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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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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만에 김훈의 산문을 읽었다.

 

처음 그의 책 [칼의 노래]를 읽었을 때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던 그의 서술방식이 더이상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한결 책을 읽기 편하기도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의 식상함도 있었다.

 

김훈의 글을 읽다보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늘 태극 형상이 떠오른다.

음과 양이 서로 맞물려 돌고 있는..

 

동양 철학에서는 모든 사물이 음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여기서의 음과 양이 따로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음 속에 양을 내포하고 있고, 또한 양은 음의 외형을 쓰고 자란다.

각각 음양의 대표 주자로 알려진 물과 불만 하더라도, 물이 겉은 부드럽고, 차가우나, 모든 생명을 낳고 기르는 뜨거운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반면, 불은 겉은 뜨겁고 화려하나, 그 내면은 허한.. 본성을 갖는다고 한다.

양이 극에 달하는 때가 바로 음이 시작되는 자리요, 음이 가장 성할 때, 그 심부에서는 양이 태동하고 있다고 한다.

 

마치.. 음양처럼,

김훈의  글 속에는 서로 대립되는, 그러나,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두 가지 관념들이 종종 등장한다.

나와 너의 문제..

(이것은 칼의 노래에서도.. 적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나와, 그런 나의 적으로 변주되었었다.)

삶과 죽음의 문제..

 

그중에서도. 김훈은

특히 보편성 안에 내재되어 있는 필연적 개별성(?)에 천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를 들자면, 모든 인간은 다 죽는다는 점에서 보편적이지만, 결국 모든 인간은 홀로 자신의 죽음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개별적이고 고독한 존재라는 인식..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존재의 숙명 내지는 본질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김훈은 지독스러울 정도로 이것을 파고든다.

 

우리 개개인에게 세상이란 어쩌면, 나와, 나 아닌 것 이렇게 둘로 나누어진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개개인은 오직 자신으로 눈으로만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세상이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본다.

개개인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 생각하는 모든 것들, 아니.. 나라는 존재 자체가 철저하게 개별적이다.

내 밥은 오직 나 만이 먹을 수 있고, 내 고통도, 내 기쁨도, 내 슬픔도 철저하게 나 혼자만의 것이다.

태어날 때, 혼자였던 것처럼..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언제나 혼자였고, 죽을 때도 혼자, 개별적으로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 아닌 것들과의 합일을 꿈꾼다.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다.. 사람으로 죽는 공통의 운명을 가졌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슬픔의 경험을 가지고 타인의 슬픔을 헤아리려 하고, 내 기쁨에 타인이.. 함께 웃어주길 기대한다.. 그 속에서 존재의 외로움을 잊으려 한다.

 

김훈의 표현을 빌자면.. 결코 건널 수 없는 심연의 거리를 뛰어 넘어, 너에게 닿기를.. 너를 이해하기를.. 꿈꾼다.

그에게는 바로 건널 수 없는 심연의 거리를 건널 수 있게 해 주는 것, 아니, 건널 수 있다고 믿게 해 주는 것이 그의 글이 아닐까?

 

그의 글을 읽으며.. 나 역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닿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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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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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마도 내가 가장 많이 샀던 책 중 하나일 것이다.

대학교 다닐 때 이 책을 처음 접한 이후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책 선물을 해야 하는 경우.. 거의 주저 없이.. 이 책을 주곤 했었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고, 감수성이 다르고,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에..

모두가 이 책을 나처럼 좋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책 속 무언가가 내 마음을 두드렸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선물했던 사람은.. 초등학생이던.

정말.. 책이라고 하면.. 머리부터 아프다고 도망가던.. 내 조카였다.

이 책이랑..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박사가 사랑한 수식] 등등을 선물했었는데..

역시나.. 조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책을 받았고..

이 책은 다른 책들과 함께

조카의 책꽂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대로.. 박제처럼.. 늙어가고 있다.

 

그 뒤로..

책을 더 이상 조카에게 선물하지 않게 되었다.

선물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 늦게.. 조카를 통해.. 배운 셈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이 책을 사랑한다.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면.. 아마 주저 없이 이 책을 권해 줄 것이다.

