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재미난 이야기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역사책 재미난 이야기 역사책
정기문 지음 / 책과함께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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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도 재밌게 읽었는데 2권도 아주 재밌다.

34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에 책 판형도 작아서 침대에 누워 소설책 읽듯 금방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역사에 대한 별다른 지식도 없이 그저 야사 위주의 가벼운 에피소드들만 양산하는 어설픈 책들 말고, 역사학자들이 대중을 위해 이렇게 흥미로우면서도 수준있는 책들을 많이 써 주면 좋겠다.

소크라테스의 스승이었다는 페리클레스의 아내 아스파시아나 네로를 위한 변명,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황후였던 테오도라 편은 좀 심심했고 나머지 이야기들은 아주 재밌었다.

콜럼버스가 단지 신앙과 평화를 전파하기 위해 신세계로 떠난 것은 아니지만, 또 그가 노예무역과 황금 약탈 등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해도, 그가 궁극적으로는 중세인이었고 마법적 사고가 여전히 지배하던 시대에 신념을 가지고 바다로 나간 점을 공정하게 평가한 저자의 시각에 깊이 공감한다.

한 개인이 시대를 거슬러 보편적인 찬사를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당시 여자들처럼 결혼에 얽매이지 않고 대서양 무역이라는 새로운 길을 뚫은 덕분에 대영제국의 영화가 시작되었던 것을 보고 한국의 지도자에 대해 생각해 봤다.

해방 이후 이승만이 사회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의 길을 선택했고 뒤를 이어 박정희가 단순히 군사 독재자에 머물지 않고 수출 위주의 자본주의 정책을 도입해 오늘날 한국을 만들었다.

이제 21세기의 한국을 선진국으로 이끌 지도자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적어도 지금 청와대에 앉아서 적폐 타령하고 있는 현 대통령 세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맨 마지막 로베스피에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막연히 공포정치가로만 생각했었는데 그의 일생을 통해 피와 폭력으로 얼룩진 프랑스 혁명사에 대해 기본적인 개념을 알게 됐다.

구체제의 전복이라는 엄청난 일을 해낸 당시 프랑스 지도자들을 오늘날의 시선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의 공정한 평가에 깊이 공감했다.

혁명은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무수한 조상들의 피가 있었기에 오늘날 인류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

정말 의미있는 독서였다.



<인상깊은 구절>

55p

이렇게 기원전 10세기 예루살렘이 작은 도시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원 지대의 산간 마을에 점처럼 흩어져 살았는데 어떻게 다윗의 거대한 왕국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 다윗은 예루살렘이라는 작은 도시에 근거지를 둔 부족장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100p

철학가 세네카는 부와 돈을 경멸하면서, 재산은 사람을 돈의 노예로 만들고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정작 자신은 돈을 모으기 위해 가혹안 고리대금을 한 위선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세게카가 위선자라고 해서 죽여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네로도 그런 이유로 스승을 죽이지는 않았다.

109p

푸주간에 걸린 짐승들의 사체를 보고 섬뜩함을 느끼는 현대인들이 로마의 도살 의식에 참가했다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동물들의 피비린내가 역겨워 구토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동물들이 전차에 묶여 끌려다니다가 칼에 찔려 죽는 장면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117p

동양의 황제들이 임금도 주지 않고 요역을 통해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인 반면, 로마는 자유로운 시민들로 구성된 국가여서 시민들을 강제로 데려다가 노역을 시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민들은 네로가 대규모 공사를 발표할 때마다 크게 환영했다.

143p

만약 평민들이 정치적 권리를 완전히 상실했다면, 굳이 '빵과 서커스'를 주어 달랠 필요가 있겠는가? ...  이렇게 먹여주고 돌봐주지 않으면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로마 시민이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자유로운 시민이었고, 로마의 권력이 자신들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191p

중세 유럽 지식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처럼 떠받들었기에 그가 제시한 지구 구형설을 대개 알고 있었다. 이슬람 학자들도 일찍부터 지구 구형설을 믿고 있었다. 따라서 12세기 이후 중세 유럽 지식인들은 대부분 지구 구형설을 믿었음에 틀림없다.

