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그레이슨 페리 지음, 정지인 옮김 / 원더박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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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얇은 문고판 정도의 분량에 비해 가격이 높게 책정된 것 같은데 편집 디자인이 산뜻하고 무엇보다 책 내용이 너무 좋다.

비평가가 아니라 실제로 작품을 만드는 생산자의 목소리로 듣는 예술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 신선하고 역시 깊이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자는 터너상을 수상하고 국가에서 훈장까지 받은 유명한 도예가라고 한다.

표지 디자인이 너무 가벼워 보여 뻔한 이야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오랜만에 예술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이있는 대화를 한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전혀 어렵지 않다.

저자는 대중에게 어려운 내용을 흥미롭게 전달하는 법을 아주 잘 아는 듯하다.

다만 한국어 제목이 책의 매력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고흐처럼 정식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 놀라운 창의력을 가지고 예술계의 별로 우뚝 선다는 것은 그야말로 거의 불가능한 신화에 가깝고 예술가 역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고 영감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은 성실한 직업인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혁신적 사고나 시도를 모두 받아들여 이익을 내는 사업으로 바꿀 수 있는 상업주의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파격적인 시도도 결코 감당하기 힘들 만큼 파격적이지 않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는 시대에 과연 예술인 것과 아닌 것의 경계선, 기준은 무엇일까?

동료의 인정, 평단의 평가, 거물 수집가들의 취향 등이 모두 어우러져야 하지만 결국 예술가는 항상 진지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인상적이다.

아무리 상업주의에 휩쓸려 좋은 작품의 기준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아도 예술가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핵심적인 방법은 바로 진지하게 작품에 임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뒤샹의 레디메이드 이후 예술과 비예술의 기준 자체가 모호한 요즘 시대에 동시대 미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그리고 예술가의 정체성이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숙고해 보는 좋은 시간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26p

우리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그것이 어떤 고유한 아름다움의 특질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거기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그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데 익숙해진 것일 뿐이라는 말이다. 아름다움은 익숙함,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생각을 강화해 주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30p

자의식에 기초해서 '무엇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뿐 아니라 '예술이라 불리는 이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까지 성찰하는 것이다. 이러니 예술가의 역할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38p

어떻게 해서 어떤 예술이 다른 예술보다 더 좋은 것으로 여겨지느냐? 대부분의 미술관과 갤러리의 회전교차로를 포함한 예술계의 주류에서 무엇이 예술의 질을 가르느냐? 그것을 이해하는 핵심은 '가치 입증'이다. 그리고 그 입증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누가 입증을 하는가. 누가 자신의 호의적인 의견과 돈과 주의와 시간을 투자하는가. 누가 특정 예술가와 예술 작품들에 가치를 부여하는가이다. 이 드라마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예술가와 수집가, 스승, 딜러, 평론가, 큐레이터, 언론... 아, 그리고 어쩌면 대중들까지도.

 테이트 갤러리의 관장에 따르면 입증에는 네 단계가 있었다. 먼저 동료들의 입증이 있고, 다음에는 진지한 평론가들의 입증, 그다음에는 수집가와 딜러의 입증, 마지막으로 대중의 입증이다. 

 인정을 받는 것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며, 동료들이 가치를 입증해 주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영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 같은 평론가가 한 예술가의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하던 시절은 지났다. 예술에 관한 글을 쓰는 이들에게서 호평을 받는 거야 좋은 일이고, 예술가들은 아주 한심한 글이라도 그들이 쓴 평을 글자 그대로 인용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언론은 예술계의 다양한 목소리들 중 그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수집가에 대해 얘기하자면, 예술가라면 언제나 거물급 수집가가 자기 작품을 사 주기를 원한다. 그게 자기 작품에 영예를 더해 주기 때문이다.

44p

오늘날 한 예술 작품에 붙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아마도 '미술관에 걸릴 만한 수준'이라는 말일 것이다. 한때는 작품에 신임을 부여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그 작품의 의뢰자들,그러니까 왕과 교화와, 그 뒤를 이어 귀족과 부자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입증자 계급 구조의 꼭대기에 있는 이는 아마도 큐레이터일 것이다. 독일의 예술 평론가인 빌리 본가르트가 "예술의 교황들"이라 불렀을 정도로 큐레이터의 힘은 막강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개인 컬렉션을 위해 작품을 수집하고 구매해서는 안 되며, 자신들이 직업적으로 관장하고 있는 분야의 일을 개인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 강령의 제약을 받는다. 그런 일을 한다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아주 큰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46p

오늘날 공공 미술관에 자리 잡게 된 예술 작품은 대중의 투표로 그곳에 간 게 아니다. 그러기까지 그 작품은 세계 곳곳에서 사적인 감상과 판매와 아트 페어라는 일련의 비공식 심사를 거치면서 좋은 평가와 인정한다는 윙크를 받았다. 이런 식의 합의는 필수적이다. 예술계에는 완전히 새롭고 예리한 안목을 가졌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 않거나 라벨에 붙은 이름을 읽지 않고도 어떤 예술 작품에서 수준 높은 질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예술계에는 많지 않다

 물론 한 번 쌓인 명성이 계속 유지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성공한 예술가에 대해서는 결국 합의가 형성된다. 바라건대 여러 다른 맥락들에서도 계속해서 검증된 합의이기를, 그런데 그 합의의 본질은 뭘까? 여러 측면을 고려하고서 나는 그것을 '진지함'이라는 한마디로 결론 내렸다. 진지함이야말로 예술계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통화다. 

52p

1960년대 팝아트는 소비주의를 미술에 접목시킨 것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떤 면에서는 전통적인 예술처럼 보였다. 오늘날에는 데이미언 허스트, 제프 쿤스, 무라카미 다카시 등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예술가들에 의해 새로운 예술 브랜드가 하나 생겨났는데 그 특징은 호사스러운 마무리, 이해하기 쉬운 형상, 터무니없는 가격이다. 이런 예술품들은 소비재가 맞다. 이런 예술가들은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소비주의를 한껏 포용하고 직원을 있는 대로 고용한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조수가 100명이 넘는다.

 비교적 소박한 재료로 소비재 상품을 모방했던 팝아트와 달리 제프 쿤스는 비싼 재료를 쓰고 대단히 공을 들인 마무리를 보여 준다. 고가의 사치품처럼 말이다. 나는 제프 쿤스의 '공기 주입식' 금속 조각품들을 마치 자동차를 평가하듯이 평가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한다. 역설적이게도 다수의 벼락부자 수집가들은 예술품을 사는 것을 페라리나 핸드백을 사는 것과 비슷한 일로 여긴다. 은행들도 예술이 견고한 자산군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65p

물론 자기가 하는 활동이 예술로 불리기를 원하는 매우 강력한 이유 중에는 경제적인 것도 있다. 미술 시장에는 엄청난 거액이 출렁대고 있으니 말이다. 그건 자기가 하는 일을 예술이라고 부를 꽤 멋진 동기다.

77p

무언가를 예술이라는 틀에 집어넣는 것은 어떤 곤란한 상황에서든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통행권을 얻는 일이자 일종의 선점이고, 다시는 기량 부족에 대해 비난받지 않을 권리를 갖는 일이 되었다.

 '예술 프로젝트'라는 게 이제는 쓸모없고 서투른 아마추어 활동을 가리키는 상투어가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알다시피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그리 잘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비디오 아티스트가 되고, 히트곡을 낼 만큼 딱히 작곡 실력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아트 밴드를 만든다.

