 무덤의 대상 범위가 왕의 사친에서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세손까지 확대된 것은 원이 사친추숭 및 계승강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사친추숭은 임승대통한 왕이 어버이에 대한 효의 윤리를 몸소 실천함으로써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궁극적으로는 유교 국가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계승강조는 당연히 대통을 이었을 세자와 세손을 높임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종통이 이어지는 군주체제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 대부분 합장이 아닌 단독 墳 으로 조성되었고, 순창원과 흥원만이 예외적인 경우이다. 이는 원의 피장자의 배우자와 사회적 신분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거나 배우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류>

105p

소령원 조성 시에 인조로부터 순혜왕후 공릉 문무석인 개수(1648)에 공이 있다는 이유로

-> 공릉은 순혜왕후가 아니라 예종비 장순왕후의 능이다. 또 1648년 실록 기사를 찾아보니 공릉이 아니라 성종비 공혜왕후의 순릉 개수가 이뤄졌다. 

141p

조말룡은 순혜왕후 공릉이 문무석인 개수에 공이 있다는 이유로

-> 공혜왕후 순릉을 개수했다.

202p

영빈 이씨는 21세에 영조의 후궁이 되고 정2품 숙의에 봉해졌다.

->1696년생인 영빈은 31세가 되는 1726년에 종2품 숙의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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