 

이 책은 체로키 인디언 혈통을 지닌 저자가.. 자신의 할아버지와, 자신의 증조 할머니, 그리고 자신에게 세익스피를 읽어주던 어머니를 모델로 해서 써내려간 자전적인 소설이다.

 

다섯 살짜리 소년이 1년 안에 연달아.. 부모를 잃게 되자, 

체로키 인디언의 생활 방식을 고수하면서 살아가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소년을 거두게 된다.

소년의 이름은 작은 나무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가진 것이라고는 산 속 오두막과.. 조그마한 옥수수 밭.. 그리고.. 위스키 제조에 쓰이는 증류기뿐인 가난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작은 나무를... 자신의 삶 속으로 받아 들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작은 나무를 깊이 이해했고 사랑했다.

영혼을 가진 한 존재로서.. 작은 나무를 존중해 주었고, 배려해 주었다.

 

할아버지는 글이라고는 단어 하나도 읽지 못했고,  법으로 금지하는 위스키 밀주를 통해서만. 겨우 생필품을 구할 수 있을 만큼 가난했지만,  (책의 배경이 되는 시기가...대공황 무렵이다), 누구보다도 지혜롭고, 크고 강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고,

할머니 역시도.. 마찬가지로 크고 강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체로키 인디언들이 산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지.. 그리고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어떤 눈과 어떤 마음으로 생을 살아가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었다.

백인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백인들이 정해준 정착지로.. 이주해간 체로키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에 대해..

모든 것을 다 빼앗겨도.. 결코 자신들의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자긍심 놓은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작은 나무는 성장한다.

 

자연 속에서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는 이치..

사냥할 때도  제일 좋은 것이 아니라, 작고 느린 것들을 골라 사냥함으로써.. 자연을 더 강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오랫동안 공존하는 이치..

어떤 것을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는 것..

사람들이 갖고 있는 두 개의 마음 이야기.. 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마음과는 다른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한 영혼의 마음 이야기..

이 영혼의 마음은..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더 커지고 더 풍성해져서.. 사람의 몸이 죽더라도.. 결코 흩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

대지의 어머니, 모노라를 느끼고, 자연 속의 모든 것을 형제 자매로 가지는 삶..

등등....

 

말로는 쉽지만.. 실제의 삶에서 체득하기는 어려운 것들을..

작은 나무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하며.. 배우고 느끼고 성장한다.

 

 

이 책의 원 제목은 [The Education of Little Tree]다.

그런데.. 한국어 제목이 책의 정서와 더 잘 맞는 것 같다.

 

책의 제목처럼.. 책을 읽는 내내.. 무언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 지는 것 같고..

덜 가지고.. 더 많이 이해고 사랑하려는 인디언의 삶의 지혜를 나도 조금은 배우게 된다.

 

먹고 사는데.. 찌들어.. 사는 것이 너무 팍팍할 때.. 도대체 나는 무얼 하고 있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 때,

나는 가끔.. 이 꼬마.. 작은 나무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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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원 2014-12-21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Native American - Amazing Grace (in cherokee)
: 체로키 애국가 1

유우내애이이 라앙나앙 이이유우왜애지이 니이가아 구우여엉대애이이
: 유내이랑낭 이유왜지 니가 구영대이
; 유내(오직 냇물)이 랑낭(즐거운 화랑이라) 이유왜지(?)
니가(사람이) 구영대이(언덕을 맞이하게 돼)

나악워언조오서언 위이유우로오세애이 니이가아 우우여엉보옹나앙
: 낙원조선 위유로세 니가 구영복낭
; 낙원조선 위유(위에 있음이)로세
니가(사람이) 구영(언덕을 맞이한) 봉낭(복된 화랑)
 
가아세애이 로오이이 우우내애치이리이 이이유우로오래애 애이나아
: 가세로이 우내치리 이유로래 애이나
; 가세로이(가쪽=바깥쪽으로) 우내치리(치우께서 안에서 다스리시니)
이유로래(이런이유 때문이래) 애이나(애가 태어나)
 