113p

예술은 여전히 창의력의 각축장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혁명과 반란과 대격변이 예술을 정의하는 개념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100년 전에 예술은 혁명이라는 개념과 거의 동의어였다. 현대 미술 전시회에 간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불쾌함을 느꼈으며 그림을 "야수"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개념으로부터 1세기나 지난 시점에 있다. "이제 아방가르드는 특정 시대에 속한 양식이 되었다."

124p

1950년대에 '해프닝'이라는 행위예술 개념을 정립했고, 당대의 진정한 최첨단 인물이라기에 손색이 없던 앨런 캐프로는 예술가들이 원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중산층의 안락한 삶이라고 단정했다. 당시 온수도 안 나오는 소호의 다락방에 살던 많은 예술가들에게는 꽤나 짜증나는 소리였을 것이다. 그는 예술가라는 직업이 다른 전문직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편 예술계에서 전복적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예술계는 정통을 꽤나 중시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예술가가 한 가장 반항적인 행위가 있다면 트레이시 에민이 보수당을 지지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창의적인 반항아들은 흔히 자신이 권력자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창의적이고 독창적으로 살아감으로써 자신들이 실은 자본주의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아이디어야말로 자본주의의 생명줄이니까. 동시대 미술은 자본주의를 위한 연구개발 부서와 같다. 칼 마르크스는 진보 혹은 참신함에 대한 이 욕구를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본성"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의 욕구를 인정하고 그 가치를 평가하고 상품으로 재생산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게 해주므로 자본주의는 억압적인 사회주의와 달리 21세기를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닐까?)

147p

두꺼비처럼 예술계 전체에 올라타 버티고 있는 거대하고 지배적인 것 하나는 두말할 것 없이 상업주의다. 상업주의는 현재 진행 중인 매우 막강한 예술운동이다. 

 나는 더 이상 아방가르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저 전 세계의 서로 다른 장소에서 다양한 재료들을 가지고 다양한 수준으로 실험하는 다양한 현장들이 있을 뿐이다. 그 세계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이 쓰레기지만 그건 언제나 그래 왔다. 그래도 그중 일부는 정말로 경이롭다.

164p

물론 아웃사이더 예술가라는 정말 멋진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 대학에 가지 않아도 예술가가 될 수는 있지만, 대학에 가지 않는다면 예술가로서 직업적 경력을 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아도 무척 어렵다

 이제는, 특히 서구에서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천재란 진기한 옛이야기에나 나오는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직 전개 중인 동시대 예술의 분야들에는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비서구권의 천재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 서구에서는, 예술 학교에 다녀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탁월한 동시대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조금은 이상하고 순진한 생각이다.

169p

예술 대학의 관대하고 수용적인 품 안에 들어가는 것은 가족이나 사회와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느끼는 젊은이들에게 심오한 경험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차이와 상상력을 인정받고 허락받는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들은 당대의 예술과 예술가임이 의미하는 바를 아주 미묘한 방식으로 온몸으로 이해하게 된다.

 테크닉을 배우는 것 또한 큰 기쁨이다. 일단 어떤 테크닉을 배우면 그때부터는 그 테크닉 안에서 사고하기 시작한다. 나는 새로운 테크닉을 익힐 때마다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이 확장되었다. 기술들을 배우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 어떤 기술을 다루는 실력이 향상될수록 자신감이 더 커지고 더 능숙하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나는 느긋하되 능숙하게 무언가를 하는 상태를 좋아한다. 어떤 영역에 들어가 몰두해서 1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정말로 능수능란해지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기술들일 수도 있지만, 주차장에서 벌어진 시비를 중재하는 기술이나 트위터를 통해 사람을 모으는 기술이 될 수도 있다.

 그 과정이 끝나면 학생들은 자신이 독특한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기를 고대하며 학교를 나온다. 그러나 옛말에도 있듯이, 독창성이란 잘 까먹는 사람들의 것이다!

 물론 독창성은 분명 존재하며, 독창성을 대면할 때 느끼는 충격적 즐거움은 예술에 관심있는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 중 하나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예술가도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까지 꽤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예술에서 경력쌓기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니까.

175p

내가 만나 본 성공한 예술가들은 대부분 대단히 엄격하게 규율잡힌 사람들이다. 그들은 시간 약속을 정확히 지키고 많은 시간을 일에 쏟아붓는다. 예술가란 모두 조금은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신화일 뿐이다. 예술가들은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예술가인 것이 아니라 예술을 만드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한 말이 떠오른다. "옛날에 그들은 지혜를 사랑했다. 오늘날 그들은 '철학자'라는 칭호를 사랑한다."

176p

마르셀 뒤샹은 말했다."내가 10년 동안 10만 개의 레디메이드를 손쉽게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그건 모두 거짓된 것이었을 터이다. 과잉 생산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평범함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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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들이 말해주는 그림 속 드레스 이야기
이정아 지음 / 제이앤제이제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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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생각보다 알찬 내용의 책이었다.

이 출판사의 다른 책들은 도판의 질이 떨어져 실망했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은 도판이 정말 훌륭하다.

출판사에서 도판에 신경을 아주 많이 쓴 것 같다.

미술사적으로는 덜 알려진 그림들을 많이 소개해 주고 도판 또한 매우 선명해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저자가 전공자가 아니라서 가벼운 가쉽거리 수준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서양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의상과 당시 시대상에 대한 많은 정보를 준 성실한 저작이라 만족스럽다.

아름답게 치장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그림을 통해 잘 표현하고 있다.

채색 물감이 발달했던 곳이라 당시 시대상을 너무나 선명하게 잘 보여준다.



<인상 깊은 구절>

9p

이러한 분위기는 과거 일부 상류층에 국한된 미술품의 주요 소비 계층이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중산층으로 확대되면서 더욱 촉진됐다. 부르주아의 취향은 일상과 현실에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평소에 입고 있는 옷과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공간, 아웃과의 만남, 거리의 풍경 등 현실이 그림에 담기길 바랐다. 소비계층과 취향이 다양해지면서 더 많은 현실의 패션이 그림에 담기게 된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위를 생물학적 본능이라 정의하며 인간의 본질을 호모 에스테티쿠스로 보았다. 미학적 인간이라는 뜻이다. 인간을 미학적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을 넘어 아름다움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재현하기 때문이다. 그림과 패션이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즉각적이고 실존적인 행위라는 말은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특성을 바탕으로 한다.

35p

의복의 예의범절은 당연하게도 많은 지출과 시간, 노력을 필요로 했지만 그만큼 여유 있고 한가하다는 반증이었다. 꼼꼼한 몸단장과 이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어느덧 품위와 에티켓으로 굳어졌다.

72p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사람들의 모든 행동에는 두 가지 동기가 있다고 했다. 성적 충동과 위대한 사람이 되려는 욕망이 그것이다. 

90p

제인 오스틴조차 여자 조카에게 보낸 편지에 "무서운 일이지만 독신 여성은 가난해지기 십상이다. 이것은 결혼을 선호하는 강렬한 이유가 된다."고 썼을 정도다.

160p

파리와 런던에 불어 닥친 자포니즘 열풍은 17~18세기 유럽을 강타한 시누아즈리 열풍을 능가한 것이었다. 시누아즈리가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하며 상류층 문화로만 소비된 반면 자포니즘은 부르주아 계층을 중심으로 대중들의 일상 속으로 퍼져나갔다. 