 14세기 이후에는 두 가지 사건이 지구 구형설을 보편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나는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탐험을 비롯한 탐험의 증대였고 다른 하나는 프톨레마이오스 저작의 복원이었다.

197p

콜럼버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성경 지식에 매우 밝았다. 성경을 읽으면서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항해가 가능하다는 암시들을 찾아냈고 그 암시들을 확대해석했다. 종말이 가깝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콜럼버스는 종말이 오기 전에 기독교를 널리 전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위원회 위원들은 콜럼버스가 성경을 너무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과대망상에 빠져 있음을 간파하고, 그의 항해가 불가능하다고 합리적으로 판결했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단지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거리를 두고 당대 학자들, 성직자들과 싸웠을 뿐이다. 콜럼버스가 아니라 당대 학자들과 성직자들이 옳았다. 콜럼버스가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완벽한 논리와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왕과 귀족들의 모험심 때문이었다.

201p

이런 측면에서 콜럼버스는 중세적 인물이었다. 그는 합리성과 과학성으로 세계를 설명하려고 시도했지만, 그의 시대에 새롭게 발달하고 있던 지식은 아직 중세적 세계관을 깨뜨리기에는 미약했다. 나름 합리성을 추구한 지식인들도 여전히 중세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콜럼버스에게서도 이런 측면이 강하게 관찰된다. 그는 중세에 만연했던 전설, 신화, 주술을 믿고 있었다. 

205p

콜럼버스가 여러 차례 목숨을 건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종말론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중세적 세계관에서는 종교와 미신이 자연 현상과 인간사를 설명하는 기준이었다. 그 시대에는 자연 현상이 그 자체로 이해되지 않고, 신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고 믿었다. 

207p

뉴턴은 우주가 신의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고유한 법칙에 따라 구성되고 운동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제 별들의 세상에 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가 오거나 안 오는 것은 단순한 자연 현상일 뿐이다. 구름도, 별도 하나의 물체일 뿐이다. 그것들이 움직이고 작동하는 것은 고유한 법칙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성을 발휘해서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신에게 기도할 게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연구해서 그 운동 법칙을 알아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이성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 사람들은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력을 키우게 되었다.

 콜럼버스에게서 발견되는 '이중성'은 바로 이런 시대 상황에 기인한다. 그는 여전히 종교, 즉 기독교를 모든 지식과 판단, 행동의 기준으로 생각했고, 중세에 만연했던 미신과 주술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새 세상을 열망했고, 새로운 시도에 기꺼이 목숨을 걸었다. 세상은 그처럼 열정적인 사람에 의해 변혁된다.

219p

중세 내내 교황과 군주는 싸우다가 화해하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신학적인 문제는 의원들의 관심이 아니었고, 현실 정치에서 누구의 세력이 우세하게 돌아가는지가 중요했다.

223p

그러나 이 아들들이 후계자로 부상된 적은 거의 없었다. 유럽인들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난 아이를 사생아로 규정하고, 그에게 어떤 법적 지위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33p

여왕은 외국 사람과 결혼하든, 국내 유력자와 결혼하든 통치권을 남편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권력욕이 대단했던 엘리자베스는 이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258p

이 시기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대항해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의 선진적인 농업 기술, 특히 관개 기술을 받아들여 농업이 발달한 덕분이었다. 목축업도 발달하여 좋은 질의 양모가 생산되었다. 이렇게 국력이 강해지고 생산이 늘어나자 상업이 발달했다. 두 나라는 동방으로 진출하여 베네치아 사람들과 경쟁했고, 북쪽으로 진출하여 대서양 무역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대서양 시대의 주역이 되지는 못했다. 새로운 항로를 발견했지만 그들은 지중해의 바깥쪽 가장자리에 있었다. 에스파냐 자본가와 상인들이 대서양에 눈을 돌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막대한 자본을 지중해에 투자했다. 그들에게 지중해는 아직 포기할 수 없는 바다였다.

