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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디자인 산책>을 리뷰해주세요.
핀란드 디자인 산책 디자인 산책 시리즈 1
안애경 지음 / 나무수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핀란드?? 북유럽 어딘가에 있는 먼나라! 사우나를 무지하게 좋아한다고 알려진 곳?? 그 정도가 핀란드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정보의 전부였다.   

핀란드에 터를 잡고 활동하는 한국인 큐레이터가 일상 속에서 만나는 사소한 것들로부터 아름다운 디자인을 이끌어 내는 핀란드 디자인에 대해 설명한 책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디자인 쪽은 전혀 문외한인 나로서는 최근 디자인 추세가 핀란드 디자인이 각광 받는지 어떤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조건 핀란드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추켜 세우는 듯한 저자의 태도가 약간 거슬렸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점점 그런 마음은 사라지고, 점점 핀란드란 나라 자체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삶 자체가 여유롭게 느껴지는 곳, 당장의 눈 앞의 이익보다는 삶을 즐기고 이웃과 다음 세대까지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따뜻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자연과 함께 호흡하면서 살 수 있는 곳, 아름다운 풍광 만큼이나 아름다운 삶과 예술이 충만한 곳, 등등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장점을 한 데 뭉쳐 놓은 나라인 것만 같다.  

예전에 케이블 방송에서 [카모메 식당]이라는 일본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한 일본 여성이 아무런 연고 없는 북유럽의 도시에 일식당을 차리고 살아가는 내용을 그린 잔잔한 영화였는데, 특별한 내용이 없는데도 그 정갈함, 잔잔함, 따뜻함이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았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영화의 배경이 된 나라도 핀란드였다. 책을 읽다보니, 핀란드 같은 나라라면 낯선 여행객이라도 그 자리에 주저 앉고 싶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면에서 우리 나라와 비교가  된다. 핀란드에서는 도시를 개발한다고 하더라도 수 십년, 수 백년을 두고 천천히.. 무엇이 가장 어울리고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심사숙고 끝에, 기존의 것들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조금씩 나아지는 아름다운 변화를 추구한다. 지금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배려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남아 있다.   

그것에 비하면 우리 나라의 개발은 그냥 주먹 구구식으로, 당장 호화찬란하게, 편리하게 마구잡이식으로 하다 보니, 전국 곳곳에서 오래된 집들은 다 부수고  아파트를 짓고 전국 곳곳의 하천을 덮었다가 다시 물길을 만드네 어쩌구 하면서 난리를 치고, 4대강을 개발한답시고 강을 다 파 헤치고, 산을 뒤엎고, 논밭을 갈아 없고, 피맛골 같은 옛 동네를 다 부수고 거리마다 보도블록을 일년도 안되서 다 교체하고, 등등... 온통 짜증나는 일, 한심한 일 투성이다.  조급증, 성과주의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되어가는 게 우리 현실이다.  

과거 우리 선조들의 멋과 아름다움을 떠올려 보게 된다. 소쇄원에서 보는 것처럼, 청자나 백자에서 보는 것처럼, 한복의 선에서 보는 것처럼, 바람이 통하는 한옥에서 보는 것처럼, 여백의 멋을 알고 있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 선조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일상의 삶 속에서 그대로 품었다.

그런 조상의 전통을 이어 받은 우리가 어디서 이식된 것인지도 모르는 성급한 성과주의, 외형주의에 빠져서 진정한 우리의 멋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멋과 아름다움을 외국의 사례를 보면서 경탄해야 한다는 게 많이 서글픈 현실이다.  

책을 통해 우리 세대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핀란드 사람의 멋과 여유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우리 스스로 무시하고 하찮다 여겼던 아름다운 우리 문화의 전통을 되돌아 보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책에 소개된 아름다운 핀란드의 디자인 보다 더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장독대에 놓인 된장독의 투박한 아름다움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편협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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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생각들>을 리뷰해주세요.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 유가에서 실학, 사회주의까지 지식의 거장들은 세계를 어떻게 설계했을까?
황광우 지음 / 비아북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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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는 어느 한순간, 뛰어난 천재에 의해 획기적인 생각이 나오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려 나가기 보다는 변화에 대한 내적, 외적 여건이 충분히 성숙되어 졌을 때 비로소 꽃을 피우는 경우가 더 많은 듯 싶다.  