195p

플래퍼는 흔히 20세기 초 미국의 흥분과 쾌락을 대변하는 이미지로 간주된다. 실제로 그들은 물신주의와 소비주의에 빠져 있었고 매사에 진지하지 못했으며 정신 없이 놀고 별로 이룬 것도 없다. 그러나 왜 남성과 여성은 평등하지 못한가에 대한 사회적 자국을 요구하며 전통적인 성역할에 반기를 들었다. 

201p

1929년 경제대공황이 시작되자 플래퍼, 가르손느, 게르다로 이어진 광란과 전위의 패션은 조용히 막을 내렸다. 여성들은 검정, 회색 같은 어둡고 재미없는 색상의 튼튼한 옷을 입고 공장에 나갔다. 이러한 내핍 시대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214p

100년 동안 이어진 혁명으로 의복의 계급은 완전히 사라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계급에 따라 옷을 입도록 강요받지 않았고 마침내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가 동시에 찾아왔다. 새로운 권력자가 된 이들은 몰락한 귀족이나 노동자 계급과 구별하는 새로운 옷차림을 원했다. 남성 부르주아지가 양심껏 도덕성을 강조한 검은색 슈트를 선택하고 신사가 되었을 때 여성 부르주아지는 귀족에 대한 선망을 대놓고 드러내며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을 압도할 우아한 옷과 사치품은 그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232p

혁명기를 거치며 사회의 주역으로 자리잡은 부르주아 남성들은 화려한 의복과 사치를 타락한 귀족 문화의 일종으로 여기고 경멸했다. 건강한 정신을 가진 신사라면 멋을 부리거나 물건을 고르고 흥정을 하는 하찮은 일 대신 사회적, 정치적 발전 같은 공공 영역에 열정을 쏟아야 한다는 생각이 사회 전반에 팽배했다. 절제, 근면, 성실은 부르주아 남성의 덕목으로 존경받았지만 과시적 소비는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지탄의 대상이 됐다. 구시대적 유물 같은 몇몇 귀족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상류층 남성들은 절제된 검은색 양복을 유니폼으로 선택했다. '남성의 위대한 포기'의 시대였다.

 남성들의 억눌린 소비 욕망은 여성들을 통해 배출되었다. 남성들은 자신의 아내를 통해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성공을 드러내고자 했고 여성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을 만족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남성보다 감성적이고 열등한 존재로 여겨진 여성들의 사치는 사회의 너그러운 이해를 받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일종의 의무가 됐다. 여성들은 사회에서 배제된 채 코르셋으로 몸을 조이고 남성들이 포기한 레이스와 보석으로 치장하며 자의반 타의반 남성의 트로피가 됐다. 가부장적 사회는 여성들의 경제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고 오직 소비하고 순종하는 현모양처의 삶을 강요했다.

235p

그의 주장대로 당시 여성의 사치는 남편이 특별하고 부유한 사람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로만 이해됐는데 따라서 미혼과 미망인 상태에서 사치는 허용되지 않았다. 허용된 사치는 남성의 후원과 보호 속에서 꾸준히 육성됐다.

256p

이런 분위기에서 차근차근 부와 지식과 교양을 쌓아가며 계급의 사다리에 오른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성공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과거 귀족들의 과시적 욕구, 구별의 욕구와 같은 맥락이다. 이들 마음에는 근면, 절약, 경건을 기본으로 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위엄, 기품, 엄격 같은 귀족적 덕목을 선망하는 부르주아의 욕구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부르주아 남성들에게는 우아하게 격식을 차리면서 종교적 경건의 윤리에 위배되지 않으며 나와 같은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새로운 패션이 필요했다. 그들의 선택은 중세 귀족들이 썼던 검은 모자였다.


<오류>

15p

도판 -브레아 미술관, 이탈리아 밀라노

-> Pinacoteca di Brera, 즉 브레라 미술관이다.

17p

신성로마제국의 궁정 화가 야콥 자이제네거가 그린 훗날 페르디난드 2세가 되는 15세 소년의 모습에 코드피스가 선명하다.

-> 도판의 주인공은 합스부르크의 황제 페르디난드 1세의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대공 페르디난드 2세이다.

본문 설명만으로는 황제 페르디난드 2세를 가리키는 것 같아 오해의 소지가 있다.

69p

도판 - 폴 제사르 엘뤼, 마틸드 씨의 초상 1530

-> 1530년이 아니라 1910년 작품이다.

131p

도판 - 겔빈그로브 미술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  Kelvingrove Art Gallery , 즉 캘빈그로브 미술관이다.

150p

루이 14세는 '자기의 트리아농'을 만들었고 그의 아들 루이 15세는 파리 근교 샹티이 성에 중국식 운하를 만들었다.

->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의 아들이 아니라 증손자이다.

190p

오귀스트 르누아르 (1841-1917)는 변모하는 근대의 삶과~

-> 르누아르의 생몰연도는 1841-1919년이다.

253p

도판 - 랭부르 형제, 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시도서 "The Belles Heures of Jean de France, duc de Berry" 1404-1409,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미국 뉴욕

-> 랭부르 형제는 두 편의 그림을 남기는데 한 편은 "Tres Riches Heures de duc de Berry (1415~1416), 즉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시도서" 이고 프랑스 샹티이 성의 콩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 한 편이 바로 도판이 실린 "The Belles Heures of Jean de France, duc de Berry", 즉 "베리 공작의 아름다운 시도서"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분관인 클로이스터즈 미술관에 있다. 

이 작품의 제작 연도는 1405-1408/1409 이다.

한글 제목이 잘못 번역되어 있다. 

274p

도판- 랭부르 형제, 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시도서 "The Belles Heures of Jean de France, duc de Berry" 1412-141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미국 뉴욕

-> 이 도판은 "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시도서"가 맞는데 불어 제목이 틀렸다. 위의 제목은 앞의 도판에 나와 있는 "베리공의 매우 아름다운 시도서"이다. 또 이 작품은 메트로폴리탄이 아니라 프랑스 샹티이 성의 콩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베리공의 시도서는 두 권이 있고 각기 다른 곳에 소장되어 있는데 저자가 착각한 것 같다.

277p

메리 스튜어트는 결혼 한 달만에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친척 언니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청하게 위해 잉글랜드로 찾아가지만

->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스튜어트의 언니가 아니라 당고모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인 헨리 8세와 메리 스튜어트의 할머니인 마거릿 튜더가 남매였다.

322p

도판 - 클로드 모네,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 쿤스트할레, 독일 베를린

-> 모네의 이 그림은 베를린이 아니라 브레멘의 쿤스트할레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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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재미난 이야기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역사책 재미난 이야기 역사책
정기문 지음 / 책과함께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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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도 재밌게 읽었는데 2권도 아주 재밌다.

34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에 책 판형도 작아서 침대에 누워 소설책 읽듯 금방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역사에 대한 별다른 지식도 없이 그저 야사 위주의 가벼운 에피소드들만 양산하는 어설픈 책들 말고, 역사학자들이 대중을 위해 이렇게 흥미로우면서도 수준있는 책들을 많이 써 주면 좋겠다.

소크라테스의 스승이었다는 페리클레스의 아내 아스파시아나 네로를 위한 변명,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황후였던 테오도라 편은 좀 심심했고 나머지 이야기들은 아주 재밌었다.

콜럼버스가 단지 신앙과 평화를 전파하기 위해 신세계로 떠난 것은 아니지만, 또 그가 노예무역과 황금 약탈 등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해도, 그가 궁극적으로는 중세인이었고 마법적 사고가 여전히 지배하던 시대에 신념을 가지고 바다로 나간 점을 공정하게 평가한 저자의 시각에 깊이 공감한다.

