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수 전쟁 - 변경 요서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大戰 경희 고고학 고대사 연구총서 4
이정빈 지음 / 주류성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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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페이지 정도 되는 작은 분량인데 사료 인용이 많고 한자어를 그대로 표기해서 읽는데 다소 어려웠다.

대중서로 펴낸 게 아니었는지, 한자가 한글 표기 없이 그대로 인용되어 당황했다.

<돌궐유목제국사>에서도 읽은 바지만, 유목민족들의 교역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저자는 고구려와 수의 전쟁도 요서 지방의 교역권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본다.

요서라는 지역 설정이 중요하다.

저자는 국경 대신 변경지대라는 표현을 썼다.

전에 다른 책에서도 이런 용어를 본 적이 있다.

고대 사회는 오늘날처럼 국경 개념이 확실한 것이 아니고 특히 민족국가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민족들이 혼재해 변경 지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하의 동쪽, 즉 요동은 고구려의 지배권이 확립됐으나 그 서쪽인 요서, 즉 동으로는 요하로부터 위로는 시레무렌까지, 서로는 난하까지 영역에서는 거란, 말갈, 돌궐 등의 여러 민족이 혼재되어 있었고, 북위 시절에는 고구려도 일정 부분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 때 유목민족과 교역권을 갖고 있었다.

그 후 수가 중원을 통일하면서 요서로 밀고 들어와 돌궐을 복속시키면서 고구려의 교역권을 침해하자 영양왕과 을지문덕 등으로 대표되는 신진귀족 세력들이 이에 반발해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영양왕도 전쟁을 막기 위해 조공 사신을 보내기도 하고, 수 역시 북방을 평정하기 전에는 잠시 평화 모드를 유지했으나 계민가한의 돌궐이 수의 세력으로 들어온 후 태도를 바꿔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했다.

계민가한의 장막에서 마침 순행을 나온 수 양제와 고구려 사신이 마주쳐 조공 체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펴는 고구려를 공격하게 된 사건은 유명하다.

저자는 꼭 이 사건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 게 아니라 돌궐 복속 전에는 수가 잠시 침공을 보류했고 이들을 평정한 후 공격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계민가한 역시 수나라와 고구려 양쪽을 저울질 하다가 고구려 사신을 수 양제에게 오픈시켰다고 본다.

고구려 원정은 결국 을지문덕과 당시 왕제였던 건무, 즉 영류왕이 잘 막아내 오히려 수나라가 망하고 만다.

재밌는 것이, 원정의 보급을 맡았던 사람이 당 고조 이연이었다고 한다.

그 후 당이 중원을 통일하면서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고 당 태종 역시 실패한 후 신라와의 협력을 통해 마침내 그 아들인 고종 때 망하고 만다.

요서라는 변경지대의 정의와, 유목민족과 농경국가의 교역권이라는 관점에서 본 고구려-수 전쟁이 무척 흥미롭다.

특히 수나라 침공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만 유명한데, 다음 왕위 계승자였던 영류왕이 500 결사대를 이끌고 10만 대군을 평양성에서 막아낸 부분은 무척 인상적이다.

과연 왕위를 이을 만한 지도자인데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살해당하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인상깊은 구절>

68p

유목국가의 군주권은 물자의 분배권을 통해 확보되었고, 따라서 군주권의 확보를 위해서는 교역이나 약탈과 같은 대외적인 성과가 요구되었다고 한다. 이를 고려해 보면 타발가한 재위 무렵 5가한 내지 그의 지지세력은 대외적인 성과를 과시해 차기 군주로서의 적격자임을 내세우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경쟁이 주변 세력과의 갈등으로 표출되었다고 해석된다.

93p

평원왕은 수 문제의 새서를 받고 외교문서를 보내 사죄하고자 하였고, 곧이어 즉위한 영양왕은 수의 책봉을 수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고구려의 행동은 수의 우위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수의 고압적인 태도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양국관계의 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기존의 세력권을 보장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층 수세적인 입장에서 기존의 세력범위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590년 수 문제의 새서를 받은 이후, 한동안은 수와의 관계개선에 노력하였다고 판단된다.

