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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최대의 경제 사기극, 세대전쟁
박종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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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의회 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어느 날..

지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특정 연령 이상은 나라를 위해 투표권을 박탈해야 한다!"

 

이미 수년 전에 모 정치인이 야심차게 비슷한 주장을 했다가 (그 상한선이 65세였는지.. 70세였는지는 이미 기억나지 않는다) 그 말 때문에.. 노년 유권자들에게 완전히 미운 털이 박혀서.. 결국 선거에서도 대패했고,

본인의 정치 인생도.. 그 뒤로 주욱 내리막을 걷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야권이었던 그는.. 주로 여권 지지층인 노년층의 지나치게 높은 투표율이 자신의 표를 갉아먹는다고 생각했었겠지만, 

뿌리 깊게.. 노인에 대한 공경 문화.. (속 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겉으로는.. 노인을 살아온 세월만큼의 연륜과 지혜를 지닌 존재로 존중하는 문화)가 여전한 우리 사회에서..

드러내 놓고, 노인을 무시하는 듯한 그의 발언이 분노를 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 지인은 표를 의식해야 하는 사람도.. 특정 정당의 지지자도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인 그에게.. 왜 그런 생각을 하는 지 물었었다.

 

그의 답은 지극히 간단했다.

선거에서 뽑힌 사람이 만드는 미래는 노년층 보다는 중장년층과, 청소년층, 그리고.. 아동층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니..

노년층의 표는 청소년층에게 양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논리였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않았으나,

청소년의 미래가.. 그들 자신의 손이 아니라, 기성 세대.. 우리나.. 우리 윗 세대에 의해 너무 많은 부분이 결정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이 공감했었다.

 

그리고

88세 대대니.. 버림 받은 세대니 하는 말들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청년 세대가 살아가야 하는 삶이.. 더이상.. 희망적이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왜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아니, 전 세계적으로.. 왜 더이상 젊은 이들에게 희망이 거의 없는 지에 대해..

[세대 전쟁]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을 통해..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고령화 사회.. 성장이 멈춘 사회에서.. 기성 세대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청년 세대를 착취하는 구조가 전세계적으로 만연해 있단 얘기다.

 

그 실례의 하나만 들자면..

국민 연금이나, 기초 노령 연금 같은 것도..

본인이 기여한 것에 비해 훨씬 더 많이 받는 구조로 되어 있고, 고령화 사회가 심화됨에 따라, 지급해야 할 연금액은 엄청나게 증가하게 되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청년 세대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노년층은 적게 내도 많이 돌려 받을 수 있지만, 청년층들은 많이 부담해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거의 없게 된다..

어찌 보면... 더 없는 사람의 돈을 걷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과 같은 일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노년층에 대한 복지 혜택은 점점 강화하면서..

정작 앞으로 우리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청년층이나.. 그 아래 세대에 대한 투자에는 지나치게 인색하다는 얘기다.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노년층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치인을 선택할 수 있는 강력한 유권자 집단이자, 우리 사회의 중요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선거철만 되면 온갖 선심성 공약이 남발된다.

그 혜택은 주로.. 기성 세대가 받지만, 그 댓가는 고스란히 미래 세대로 전가된다.

각종 남발한 선심성 공약이나 복지 비용이 그대로 나라의 빚으로 남아.. 미래 세대의 삶을 저당잡게 된다.

갈수록 노년층에 대한 복지 비용이 늘어나는데 비해, 미래 세대라 할 수 있는 영유아, 아동, 청소년, 청년층에 대한 복지는 제자리이거나, 뒷걸음질 친다.

그러나, 그런 사회는 결코.. 지속 가능한 사회가 아니다.

이태백이라는 말처럼.. 20대의 태반이 비 정규직을 전전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미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청년들의 미래가 암울한 나라에서... 기성 세대들이 언제까지.. 홀로 안전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늘어가는 노년층을 부양해야 할 청년층이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서..

청년층의 일자리마저 부실해져가는 현 상황 때문에..

이미 세계 곳곳에서는 세대간 불신과 격차로 인한 혼란이.. 서서히.. 부각되고 있다고 한다.