그런 면에서 인류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생각은 어떤 면에서는 당시 시대의 요구에 대한 집단 지성의 반영이라고까지 말하면 너무 지나친 걸까? 

 암튼, 이 책에서는 지금 우리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듯 하지만, 사실 잘 알지 못하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파시즘, 유가, 도가, 법가 사상과 실학, 동학 사상등 각 사상의 본질과 그 태동 배경, 역할, 한계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서양에서 중세시대가 막을 내리고 상공업이 발달하고 시민 계급이 성장하면서 제일 먼저 대두된 사상은 자유주의다. 재산/ 종교/ 언론/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였던 자유주의 사상은 경제적인 측면에는 자본주의와 결탁한다. 즉,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주장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저절로 최상의 상태로 조절되기에 국가나 권력이 최소한의 간섭만 하는 것이 경제를 발전시키는 최선의 방법임을 설파했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서 도처에서 자유주의의 문제점이 터져 나온다. 말이 자유주의지, 결국 가진 사람들만의 자유를 위해 대다수의 빈민이 희생되는 구조적 문제가 대두되고 그 대안의로 대두된 새로운 사상이 사회주의다.( 물론 그 이전에도 사회주의적 이상이 유토피아나 공자의 대동 세계에 대한 염원등에서 꿈꾸어진 적이 있지만, 현실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된 것 마르크스에 의해서이다).  

즉 사회주의는 가진 자들의 자유가 아니라, 평등을 요구하는 새로운 사상이었다.  그리고 이 사상을 실제 역사 속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게 소련의 사회주의였지만, 지난 역사를 통해 소련의 사회주의 실험은 완전히 실패임이 드러났다. 충분히 자본주의가 성숙하기도 전에 몇몇 엘리트 층에 의해 강제적으로 실시된 사회주의는 결국 프로레탈리아 독재란 미명하에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 숙청 및 경제 퇴보로 인해 실패했다.     

소련과 동구권에서 사회주의가 실험되고 있었던 데 비해 서유럽에서는 자유주의의 자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민주주의가 수용되고 있었다. 즉, 국민 대다수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국가의 역할이 증대되었고, 국민들은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해 줄 대표를 선출하기 시작했다. 여성의 참정권이 실현되었고, 노조라든가, 사회 취약층에 대한 지원도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국가 통일 자체가 어렵게 된 나라들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파시즘, 즉,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통치하는 극단적 국가주의의 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그 결과는 600만 유태인의 학살과 2차 세계 대전이라는 비극을 불러 왔다.  

격동의 20세기가 끝난 지금은 어느 곳에서나 자유 민주주의가 대세이다. 그러나 과연 세계 곳곳에서 명목 상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가 하는 면에서는 아직 갈 길은 멀다. 또, 사회주의가 주장한 것처럼 평등의 문제를 고려한다면 자유 민주주의가 완벽한 것은 결코 아니다.

동양의 정치 사상은 크게 유가, 법가, 도가 정도로 분류해 놓았다. 세 가지 사상 모두 춘추 전국시대라는 극도의 혼란기에 그 혼란을 극복할 구체적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유가 대표라고 할 공자의  가르침은 주나라 시대를 이상적 시대로 삼아 인과 예가 충만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각자 자기의 지위에 맞게 윗 사람은 덕을 베풀고 아랫 사람은 충과 효로서 답하면 만물의 질서가 회복되어진다는 주장이다. 맹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임금 다운 임금이 아니면 갈아엎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유가 사상은 윗사람에게 충과 효를 지배층의 통치 논리로 이용되었다.  

도가의 주장은 이와는 정 반대이다. 충효, 인의, 예지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자체가 그런 것들이 이 세상에 드물기 때문이며, 인위적으로 무엇이든 하면 할 수록 더 혼란스러워짐을 이야기 한다. 무위자연이라고 해서 인간의 본성 그대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가장 좋다고 설파한다.  

법가는 아주 현실적이다. 법과 원칙을 명확히 세워 그 법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란 주장이다. 변방이었던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하여 최초의 통일 왕조를 세우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법가는 아주 효율적인 통치 원리였지만,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데는 실패했다.  

