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한국인 - 푸른 눈의 영국 기자 마이클 브린이 바라본 한국의 모습
마이클 브린 지음, 장영재 옮김 / 실레북스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500페이지에 달하는 상당한 분량의 책이라 며칠에 걸쳐 읽었다.

구한말부터 시작한 한국 현대사 분석이 흥미로우면서도 북핵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안 하고 있어 한반도 통일 운운하는 마지막 장은 매우 공허하게 들린다.

아마도 원고를 오래 전에 써 놔서 새로운 변화를 추가하기 어려웠던 게 아닐까 싶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적으로 한쪽 진영의 얘기를 참조해서 약간 기울어진 시각으로 한국 정치를 보기 때문은 아닐까?

이승만은 국제적인 경험과 탁월한 외교 감각으로 보잘 것 없는 패를 가지고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루어내고 미국의 원조를 받아내서 한국을 안정시켰지만 자신의 승리에만 집착한 나머지 민주주의적인 과정을 훼손시켰다고 평가한다.

대체적으로 지도자들이 사회주의에 경도됐던 시기에 민주공화국 제체를 지킨 것만으로도 큰 역할을 했으나 더 민주적이고 더 통합된 나라를 이끌지 못했음은 이승만의 개인적 한계라 아쉽다.

국민들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린 것은 박정희였고 분단 상황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이 지금보다 훨씬 더 역량있는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안타깝다.

저자는 한국의 엄청난 발전상에 놀라면서도 안보 문제가 발목을 잡아 권위주의를 청산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유교 문화라는 오랜 역사적 경험도 한몫 하겠지만 좀더 자유롭고 선진적인 나라를 만드는 것이 이제는 경제 발전보다 더 중요한 시기인 것 같다.

특히 저자는 민주주의의 완성에서 권위주의 타파와 함께, 표현의 자유를 중요시 했다.

과연 문재인과 현재의 여당이 역사적 과업을 이룩할 수 있을까?

가짜뉴스 단속한다면서 유튜브 등에 압력을 가하고 공수처 설치해서 고위 공직자 수사권을 가진 사람을 대통령이 임명하겠다는 현 정부는 자유를 확대시키고 있는가?

현재로서는 너무나 절망적인데, 그렇다면 야당은 가능할까?

국민정서라는 법 위의 군중심리를 제압하고 진정한 법치와 대의민주주의를 실현시킬 수 있는 리더가 과연 나타날까?

지금으로서는 모두 요원한 문제 같다.

저자는 북핵 위협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가볍게 치부하는 느낌이지만, 성숙한 사회 변화는 차치하고라도, 당장 북한의 위협에서라도 벗어나길 바랄 뿐이다.




<인상깊은 구절>

5p

처음에는 북한 경제력이 더 강했고 사기와 자신감도 우위에 있었지만, 이제 북한은 통치자가 세계적 놀림감이 되는 고립되고 열등한 나라가 되었다.

 핵무기를 흔들고, 인종적 순수성을 내세우고, 외세로부터의 자립을 자화자찬하고, 국제 규범과 외교 관례를 무시하면서, 동시에 항상 적들로부터 도움을 구하려고 하는 북한이 저항적으로 보이게 된 것은 역설적인 일이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은 허풍쟁이들이다. 그들은 저항을 통해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한 손에는 깃발을 다른 한 손에는 동냥 그릇을 들고 서 있을 뿐이다. 저항을 활용하여 무언가를 이뤄낸 것은 남한 사람들이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은 이러한 저항의식을, 통치자의 교체를 검토할 정도로 미국의 멘토들을 성가시게 만든, '북진'이라는 공허한 위협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저항의 고삐를 단단히 잡아서 다시는 침몰하지 않을 국가의 건설 쪽으로 돌린 사람으 1961년에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23p