116p

590년대 중반 수의 지배층은 요서의 경제적 가치를 인지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일찍이 지적된 것처럼 요서는 동북아시아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요서의 동부에 세력범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볼 때 수의 관롱집단이 고구려 공격을 구상한 것은 요서의 교역권과 관련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5세기 이후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패권적 국가로서 주변 諸國의 교역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보면, 관롱집단은 비단 요서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교역권까지 장악하고자 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598년 고구려의 요서 공격에 수의 관롱집단이 즉각적인 반격을 주장하였고, 대규모 전쟁에 나섰다고 해석된다. 

122p

고구려는 요서를 통해 내륙아시아의 유목세력과 교섭하였는데, 수가 요서를 장악하고 내륙아시아의 제세력을 통제한다면, 고구려는 국제적으로 고립될 처지에 놓이게 될 수 있었다. 더욱이 5세기 이후 요서는 고구려의 안전판에 비견되듯이 그의 상실은 고구려의 직접적인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영주총관부의 세력확장은 고구려를 압박했다고 생각된다. 즉 요서에서 고구려의 군사력 실력과 세력을 내보임으로써 제종족의 이탈을 방지하고, 고구려와 내륙아시아 유목세력의 통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고 이해된다. 

138p

603~604년 이후 수는 요서에 진, 수를 설치, 정비하며 동진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면 598~607년 고구려와 수의 우호관계는 표면적인 현상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한다. 수의 동진은 고구려의 세력범위를 잠식해 감으로써 가능했을 것으로, 고구려의 위기의식은 차츰 고조되고 있었고, 이로 인한 양국의 갈등은 심화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605년 수 양제가 즉위하면서 양국 간에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은 한층 높아지고 있었다.

144p

고구려의 동돌궐 교섭이 수를 자극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수는 고구려와 동돌궐의 교섭을 공적 조공책봉질서의 외부에서 진행된 사적 외교행위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사적 외교행위를 묵인한다면 수 중심의 조공책봉질서를 앞으로도 계속 도전받을 수 있었다. 

156p

계민가한은 고구려의 사신을 숨기지 못해 양제에게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보다 계민가한은 양제가 방문할 때까지 고구려 사신과 교섭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는 수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고, 마침내 고구려의 사신을 공개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 고구려는 동돌궐을 통해 변경지대의 제종족과 불필요한 갈등을 없애길 바랐을텐데, 그래야 서방 변경지대에서 진행되고 있던 수의 동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동돌궐과의 확고한 동맹관계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대립은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166p

요서의 진, 수는 '유성 밖의 둔전'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진, 수의 설치와 같은 수의 요서정책은 북방정책의 일환이었다고 이해된다. 그 목표는 동북 방면에 대한 통제력의 강화였을 것이다.

 양제의 북방정책은 멸망의 원인으로 지목될 만큼 국가운영에 큰 부담이었다. 예컨대 청해성, 신강성 지역의 진, 수는 둔전만으로 유지가 어려웠고, 이에 서북의 군현으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었고, 그 결과 서북 군현의 농업생산마저 곤란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점은 동북 변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그렇다고 하면 양제대의 북방정책은 변경지대의 정치, 군사적 안정만 아니라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서북방으로는 토욕혼을 공격함으로써 서역과의 교역로를 개척하고자 하였다면, 동북방으로는 고구려를 공격함으로써 서역부터 동북아시아에 이르는 교역로, 다시 말해 실크로드-오아시스로를 장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74p

수에서 교역과 대외전쟁에 적극적이었던 것이 양제만이 아니었다. 예컨대 598년 고구려에 대한 반격시도나 605년 임읍 공격은 관롱집단이 주도하였다. 

 하지만 양제의 즉위 이후 대외전쟁은 대부분 그가 주도하였다. 이를 통해 양제는 관롱집단을 비롯한 주요 정치세력을 통제하고 집권력을 장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양제는 제위계승 분쟁을 통해 즉위하였고, 이에 정통성에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유목사회 계통의 군주는 이러한 불안정한 제위 계승의 한계를 대외적인 성과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는데, 양제의 고구려 공격 역시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수의 고구려 공격계획은 관롱집단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이제 양제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으로 전유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수 양제의 고구려 공격은 동북아시아 교역권의 장악을 목적으로 구상되었고, 그 안에는 황제권의 강화란 양제의 정치적인 목적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양제는 612~614년 고구려 공격이 실패하고, 신료의 대부분이 고구려와의 전쟁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공격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된다. 황제권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228p

619년 당은 장안을 비롯하여 중원지역의 요지를 차지하였다. 그런 만큼 중원지역 안의 여러 세력과 비교해 상대적인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동아시아 최강의 강자는 당이 아니라 동돌궐이었다. 