 

경제 기자로서의 다양한 현장 경험을 통해..

이미 이러한 세대간의 불화와 불신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여러 나라들의 예를 통해..

지금

세대간 불균형의 문제를 바로 잡지 않으면..

더이상 우리 나라에 밝은 미래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여러 자료를 통해.. 조목조목 밝힌다.

 

미래 세대에 대한 복지는

비용이 아니라, 그것이야 말로 가장 효과적인 투자이자, 성장 동력임을 저자는 강변하지만,

그런 저자의 견해에 백번 공감하기에..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가슴이 답답하다..

 

지속 가능한 사회..

공존 가능한 사회..

우리의 힘으로 그런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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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원 인생 -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안수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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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시간당 최저 임금을 오천원으로 인상하려다가 정부 여당의 반대로 사천 몇 백원 선으로 맞췄다는 기사를 얼핏 본 것 같다. 몇 백원 더 올려 준다고 해서 기업 하는 사람들이 크게 난리 나는 것도 아닐텐데.. 참 너무들 한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 들어 워킹 푸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말 그대로 일을 하기는 하는데,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가 여태 세뇌 되어온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단어이다. 열심히 성설하게, 근면하게 일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고, 아니 최소한 큰 부자는 못되어도 자기 식구 건사할 정도는 먹고 살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머리 속 깊이 박혀 있다.  

옛말에도 "소부는 재근하고 대부는 재천이라. 小富在勤 大富在天: 큰 부자는 하늘의 뜻에 달려 있고 작은 부자는 근면한 데 있다 "는 말이 있다. 또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던 시대에 청춘을 보내셨던 우리들의 아버지 시대에는 이말이 어느 정도는 들어 맞았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니.. 더 이상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4천원 인생은 한겨레 21 사회부 기자 4인의 위장 취업기를 담고 있다. 힘겨운 노동 조건에 신음하는 우리 사회의 취약 계층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고발하고자 기획된 대로, 4인의 기자는 각각 식당 아줌마로, 마트 임시직 사원으로, 가구 공장의 노동자로, 공장 조립 라인의 단순 노동자로 대략 한달을 시간급 4천원 남짓을 받으며 다녔다.  

어쨌는 기자라는 번듯한 직업을 가진 그들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 살아낸 현실의 이야기는 결코 녹녹하지 않다. 거의 11-12 시간의 고강도 노동을 하더라도 그들이 손에 쥐는 것은 최저 생계비가 될까말까  하고, 그 돈이라도 받지 않으면 먹고 살기 막막해 지고, 달리 갈 곳도 없고 설사 가더라도 지금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어떻게든 버티며 일한다. 일하면 할수록 몸은 더 망가지고, 생활은 쪼들리고 희망은 부서지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나마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조차 없기에 그냥 하루 하루 버텨내듯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더 나은 조건의 직장을 구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이 먹었거나, 외국인 불법 체류자의 신분이거나, 경력이 부족하거나, 필요한 만큼의 교육과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곳에 취업한 기자들이 하루만에 , 자신이 기자라서 다행이라고.. 한달만 버티면 다시 자신은 기자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수 있다면서 간신히 버텨 내는 삶을 그들은 벌써 수년에서 수십년째 살고 있다. 발에 물집이 잡이고 손이 굳고, 온몸이 맞은 것처럼 아프고 소음 때문에 귀가 멍멍해지고 하루 종일 마신 분진에 가슴이 막혀도.. 또 자신을 아랫사람 취급하고 무시하는 사용주나 손님으로 인해 모멸감이니 설사 느껴진다고 해도 그곳에서 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참는다. 달리 방법이 없기에..   

안타까운 일은 그런 가난이 어느 사이엔가 대물림 되는 구조로 우리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처럼 지독히 가난한 부모 밑에 태어났다고 해서 그 자식까지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가난한 부모 밑에서 적절하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 자식은 원치 않았던 자신의 부모의 삶을 그대로 답습한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원천 봉쇄되 버리는 것이다.  