오늘날에 와서도 일부 구세대 학자들은 남한의 민주주의에 대하여 거론하기를 꺼린다. 민주주의를 이룩한 주체가 정치적 우익이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들은 세계대전 이후 남한의 건국 과정이 '순수하지 못했음'을 강조하고, 이어서 세계가 항상 북한을 잘못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가 제 발에 걸려 넘어져 코방아를 찧기 전인 호시절에는 자본주의가 저개발을 초래하고 사회주의가 더 정통적이라는 생각에 도덕적, 지적 설득력이 있었다. 공산주의의 흉악함도 자유세계의 일원인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불쾌함만큼 강하게 인식된 적이 없었다. 그 정도까지는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증거가 그들의 오류를 입증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박정희는 가망이 없었다. 그는 일본제국에 봉사했고,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으며, 반대자를 고문살해했고, 미군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자국의 군대를 그것도 잘못된 편을 들어서, 베트남전에 파병했다. 북한에는 외국 군대가 없었고, 경제도 초기에는 남한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김일성 체제에 호감을 갖기는 어려웠지만 이는 미래의 '진정한' 코리아로 가는 가파른 오르막일 뿐이었다. 이런 난센스로 머릿속을 채우면서 우리는 남한이 달성한 성취에는 눈을 감았다."

 큰 그림에 해당하는 문제 외에도 남한의 성장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키는 작은 결점들이 있었다. 성장이란 단지 국가의 회계장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성장하는 국가는 부유해질 뿐만 아니라 도덕적, 실천적, 전체적 건전성도 향상된다. 

31p

아직 한국의 리더십은 개인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명확히 하는 길을 찾지 못했다. 집단을 위한 희생에 가치를 두는 관념의 뿌리가 너무도 깊다.

32p

북한은 그들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가 있다는 듯이 침략을 저질렀으며 이후에도 자신들이 더 순수하고, 합리적이고, 한국적이라는 태도를 견지했다. 북한은 일본 식민통치에 협력한 사람들을 숙청했고, 소련의 지시를 받지 않고 중국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는 척했으며, 주민이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모든 것은 북한이 인종적, 정신적으로 오염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런 주장에는 남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다소간의 국수적 논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남한 사람들은 분노와 실용주의를 따라서 다른 길을 선택했다.

 위성사진의 한반도가 보여주는 것이 그 결과다. 우리를 보라. 우리가 더 발전했으며, 너희의 순수함이라는 기준은 환상에 불과하고, 우리가 진정한 코리아다.

53p

이들이 한국의 놀랄 만한 발전을 일궈낸 영웅들이다. 이 나라가 가진 것은 이런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에게는 되살려낼 산업의 역사나 자유의 경험이 없었다. 석유는 물론이고 땅에서 캐내거나 재배해서 팔 수 있는 천연자원도 전혀 없었다. 거의 모두가 전쟁이 끝난 후 휴전선 때문에 위축되지 않고 고향을 떠나 서울과 주변 위성도시로 몰려들었던 수백만 명의 이주민에 합류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미국의 지원을 통해서 자신감을 얻었으며 집단적 도전이 된 삶을 추구해 나갔다.

 이런 사람들이 한국의 유일한 자원이었다. 그들에게 깃들인 찬란함의 실체를 깨닫기 위해서 그들이 겪은 고난, 고된 일, 학대, 사회적 사다리의 아래쪽으로 밀려난 일 등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이들은 승리자들이기 때문이다.

70p

자신은 회사의 파산에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당연히 복직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 자동차업계 근로자들에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보다 못한 시 공무원들이 마침내 시위대의 텐트를 철거했을 때 나는 당연한 조치를 왜 그렇게 오래 끌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내 가족과 동료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한국인이 정부가 한 일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놀랐다. (법원도 마찬가지였다. 시가 취한 조치는 나중에 불법으로 판결되었다)

 전통적인 권위주의 가족문화와 수백 년을 이어온 교육에 대한 견해, 즉 교육은 새로운 지식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한 교사가 무지한 학생에게 전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온다. 오늘날 학교에서조차 론이 부족하고 설명과 설득의 기술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국인은 성인이 되어서 상호간에 원활하게 협력하면서 일할 수 있는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 두 사람 이상이 함께 하는 모든 일에는 리더가 있어야 한다. 토론을 해본 경험이 부족한 것은 사람들이 자기 의견에서 편견과 감정을 배제하는데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장 동료나 가까운 친구가 아닌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한국인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는 쪽을 선택한다. 당신의 의견에 대한 한국인들의 존중 때문에 당신의 생각이 실제보다 더 뛰어나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반면에 당신의 한국인 배우자는 당신이 말하는 거의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파트너를 사랑하는 사려 깊은 파트너는 머지않아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방어하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73p