자아비이내애려어 치이유우질리이 우우여어엉 내애이이우우 래애여엉
: 자비내려 치유진리 우영 내이우 래영
; 자비내려 치유(다스림이 있으니) 진리(로다)
우영(치우를 맞이해라) 내이우(내가 치우=내가 치우의 자손이로세)
래영(오시니 맞아라)

왜애이일로오 니이가아 라알리이 소오리이 자아유우 조옹허엉 이이유우우
: 왜일로 니가 랄리소리 자유종헝 이유
; 왜일로(무슨일로) 니가(사람이) 랄리(랄라리=날라리=태평소)
소리(를 듣니?) 자유(롭게) 종헝(종횡=돌아 다니는) 이유(로세)
니이가아 기이러언 뢰애지이소오리이 아아니이? 대애이일로오 니이가아
: 니가 기런 뢰지소리 아니 대일로 니가
니가(사람이) 기런(그런) 뢰지(벼락의) 소리 아니(?) 대(큰)일로
니가(사람이 아니?)
 
우우나앙따앙지이 야아메애이이로오 조오저언자앙여엉 이이리이
: 우낭땅지 야메이로 조전장영이리
; 우낭(치우 화랑) 땅지(땅의) 야메이로(들과 산으로)
조전장영이리(조각품들이 길이 빛나리)
 
조오시어언나악워언 이이뤄어지이여어 조오히이 와안메애이이대애지이
: 조시언낙원 이뤄지여 조히 완메이대지
; 조시언(좆이 얼운=남근숭배사상=제일로 좋은)낙원 이뤄지여(이루어져)
조히(좋게) 완메이대지(모두=한 산이 돼지)
 
유우메애이이 라앙나앙 이이유우왜애지이 니이가아 구우여엉대애이이
: 유메이랑낭 이유왜지 니가 구영대이
유메(오직 산)이 랑낭(즐거운 화랑) 이유왜지(?)
니가(사람이) 구영대이(언덕을 맞이하게 돼)
 
나악워언조오서언 위이유우로오세애이 니이가아 구우여엉보옹나앙
: 낙원조선 위유로세 니가 구영봉낭
낙원조선 위유(위에 있음이)로세
니가(사람이) 구영(언덕을 맞이한) 봉낭(복된 화랑)

Native American - Amazing Grace (in cherokee)2
: 체로키 애민가 2

우우내애 라아나아 이이유우왜애지이 니이가아 구우여어해애이이
: 우내 라나 이유왜지 니가 구여해이
; 우내(온세상=치우 안) 라나(살고 태어나니) 이유(가) 왜지(?)
니가(사람이) 구여해이(거저 줘라)

나악워어조오여어 위이유우로오세애 니이가아 구우여어해애이이
: 낙워 조여 위유로세 니가 구여해이
; 낙워(즐거이) 조여(줘라) 위유(위에 있음이)로세
니가(사람이) 구여해이(거저 줘라)



저작권등록 되어있고요, 비상업목적으로 마음껏 쓰십시오.


이선원입니다. 010-2494-5484

 
대머리 여가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3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오세곤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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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명작이나 고전이라고 하는 책들은 대부분 일단 제목이 친숙해서..

책을 읽기도 전에 왠지 책의 내용을 다 아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클릭 몇 번으로 원하는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세상이기에,

낯선 제목의 책이라도 클릭 몇 번 하면 대강의 줄거리나 평단의 평가, 연관된 이야기 등등이 줄줄이 찾아낼 수 있고, 때로는 그런 정보를 취하다 보면

막상 진짜로 그 책을 읽을 때는, 책이 시시하게 느껴지거나, 이미 읽은 책 같아서, 읽고 싶지 않아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제목 [대머리 여가수] 자체는 굉장히 익숙했다. 또한 책의 저자라는 이오네스코 역시 입에 착 붙는 맛이 있었다.

그런데..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사실상 떠오르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책의 두께가 상대적으로 얇았기 때문에.. 부담감 없이.. 잠 자리에 들기 전에 쉽게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물론 그 기대는 채 세 장을 넘기기 전에.. 박살나 버렸다.

 

뭐야? 이거??

당혹스러움...

그랬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느꼈던 것은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다.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인지.. 어디서.. 감동 받고 어디서.. 생각을 멈추어야 하는 지.. 알지 못했다.