한 개인이 시대를 거슬러 보편적인 찬사를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당시 여자들처럼 결혼에 얽매이지 않고 대서양 무역이라는 새로운 길을 뚫은 덕분에 대영제국의 영화가 시작되었던 것을 보고 한국의 지도자에 대해 생각해 봤다.

해방 이후 이승만이 사회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의 길을 선택했고 뒤를 이어 박정희가 단순히 군사 독재자에 머물지 않고 수출 위주의 자본주의 정책을 도입해 오늘날 한국을 만들었다.

이제 21세기의 한국을 선진국으로 이끌 지도자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적어도 지금 청와대에 앉아서 적폐 타령하고 있는 현 대통령 세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맨 마지막 로베스피에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막연히 공포정치가로만 생각했었는데 그의 일생을 통해 피와 폭력으로 얼룩진 프랑스 혁명사에 대해 기본적인 개념을 알게 됐다.

구체제의 전복이라는 엄청난 일을 해낸 당시 프랑스 지도자들을 오늘날의 시선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의 공정한 평가에 깊이 공감했다.

혁명은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무수한 조상들의 피가 있었기에 오늘날 인류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

정말 의미있는 독서였다.



<인상깊은 구절>

55p

이렇게 기원전 10세기 예루살렘이 작은 도시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원 지대의 산간 마을에 점처럼 흩어져 살았는데 어떻게 다윗의 거대한 왕국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 다윗은 예루살렘이라는 작은 도시에 근거지를 둔 부족장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100p

철학가 세네카는 부와 돈을 경멸하면서, 재산은 사람을 돈의 노예로 만들고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정작 자신은 돈을 모으기 위해 가혹안 고리대금을 한 위선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세게카가 위선자라고 해서 죽여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네로도 그런 이유로 스승을 죽이지는 않았다.

109p

푸주간에 걸린 짐승들의 사체를 보고 섬뜩함을 느끼는 현대인들이 로마의 도살 의식에 참가했다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동물들의 피비린내가 역겨워 구토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동물들이 전차에 묶여 끌려다니다가 칼에 찔려 죽는 장면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117p

동양의 황제들이 임금도 주지 않고 요역을 통해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인 반면, 로마는 자유로운 시민들로 구성된 국가여서 시민들을 강제로 데려다가 노역을 시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민들은 네로가 대규모 공사를 발표할 때마다 크게 환영했다.

143p

만약 평민들이 정치적 권리를 완전히 상실했다면, 굳이 '빵과 서커스'를 주어 달랠 필요가 있겠는가? ...  이렇게 먹여주고 돌봐주지 않으면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로마 시민이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자유로운 시민이었고, 로마의 권력이 자신들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191p

중세 유럽 지식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처럼 떠받들었기에 그가 제시한 지구 구형설을 대개 알고 있었다. 이슬람 학자들도 일찍부터 지구 구형설을 믿고 있었다. 따라서 12세기 이후 중세 유럽 지식인들은 대부분 지구 구형설을 믿었음에 틀림없다.

 14세기 이후에는 두 가지 사건이 지구 구형설을 보편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나는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탐험을 비롯한 탐험의 증대였고 다른 하나는 프톨레마이오스 저작의 복원이었다.

197p

콜럼버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성경 지식에 매우 밝았다. 성경을 읽으면서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항해가 가능하다는 암시들을 찾아냈고 그 암시들을 확대해석했다. 종말이 가깝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콜럼버스는 종말이 오기 전에 기독교를 널리 전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위원회 위원들은 콜럼버스가 성경을 너무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과대망상에 빠져 있음을 간파하고, 그의 항해가 불가능하다고 합리적으로 판결했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단지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거리를 두고 당대 학자들, 성직자들과 싸웠을 뿐이다. 콜럼버스가 아니라 당대 학자들과 성직자들이 옳았다. 콜럼버스가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완벽한 논리와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왕과 귀족들의 모험심 때문이었다.

201p

이런 측면에서 콜럼버스는 중세적 인물이었다. 그는 합리성과 과학성으로 세계를 설명하려고 시도했지만, 그의 시대에 새롭게 발달하고 있던 지식은 아직 중세적 세계관을 깨뜨리기에는 미약했다. 나름 합리성을 추구한 지식인들도 여전히 중세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콜럼버스에게서도 이런 측면이 강하게 관찰된다. 그는 중세에 만연했던 전설, 신화, 주술을 믿고 있었다. 

205p

콜럼버스가 여러 차례 목숨을 건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종말론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중세적 세계관에서는 종교와 미신이 자연 현상과 인간사를 설명하는 기준이었다. 그 시대에는 자연 현상이 그 자체로 이해되지 않고, 신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고 믿었다. 

207p

뉴턴은 우주가 신의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고유한 법칙에 따라 구성되고 운동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제 별들의 세상에 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가 오거나 안 오는 것은 단순한 자연 현상일 뿐이다. 구름도, 별도 하나의 물체일 뿐이다. 그것들이 움직이고 작동하는 것은 고유한 법칙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성을 발휘해서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신에게 기도할 게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연구해서 그 운동 법칙을 알아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이성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 사람들은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력을 키우게 되었다.

 콜럼버스에게서 발견되는 '이중성'은 바로 이런 시대 상황에 기인한다. 그는 여전히 종교, 즉 기독교를 모든 지식과 판단, 행동의 기준으로 생각했고, 중세에 만연했던 미신과 주술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새 세상을 열망했고, 새로운 시도에 기꺼이 목숨을 걸었다. 세상은 그처럼 열정적인 사람에 의해 변혁된다.

219p

중세 내내 교황과 군주는 싸우다가 화해하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신학적인 문제는 의원들의 관심이 아니었고, 현실 정치에서 누구의 세력이 우세하게 돌아가는지가 중요했다.

223p

그러나 이 아들들이 후계자로 부상된 적은 거의 없었다. 유럽인들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난 아이를 사생아로 규정하고, 그에게 어떤 법적 지위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33p

여왕은 외국 사람과 결혼하든, 국내 유력자와 결혼하든 통치권을 남편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권력욕이 대단했던 엘리자베스는 이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258p

이 시기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대항해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의 선진적인 농업 기술, 특히 관개 기술을 받아들여 농업이 발달한 덕분이었다. 목축업도 발달하여 좋은 질의 양모가 생산되었다. 이렇게 국력이 강해지고 생산이 늘어나자 상업이 발달했다. 두 나라는 동방으로 진출하여 베네치아 사람들과 경쟁했고, 북쪽으로 진출하여 대서양 무역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대서양 시대의 주역이 되지는 못했다. 새로운 항로를 발견했지만 그들은 지중해의 바깥쪽 가장자리에 있었다. 에스파냐 자본가와 상인들이 대서양에 눈을 돌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막대한 자본을 지중해에 투자했다. 그들에게 지중해는 아직 포기할 수 없는 바다였다.