 보수 좋고 안정적인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그런 자리는 4년제 대학물이라도 먹고 어느 정도 스펙을 갖춘(그러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이 투입되어야 하는지)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그러니 가난한 부모 밑에서 가난하게 성장해서 자신의 계발할 기회를 별로 얻지 못한 자식들은 자신들의 부모처럼 최저 임금을 받으며 파견 용역을 전전하거나 시급 사오천원짜리 아르바이트로 연명하게 된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은 알겠는데.. 저자들의 말처럼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점점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상.. 정부의 개입이 없다면, 기업들은 너도 나도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더 쥐어짜게 된다. 그래야 무한 경쟁 속에서 좀더 나은 위치를 선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다보니 그 속에 속해있는 사람의 인권이나 생존권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너 아니어도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은 많다는 의식이 어느 곳에나 팽배해 있다. 그러니.. 사람이 귀한 것이 아니고, 돈이 귀할 뿐이다.   

물론 사회 취약 계층끼리 연대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수 밖에 없겠지만, 그들은 당장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바쁘다. 이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줄 사람이 없기에..이 사람들을 위한 정책은 아직 요원하다. 그런데, 저들이 꼭 나와 상관없는 존재들인가? 당장 우리 오빠만 해도.. 비정규직을 전전하고 있다.  또 누구라도 이 험악한 경쟁 사회에서 한발 삐끗하면.. (갑작스러운 가족 누군가의 질병이나 사업 실패, 실직 혹은 요즈음 많이 회자되는 하우스 푸어 같이 대출 과다)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덫에 빠진 것처럼 삶의 모든 수준이 추락하게 된다. 그러니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이런 문제의식을 갖는 자체가 문제 해결을 위한 첫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최소한 이땅에서만이라도 미래를 위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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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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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집회가 열렸던 게 벌써 2년이 넘었다. 그때, 우리 국민들은 36개월 이상의, 광우병 위험물질이 들어 있을 수도 있는 소내장의 수입까지를 포함한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 결과에 반발해서 하나 둘 씩 서울 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왔었다. 그 과정에서 현 정권과 국민들은 정면으로 충돌했었고 그 뒤4대강 문제, 세종시 문제, 천안함 사태 등등 숱한 문제들에 있어서 대립과 소통 부재가 계속 되고 있다.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점에서 이 책의 제목을 본 것이..  광우병 때문에 국민들의 불안감이 극심해져 있을 때라, 광우병에 대한 책이나, 쇠고기를 먹는것과 관련된 책들이 많이 나오던 시절이라, 이 책 역시도 출판사가 이번 기회에 한 몫 보자는 식으로 펴낸 책이라고 생각해서 아예 읽지 않았었다.

그런데 책의 저자가 제레미 리프킨이란다!! [소유의 종말]과 [엔트로피]를 쓴 사람이다. 앞으로의 사회는 누가 무엇을 소유하는가보다 누가 무엇에 접속할 권한을 가졌는가가 더 중요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유의 종말]은 현대 사회에 대한 꽤 예리한 통찰을 담고 있고 있었다. 또 엔트로피란 책을 통해서.. 과학 발전에 따라 더 효율적인 에너지를 사용해 온 것이 아니라, 더이상 손쉽게 에너지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수고와 노력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에너지원을 찾게 됨을 설명한 내용에서는 내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내용이라 꽤 흥미로웠었다.  이 책에서는 어떤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까? 순전히 저자에 대한 믿음 때문에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의 앞부분에서 부터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육식, 특히 쇠고기를 대량으로 소비하는 사회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소득이 증가한 사람들은 너도 나도 쇠고기 소비를 즐긴다. 그 수요에 맞추기 위해(? 어쩌면 이 말은 거짓인지도 모르겠다. 이윤 추구를 위한 대량 생산과 수요 유발이 더 먼저일 수도 있으니까) 대량으로 축산 단지를 운영하고,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듯 정육 가공 공장에서 포장을 한다. 그 과정에서 예전에는 인간이 먹을 곡물을 생산하던 곳에서 이제는 소를 위한 사료작물을 재배한다. 세계 인구 중 10억 이상이 굶주리고 있는 이 지구에서, 오히려 인간들이 식용으로 키우는 소들은 배부르게 먹는 (?) 아이러니가 생겨나게 된다. 가난한 농민들이 자신의 땅에서 쫓겨 나고,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의 열대 우림은 나날이 더 훼손된다.  