그래서 외형적으로는 유가 사상이(만 백성을 살피는 어버이 같은 임금님의 이미지), 내적으로는 법가 사상이(왕과 신하의 끊임없는 주도권 싸움과 권력 투쟁의 과정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중국을 지배해왔다. 그리고 때때로 권력의 간섭이 없는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는 도가에 뿌리는 둔 세력들이 혼란기마다 등장하곤 했다.  

유가나 법가는 기존의 신분 질서를 옹호하고 지배계층의 권한을 강화시켜줄 뿐 백성들의 삶을 개선시키는데는 실패했다. 그래서 실학이나, 동학같은 새로운 사상이 대두되곤 했다. 탁상 공론이나 일삼고, 출세의 수단으로 전락한 유학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사상, 혹은 후천 개벽으로 열리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지만, 기득권 세력의 단단한 벽 앞에서 결국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버린 동학 혁명까지.... 

지금 우리 세상이 자유로운가? 우리 모두가 평등한가?  

그렇지 않기에, 과거의 사상이지만, 위에 언급한 여러 사상들이 우리 삶 속에서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이런 사상들을 공부해야 할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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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교양강의>를 리뷰해주세요.
사기 교양강의 - 사마천의 탁월한 통찰을 오늘의 시각으로 읽는다 돌베개 동양고전강의 1
한자오치 지음, 이인호 옮김 / 돌베개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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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원래 역사를 좋아한다. 물론 드라마도 사극(퓨전 사극은 제외)을 좋아한다. 과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늘 궁금하고, 그 시절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고들 하는데, 어느 시대 어떤 인물이 어떤 방식으로 살다 갔는지 흥미가 간다.  

그래서 역사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예전에 사기열전 번역본이나, 한권으로 읽는 사기 같은 류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또 열국지나 초한지, 삼국지 등의 책도 여러번 읽어서 잘은 몰라도 대강 유명한 사람 이름 정도는 익혔지만, 한 시대, 한 인물을 제대로 바라보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우리 나라 역사 이야기도 아니고 (물론 우리 역사도 대강 밖에 알지 못하지만) 남의 나라 역사 속에 나오는 인물이다 보니, 그 사람들이 실제 중국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평가되는지 중국 역사에서는 어느 정도 위치를 점유하는 인물들인지,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러던 차에 그 궁금증을 어느 정도는 풀어줄 만한 책을 만나게 되었다. 한자오치라는 중국 강단 사학자가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사마천의 사기를 가지고 강의를 한 내용 중 정수만을 뽑아서 책으로 편집한 것이니, 나의 구미에 딱 맞는 책이다.  

사마천의 [사기]를 통틀어서 어쩌면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인물인 시황제, 이사, 항우, 유방, 여후, 한신, 장량, 주아부, 한문제, 한경제, 한무제에 대해 사기에 기록된 내용을 설명하면서 사마천이 각 개개인들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왜 그렇게 평가했는지, 오늘의 관점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는지 등등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시황제는 정말 폭군이고 장사꾼 여불위의 아들이었을까?? 호해가 아니라, 시황제의 큰아들 부소가 2세 황제가 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항우가 홍문연에서 유방을 죽여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면, 한신이 괴통의 말을 듣고 천하삼분을 했더라면,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하는 멋진 장면이 나오는 삼국지 이전에 삼국시대가 도래하진 않았을까 등등 역사책을 읽다보면 만약 이랬더라면 하는 가정을 많이 하게 된다.  이미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기에 역사책 면면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의 운명도 다 알고 있기에, 뛰어난 인재가 억울한 누명이나 한계 때문에 역사 속에 스러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또 왜 다른 선택을 하지 못했을까? 왜 그런 뻔한 함정을 피하지 못할까 하면서 아쉬워하지만, 당시 정황상 그렇게 밖에 안되는 일도 많았을 것이다.  

역사는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또 역사란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또 끊임없이 현재에 새로 쓰여지는 이야기라고도 한다.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되어 지는 기록이기에, 아무래도 기득권, 권력을 가진 계층의 입맛에 맞도록 끊임없이 수정되어 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사마천의 [사기]가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고전으로 추앙받는 것은 그 속에 성공한 통치자만의 역사가 아니라, 실패했지만, 누구보다 뛰어나고 멋진 영웅과 호걸과 재사와 협객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는 한번 사마천의 사기를 다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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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을 리뷰해주세요.
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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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리스본 대지진?? 근대 유럽 역사의 흐름을 바꿀 만한 엄청난 사건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난 처음 들어보는 걸까?