명확성의 부족에 대한 또 한 가지 현실적인 설명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권력자는 철저하게 통제된 상황에서가 아니면 언론에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가 기자들을 다루기 위해서 다루기 위해서 지명한 대변인은 정부부서나 기업의 계층구조 상의 위치가 너무 낮아서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83p

필자는 때로 선의와 목표의식을 갖고 모든 것을 설명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사상에 열광했던 한국의 성리학자들이 14세기의 공산주의자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공산주의자가 그랬던 것처럼 일단 권력을 획득하자 그들의 종교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아마도 그와 같은 시스템은 실현되기에는 너무도 유토피아적이었을 것이다. 유교의 혁명가들은 가장 현명하고 품위 있는 사람이 지배하는 고결한 사람들의 국가를 꿈꾸었다. 이를 위해서 시, 서예, 도덕에 중심을 둔 교육체계를 확립하고 시험을 통과해야만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결과는 부패가 만연하고, 정의가 실종되었으며, 계급체계가 고착되고, 편협하고 악의적인 법이 시행되는 국가였다. 그들은 경쟁적인 주장을 내놓고 파당을 조성하여 야만인들같이 서로를 공격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의 유교사상은 일본이나 중국보다 훨씬 더 깊이 한국의 심층부로 들어갔으며 오늘날에도 조상을 기리는 제사나 수직적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성향에 확실히 남아 있다. 또한 성 차별 문제에도 유교의 영향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필자는 유교의 영향이라고 생각한 한국인들의 정중함과 예의바름에 끌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사람들의 저속함과 마주쳤다.

86p

20세기 초까지도 행인들은 망자의 가족이 묏자리를 물색하는 동안에 거적에 말린 채로 햇볕 속에서 부패하고 있는 시신과 마주치곤 했다. 불안정한 혼령을 매장하는 것은 질병의 위험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매장 공간이 부족해짐에 따라 남한 정부는 화장의 선호도를 높이는데 성공했다. 사후세계에 대한 개념은 종교마다 다르지만 한국인의 공동적 관심사는 망자의 자손이 조상에 대한 공경심을 갖게 하고 혼령이 외롭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92p

한국인들은 종교에도 무속신앙적 열정을 가지고 뛰어들었다. 그들은 유교의 적용에서 종주국 중국을 능가했다. 마찬가지로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에 대한 공산주의적 개인숭배에 있어 스탈린과 모택동을 능가했으며, 그는 마치 샤먼왕처럼 북한을 통치했다.

103p

이런 방식으로 신흥종교는 사회에서 예술가의 역할, 천재적 예술가사 어떻게든 사름들의 영혼 즉 시대정신에 다가서는 것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예술가는 단지 자신이 시대정신에서 발견한 것을 분명하게 표현하려 하는 반면에, 신흥종교의 지도자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거나 사회에 새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 시대정신을 활용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 종교 또는 다음에 나타날 종교의 임무는 행복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111p

오늘날 그토록 많은 한국인들이 여론 조사원에게 자신이 불행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경쟁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공을 위해서 필요한 학력을 취득하는 길은 소수의 일류대학을 통하는 좁은 길이다.

 오늘날 한국의 당면 과제는 성공에 이르는 길을 다변화하고 사회적 서열을 자존감과 분리시키는 것이다. 

 사회적 서열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타인이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판단에 따라 사람이 얼마나 바뀔 수 있는가는 볼 때마다 놀랍다.

112p

나는 측정할 방법이 있다면 한국인이 예컨대 아이디어보다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 밝혀지리라고 확신한다. 

 계급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는 자발적이고 순수한 태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일찍부터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정보를 모으고 책략을 꾸미는 것을 배우게 된다. 대화하는 사람의 수준과 그들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중요할 뿐 대화 자체의 즐거움은 없다.

 서구인이 이해하기 힘든 한국인의 특성, 즉 침묵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성향이 거기에서 나온다.

117p

한국인들은 격정적이면서 또한 매우 예민하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의 미묘한 느낌에 대한 타인의 이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기분(느낌 또는 마음의 상태)'은 대단히 중요하다. 기분이 좋으면 건강에도 유익하다. 기분이 나쁘면 사업제안서를 퇴짜 놓거나 아내나 비서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나쁜 행동도 정당화된다. 

