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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 아름다운 우리 땅 그림 순례, 도원을 꿈꾸다 조선 땅을 만나다
이태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5년 3월
평점 :
500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분량에 비해 이야기는 술술 잘 읽힌다.
제목만 보고 단순히 옛 그림에 나오는 명승지를 찾아 가보는 답사기 같은 포맷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에 대한 본격적인 회화론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정선으로 대표되는 18세기의 진경산수화는 그 전의 관념산수화와 달리 우리 땅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여 관념성을 탈피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저자는 정선의 그림들이 실제 풍경과 거의 일치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정말로 사생에 중점을 둔 실경산수화는 그 다음 세대인 김홍도에서 만개한다.
정선은 화원이 아닌 사대부였기 때문에 풍경을 똑같이 그리기 보다는 신선이 살고 있는 선경이라는 이상향을 추구했고 명승지를 본 후의 느낌을 표현하는 사의성에 중점을 뒀다.
저자는 옛 그림과 실제 풍경을 카메라로 비교하여 얼마나 비슷한지 통계를 내기까지 한다.
진경산수화라는 정선의 경우 실제 풍경과의 일치도가 50% 미만이고 김홍도는 80%가 넘는다.
저자는 정선이 단순히 풍경을 사실대로 묘사하지 않고, 풍경에서 받은 느낌을 확대시켜 그 뜻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음을 지적한다.
소재는 조선 땅이었으나 여전히 풍경 그 자체보다는 성리학자가 추구하는 정신 세계의 조화로운 추구가 목표였던 셈이다.
책에 잠깐 언급되지만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 풍경화와의 비교가 인상적이다.
그러고 보면 조선시대 문인화가들은 예술 자체의 표현보다는 그 정신에 더 중점을 두는 오늘날의 추상화와 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김홍도의 그림이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수많은 그림들이 소개되는데 도판에 절반도 실리지 않아 너무 아쉽다.
강희언이나 이인문 등의 산수화도 정말 훌륭하고 후대의 소정 변관식와 청전 이상범의 현대적 금강산 그림도 너무나 인상적이다.
채색을 겸비한 현대 수묵화의 매력이 대단하다.
마지막에 실린 선조의 사위 신익성에 대한 화론도 흥미롭게 읽었다.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의빈이었으나 대신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기 때문에 경화사족으로써 시서화에 탐닉하고 문화를 후원하면서 예술을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소개된 그림 솜씨도 남다르다.
좀더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면 좋겠다.
<인상깊은 구절>
19p
겸재가 그린 진경의 현장을 답사하다 보면 과연 실제로 그곳을 보았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닮게 그린 예가 거의 없다. 심지어 가까이 살던 장동팔경을 그린 작품도 실경과 크게 차이가 난다. 보지 않고 그리거나 감정이 지나쳐 과장이 심한 '구라체'라 일컬어도 될 정도다. 혹은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데서 오는 기초 묘사력의 결여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 이로 보면 겸재가 실제 풍경을 통해 현실미보다 성리학적 이상을 그리려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 소동파가 '회화에서 대상의 닮음, 곧 형사를 강조하는 것은 어린애 수준'이라 폄하했던 점이나, '神似'나 '寫意'의 정신성을 강조한 문인화론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다. 겸재 진경 작품의 변형미를 대할 때면, 군자가 산수를 사랑하는 까닭을 설파한 곽희의 '산수 보는 법'이 떠오른다.