소들이 먹는 풀들로 가득찬 목초지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황무지나 사막처럼 바뀌어 버린다. 소들이 땅을 밟아 대어서 땅이 지나치게 다져지기 때문에 미생물이 살기 힘들어지고 생물 다양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환경 변화에 취약해져서 비바람에도 흙이 쉽게 쓸려가버린다.  갈수록 지구촌 곳곳이 사막화되어 가는 것이 소의 대량 방목과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다.  

그 뿐만이 아니다. 지방이 많은 맛 좋은 쇠고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대부분의 소는 제 몸하나 보다 더 작은 비좁은 축사에서 비인간적인(? 소한테 인간적이란 말은 좀 어폐가 있을까?) 방식으로 곡물과 온갖 잡다한 쓰레기(다른 동물의 폐기물, 시멘트, 등등)를 먹이고, 항생제와 성장 호르몬을 마구 투여하며 살충제를 대량 살포해 가면서 키운다. 도축되는 과정은 더 끔찍하다. 전체 물량의 약 3%만이 검사 대상이고 나머지 소들은 질병 유무와 상관없이 마구 도축되어 쪼개지고 부위별로 소포장 상태로 만들어져 나온다.  그 과정에서 오염물질이나 간이나 조직에 농양 같은 것들도 마구 한데 섞여 버린다. 마치 자동차의 조립 라인처럼 비숙련 저임금의 이민 노동자들이 소를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에 맞춰 소를 해체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오는 폐기물은 다시 소의 사료로 가공되고, 해체된 소는 부위별로 그럴듯하게 소포장되어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한때 인간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자 친구였던 소가 생명체가 아니라, 이윤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자본주의의 상품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지구 곳곳이 환경 재난에 신음하고 있고, 가난한 제 3세계의 농민들은 자신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그 반대로 부유한 나라의 국민들은 각종 성인병으로 고통받는다.  또한 쇠고기를 소비할 여력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차별, 또 대량으로 쇠를 양육하기 위해 저질러 졌던 버팔로 대학살과 인디언들에 대한 억압.. 등등 수없이 많은 문제를 양산하는 것이 바로 쇠고기 소비와 연관이 있다.  

쇠고기를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근절되지 않는다면 이 모든 문제들은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쇠고기를 소비하는 것에 대해 차가운 범죄(절도나 강간, 살인처럼 당장 눈앞에서 저질러지는 것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는 지구 환경을 파괴하고, 지구촌의 배고픈 사람들에게서 먹을 것을 빼앗고, 살아있는 소로부터 생명체의 존엄을 말살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을 소외시키는 종합 범죄행위)라고 성토한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경제, 환경, 역사, 사회의 다양한 측면에서 쇠고기 소비가 우리에게 가져온 문제점들을 낱낱히 파헤치면서 우리에게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쇠고기를 먹고 싶은가?'라고!!  

책을 다 읽고 나서 마음이 참 무겁다.. 저자의 준열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쇠고기가 제일 맛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비싸서 자주 먹지는 못하지만, 우리 땅에서 키운 한우는 괜찮지 않을까?, 어쩌다 한 번 정도는 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이 자꾸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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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3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혁명을 팝니다 - "체 게바라는 왜 스타벅스 속으로 들어갔을까?"
조지프 히스.앤드류 포터 지음, 윤미경 옮김 / 마티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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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와 체게바라.. 하나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는 미국 문화의 상징인 반면, 또 다른 한 사람은 자본주의에 반기를 들고 사회주의 가치의 실현을 위해 게릴라 투쟁을 벌였던 영원한 혁명가.. 정 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도 그게 낯설지 않다..  

왜 그럴까? 일단 자주 책 표지에 등장하는 스타벅스의 컵 자체가 익숙하다. 또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사람도 수없이 보아 왔기에, 체 게바라가 실천하고자 했던 이상과는 상관없이 그는 젊음과 저항에 대한 하나의 심볼로서 상품화되어 버렸다.  