 

책의 뒷편에 실린 해설을 읽고 나서야,

[고도를 기다리며]와  마찬가지지의 부조리극의 대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해설에 따르면 부조리극의 특성은 인간들의 막연하고 근거없는 집단적인 믿음 (조리) 앞에 그들이 믿으려 하지 않는 적나라한 현실 (부조리)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오네스코는 이 작품에서 언어의 부조리.. 언어를 통한 의사 소통의 어려움, 언어의 폭력성, 언어의 허구성과 공허성을 드러낸다고 한다.

뭐, 그런 의미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 해설을 읽고 나서야 조금 납득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작품이 별로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느다.

 

전문가의 해석 내지는 의미 부여가 필요한 어려운 이야기보다는 보다 명확한 플롯과 사건이 있는 더 이전 시대의 작품들이 더 끌린다.

 

사는 것이 마냥 쉽지 많은 않은 세상에서.. 이젠 책을 읽을 때도 .. 무언가 내포적인 상징과 의미를 끊임없이 찾아내고.. 해석해야 하는 게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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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둑 1
마커스 주삭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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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책을 단 한권만  꼽으라고 하면,

나는 아마 어느 책도 선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질문을 조금 한정해서, 최근 몇 년 간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아하는 책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이 책 [책 도둑]을 꼽고 싶다!

 

이 책의 화자는 사신 (?), 죽은 이의 영혼을 운반하는 일을 하는 존재다.

그는 죽어버린 사람들의 영혼을 나르면서,

세 번에 걸쳐 이 소녀를 목격하고, 마지막 목격에서 소녀가 직접 쓴 소녀의 이야기 [책도둑]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 슬프지만, 아름다운 책 도둑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리젤 메밍거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훔친 책과 선물 받은 책, 자신이 쓴 책을 포함한 열 권 남짓의 책에 얽힌 이야기!

 

1939년 독일의 무섭게 추운 겨울 어느 날 ,

리젤과 남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기차를 타고 자신들을 맡아줄 양부모를 찾아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도중에, 리젤의 남동생이 기차 안에서 죽는다.

얼어붙은 땅에 동생을 묻고, 다시 기차를 타고 떠나올 때

리젤은 동생 대신, 거기에 떨어진  한 권의 책을 훔친다. (리젤은 아직 글을 읽을 줄 모른다.)

 

[무덤 파는 이를 위한 안내서]

 

어머니는 리젤을 뮌헨의 힘멜 (하늘이라는 뜻이란다) 거리의 가난한 후버만 부부에게 맡기고 사라진다. (아마 아버지처럼 어디론가 끌려 갔을 테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스 후버만과 로자 후버만,

약간의 양육 수당을 벌고자, 리젤을 양녀로 맞은 사람들..

 

한스 후버만은 가난한 칠장이(페인트공?)였다.

한스는 나치 치하, 광기로 치닫는 독일 내에서, 당시 전국민의 90%가 지지하는 퓌러 (나는 이게 히틀러의 이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도자라는 뜻이란다) 를 지지하지 않는 나머지 10%에 속한,

그래서, 점점 사는 것이 힘들어져도,

말없이 그 고통을 감수하는 사람이었고,

로자 후버만은 그런 한스 대신, 부유한 사람들에게 세탁일을 해 주면서, 부족한 돈을 벌며 살고 있었다.

 

말끝마다 폭포수처럼 터져 나오는 욕을 입에 달고 살고, 때로는 무지막지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로자에 비해,

한스 후버만은 너무 조용한 사람이었으나, 아코디언을 잘 켤 줄 알았고, 겁먹은 아이를 달래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이었다.

그 두 사람이 이제 리젤의 엄마, 아빠였다.

 

밤마다, 악몽에서 깨어나 비명을 질러대는 아이를 위해, 몇 주 동안이나 곁에 아무 말 없이 함께 앉아 주며, 아이가 다시 잠들 때까지 기다려 주는 사람..

그리고, 리젤이 밤마다 꿈에 나타나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 동생의 얼굴을 이야기 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리고 동생 대신 훔친 책을 보여 주었을 때,

그 책 제목이 

[무덤 파는 이를 위한 안내서] 이었음에도,

리젤이 원하는 대로 그 책을 밤마다 떠듬거리며 읽어주다, 직접 지하실 벽에 페이트로 칠판을 만들어 가면서, 리젤에게 글을 가르쳐 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한스였다.