 에스파냐는 지중해에 미련이 있었기 때문에 대서양과 지중해 양 지역을 모두 장악하기 위해 힘을 분산시켰다. 그렇지만 서서히 세계의 중심은 대서양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16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영국은 지중해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에스파냐와의 충돌을 피하느라 대서양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영국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지리적으로 세계의 중심이 될 대서양이라는 발판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엘리자베스는 운이 좋았다. 남동생 에드워드와 언니 메리가 빨리 죽은 덕분에 왕이 될 수 있었고, 메리가 워낙 통치를 엉망으로 한 뒤라 조금만 정치를 잘해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업적을 가능케 한 것은 각고의 노력과 야심 찬 비전이었다. 바다로 진출해 국부를 키운 에스파냐는 좋은 자극이 되었다. 그녀는 영국도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는 비전을 가졌다. 그 일환으로 해적 드레이크를 후원하고 북아메리카를 개척했다. 엘리자베스가 기 기회를 잘 잡은 덕분에 영국은 대서양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지도자의 비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21세기 한국에 과연 이런 비전을 가진 지도자가 있을 것인가)

271p

프랑스의 최고 가문 자제들이 입학했던 이 학교에서 로베스피에르는 가장 가난했지만 공부를 가장 잘했고 생활에서도 가장 반듯한 모범생이었다. 학창 시절에 그는 이미 성직자처럼 경건하고 살았고, 동료들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을 경멸하고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로베스피에르는 그들과 어울리려 해도 어울릴 수 없었다. 대다수 학생들이 귀족의 자제로 부유했던 반면 로베스피에르는 해진 옷을 입고 다닐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로베스피에르는 몹시 이지적이어서 말 붙이기도 쉽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일단 맡으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해낼 사람, 아무리 강한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고 대의를 지킬 사람, 개인의 이익을 추호도 구하지 않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절대 부패하지 않을 청렴지사'라고 별명을 붙여주었다.

274p

프랑스 농민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해서 혁명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8세기에 프랑스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인구 증가에서 나타나는데, 1700년경 2천만 명이었던 인구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는 28백만 명으로 늘어났다. 프랑스의 인구가 이렇게 늘어난 것은 농업 혁명이 일어나 농업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고, 대서양 무역이 발전하면서 상공업이 성장한 덕분이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농민의 상황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좋았다. ... 프랑스 농민들은 이런 '봉건적 강제 규정'으로부터 거의 모두 해방되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농민이 근대적인 의미에서 자유로운 농민이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중세 농노에게 부과되었던 인신적 구속은 거의 사라졌지만, 농노가 져야 했던 경제적 부담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농민에게 가장 무거운 부담은 지대였다. 

278p

이렇게 왕실의 낭비가 지속되는 가운데 프랑스의 국고를 결정적으로 파탄나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 전 쟁에 참전한 것이다. 여기에 쏟아부은 돈이 무려 20억 리브르였다. 4년치 수입을 한꺼번에 쏟아부은 것이다.

 재무 대신들은 세금 징수액을 늘리고 부채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근본적인 제도 개혁 없이 세금을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재무 대신 칼론이 성직자와 귀족의 토지에도 세금을 부과하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칼론의 제안을 거부하고 제1,2 신분은 납세할 의무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후 귀족들은 왕의 명령에 공공연히 항의하면서 세금을 징수하려면 삼부회를 소집하라고 요구했다. 루이 16세는 할 수 없이 1788년 8월 8일 삼부회의 소집을 결정했다.

286p

혁명 초기에는 왕을 처형하거나 공화제를 실시하자는 주장은 없었다. 기묘하게도 혁명 초기에 왕권은 오히려 강해진 측면이 있었다. 혁명 전 왕권을 견제하던 귀족 세력이 거의 완전히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혁명에 반대하는 견해를 공공연히 표명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들은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 혁명 세력을 몰아내고 왕권을 회복하려 했다. 