1755년 11월 1일 카톨릭의 성인들을 기리는 축일인 만성절 아침,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대지진이 발생했고, 뒤 이어서 거대한 쓰나미가 도시를 덮쳤다. 유럽의 번영을 상징하던 화려한 도시 리스본은 연타석으로 터진 지진과 화재와 쓰나미로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 버렸다.  

자연 재해 앞에 인간이, 또 인간이 만든 도시와 문화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멀게는 대서양 어디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는 아틀란티스 대륙의 이야기가 있고, 몇년 전엔가 우리 나라에서 전시회까지 열렸던 화산재 속에 덮여버린 도시, 품페이도 있고, 성경에 보면 숱하게 타락과 죄로 인해 멸망해 버린 도시들이 등장한다. 노아의 홍수로 세계가 다 물에 잠기었다거나(그런데, 왜 중국과 우리나라는 역사가 지속되어 왔을까??), 죄와 타락과 오만으로 인해 소돔과 고모라가 천벌을 받아 멸망했다는 식의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실제 현실에서도 몇 년 전에 인도네시아에 쓰나미가 닥쳐서 몇 십만인가가 순식간에 물귀신이 되었고, 중국 쓰촨성 대지진 때도 무너진 집과 산더미 속에 수십만이 그대로 매장 되어 버렸다. 자연의 엄청난 힘 앞에 인간이 이루어낸 문명과 과학 기술이 무용지물처럼 느껴지는 게 어디 한 두번일까?   

1755년 갑작스럽게 생긴 대지진 앞에 리스본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불과 3분만에 포르투갈이 수백년간 이룩해 놓은 부와 번영, 그리고 종교적인 신념이 다 무너져버렸다.   

당시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수백년에 걸쳐 진행된 노예 무역의 중계와 식민지 브라질 착취를 통해 쌓아올린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내면을 파고 들어가 보면, 일단 경제적으로는 해외에서 벌어오는 막대한 재화가 왕족과 몇몇 상층 귀족에게만 돌아가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가난과 무지에서 허덕거리는 사회였고, 종교적으로는 예수회가 실권을 장악해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자들을 종교재판을 거쳐 공개처형 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카톨릭 신앙의 마지막 보루 같은 도시였으며, 동시에 개인의 이성과 자유와 과학에 대한 일체의 사상과 교육을 통제하던 나라였다.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내면으로는 곪을 대로 곪아 있던 나라 리스본에 유럽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재앙이 갑작스럽게 닥쳤다. 그것도 카톨릭 성자들을 기리는 만성절날, 지진은 성당과 많은 가옥과 궁전이 무너졌다. 신부와 신자과 불신자들이 함께 죽었고, 왕족과 귀족과 일반 백성들과 천민들이 평등하게 죽었다. 죽은 자들에게는 성서에 예견된 지구 멸망의 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날이었을 것이다.   

또 그날은 로마 멸망 이후 거의 천년 이상 유럽을 지배하던 기독교 대신,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과학적 사고 방식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된 운명의 날이기도 했다.  개신교와 카톨릭 모두 대재해 앞에 무용지물이었다. 지진의 원인이 리스본 시민의 타락과 원죄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거나, 불신에 대한 벌이라는 신부와 목사들의 설교가 늘어갔지만, 실질적으로 지진으로 피폐해진 리스본을 다시 살릴 것은 카르발류라는 한 정치가였다.  

그는 대재해 앞에서 망연자실해 있는 국왕을 대신해, 리스본의 피해 실태를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치안을 유지하고, 공권력을 적절히 이용해, 부상자들과 이재민들을 구호하고 썩어빠져 있던 리스본의 구태을 일소하고, 특권층의 특혜를 줄이고 긴 안목을 가지고 리스본을 재건축해 나갔다. 어디서 갑자기 이런 인물이 나왔을까 싶게, 그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뛰어난 안목과 추진력과 결단력을 가진 카르발류를 통해, 신의 저주를 받은 도시 리스본은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그 과정에서 근대적 의식이 유럽 전역에 싹터나갔다.  

그는 그의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적들에게 혹독했고, 자신의 비전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 대중에게도 단호했다.  그만큼 적도 많았다. 그를 지지하던 주제 1세의 사망 이후, 그는 바로 실각했고 자신이 추구했던 모든 개혁 정책들이 다 폐지되는 것을 모멸스럽게 지켜봐야했다.  