 

그들과 살면서 리젤은 점차 생활의 안정을 느낀다.

그리고 이웃에 사는 루디라는 친구도 사귀고,

가난하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간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당국이 불온 서적이라고 분류한 책들과 선전물들을 태우던 날,

소녀는 두번째로 [어깨 으쓱거리기]라는 책을 불길 속에서 훔친다.

그리고, 그 장면은

로자 후버만의 주된 고객이자 로자 후버만이 늘쌍 게으름뱅이라 경멸해 마지않는 시장 부인에게 고스란히 목격한다.

 

항상 보풀같은 머리를 하고, 마치 아들이 1차 대전에서 죽은 뒤.. 유령처럼 로자에게 세탁물을 건네던 시장 부인 (일자 헤르만)은

책으로 가득찬 자신의 서재를 리젤에게 개방한다.

 

그러다가,

일이 생긴다.

 

예전에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한스 후버만은 전장에 끌려 갔었고, 거기서 한스에게 아코디언 연주하는 법을 가르쳐 준 에릭 판덴부르크라는 유태인 덕분에 가까스로 죽음의 신을 피했다.

 

거의 이십여년이 지나서,

유태인 에릭 판덴부르크의 아들, 막스 판덴부르크가 한스가 20여년 전에 에릭의 부인에게 주었던 주소를 들고, 초라한 몰골로 두려움에 떨며 힘멜가 33번지로 찾아 온다.

 

한스는 막스를 자기 집 지하실에 숨겨 준다.

평소라면 온갖 욕설을 다 퍼부었을 로자도, 말 없이, 막스에게 스프를 건네 주고,

한스는 리젤에게,

한스가 리젤이 책 도둑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처럼, 리젤 역시 막스가 자기 집 지하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달라고,

리젤이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건 하면..

한스와 로자가 리젤의 부모처럼 어딘가로 끌려가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될 거라고 한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이들 부부에게 큰 위험이자 짐인지 알면서도, 염치 없이 살기 위해 이들 부부를 찾아 왔다는 사실,

그리고, 이미 그 훨씬 이전에,

살기 위해, 자신의 가족을 버리고, 자신만 독일인 친구 발터 쿠글러의 도움으로 은신처로 숨어들었었다는 사실 때문에..

온 몸이 두려움과 책망과 수치로 뒤덮여 한스의 집 지하실에 살게 된 막스에게

어느 날 그 집의 소녀가,

'아저씨 머리가 깃털 같아요!'라고 말해 준다. 소녀의 말에  막스는 몇 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이 벌레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둘은 밤마다, 악몽을 꾼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 놓다가 점점.. 친구가 되어 간다.

 

그러면서 소녀의 삶은 집 안에서의 삶과 집 밖에의 삶으로 이분화 되었다.

집안에서 소녀는 막스의 친구였다.

추운 지하실에서 지내던 막스가 자신의 침대에서 죽어갈 때, 그의 머리 맡에 앉아, 자신이 가진 몇 권 안되는 책을 계속 읽어준 사람은 리젤이었다. 그리고 밖에서 솔방울, 깃털, 구름, 사탕 껍데기 같은 선물을 가져와 막스의 머리 맡에 놓아준 이도 리젤이었다.

 

막스가,

죽을 고비에서 벗어나, 다시 살게 되었을 때,

막스는 리젤에게,

기차안에서 자신이 무사히 한스네 집으로 올 수 있도록 위장막이 되어 주며,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었던 마인캄프 (히틀러가 쓴 책 [나의 투쟁]?) 책 지면을 뜯어 그 위에 페인트를 칠하고

열 페이지 조금 넘는 [굽어보는 사람]이라는 책을 붓으로 직접 그려서 리젤에게 선물한다.

