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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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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언제부터인가 딱딱한 책을 읽는 일이 아주 힘들어졌다.  긴 호흡을 가지고 읽어야 하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읽지 못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특정 주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책들이나, 실제 생활과 별 연관이 없는 인문학 책을 읽는 게 어려워졌다. 나이 먹어가면서, 혹은 사는 데 바빠 예전처럼 책을 자주 읽지 않아서 생기는 아쉬운 현상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일을 겪는 게 비단 나 뿐이 아니었다. 

이 책을 접하면서 비로소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바로 재미없는 책을 잘 읽지 못하게 되어버린 내가 이 책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바로 나 자신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흥미진진하게 책을 끝까지 쉬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점점 어려운 책, 혹은 긴 호흡을 가지고 읽어야 하는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은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에 따른 손쉬운 정보 접근성이 가지고 온 댓가라고. 빨리 빨리 정보를 검색하고 처리하는 기능은 점점 늘어가고 있지만, 침착하게 생각하고 몰입하며 책의 내용을 깊게 이해하고 사색하는 능력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멀티 태스킹이라는 말이 보편화 된 것처럼 동시에 여러 일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자주 노출됨에 따라, 뇌 자체가 순간 순간 들어오는 정보를 처리하는데 특화되어가는 나머지  긴 호흡의 독서가 힘들어지게 된다.   

인터넷에서 활자를 읽는 방식은 대개 대충 훑어보기이다. 인터넷 상의 긁일기는 대개 스크롤 바를 마구 아래 위로 내리면서 맨 앞과 맨 뒤, 중간 중간에 섞인 그림과 굵은 글씨체에나 좀 주목할 뿐 건너뛰기 식으로 읽는다. 그리고 이런 독서에 익숙해진 나머지 종이에 인쇄된 활자화된 책을 읽을 때도 나도 모르게 인터넷에서 글을 읽듯 읽고는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건너뛰곤 하는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의미의 독서의 의미와 효용은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 저기서 쓸어모은 정보들이 깊은 통찰을 제공하기보다는 단편적인 지식, 혹은 정보 조각으로 소비되고 있을 뿐이다. .  독서를 저자와의 대화라고 하는데, 요즈음의 우리들은 책을 읽으며 수없이 인터넷을 들락거리면서 모르는 것을 검색하고 이메일을 체크하며 또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 받는다. 그러니 저자와의 대화가 제대로 될 리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의 뇌 신경망의 가소성 때문이다. 마른 땅에 물이 흐를 때 처음에는 어디로든 흐를 수 있지만, 물길이 한번 생기고 나면 점점 그 물길이 고착화되는 것처럼 우리의 뇌 신경망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부분은 그 기능이 강화되는 반면, 사용하지 않는 영역은 축소되어 버린다는 얘기다.  일례로 후천적으로 실명을 하게 된 사람들의 경우, 시각 정보를 처리하던 뇌 영역이 축소되고, 그 영역에서 후각이나 촉각 정보를 처리하게 된다고 한다. 신경 세포는 한번 손상되면 영원히 재생될 수 없다는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신경세포야말로 가장 flexible하게 반응하는 세포란 이야기이다.  사람의 뇌는 가소성을 가지고 있는 대신, 한번  한번 그런 경향으로 기울어지면, 어지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는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는 현대 정보화 사회가 반대로 무가치한 쓰레기 정보 더미에서 허덕이면서 오히려 정말 필요한 정보를 간직하게 못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건 아닌가 하고 저자는 묻는다.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기에 결국 어떤 정보도 스스로 기억하거나 간직하지 않게 되고, 깊은 통찰이 필요한 순간에 단편적인 정보를 모으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우리 현대인들을 저자는 the shallows(얕은 사람들, 혹은 천박한 사람들)이라고 칭한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점점 더 가속화되어 갈 것이다.  

시간을 가지고 하는 긴 호흡의 독서, 그리고 그런 독서를 통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성장시켜 나가는 생활이 그립다. 막연히 책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이젠 독서에도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 된 것 같다. 웹 서핑에 익숙한 뇌에게 '잠시 멈추어서서 생각하기!'란 잃어버린 능력을 되살리는 길이 쉽지는 않겠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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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을 리뷰해주세요.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 - 비밀스러운 종교의 역사
에두아르 쉬레 지음, 진형준 옮김 / 사문난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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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예전부터 난 막연하게 어떤 진리가 있다면 그 진리의 본질은 하나일 거라고 생각해 왔다. 다만, 그걸 표현하는 방식과 그걸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가 오늘날의 무수한 종교와 사상을 낳게 되었을지라도, 진짜 깨달음 혹은 진리라면 무언가 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야만 한다고 믿어왔었다.. 

비밀스러운 종교의 역사라는 부제목을 갖고 있는 이 책은 어쩌면 그런 면에서 내가 찾던 책인지도 모르겠다. 19세기 프랑스 철학자이자 역사학자라는 쉬레는 바로 그런 가설에서 서양사를 추적하면서 어쩌면 신비한 깨달음, 혹은 신의 숨결을 직접 대면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흔적을 더듬어, 각기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드러난 여러 가르침들이 어쩌면 하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음을 조심스럽게 이야기 한다.  