 에스파냐는 지중해에 미련이 있었기 때문에 대서양과 지중해 양 지역을 모두 장악하기 위해 힘을 분산시켰다. 그렇지만 서서히 세계의 중심은 대서양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16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영국은 지중해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에스파냐와의 충돌을 피하느라 대서양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영국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지리적으로 세계의 중심이 될 대서양이라는 발판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엘리자베스는 운이 좋았다. 남동생 에드워드와 언니 메리가 빨리 죽은 덕분에 왕이 될 수 있었고, 메리가 워낙 통치를 엉망으로 한 뒤라 조금만 정치를 잘해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업적을 가능케 한 것은 각고의 노력과 야심 찬 비전이었다. 바다로 진출해 국부를 키운 에스파냐는 좋은 자극이 되었다. 그녀는 영국도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는 비전을 가졌다. 그 일환으로 해적 드레이크를 후원하고 북아메리카를 개척했다. 엘리자베스가 기 기회를 잘 잡은 덕분에 영국은 대서양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지도자의 비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21세기 한국에 과연 이런 비전을 가진 지도자가 있을 것인가)

271p

프랑스의 최고 가문 자제들이 입학했던 이 학교에서 로베스피에르는 가장 가난했지만 공부를 가장 잘했고 생활에서도 가장 반듯한 모범생이었다. 학창 시절에 그는 이미 성직자처럼 경건하고 살았고, 동료들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을 경멸하고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로베스피에르는 그들과 어울리려 해도 어울릴 수 없었다. 대다수 학생들이 귀족의 자제로 부유했던 반면 로베스피에르는 해진 옷을 입고 다닐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로베스피에르는 몹시 이지적이어서 말 붙이기도 쉽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일단 맡으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해낼 사람, 아무리 강한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고 대의를 지킬 사람, 개인의 이익을 추호도 구하지 않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절대 부패하지 않을 청렴지사'라고 별명을 붙여주었다.

274p

프랑스 농민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해서 혁명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8세기에 프랑스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인구 증가에서 나타나는데, 1700년경 2천만 명이었던 인구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는 28백만 명으로 늘어났다. 프랑스의 인구가 이렇게 늘어난 것은 농업 혁명이 일어나 농업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고, 대서양 무역이 발전하면서 상공업이 성장한 덕분이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농민의 상황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좋았다. ... 프랑스 농민들은 이런 '봉건적 강제 규정'으로부터 거의 모두 해방되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농민이 근대적인 의미에서 자유로운 농민이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중세 농노에게 부과되었던 인신적 구속은 거의 사라졌지만, 농노가 져야 했던 경제적 부담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농민에게 가장 무거운 부담은 지대였다. 

278p

이렇게 왕실의 낭비가 지속되는 가운데 프랑스의 국고를 결정적으로 파탄나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 전 쟁에 참전한 것이다. 여기에 쏟아부은 돈이 무려 20억 리브르였다. 4년치 수입을 한꺼번에 쏟아부은 것이다.

 재무 대신들은 세금 징수액을 늘리고 부채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근본적인 제도 개혁 없이 세금을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재무 대신 칼론이 성직자와 귀족의 토지에도 세금을 부과하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칼론의 제안을 거부하고 제1,2 신분은 납세할 의무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후 귀족들은 왕의 명령에 공공연히 항의하면서 세금을 징수하려면 삼부회를 소집하라고 요구했다. 루이 16세는 할 수 없이 1788년 8월 8일 삼부회의 소집을 결정했다.

286p

혁명 초기에는 왕을 처형하거나 공화제를 실시하자는 주장은 없었다. 기묘하게도 혁명 초기에 왕권은 오히려 강해진 측면이 있었다. 혁명 전 왕권을 견제하던 귀족 세력이 거의 완전히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혁명에 반대하는 견해를 공공연히 표명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들은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 혁명 세력을 몰아내고 왕권을 회복하려 했다. 

295

국민공회가 30만 징집령을 내리자 여러 지역의 농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중세 이래 유럽 농민은 군대에 가지 않았다. 프랑스가 세워진 이래 무기를 들고 싸운 자들은 오직 귀족뿐이었다. 농민에게 입대는 낯설었고, 더욱이 농사철에 토지를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농사철에 농사짓지 않는 것은 곧 굶어 죽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농민들이 혁명의 대의에 찬성하면서도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297p

흔히 혁명은 기존 체제를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긍정적인 희망의 색채를 띠고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강렬한 폭력의 냄새 안고 있다. 기존 체제를 뒤엎으려면 필연적으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저항할 것이다. 그동안 누리던 특권, 재산, 심지어 생명과 자유를 빼앗기는 상황에서 저항하지 않을 지배층이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그들은 많은 군대와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제거하려면 폭력이 사용될 수밖에 없다. 프랑스 혁명도 끊임없는 폭력의 연속이었다. ...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한 후 시민군이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다. 당시 시민군의 학살은 혁명에 동조하는 인사들마저도 치를 떨게 할 정도였다.

300p

당통이 대담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연설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파리 시민들은 정말 대담해졌다. 그들은 적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내부의 적을 없애야 한다고 외치면서 낫과 몽둥이를 들고 감옥으로 향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죄수들을 끌어내어 잔인하게 죽였다. 당시 당통은 법무장관으로서 치안을 유지할 책임이 있었지만, 민중을 선동했을 뿐 아니라 민중이 학살하는 동안 전혀 말리지 않았다. 

302p

혁명재판소는 이른바 '자유의 독재'를 행하는 주요 기구가 되었다. 혁명 세력의 중추인 국민공회가 판사와 배심원 임명권, 그리고 기소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판사와 배심원이 혁명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재판소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결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한국의 이른바 민주 세력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독재가 같은 맥락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려는 공수처라는 것도 적폐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자유의 독재를 실행하기 위한 기구가 아닐까?)

 당통이 주도한 국민공회는 혁명재판소 설치에 이어 '자유의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혁명감시위원회'는 혁명에 반대하거나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조처를 취했다.

312p

흔히 학살의 주도자가 일본군이었다고 말하지만, 고종을 중심으로 한 조선 관료들은 수십 차례 이상 대책회의를 했고 고종은 여러 차례 토벌군을 보내 동학 잔존 세력을 토벌하게 했다. 따라서 당시 최고 주권자였던 고종이 농민 20만 명을 학살한 책임을 져야 한다.

313p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전선, 그리고 지중해 해상에서도 프랑스군은 우위를 확보했다. 반혁명의 위협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공포정치의 필요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 로베스피에르의 치명적 오류가 있었다. 그는 혁명을 완수하려면 더 단호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에, 지속되고 있는 반혁명 음모를 격파하고, 내부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분파 운동을 제어해야 하는데, 공포정치를 그만둔다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그러나 외부의 위협이 급격히 약화되자, 공안위원회 의원들조차도 공포정치를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국민공회 의원들 다수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되자, 로베스피에르의 반대파는 국민공회를 움직여 그와 그의 일당을 숙청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공포정치가 끝나고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측근들이 처형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다시 온건한 길을 가게 되었다.

323p

다윗 이야기의 저자를 셰익스피어에 비유했다. 셰익스피어가 영국 역사를 소재로 다양한 사극을 만들었듯이, 성경의 저자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소설처럼 각색한 게 성경이라는 의미다.

337p

프랑스 서부의 주민들이 혁명정부와 긴장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들이 혁명정부에 맞서게 된 결정적 계기는 국민공회의 30만 징집령이었다. 주요 원인으로 이 지역이 산업화가 더뎌 농촌 문화가 강고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구체제의 모순을 강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의 모토 아래 억압과 모순을 철폐하자는 혁명에 적극 동의했지만, 파리의 혁명 세력과 갈라서게 되었다. 이 지역의 농민들은 가톨릭 신앙이 매우 두터웠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가톨릭 신부와 교회를 통제하려 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선서하지 않은 성직자들이 옳다고 생각했다. 상당수의 주민들은 이들을 적극 지지하면서 혁명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1792년 8월에는 수백 명이 이들을 지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가 모두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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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 서양화
선승혜 지음 / 국립중앙박물관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2008년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의 도록이다.