 

평생 자신을 굽어 보는 사람들을 두려워 했던 ,

그러나, 이제, 자신을 굽어 보고 자신의 머리카락이 깃털 같다고 말해준 소녀를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게 된 한 사내의 이야기,

막스 자신과 리젤의 이야기였다.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사는 것이 점점 더 팍팍해졌고, 마지막으로 로자에게 세탁물을 주었던 시장 부인마저, 더이상 일거리를 주지 않게 되던 날,

리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욕을 다 시장 부인에게 퍼 부어 주고도,

분이 풀리지 않자, 그 집 서재에 들어가, 책을 훔친다.

 

훔친 책을 헤지도록 읽고 난 뒤에는 다시, 그 서재에 들어가 두 번째의 책을 훔치고.. 다시.. 세번째의 책을 훔치고,

그러던 어느 날..

서재 창문에 세워 놓은 사전 한권,

그리고 그 안에 쓰여진 편지,

 

'여전히 나는 너의 친구란다!'

 

유태인 박해가 극에 달하던 어느 날, 거리를 행진하는 유태인 노인에게 한 조각의 빵을 건네 준 한스로 인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이들의 생활이 파탄나 버렸다.

유태인의 친구로 낙인 찍혀 자신의 집에 언제든 게쉬타포가 들이닥칠 수 있다고 생각한 한스는 어쩔 수 없이 며칠 동안만 막스을 바깥으로 내 보내려 한다.

그러나, 수색은 없었고, 막스는 그 동안으로도 너무 고마웠다는 편지 한 장을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이야기의 마지막 즈음에,

공습으로 인해 힘멜 거리가 폐허가 되고,

리젤이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다 사라졌다.

리젤이 이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아버지 한스 후버만도, 그리고, 욕을 입에 달고 살았고 키가 150cm 조금 넘을까 말까한, 옷장처럼 생긴 거친 여자였지만,  이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엄마 로자 후버만도,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이자, 첫사랑인 루디도

그 공습으로 죽었다.

 

그러나,

더이상 폐를 끼칠 수 없다면서,

떠나 버린 막스가 쓰던 지하실에서, 자신의 이야기 [책 도둑]을 쓰던 소녀 리젤은 살아 남았다.

 

그리고,

1945년 10월 단정한 차림의 막스가 리젤을 찾아왔을 때..

나는 정말 많이 울었다.

 

아니,

책을 읽으면서.. 내내  참 많이 울었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이야기들..

극한으로 몰리게 되면,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해 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아마도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한스 후버만이나, 로자 후부만 같은 따뜻한 마음은 가진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직도..

나는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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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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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80, 90, 그리고 2000년대 노래들을 자주 듣게 된다.

어떤 노래들은 지금으로부터 30년전 노래들인데도, 이상하게 그 노래가 촌스럽다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아련한 향수 같은 것을 불러 일으킨다.

요즈음의 보여지는 것 위주의 음악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것이

어쩌면 더이상 내가 젊지 않다는 것에 대한 반증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가사를 음미하면서 들을 수 있는 노래들이 좋다.

 

좋은 노래나 좋은 책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자신이 태어난 시대의 감성을 충실하게 반영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그 시대를 넘어서는 힘이 있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나에게는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좋은 소설이다.

 

언제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내용도 가물가물.. 그저 한 꼬마와 그 꼬마를 돌봐 주던 어느 여자의 이야기라는 것과 그냥 막연히 좋았던 것 같은 느낌만...

아무리 찾아도 책을 찾을 수가 없어서.. 얼마전에 다시 샀고, 주말 내내 다시 읽었다.

 

또래 보다 조숙한, 그리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10살 소년 모모라 불리는 소년이 자신을 돌보아 주던 로자 아주머니와 이별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이 책의 주된 줄거리이다.

 

로자 아주머니는 어쩌면 한때는 예뻤을 수도 있는, 그러나 지금은 늙고 뚱뚱한 유태인 여자였다.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아이의 부모들로부터 돈을 받고 임시로 아이를 양육해 주면서 살아가고 있었고, 화자인 모모는 그녀가 가장 오랫동안 데리고 있는 아이였다.

 

모모의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모모는 로자 아주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열 살이라고 하지만, 열 살이라고 그대로 믿기에는 너무 조숙한 아이 모모에게는  로자 아주머니가 가족의 모든 것이기이전에, 삶의 전부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모의 눈에 비친 로자 아줌마의 모습이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거나 하지는 않다.