295

국민공회가 30만 징집령을 내리자 여러 지역의 농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중세 이래 유럽 농민은 군대에 가지 않았다. 프랑스가 세워진 이래 무기를 들고 싸운 자들은 오직 귀족뿐이었다. 농민에게 입대는 낯설었고, 더욱이 농사철에 토지를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농사철에 농사짓지 않는 것은 곧 굶어 죽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농민들이 혁명의 대의에 찬성하면서도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297p

흔히 혁명은 기존 체제를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긍정적인 희망의 색채를 띠고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강렬한 폭력의 냄새 안고 있다. 기존 체제를 뒤엎으려면 필연적으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저항할 것이다. 그동안 누리던 특권, 재산, 심지어 생명과 자유를 빼앗기는 상황에서 저항하지 않을 지배층이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그들은 많은 군대와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제거하려면 폭력이 사용될 수밖에 없다. 프랑스 혁명도 끊임없는 폭력의 연속이었다. ...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한 후 시민군이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다. 당시 시민군의 학살은 혁명에 동조하는 인사들마저도 치를 떨게 할 정도였다.

300p

당통이 대담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연설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파리 시민들은 정말 대담해졌다. 그들은 적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내부의 적을 없애야 한다고 외치면서 낫과 몽둥이를 들고 감옥으로 향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죄수들을 끌어내어 잔인하게 죽였다. 당시 당통은 법무장관으로서 치안을 유지할 책임이 있었지만, 민중을 선동했을 뿐 아니라 민중이 학살하는 동안 전혀 말리지 않았다. 

302p

혁명재판소는 이른바 '자유의 독재'를 행하는 주요 기구가 되었다. 혁명 세력의 중추인 국민공회가 판사와 배심원 임명권, 그리고 기소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판사와 배심원이 혁명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재판소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결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한국의 이른바 민주 세력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독재가 같은 맥락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려는 공수처라는 것도 적폐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자유의 독재를 실행하기 위한 기구가 아닐까?)

 당통이 주도한 국민공회는 혁명재판소 설치에 이어 '자유의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혁명감시위원회'는 혁명에 반대하거나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조처를 취했다.

312p

흔히 학살의 주도자가 일본군이었다고 말하지만, 고종을 중심으로 한 조선 관료들은 수십 차례 이상 대책회의를 했고 고종은 여러 차례 토벌군을 보내 동학 잔존 세력을 토벌하게 했다. 따라서 당시 최고 주권자였던 고종이 농민 20만 명을 학살한 책임을 져야 한다.

313p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전선, 그리고 지중해 해상에서도 프랑스군은 우위를 확보했다. 반혁명의 위협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공포정치의 필요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 로베스피에르의 치명적 오류가 있었다. 그는 혁명을 완수하려면 더 단호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에, 지속되고 있는 반혁명 음모를 격파하고, 내부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분파 운동을 제어해야 하는데, 공포정치를 그만둔다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그러나 외부의 위협이 급격히 약화되자, 공안위원회 의원들조차도 공포정치를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국민공회 의원들 다수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되자, 로베스피에르의 반대파는 국민공회를 움직여 그와 그의 일당을 숙청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공포정치가 끝나고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측근들이 처형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다시 온건한 길을 가게 되었다.

323p

다윗 이야기의 저자를 셰익스피어에 비유했다. 셰익스피어가 영국 역사를 소재로 다양한 사극을 만들었듯이, 성경의 저자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소설처럼 각색한 게 성경이라는 의미다.

337p

프랑스 서부의 주민들이 혁명정부와 긴장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들이 혁명정부에 맞서게 된 결정적 계기는 국민공회의 30만 징집령이었다. 주요 원인으로 이 지역이 산업화가 더뎌 농촌 문화가 강고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구체제의 모순을 강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의 모토 아래 억압과 모순을 철폐하자는 혁명에 적극 동의했지만, 파리의 혁명 세력과 갈라서게 되었다. 이 지역의 농민들은 가톨릭 신앙이 매우 두터웠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가톨릭 신부와 교회를 통제하려 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선서하지 않은 성직자들이 옳다고 생각했다. 상당수의 주민들은 이들을 적극 지지하면서 혁명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1792년 8월에는 수백 명이 이들을 지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가 모두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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