24p
'우리 19세기 회화가 단원 화풍을 한 단계 발전시켰더라면' 하는 가정을 떠올릴 만큼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잘 알다시피 단원 이후에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대표작으로 손꼽히듯이, 망막에 어리는 대상보다 심상을 표출해야 한다는 서권기, 문자향의 남종문인화풍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39p
우리의 수묵산수화는 그 재료가 갖는 생래적인 특성 때문에 대상 풍경의 색감이나 질감을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현재 심사정은 <삼일포>를 그릴 때 물과 하늘색을 고려했는지 푸른 옥색 종이를 선택했다. 하지만 갈필의 피마준 선묘와 엷은 담채로 그린 화면에서는 막상 그런 미인의 맛이 나지 않는다. 실경에서 만나는 흰 구름과 파란 하늘, 녹색 숲, 그것들이 비친 호수의 색감이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정선이나 심사정이 그린 삼일포 그림의 약점은 1999년에 서양화 재료로 그린 강요배의 <삼일포>와 비교하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이런 강요배의 채색화가 삼일포의 아름다움, 그 진경의 맛을 보게 해준다. 서양화 안료의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44p
먼저 대상의 외모를 재현하는 일이다. 동양회화론으로는 '형사'에 해당하겠다. 다음으로 그보다는 대상에서 받은 느낌 드러내기, 곧 표현을 강조하는 스타일이다. 대상에서 받은 감정표출을 중시하는, 동양회화론의 '사의' 개념과 흡사하다. 이렇게 보면 기억으로 그리는 일은 사의성에 치우치기 쉽다. 반면 실경 현장에서 스케치한 그림은 형상을 닮게 그리는 형사 기량이 중요하다.
87p
뛰어난 회화성은 선배인 정선이나 동료화원 김홍도의 총석정 그림에 뒤지지 않는다. 먼 수평선부터 총석정까지 일렁이는 동해의 파도를 생생하게 표현한 그림이다. 이인문은 김홍도와 동갑인 화원으로 김홍도의 명성에 가려 있다. 하지만 <단발령망금강>과 <총석정> 두 진경 작품들의 조형미를 보면, 이인문이 김홍도보다 낮게 평가받을 이유가 없다.
94p
정선이 완성한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대지, 나아가 조선의 명승을 통해 더 나은 이상을 꿈꾼 자들의 회화형식이다. 그 중심이념은 물론 성리학이었을 터이고 정선이 역리를 원용하여 그림을 그렸다는 증언과도 맞물린다. 또 정선이 고위관료로서 당시 집권층인 서인-노론계 문사들과 친밀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130p
정선의 금강산 전경도나 부분 명승도들이 실경과 다른 것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외형보다 현장에서 느낀 감정의 리얼리티와 첫인상을 형상화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감식 화면구성과 대담한 변형과 생략, 리듬감 있게 반복되는 붓질은 천석의 울림, 즉 기암 사이에 부는 바람소리와 계곡에 여울지는 소란스런 물소리를 화면에 담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터이다. 이는 신선이 사는 선경을 의미하는, 그래서 당대 사대부들의 은일와유 취미에 걸맞은 진경산수 개념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140p
진경산수와 남종화풍을 개성미 넘치게 융화시켰던 18세기 선비화가들은 19세기 중엽 이후 구체적인 대상 없이 중국 문인화를 모델로 관념적 사의와 문기만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버린 김정희 일파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252p
그렇게 도형화된 지도가 진보한 만큼이나 회화에 버금가는 그림지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지닌다. 도형식 지도가 과학화되면서 그림지도의 형식미는 산천을 사람의 몸과 같이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로 인식했던, 인간과 땅을 동일시했던 전통적인 자연관을 더욱 잘 반증하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우리 국토 곳곳을 빠짐없이 서술한 크고 작은 그림지도가 현지 많이 제작되었다. 나름대로 보기 좋고 이해하기 수월한 그림지도 방식을 창출한 까닭에 당대인들이 추구한 자연과의 친화력을 읽을 수 있다.
267p
이처럼 정선은 실경을 형사하기보다는 실경에서 받은 감정적 사의를 중시했다. 대상의 외형은 닮게 그리지 않았지만, 실경에서 받은 인상을 정확히 쏟아내려 했던 것이다.