 사실 수 전성기에 해당하는 십여 년을 제외하면, 6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중원왕조가 아니라 돌궐이 주도할 때가 많았다. 따라서 당이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주도하리란 전망이 확고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구려는 동돌궐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 국제질서가 확립되는 데에도 경계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고구려와 당의 우호관계는 동돌궐 견제란 공동의 목적 속에서 수립되었다고 생각된다. 

247p

책봉호의 수여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조응한 것으로, 이제 당은 명실상부한 책봉-조공관계를 요구하였다고 생각된다. 이 무렵 고구려에 당에 책력을 요청한 사실은 그와 같은 대외정책의 변화에 호응한 것으로, 이로써 양국 관계는 점차 변화하였다고 파악된다. 특히 620년대 후반 이후 당이 동돌궐을 제압하고 동아시아 최강자로 떠오르자 고구려는 한층 순응적인 모습을 보였다. 경관의 철거는 그 연장선생에서 양국 관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판단된다. 

254p

요서 서북부의 거란 諸部 를 둘러싸고 고구려와 수가 경쟁하였다. 그럼에도 요서 제종족에 대한 수의 영향력은 차츰 증가했다. 양국과의 우호관계 역시 지속되기 힘들었다.

 590년대 후반 고구려는 요서에서 수의 세력확장을 경계했다. 수의 세력범위에 속한 제종족에 대한 군사행동까지 취했다. 그러나 수가 진까지 병합하고 동아시아 최고의 강국으로 부상한 589년 이후 고구려의 요서정책이 팽창 위주의 것이었다고 보이진 않는다. 고구려는 수의 우위를 인정하고 양국관계의 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기존의 세력범위를 보장받고자 했다. 

255p

607년 고구려는 동돌궐과 교섭했다. 이는 수 중심의 조공책봉질서를 위반한 사건으로, 향후 수의 전쟁의 명분으로 제시되었다. 하지만 수의 전쟁 명분이 곧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아니었다. 수는 고구려의 동돌궐 교섭에 위기의식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감을 내비치면서 고구려 국왕의 입조를 요구했다. 위기의식을 가진 쪽은 고구려였다. ... 고구려의 여러 귀족세력은 전쟁에 동의하고 그에 따른 인력과 물자를 부담하였는데, 이는 요서정책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6세기 이후 영역확장과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한계를 보이며, 요서정책과 요서를 통한 교역의 중요성이 한층 높아진 까닭에 전쟁을 감수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고구려-수 전종앤 수의 고구려 공격에서 비롯되었지만, 한편으로 고구려 지배층의 정치적 선택이 작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 645년 고그려-당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당의 동진은 급진적이지 않았다. 고구려 역시 무리한 세력확장은 피했다. 변경 요서를 사이에 둠으로써 갈등을 완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서를 둘러싸고 고구려와 당 또한 경쟁했고, 이는 또 다른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283p

이와 같은 병력규모의 증가는 병력동원 대상의 확대를 기반으로 하였다. 3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지배층을 중심으로 병력을 구성하였다고 한다면,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이후 병력동원의 대상을 일반 民으로 확대하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통시대의 병종구성은 신분과 무관치 않았다. 대체로 기병은 지배층이 보병은 피지배층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4~5세기 새롭게 병력으로 동원된 민은 주로 보병을 구성하였다고 짐작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이후 고구려 병력동원 대상의 확대는 보병의 증원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추정은 4~5세기 고분벽화에 보이는 보병과 기병의 비율이 3:1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 6세기 중반 이후 쇠뇌와 아울러 장궁이 보급되고 운용된 것은 보병의 수적 증가만 아니라 그 전술의 비중도 높아진 사실을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 이와 같은 보병의 확대는 중앙집권적 군사조직의 정비를 전제로 하였다. 전국적으로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고 운용하기 위해서는 중앙의 통제력이 요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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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veattack 2019-06-13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즈 명칭대로 ˝연구총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