직접 가서 봤던 생각이 난다.

최근 일본에 가서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을 관람한 후 관심이 생겨 빌려 보게 됐다.

이왕가미술관에서 소장했던 일본 근대화들인 모양이다.

일본 역시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 후 모방하던 시절이라 그런지 인상파 화풍들이 많았다.

일본 가서 서양화를 배운 우리 근대 회화들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인상깊은 구절>

11p

근대 일본 서양화가들은 누드화를 통해 신체에 내재된 본질적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하는 유럽의 미적 가치관을 수용하였다. 그 결과 누드화는 직설적인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전통적인 춘화와는 달리, 감정이입을 제한하고 미적 거리를 유지하는 새로운 감상의 대상이 되었다.

71p

이러한 산수화 전통에서 일본의 근대 서양화가들은 유럽 풍경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전에 주의깊게 표현하지 않았던 하늘, 날씨, 빛이 풍경화의 주요한 요소라는 것은 매우 새로운 개념이었다. 빛의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유화 물감은 일본의 서양화가들이 전통 산수화에서 풍경화로 전환하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99p

일본 산수화의 전통에 날씨와 빛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었다. 이러한 산수화에서 풍경화로의 전환은 하늘이 天이나 神과 같은 신성한 존재이며, 날씨는 신성한 존재가 암시하는 의사라는 전통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하늘과 날씨는 무한히 변화하는 자연과학의 대상이라는 인식으로 전환되었음을 반영한다.

 문화는 열린 개념이며, 끊임없이 확장되는 영역이다. 하나의 문화권이 다른 문화권과 만나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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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인 - 푸른 눈의 영국 기자 마이클 브린이 바라본 한국의 모습
마이클 브린 지음, 장영재 옮김 / 실레북스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500페이지에 달하는 상당한 분량의 책이라 며칠에 걸쳐 읽었다.

구한말부터 시작한 한국 현대사 분석이 흥미로우면서도 북핵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안 하고 있어 한반도 통일 운운하는 마지막 장은 매우 공허하게 들린다.

아마도 원고를 오래 전에 써 놔서 새로운 변화를 추가하기 어려웠던 게 아닐까 싶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적으로 한쪽 진영의 얘기를 참조해서 약간 기울어진 시각으로 한국 정치를 보기 때문은 아닐까?

이승만은 국제적인 경험과 탁월한 외교 감각으로 보잘 것 없는 패를 가지고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루어내고 미국의 원조를 받아내서 한국을 안정시켰지만 자신의 승리에만 집착한 나머지 민주주의적인 과정을 훼손시켰다고 평가한다.

대체적으로 지도자들이 사회주의에 경도됐던 시기에 민주공화국 제체를 지킨 것만으로도 큰 역할을 했으나 더 민주적이고 더 통합된 나라를 이끌지 못했음은 이승만의 개인적 한계라 아쉽다.

국민들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린 것은 박정희였고 분단 상황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이 지금보다 훨씬 더 역량있는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안타깝다.

저자는 한국의 엄청난 발전상에 놀라면서도 안보 문제가 발목을 잡아 권위주의를 청산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유교 문화라는 오랜 역사적 경험도 한몫 하겠지만 좀더 자유롭고 선진적인 나라를 만드는 것이 이제는 경제 발전보다 더 중요한 시기인 것 같다.

특히 저자는 민주주의의 완성에서 권위주의 타파와 함께, 표현의 자유를 중요시 했다.

과연 문재인과 현재의 여당이 역사적 과업을 이룩할 수 있을까?

가짜뉴스 단속한다면서 유튜브 등에 압력을 가하고 공수처 설치해서 고위 공직자 수사권을 가진 사람을 대통령이 임명하겠다는 현 정부는 자유를 확대시키고 있는가?

현재로서는 너무나 절망적인데, 그렇다면 야당은 가능할까?

국민정서라는 법 위의 군중심리를 제압하고 진정한 법치와 대의민주주의를 실현시킬 수 있는 리더가 과연 나타날까?

지금으로서는 모두 요원한 문제 같다.

저자는 북핵 위협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가볍게 치부하는 느낌이지만, 성숙한 사회 변화는 차치하고라도, 당장 북한의 위협에서라도 벗어나길 바랄 뿐이다.




<인상깊은 구절>

5p

처음에는 북한 경제력이 더 강했고 사기와 자신감도 우위에 있었지만, 이제 북한은 통치자가 세계적 놀림감이 되는 고립되고 열등한 나라가 되었다.

 핵무기를 흔들고, 인종적 순수성을 내세우고, 외세로부터의 자립을 자화자찬하고, 국제 규범과 외교 관례를 무시하면서, 동시에 항상 적들로부터 도움을 구하려고 하는 북한이 저항적으로 보이게 된 것은 역설적인 일이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은 허풍쟁이들이다. 그들은 저항을 통해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한 손에는 깃발을 다른 한 손에는 동냥 그릇을 들고 서 있을 뿐이다. 저항을 활용하여 무언가를 이뤄낸 것은 남한 사람들이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은 이러한 저항의식을, 통치자의 교체를 검토할 정도로 미국의 멘토들을 성가시게 만든, '북진'이라는 공허한 위협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저항의 고삐를 단단히 잡아서 다시는 침몰하지 않을 국가의 건설 쪽으로 돌린 사람으 1961년에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23p

오늘날에 와서도 일부 구세대 학자들은 남한의 민주주의에 대하여 거론하기를 꺼린다. 민주주의를 이룩한 주체가 정치적 우익이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들은 세계대전 이후 남한의 건국 과정이 '순수하지 못했음'을 강조하고, 이어서 세계가 항상 북한을 잘못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가 제 발에 걸려 넘어져 코방아를 찧기 전인 호시절에는 자본주의가 저개발을 초래하고 사회주의가 더 정통적이라는 생각에 도덕적, 지적 설득력이 있었다. 공산주의의 흉악함도 자유세계의 일원인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불쾌함만큼 강하게 인식된 적이 없었다. 그 정도까지는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증거가 그들의 오류를 입증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박정희는 가망이 없었다. 그는 일본제국에 봉사했고,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으며, 반대자를 고문살해했고, 미군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자국의 군대를 그것도 잘못된 편을 들어서, 베트남전에 파병했다. 북한에는 외국 군대가 없었고, 경제도 초기에는 남한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김일성 체제에 호감을 갖기는 어려웠지만 이는 미래의 '진정한' 코리아로 가는 가파른 오르막일 뿐이었다. 이런 난센스로 머릿속을 채우면서 우리는 남한이 달성한 성취에는 눈을 감았다."

 큰 그림에 해당하는 문제 외에도 남한의 성장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키는 작은 결점들이 있었다. 성장이란 단지 국가의 회계장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성장하는 국가는 부유해질 뿐만 아니라 도덕적, 실천적, 전체적 건전성도 향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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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한국의 리더십은 개인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명확히 하는 길을 찾지 못했다. 집단을 위한 희생에 가치를 두는 관념의 뿌리가 너무도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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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그들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가 있다는 듯이 침략을 저질렀으며 이후에도 자신들이 더 순수하고, 합리적이고, 한국적이라는 태도를 견지했다. 북한은 일본 식민통치에 협력한 사람들을 숙청했고, 소련의 지시를 받지 않고 중국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는 척했으며, 주민이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모든 것은 북한이 인종적, 정신적으로 오염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런 주장에는 남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다소간의 국수적 논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남한 사람들은 분노와 실용주의를 따라서 다른 길을 선택했다.