131p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인이 예컨대 영국인보다 훨씬 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최소한 30대 이상의 한국인은 그렇다. 그보다 젊은 세대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들은 휴대전화와 PC에 푹 빠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이 든 한국인들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 사람들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으며, 부모와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에 눈을 치켜뜨지도 않는다. 그들은 인간관계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들에게는 고정된 취침시간이 없다. 밤을 절반쯤 새우며 당신과 대화를 나누다가 지쳐서 바닥에 누워 잠이 들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출근한다.

 우리는 동아시아인이 대체로 보수적이고 서구인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필자의 주관적 경험으로는 한국인들이 훨씬 더 차이를 잘 받아들이고 포용적이다. 나는 기독교와 법에 기초한 서구문화 때문에 서구인은 옳고 그름의 문제, 선과 악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갖는 반면, 유교적인 한국인들에게는 사람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하는 본능이 있다고 생각을 한다. 한국인은 덜 비판적이다.

135P

한국의 아기들은 자신을 억제하기보다는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길러진다. 즐거움을 미루는 것을 배우지 못한 소년들은 표가 난다. 성인이 되어도 그들은 모든 것이 즉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이와 같은 보편적 패턴을 목격한 서구인은 한국의 부모들이 자식에게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자식에게 훈계하지 않는다. 사실상 설명조차 많지 않은 편이다. 

137p

사실대로 말하자면 한국인들에게는 애국심의 부족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민족주의와 정체성에 대한 강렬한 집착은 있을지 몰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없다.

138p

오늘날까지도, 비록 전적인 중매결혼은 매우 드물지만, 가족은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따라서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대단히 타산적인 결혼과정을 거치게 된다. 

"낭만적 연애로 변화하는 추세는 대중문화가 암시하는 것처럼 크지 않을 수 있다."

"소득, 집안 배경, 키, 심지어 혈액형 같은 스펙이 매우 중요하다. 중매결혼의 사고방식과 가족의 영향력은 이들 요소에 여전히 남아 있다."

147p

한국의 교육이 지향하는 방향에는 한 가지 바람직스럽지 않은 특징이 있다. 아이들을 훌륭한 시민으로 만들려는 것보다는 학력과 자격을 취득하는 방향으로 몰고가는 것이다. 

171p

초기의 조선은 금욕적인 국가였다. 과시적 소비는 금기시되었으며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들도 그런 행동을 삼갔다. 발전이 아니라 사회의 안정이 성공적인 통치의 지표로 여겨졌다. 성리학자들은 완벽한 사회는 체제가 아니라 군주의 도덕성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으며 부도덕한 리더십이 불안정을 초래한다고 믿었다. 

 유교 교육에서는 윤리도덕이 가장 중요했으므로 이론상으로는 국가가 가장 도덕적인 젊은이들을 미래의 결정권자로 선발하는 것이 셈이었다. 15세기 관료제도의 배후에 있는 이런 관념은 오늘의 한국에도 여전히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75p

최하층민에는 천민과 함께 정부와 개인이 소유한 노비가 있었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조선사회의 이러한 측면을 부각시키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한국인을 외세의 피해자로 보는 오늘날의 관점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179p

조선시대의 사법제도는 불공정하고 혼란스러웠으며, 부도덕한 경우도 흔했다. 감옥은 "인간 고통의 지옥"이었으며, 유죄판결을 받은 중죄인, 전문적 범죄자, 초범, 심지어 증인에게까지 고문은 기본이었다. 처벌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급료를 받지 않고 피해자 가족의 뇌물로 살아가는 일도 흔히 있었다.

 유교사상이 지배한 한국에서는 하위계층은 그 출신성분에 맞게 태어났으며, '氣'  또는 정수가 열등하여 제대로 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면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동정심의 부재를 오늘의 북한에서도 볼 수 있다. 북한 정권은 조상 때문에 "동요"나 "적대" 계층으로 분류된 많은 주민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180p

실제로 일본 침략군은 백성들에게 식량을 제공했으며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필요한 도움을 얻었다. 이는 역사학자들이 잘 언급하지 않는 사실이다. 일본군을 저지한 결정적 요인이 거북선이 아니라 중국 명나라의 개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명나라 군은 1593년의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으며 1596년까지 조선군을 도와서 침략자들을 남해안까지 밀어냈다.