60-70년대 미국에 히피라고 불리던 반문화 운동을 하던 일군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모든 사회 문화 자체가 체제 유지를 위한 억압의 기제라고 보았다. 학교는 체제 순응을 위한 교육 기관이고 모든 사회 문화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한 마약이니까, 당연히 기존의 문화, 관습, 가치를 거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은 공감을 샀었다.  즉 문화 전체가 이데올로기 체제에 불과하므로 문화를 송두리째 거부하는 것이 자신과 타인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란 생각이 바로 반문화의 근원이다.  

그런데, 그 반체제 운동이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대안이나 저항이 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대척점에는 사회주의가 존재했다. 물론 러시아나 동구권이 지금에 와서 거의 사회주의를 폐기처분하다시피 했지만, 만약 사회주의라는 대안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의 모습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거라는 것은 누구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사회주의라는 대안 때문에 불가피하게 자본주의는 조금씩 사회주의의 정책, 예를 들자면, 노조와의 공생 추구라던가, 소외 계층에 대한 약간의 지원, 내지는 소득 재분배의 문제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고, 자본의 억압과 착취라는 면을 조금은 완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더이상 자본주의의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반문화 운동을 사회주의를 대체한 급진 정치 사상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반문화를 이끄는 주동자들은 자신들의 반란이 급진적이며, 세뇌된 유순한 노동자에 의존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위험한 도전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을 살펴보면 언제부터인가 반문화는 자본주의 안에 완전히 포섭된 듯 보인다. 즉 자본주의 체제는 반문화의 상징들을 전유하고, 그 혁명적 내용을 완전히 비운 후에 상품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판매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상품을 생산하고 그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존재한다.애초에, 사회주의 이론에 따르면 언젠가는 과잉 생산된 물품 때문에 더이상 판매가 이루어지지 않는 시점이 오고 그러면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고 해고된 노동자들이 늘어날수록 상품은 더 팔리지 않는 악순환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는 대공황으로 간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간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결코 그런 이유로는 대공황이 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사고자 하는 물품이 모두 똑같다면 과잉 생산된 것이 더이상 팔리지 않는 시점이 오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남과 다르고자 하는,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남들보다는 특출나 보이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에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에 대한 수요와 욕망은 증가한다. 남들과 다른 물건을 소유하거나, 남과 다른 취향을 가졌다는 것이야말로 우리 가 쿨하다는 증거다.  

바로 그 점에서 자본주의와 반문화 운동은 서로를 포섭한다. 즉, 기존의 문화, 가치의 전복을 추구하는 반문화야 운동이야 말로 늘 보편화되지 않는 새로운 상품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문화의 자양분이다. 그래서, 보편화된 나이키 운동화를 캔버스 운동화가 대체해 버리고, 우아한 발레 대신에 비보이들의 거친 몸짓이 주류 문화로 편입된다.  나만 해도 작년엔가 일금 오만원인가를 주고 비보이 공연을 보러 간적도 있었다. 즉 반문화 운동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일반 대중과의 기호와 취향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자본주의 신상품의 보고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반문화 반란이란 사람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의안들에 쏠릴 에너지와 노력을 분산시킬 뿐만 아니라, 제도권 내에서의 점진적인 변화를 모조리 경멸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따라서 반문화 반란이란 결국 듣기에는 좋을 지 몰라도 결코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순 없다. 실제로 우리 삶을 개선시킨 것은 히피나 문화 반란자들의 선동적인 문화가 아니라,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점차적인 제도 개선을 통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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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리뷰해주세요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기자와 나눈 3일간 심층 대화
오연호 지음 / 오마이뉴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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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부터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그 사람이 죽었을 때 알 수 있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었다. 그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릴 자가 몇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이 평가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전 대통령 노무현은 헌정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진심어린 조문을 받았으니, 어떤 면에서는 한 평생을 잘(말의 본래 뜻 그대로, 가치 있고 훌륭하게) 사람일 것이다.   