 위성사진의 한반도가 보여주는 것이 그 결과다. 우리를 보라. 우리가 더 발전했으며, 너희의 순수함이라는 기준은 환상에 불과하고, 우리가 진정한 코리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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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한국의 놀랄 만한 발전을 일궈낸 영웅들이다. 이 나라가 가진 것은 이런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에게는 되살려낼 산업의 역사나 자유의 경험이 없었다. 석유는 물론이고 땅에서 캐내거나 재배해서 팔 수 있는 천연자원도 전혀 없었다. 거의 모두가 전쟁이 끝난 후 휴전선 때문에 위축되지 않고 고향을 떠나 서울과 주변 위성도시로 몰려들었던 수백만 명의 이주민에 합류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미국의 지원을 통해서 자신감을 얻었으며 집단적 도전이 된 삶을 추구해 나갔다.

 이런 사람들이 한국의 유일한 자원이었다. 그들에게 깃들인 찬란함의 실체를 깨닫기 위해서 그들이 겪은 고난, 고된 일, 학대, 사회적 사다리의 아래쪽으로 밀려난 일 등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이들은 승리자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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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회사의 파산에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당연히 복직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 자동차업계 근로자들에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보다 못한 시 공무원들이 마침내 시위대의 텐트를 철거했을 때 나는 당연한 조치를 왜 그렇게 오래 끌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내 가족과 동료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한국인이 정부가 한 일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놀랐다. (법원도 마찬가지였다. 시가 취한 조치는 나중에 불법으로 판결되었다)

 전통적인 권위주의 가족문화와 수백 년을 이어온 교육에 대한 견해, 즉 교육은 새로운 지식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한 교사가 무지한 학생에게 전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온다. 오늘날 학교에서조차 론이 부족하고 설명과 설득의 기술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국인은 성인이 되어서 상호간에 원활하게 협력하면서 일할 수 있는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 두 사람 이상이 함께 하는 모든 일에는 리더가 있어야 한다. 토론을 해본 경험이 부족한 것은 사람들이 자기 의견에서 편견과 감정을 배제하는데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장 동료나 가까운 친구가 아닌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한국인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는 쪽을 선택한다. 당신의 의견에 대한 한국인들의 존중 때문에 당신의 생각이 실제보다 더 뛰어나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반면에 당신의 한국인 배우자는 당신이 말하는 거의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파트너를 사랑하는 사려 깊은 파트너는 머지않아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방어하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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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성의 부족에 대한 또 한 가지 현실적인 설명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권력자는 철저하게 통제된 상황에서가 아니면 언론에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가 기자들을 다루기 위해서 다루기 위해서 지명한 대변인은 정부부서나 기업의 계층구조 상의 위치가 너무 낮아서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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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때로 선의와 목표의식을 갖고 모든 것을 설명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사상에 열광했던 한국의 성리학자들이 14세기의 공산주의자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공산주의자가 그랬던 것처럼 일단 권력을 획득하자 그들의 종교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아마도 그와 같은 시스템은 실현되기에는 너무도 유토피아적이었을 것이다. 유교의 혁명가들은 가장 현명하고 품위 있는 사람이 지배하는 고결한 사람들의 국가를 꿈꾸었다. 이를 위해서 시, 서예, 도덕에 중심을 둔 교육체계를 확립하고 시험을 통과해야만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결과는 부패가 만연하고, 정의가 실종되었으며, 계급체계가 고착되고, 편협하고 악의적인 법이 시행되는 국가였다. 그들은 경쟁적인 주장을 내놓고 파당을 조성하여 야만인들같이 서로를 공격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의 유교사상은 일본이나 중국보다 훨씬 더 깊이 한국의 심층부로 들어갔으며 오늘날에도 조상을 기리는 제사나 수직적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성향에 확실히 남아 있다. 또한 성 차별 문제에도 유교의 영향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필자는 유교의 영향이라고 생각한 한국인들의 정중함과 예의바름에 끌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사람들의 저속함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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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까지도 행인들은 망자의 가족이 묏자리를 물색하는 동안에 거적에 말린 채로 햇볕 속에서 부패하고 있는 시신과 마주치곤 했다. 불안정한 혼령을 매장하는 것은 질병의 위험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매장 공간이 부족해짐에 따라 남한 정부는 화장의 선호도를 높이는데 성공했다. 사후세계에 대한 개념은 종교마다 다르지만 한국인의 공동적 관심사는 망자의 자손이 조상에 대한 공경심을 갖게 하고 혼령이 외롭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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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종교에도 무속신앙적 열정을 가지고 뛰어들었다. 그들은 유교의 적용에서 종주국 중국을 능가했다. 마찬가지로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에 대한 공산주의적 개인숭배에 있어 스탈린과 모택동을 능가했으며, 그는 마치 샤먼왕처럼 북한을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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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식으로 신흥종교는 사회에서 예술가의 역할, 천재적 예술가사 어떻게든 사름들의 영혼 즉 시대정신에 다가서는 것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예술가는 단지 자신이 시대정신에서 발견한 것을 분명하게 표현하려 하는 반면에, 신흥종교의 지도자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거나 사회에 새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 시대정신을 활용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 종교 또는 다음에 나타날 종교의 임무는 행복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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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그토록 많은 한국인들이 여론 조사원에게 자신이 불행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경쟁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공을 위해서 필요한 학력을 취득하는 길은 소수의 일류대학을 통하는 좁은 길이다.

 오늘날 한국의 당면 과제는 성공에 이르는 길을 다변화하고 사회적 서열을 자존감과 분리시키는 것이다. 

 사회적 서열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타인이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판단에 따라 사람이 얼마나 바뀔 수 있는가는 볼 때마다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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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측정할 방법이 있다면 한국인이 예컨대 아이디어보다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 밝혀지리라고 확신한다. 

 계급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는 자발적이고 순수한 태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일찍부터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정보를 모으고 책략을 꾸미는 것을 배우게 된다. 대화하는 사람의 수준과 그들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중요할 뿐 대화 자체의 즐거움은 없다.

 서구인이 이해하기 힘든 한국인의 특성, 즉 침묵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성향이 거기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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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격정적이면서 또한 매우 예민하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의 미묘한 느낌에 대한 타인의 이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기분(느낌 또는 마음의 상태)'은 대단히 중요하다. 기분이 좋으면 건강에도 유익하다. 기분이 나쁘면 사업제안서를 퇴짜 놓거나 아내나 비서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나쁜 행동도 정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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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인이 예컨대 영국인보다 훨씬 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최소한 30대 이상의 한국인은 그렇다. 그보다 젊은 세대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들은 휴대전화와 PC에 푹 빠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이 든 한국인들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 사람들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으며, 부모와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에 눈을 치켜뜨지도 않는다. 그들은 인간관계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들에게는 고정된 취침시간이 없다. 밤을 절반쯤 새우며 당신과 대화를 나누다가 지쳐서 바닥에 누워 잠이 들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출근한다.