193p

이토는 수상을 역임했으며 일본의 근대화를 이룩한 메이지유신을 이끈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한국을 합병하는 계획에 반대했으며, 한국의 위상을 부분적으로나마 유지할 수 있는 보호국 지위를 선호한 인물이었다. 그의 암살은 일본이 합병 계획을 밀어붙이고 한국에 대한 공식적 지배권을 주장하기로 결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참담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암살자 안중근은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196p

한국인들은 일본의 행위를 공격적인 찬탈로 받아들였지만, 일본의 행동은 여러 면에서 볼 때 자기 방위를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제국주의 클럽에 가입을 꾀하면서 사실상 제국주의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피하려 했다. 그들은 식민주의자로서는 후발주자였으며, 식민지를 단지 원자재의 공급원으로 이용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이웃을 식민지화한 후에 산업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이례적이었다.

203p

상업 부문의 엘리트 계층은 일본 통치의 혜택을 입은 반면, 가난한 농민은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은 지금도 한국사회에 스며 있는 사회적, 이념적 분열을 초래했다. 이제 좌파 세력은 부자들 중에 부역자가 있었다고 비난한다.

207p

오늘날의 인식과는 반대로 1943년까지 군복을 입은 청년들은 지원병들이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많은 청년들이 입대를 거부하자 "자원하라"는 압박이 강화되었다. 이 시기에 8만 명의 자원자 중에서 실제로 입대가 허용된 사람이 1만 7천 명에 불과했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한국인에게는 일본인보다 까다로운 조건이 요구되었다. 이는 한국인의 충성심에 대한 의문과 아울러 천황을 위한 전쟁에 다수의 한국인을 투입하면 그들이 전쟁이 끝난 후 동등한 대우를 요구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입대를 위한 조건 중에는 언어능력도 있었는데, 한국인 중에서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4분의 1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입영을 피할 수 있었다.

209p

일본 정보는 1995년에 처음으로 공식적 사과를 표명했다. 그러나 보상과 관련해서는 1965년에 양국 관계가 정상화되었을 때 식민통치의 피해자 모두에 대한 보상금을 지불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한국 정부는 이 돈을 개인들에게 지급하기보다는 국가적 프로젝트에 투입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생존자들은 한국 정부와 보상 문제를 협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불편한 진실은 20세기 초,중반의 한국에서는 그와 같은 여성 학대가 별로 특별한 문제가 아니었으며, 한국의 권력자들이 위안부 문제를 일본인보다 더 특별한 문제로 지목할 가능성도 낮았다는 사실이다. 또한 인신매매의 상당 부분이 한국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지방정부가 할당된 인원을 채우라는 요구에 내몰린 지역에서는 팔려가지는 않았더라도 가족의 권유에 따라 위안부가 된 여성들이 많았다.

 세련되고 민주화된 사회의 운동가들이 이 경우처럼 파시스트적인 민주화 이전 시기의 적에게 21세기의 거울을 들이대면 거기에는 자국이 근대화되기 전의 모습도 비치게 된다는 점이 어려운 점이다. 이것이 진실의 추구를 더욱더 어렵게 한다. 


<오류>

172p

태조의 셋째 아들인 이방원은 정도전이 다른 왕자를 후계자로 선호했다는 이유로~

->셋째가 아니라 다섯째 아들이다.

173p

스물네 글자 중 일부는 왕비에게 여러 가지 소리를 내보게 하면서 입과 혀의 모양을 관찰한 왕이 직접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 왕비가 아니라 정의공주로 알고 있다.

174p

양민 간에도 등급의 구별이 있었으며 장인이 가장 높이 평가되었다.

->장인이 아니라 농민이 가장 높게 평가되었다.

177p

연산군의 마지막 만행은 미망인이었던 백모를 강간한 것이었는데, 자살한 백모의 오빠는 왕실 호준의 지휘관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또 하나의 고약한 인물을 17세기의 군주이며 세자의 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부왕을 독살한 것으로 알려지는 광해다.

-> 연산군이 큰어머니를 강간했다거나 광해군의 선조 독살설은 야사에 불과하다.

또 박원종은 월산대군 부인의 오빠가 아니라 동생이다.

440p

여러 사람이 같은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고 술잔을 교환하는 식으로, 이는 B형 간염의 발병률이 높은 원인으로 지적된다.

->B형 간염은 술잔으로 옮는 것이 아니라 수혈과 성교 등을 통해 전염될 수 있다. 술잔 돌리기는 A형 간염을 전파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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