카르발류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상앙을 떠올렸다. 춘추전국시대와 18세기 유럽이라는 시간차, 공간차가 있지만, 두인물이 서로 겹쳐진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카르발류가 대재난 이후 멸망 위기에 처한 포르투갈을 차근차근 개혁과 결단으로 재건축해 나갔지만, 비밀 경찰, 첩자, 검열이 난무하는 독재정치를 벌임으로써 주제 1세 사후 바로 실각된 것처럼, 상앙도 변법이라는 개혁을 통해, 그 당시 변방에 속해있던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지만, 너무 지나친 법집행 때문에 모두의 미움을 사서, 결국 진효공 사후에 바로 실각되었다.  

포르투갈은 카르발류가 펼쳤던 개혁을 다시 원점으로 돌림으로써, 더이상 유럽의 강대국으로 남아있지 못하고 점차 주도권을 네덜란드나, 영국 프랑스에 빼앗기고 쇠락해 갔지만, 카르발류는 천수를 누리다가 평온하게 죽은 반면, 진나라에서는 상앙이 추진한 변법의 덕택에 나라가 부강하게 되었고, 결국 진시황때에는  천하까지 통일할 수 있었지만, 상앙 본인은 결국 자신이 만든법에 의해 잡혀 죽임을 당했다. 자신이 남긴 업적으로 비록 자신은 죽지만 후세에 두고 두고 이름을 남기게되는 상앙과, 한 때 포르투갈을 전성기로 이끌었지만, 실각하고 쇠락해지는 포르투갈과 함께 잊혀져가게된 카르발류중  누가 더 한이 많을 지 궁금해졌다.  

공교롭게도 며칠 전에 영화 해운대를 봤다. 부산을 완전히 휩쓸어 버리는 메가 쓰나미를 다루고 있는 대형 블록버스터인데 그 영화를 보면서.. 내내 이 책을 생각했다. 영화가 아니고, 실제라면.. 그 재난은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까? 카르발류 같은 지도자가  우리에게도 있을까??(물론 그의 독재적 통치 방식은 절대 사절!!!.. 지금 청와대에 있는 사람 하나도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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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4 - 그리스도의 승리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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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꼭 그 시대를 바로 옆에서 관찰하는 것 처럼..

편안한 글쓰기, 그러면서 냉정하고 예리하고 시대의 본질을 꿰뚫는 저자의 지성이 늘 그렇듯, 놀랍다..

 

거의 제국의 마지막의 시간대인 4세기.. 어떻게 로마가 쇠약해져갔으며, 어떻게 기독교가 결국 로마를 지배하게 되었는지.. 기독교 신앙인의 눈이 아닌, 제 3자.. 냉정한 지성을 갖춘 저자에 의해 그 본질이 보다 실재적으로 적나라하게 파해쳐 진다...

 

결국 한비자의 말처럼..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실재적인 이익이다.

 

4세기.. 그 시기에 기독교를 신앙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유리했다. 로마의 황제 입장에서도 불안한 자신의 황위가 신에 의해 권위를 인정받는다는 주장만큼 매력적인 것이 없었을 것이고, 재산을 가진, 그러나 더이상 주변 야만족의 침략에 대해 안전하지만은 않은 로마에서 로마인으로 살아가기에 기독교 사제가 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 사제가 되면.. 황제가 기부한 많은 농토를 차지할 수 있었고 자신의 사유재산도 지킬 수 있었으며 또한 세금을 낼 필요도.. 전쟁에 나갈 필요도 없었다..

또.. 기독교는 그 많은 재산으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활동도 여유롭게 할 수 있었기에 많은 가난한 사람들도.. 기독교를 좋아했다.. 늘 착취만 할 뿐.. 베풀줄 모르는 지배층에 비해..

기독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선을 베풀었다..

 

권력의 최상층과 지배층과 피지배층 모두에게..

결국 기독교는 당장의 현실적 이익이었다...

 

그러나,

그 현실적 이익 때문에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 그리스 로마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완전히 무너지고 내가 옳으면 너는 틀렸다는 기독교의 배타성이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

종국적으로는 인류 문명 전체로 볼 때는 결코 이득이란 생각이 안든다.. 이건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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