 우리는 동아시아인이 대체로 보수적이고 서구인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필자의 주관적 경험으로는 한국인들이 훨씬 더 차이를 잘 받아들이고 포용적이다. 나는 기독교와 법에 기초한 서구문화 때문에 서구인은 옳고 그름의 문제, 선과 악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갖는 반면, 유교적인 한국인들에게는 사람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하는 본능이 있다고 생각을 한다. 한국인은 덜 비판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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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기들은 자신을 억제하기보다는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길러진다. 즐거움을 미루는 것을 배우지 못한 소년들은 표가 난다. 성인이 되어도 그들은 모든 것이 즉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이와 같은 보편적 패턴을 목격한 서구인은 한국의 부모들이 자식에게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자식에게 훈계하지 않는다. 사실상 설명조차 많지 않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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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대로 말하자면 한국인들에게는 애국심의 부족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민족주의와 정체성에 대한 강렬한 집착은 있을지 몰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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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도, 비록 전적인 중매결혼은 매우 드물지만, 가족은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따라서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대단히 타산적인 결혼과정을 거치게 된다. 

"낭만적 연애로 변화하는 추세는 대중문화가 암시하는 것처럼 크지 않을 수 있다."

"소득, 집안 배경, 키, 심지어 혈액형 같은 스펙이 매우 중요하다. 중매결혼의 사고방식과 가족의 영향력은 이들 요소에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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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육이 지향하는 방향에는 한 가지 바람직스럽지 않은 특징이 있다. 아이들을 훌륭한 시민으로 만들려는 것보다는 학력과 자격을 취득하는 방향으로 몰고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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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조선은 금욕적인 국가였다. 과시적 소비는 금기시되었으며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들도 그런 행동을 삼갔다. 발전이 아니라 사회의 안정이 성공적인 통치의 지표로 여겨졌다. 성리학자들은 완벽한 사회는 체제가 아니라 군주의 도덕성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으며 부도덕한 리더십이 불안정을 초래한다고 믿었다. 

 유교 교육에서는 윤리도덕이 가장 중요했으므로 이론상으로는 국가가 가장 도덕적인 젊은이들을 미래의 결정권자로 선발하는 것이 셈이었다. 15세기 관료제도의 배후에 있는 이런 관념은 오늘의 한국에도 여전히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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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층민에는 천민과 함께 정부와 개인이 소유한 노비가 있었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조선사회의 이러한 측면을 부각시키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한국인을 외세의 피해자로 보는 오늘날의 관점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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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사법제도는 불공정하고 혼란스러웠으며, 부도덕한 경우도 흔했다. 감옥은 "인간 고통의 지옥"이었으며, 유죄판결을 받은 중죄인, 전문적 범죄자, 초범, 심지어 증인에게까지 고문은 기본이었다. 처벌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급료를 받지 않고 피해자 가족의 뇌물로 살아가는 일도 흔히 있었다.

 유교사상이 지배한 한국에서는 하위계층은 그 출신성분에 맞게 태어났으며, '氣'  또는 정수가 열등하여 제대로 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면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동정심의 부재를 오늘의 북한에서도 볼 수 있다. 북한 정권은 조상 때문에 "동요"나 "적대" 계층으로 분류된 많은 주민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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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일본 침략군은 백성들에게 식량을 제공했으며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필요한 도움을 얻었다. 이는 역사학자들이 잘 언급하지 않는 사실이다. 일본군을 저지한 결정적 요인이 거북선이 아니라 중국 명나라의 개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명나라 군은 1593년의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으며 1596년까지 조선군을 도와서 침략자들을 남해안까지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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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는 수상을 역임했으며 일본의 근대화를 이룩한 메이지유신을 이끈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한국을 합병하는 계획에 반대했으며, 한국의 위상을 부분적으로나마 유지할 수 있는 보호국 지위를 선호한 인물이었다. 그의 암살은 일본이 합병 계획을 밀어붙이고 한국에 대한 공식적 지배권을 주장하기로 결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참담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암살자 안중근은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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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일본의 행위를 공격적인 찬탈로 받아들였지만, 일본의 행동은 여러 면에서 볼 때 자기 방위를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제국주의 클럽에 가입을 꾀하면서 사실상 제국주의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피하려 했다. 그들은 식민주의자로서는 후발주자였으며, 식민지를 단지 원자재의 공급원으로 이용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이웃을 식민지화한 후에 산업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이례적이었다.

203p

상업 부문의 엘리트 계층은 일본 통치의 혜택을 입은 반면, 가난한 농민은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은 지금도 한국사회에 스며 있는 사회적, 이념적 분열을 초래했다. 이제 좌파 세력은 부자들 중에 부역자가 있었다고 비난한다.

207p

오늘날의 인식과는 반대로 1943년까지 군복을 입은 청년들은 지원병들이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많은 청년들이 입대를 거부하자 "자원하라"는 압박이 강화되었다. 이 시기에 8만 명의 자원자 중에서 실제로 입대가 허용된 사람이 1만 7천 명에 불과했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한국인에게는 일본인보다 까다로운 조건이 요구되었다. 이는 한국인의 충성심에 대한 의문과 아울러 천황을 위한 전쟁에 다수의 한국인을 투입하면 그들이 전쟁이 끝난 후 동등한 대우를 요구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입대를 위한 조건 중에는 언어능력도 있었는데, 한국인 중에서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4분의 1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입영을 피할 수 있었다.

209p

일본 정보는 1995년에 처음으로 공식적 사과를 표명했다. 그러나 보상과 관련해서는 1965년에 양국 관계가 정상화되었을 때 식민통치의 피해자 모두에 대한 보상금을 지불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한국 정부는 이 돈을 개인들에게 지급하기보다는 국가적 프로젝트에 투입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생존자들은 한국 정부와 보상 문제를 협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불편한 진실은 20세기 초,중반의 한국에서는 그와 같은 여성 학대가 별로 특별한 문제가 아니었으며, 한국의 권력자들이 위안부 문제를 일본인보다 더 특별한 문제로 지목할 가능성도 낮았다는 사실이다. 또한 인신매매의 상당 부분이 한국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지방정부가 할당된 인원을 채우라는 요구에 내몰린 지역에서는 팔려가지는 않았더라도 가족의 권유에 따라 위안부가 된 여성들이 많았다.

 세련되고 민주화된 사회의 운동가들이 이 경우처럼 파시스트적인 민주화 이전 시기의 적에게 21세기의 거울을 들이대면 거기에는 자국이 근대화되기 전의 모습도 비치게 된다는 점이 어려운 점이다. 이것이 진실의 추구를 더욱더 어렵게 한다. 


<오류>

172p

태조의 셋째 아들인 이방원은 정도전이 다른 왕자를 후계자로 선호했다는 이유로~

->셋째가 아니라 다섯째 아들이다.

173p

스물네 글자 중 일부는 왕비에게 여러 가지 소리를 내보게 하면서 입과 혀의 모양을 관찰한 왕이 직접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 왕비가 아니라 정의공주로 알고 있다.

174p

양민 간에도 등급의 구별이 있었으며 장인이 가장 높이 평가되었다.

->장인이 아니라 농민이 가장 높게 평가되었다.

177p

연산군의 마지막 만행은 미망인이었던 백모를 강간한 것이었는데, 자살한 백모의 오빠는 왕실 호준의 지휘관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또 하나의 고약한 인물을 17세기의 군주이며 세자의 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부왕을 독살한 것으로 알려지는 광해다.

-> 연산군이 큰어머니를 강간했다거나 광해군의 선조 독살설은 야사에 불과하다.

또 박원종은 월산대군 부인의 오빠가 아니라 동생이다.

440p

여러 사람이 같은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고 술잔을 교환하는 식으로, 이는 B형 간염의 발병률이 높은 원인으로 지적된다.

->B형 간염은 술잔으로 옮는 것이 아니라 수혈과 성교 등을 통해 전염될 수 있다. 술잔 돌리기는 A형 간염을 전파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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