327p
김윤겸은 명문세도가에서 서얼로 태어나 서출의 사회적 자각과 진출이 두드러지는 18세기에 활동한 화가다. 서출에 대해 개방적이고 학예에 돈독했던 집안의 영향 아래 다행히 화가로서 자신의 길을 열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김윤겸이 기행과 사경으로 진경산수에 일가를 이룬 것은 집안에 전승해온 유묵, 그리고 아버지 김창업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의 명승기행과 세속을 벗어나 자연에 은거했던 사상적 배경도 간과할 수 없겠다. 당대의 능력 있는 사얼 중 일부는 사회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데 비해, 김윤겸 또한 명문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행적이나 기록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얼들의 소극적 행동반경과 그가 화업에 열중한 대신 학문이나 문학 분야에서는 두드러진 존재가 아니었던 데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431p
이들에 의해 일반화되어 유지해온 김홍도 화맥은 근대회화에서 실경산수가 부흥하는 데 기여한 비중이 자못 크다. 즉 말기에 침잠한 상태로 계승된 김홍도의 진경 표현감각이 근대에 향토적인 소재와 색채를 구사한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에게서 새로운 양식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488p
17~18 세기에 새롭게 변신, 창출되는 실경산수는 중국에서 명과 청이 교체된 이후 조선에서 형성된 주자종본주의 내지 소중화적 자긍심으로, 정권의 중심세력에 부각된 서인-노론이 이를 자극하고 발전시켰음을 무시할 수 없게 한다. 17세기 실경산수의 사례가 서인-노론에 집중되고 특히 작품으로 남아 있는 사례가 안동 김씨 집안에 전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들과 정선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정선이 화가로서 위치를 다지게 된 계기가 김수항의 장자이며 집권 노론계의 주요인물인 김창집과 이웃하여 살면서 그의 천거를 받아 비롯되었다고 전해오기 때문이다.
533p
신익성이 17세기 변혁기 새로운 문예의 움직임을 선도한 문인 중 한 사람임을 적절히 시사한다. 평생 유람객으로 자연에 대한 흥신을 녹여낸 시와 기행문, 명대 문예풍 수용과 개성, 그리고 장서와 서화수집 취미, 여기에 덧붙여 서화론과 서화작품은 신익성의 문예사적 위상을 재론케 한다.
신익성은 선조의 부마로서 격변기를 겪었다. 대내외로 복잡하게 얽힌 정세변화 속에서 인조반정 참여와 척화로 정치적 명분을 세우고, 조선 후기 사족문화의 한 전형이 되었다. 관료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자연에 귀의하여 탈속한 삶으로 문예에 대한 끼를 맘껏 쏟아냈던 것이다. 또한 이는 탈속한 물외인으로서 이룬 것만은 아니었다. 광주 별서의 논밭과 두미 어장의 튼실한 경제적 기반 아래 '반은 사림에 반은 저잣거리'에 걸쳐 있던 현실인이었기에 가능했을 거라 생각한다.
536p
진산수 사생론과 실경화 <백운루도>는 인조 연간을 대표할 만한 회화 사료다. 한국회화사에서 신익성이 차지하는 위치를 새로이 짚어보게 한다. 또 이들의 참신한 시각과 예술적 성과, 신형식 창출은 커다란 변혁기인 17세기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신익성이 역사의 소용돌이를 딛고 전국 명승을 유람하고 광진과 두미 사이 한강을 오가며 성리학자로서, 시인으로서, 서화비평가와 수장가로서, 서화가로서 조선 문인의 자긍심을 꾸준히 절차탁마한 결과일 터이다. 신익성은 지금까지 미술사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문인화가지만, 조선 후기를 그가 활동했던 인조 연간부터 잡아도 될 만큼 재평가해야 할 인물이다.
537p
이미 16세기 후반에 경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구체제의 대대적인 개혁을 주장한 바 있는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서인이 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조선 후기 사회를 예시하고 있었다, 뒤이어 일어난 병자년(1636)으로 인하여 일시적 좌절이 있었지만 순정 성리학도를 자처한 사림이 정권 담당자가 됨으로써 양란으로 구체제가 와해된 조선사회를 순수 성리학 이념으로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사림이 되는 일차적 요건이 성리학이라는 학문에 있었기 때문에 신분적 한계나 혈연과 가문이라는 요소가 이차적으로 밀려난 느낌마저 있었다. 조선 후기에 제시된 제반 사회경제정책이 모두 이들의 정치이념에서 도출되었던 것이다. 인조반정이야말로 조선 후기의 기점이 될 수 있는 내재적 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