도대체 노무현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의 죽음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아파했을까? 그런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이 책은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기자가 재임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던 노무현 대통령과의 했던 3일간의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평생 총 여덟 번에 걸친 만남을 통해 우리가 잘 모르는 바보 노무현, 정치가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정치학자 노무현, 사상가 노무현, 인간 노무현의 모습을 복원해 낸 책이다. 

 

정치 자체에 무관심 했던, 그래서 대통령 선거 때도 투표조차 안하며,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것도 내 권리라고 말했던 나는 참여 정부 내내, 대통령 노무현을 싫어했었다.  

그 정도 위치에 오르면 의례 따르기 마련인 언론의 비판에 대해 발끈해서 막말을 쏟아내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지도자로서의 포용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했고, 걸핏하면 힘들어서 못해먹겠다고 하는 그를 보면서 대통령으로서의 카리스마와 리더쉽이 모자란다고 평가했다. 뜬금없이 한미 FTA를 한다고 할 때는 자동차, 핸드폰, 컴퓨터 좀 더 팔겠다고 국민 대다수를 승자 독식의 미국식 자본주의에 제물로 바치는 미친 짓이라고 했다.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한, 그 시대적 분위기에 맞는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대통령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는 노무현, 왠지 실패만을 거듭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통령 노무현을 나는 아무 죄책감 없이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이라고 판단해 버렸다.    

그런데, 요즈음 내 섯부른 판단과 오만에 대해 많이 반성중이다. 어리석게도 보수언론의 노무현 흠짓내기에 너무 쉽게 넘어가 버린 꼴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그런 반성과 자책감에 더더욱 얼굴이 많이 달아오른다.  

대통령 노무현이 추구했던 가치, 강하고 재능있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사회가 아니라, 약자를 보듬어 안아 함께 하고자 했던 그 마음, 자신의 권위가 사정없이 무너져 내리더라도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원칙과 소신을 왜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을까.  그저 권위적으로 이끌어가는 독재 정권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에,  권력을 위임을 하되, 지배는 단호하게 거부하는성숙하고 깨어있는 시민 권력에 대한 앞선 비전을 가졌던 지도자 노무현을 나는 수용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정말 전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자기 자신의 명예나 사욕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앞날을 위해,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국민 한 사람 한사람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살았던 대통령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가치를 조금씩 깨닫게 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던, 아니, 단지 꿈만 꾼 게 아니라, 직접 행동했던(너무 앞서 있어서 제대로 이해받을 수도, 지지 받을 수도 없었지만) 노무현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우리는 보수 언론의 무자비한 비판에, 현 정권의 치졸한 술수앞에 무방비로 내 던져 버렸었다.   

노무현의 자살은 단지 전직 대통령 한 사람의 불운이 아니라, 너무 거대해진 언론 권력, 시장 권력 앞에 평범한 소시민의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의 욕구가 말살되어가는 하나의 상징이다. 단지 현 정권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거대 자본의 벽 앞에 민주, 자유, 평등이라는 인간 본연의 가치가 무시되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한 상징이다.

지금도 국회에서는 거대 언론의 미디어 장악을 위한 미디어법이 개악되려고 하고 있다.

그가 가고 나서야, 비로소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아 넣은 것은 수구 세력만이 아니라, 그에 진심을 외면했던, 혹은 아예 무관심했던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일 수도 있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그를 보내고 나서야, 한 사람의 걸출한 지도자가 이끄는 나라가 아니라, 성숙되고 깨어난 보통 시민들이 제대로 제 역할을 하는 나라에 대한 그의 이상을 위해 우리 모두 각성해야 함을 깨닫는다. 또 그를 보내고 나서야 더이상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선거를 외면하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무책임한 책임 회피임을 절감한다.  

책에 실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로 글을 끝맺고자 한다.

"노무현입니다.. ~ 중략 ~ 

저도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도 부족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납득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속았다고 생각하기가 쉽지요. 그리고 실망하고, 다음에는 세상을 불신하게 되지요. 

부족한 그대로 동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당신을 동지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이 부족했던 저희 모두를 용서하시길~~..  당신님의 뜻대로, 이제 한 사람 한사람 시민들이 각성하고 있음이 조금은 위안이 되시길~~.. 그리고 영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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