7층짜리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을 힘들어 하는 늙고 지친, 그리고 돈 때문에 아들을 돌보는 일을 하지만, 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아이들까지도 차마 내 보내지 못하고 끼고 사는,

때때로 아유슈비츠의 환영에 시달리고, 말 듣지 않는 아이들에게 거친 욕설을 퍼 붓다가도 울음을 터뜨리는 히스테릭한 병든 여인일 뿐이다.

 

나는 누구일까?

내 부모는 어떤 사람일까? 왜 내 부모는 나를 찾아오지 않는가?

왜 내 이름은 모하메드인가?

왜 아랍인인 나를 유태인 여자에게 양육을 맡겼을까? 내가 아랍인이 맞기는 한 걸까?

어린 모모에게는 궁금한 것이 많지만,

로자 아주머니에게 이런 것들에 대해 물어볼 때면, 로자 아주머니는 마치 모모가 당장이라도 자신을 버리고 떠나갈 것처럼 서럽게 울어대는 통에, 어떤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녀와 함께 산다.

그리고 그녀가 돌보는 아이들을 돌보기도 하고, 거리를 쏘다니기도 하고, 아랫층에 하밀 할아버지 같이 경험 많고 눈이 아름다운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면서,

어찌보면 가난하지만, 또 어찌 생각해 보면 그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로자 아주머니가, 뇌일혈로 점차..

정신을 놓아가게 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녀가 병으로 인해 더이상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게 되면서.. 병들어 죽어가는 로자 아주머니를 모모가 돌봐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작 열살 (사실은 열 네살이었다. 어린 아이인 채로 자신의 품 안에서 모모를 키우고 싶었던 로자 아주머니가 모모의 나이를 속였다)자리 아이가 병들어 죽어가는 여인을 돌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건물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간신히 간신히.. 모모와 로자 아줌마는 생활을 꾸려 나간다.

 

그러나,

그것도 서서히 한계에 봉착해 가고 있었다.

병원에서 수 많은 기계에 몸을 연결한 채.. 무의미한 삶을 영위하고 싶어하지 않는 로자 아주머니의 마지막을 지켜 주기 위해.. 모모는 모두에게 로자 아줌마의 고향인 이스라엘로 가게 된다고 속이고,

평소에 로자 아주머니가 악몽에 시달릴 때면, 숨어들곤 하던, 아무도 모르는 그녀 만의 안식처

지하실로.. 로자 아주머니를 데려 간다..

그리고.. 그 곳에서.. 숨이 끊어진 로자 아주머니와.. 3주 동안 더 살다 사람들에게 구출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난 조금 울었다.

 

책에서 하밀 할아버지가 모모에게 이야기 해 준 것처럼..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없이 살아갈 수가 없었던 아이 모모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법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숨이 끊어져 버린 로자 아줌마를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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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뒷편에 부록처럼..

로맹가리가 왜 자신의 이름을 속이고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이 책을 썼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젊은 시절, 이미 꽤 성공적인 작가의 삶을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더이상 누구도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읽지 않고 과거의 자신의 작품들로 자신을 한정시켜 버리는,

말하자만, 고착화된 이미지가 작가로서의 자기 자신을 대체해버리는 것, 혹은 그런 사람들에 대한 저항 ? 통쾌한 반전?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

 

로맹가리는 그 것을 에밀 아자르 필명으로 성취해 내었다.

[자기 앞의 생]이 출간되고, 로맹 가리가 자살하면서, 유서에서 자신이 진짜 에밀 아자르라고 밝히기 전까지.. 로맹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동일인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예전에 로맹 가리의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도, 동일인이 쓴 것이라고 하기에는 풍기는 분위기가 참 많이 달랐다.

그런 타고난 재능이 조금은 부럽다.

 

누구나, 한번쯤은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 새롭게 시작하는 모습을 꿈꾸지만,

그걸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다 이룬 뒤, 로맹가리는 더 이상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으니,

차라리 그런 능력이 없는 우리 같은  평번한 삶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암튼..

다시 읽어도.. 여전히 눈물나게 좋은.. 아름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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