아리안족의 이동 과정에서 나타난 람이라는 인류 최초의 스승 이야기부터, 인도의 힌두 신화의 원형이 된 크리슈나 이야기, 이집트의 헤르메스, 이스라엘의 모세, 오르페우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각각 표현 방식은 다 다르고, 그걸 받아들이는 방식도 마찬가지로 달랐지만, 그 본질적이 가르침은 아마도 하나일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정신과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선택받은 자, 그리고 그에 합당한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던 자는 아주 드물게 통과 제의를 거쳐 보다 높은 지고의 존재를 깨닫고 때로는 그 존재로부터 특별한 가르침을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그저 단 한번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보다 더 큰 영적 성장을 위한 반복되는 행위의 결과이며 현재의 삶이 전생의 삶에 의해 영향받은 것처럼 영적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생에서 초월적인 깨달음, 혹은 특별한 믿음과 가르침이 필요한데,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는 이 특별한 가르침은 람이나, 크리슈나를 통해 전승되었고, 그 뒤에는 이집트 사제단들에 의해 수천년간 계승되어 오다가, 모세와 오르페우스, 피타고라스 등등을 거쳐서 그리스와 서방 세계로 조금 더 쉬운 가르침의 형태로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그게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거진 완성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언급되던 헤르메스나, 오르페우스 이야기나 디오니소스 제의와 바캉스들 이야기 부분은 좀 혼란스러웠다. 박카스나 디오니소스나 다 술의 신 아닌가??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전령 아니었던가? 왜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이 대립하게 되는 거지? 이런 식으로 나의 얼마 안되는 지식 가지고 책 내용을 다 한번에 소화하기에는 좀 무리였다. 

다만, 예전에... 람타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의 첫머리에서 다루는 람이란 존재와 내가 접했던 람타가 비슷하게 느껴졌었고, 사물의 본질적 이치를 숫자로 파악하려고 했던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부분은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다..  

인도와 유럽을 아우르는 사상 혹은 종교의 맥과 큰 흐름을 통합하는 시도 자체는 신선했지만, 조금 내용이 난해한 듯 느껴졌다. 또 19세기 서양인이라는 한계가 있어서였겠지만, 동양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부분이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어찌 진리가 서양에서만 그 빛을 비추었을까??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는 어떤 면에서는 동양에서 더 많이 나왔을 거 같은데.. 동서양을 아우르는 깨달음, 혹은 진리의 큰 줄거리는 전혀 손대지 못하고.. 그냥 서양의 깨달음의 역사 같은 걸 마구 늘어놓는 식의 서술이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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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먹으면 왜 안되는가?>를 리뷰해주세요.
사람을 먹으면 왜 안 되는가? - 일상을 전복하는 33개의 철학 퍼즐
피터 케이브 지음, 김한영 옮김 / 마젤란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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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가 도발적이다!! 

사람을 왜 먹으면 안되는가? 그냥 안되는 거지 무슨 다른 이유가 필요하겠어 싶지만, 책을 찬찬히 읽다보면 도발적인 질문들을 통해 저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것은 우리의 사고가 과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가 하는 부분과 맞닿아 있다.  

이 책에 제시된 33가지의 철학 퍼즐을 따라가다 보면 틀림없이 논리적으로 맞는 것 같은데, 어느 순간엔가 모순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라고 알려진 이야기... 어떤 사람이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을 했을 때..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이니까, 그의 말이 계속 진실일 수가 없고, 또 그의 말이 거짓이라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거짓이니까, 결국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게 되어 버리는 모순에 직면한다.   

또 모두에게 잘 알려진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를 들어, 과연 베짱이처럼 사는 게 어리석은 일인지를 묻는다. 좀 속되게 표현하자면 짧고 굵게 즐기며 살 것인가, 가늘고 길게 안정되게 살것인가의 선택 문제에 있어서, 어느 한 쪽이 다른 쪽보다 월등히 우월하다고 평가할 만한 논리적 근거가 미약함을 말한다.  고난은 아직 오지 않았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항상 현재의 순간 밖에 없는데, 현재의 모든 소망과 행복을 희생하면서 오직 의식주를 걱정하면서 일만 하는 개미가 과연 현명한 걸까? 또 반대로 현재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흥청망청 놀다가 추운 겨울에 얼어 죽을 것 같은 고통에 빠지는 베짱이가  나중에도 자신의 지난 날을 후회하지 않을까??  또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가 동일하다고 단정지을 증거는 무엇인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려고 결정하기도 전에 무의식 상태에서 벌써 어떤 행동을 위한 신경 회로가 작동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럼 인간의 자유의지란 진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의지라 존재한다고 믿는 것인가.  

진정 옳은 선택과 행동은 가능할까?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을 체포했을 때, 그를 고문해서라도 미리 테러 계획에 대한 정보를 토설하게 만들어 대량 인명 살상을 막을 것인가, 아니면 무죄 추정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 줄 것인가, 혹, 그가 무고한 시민인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등등의 극단적인 경우에서부터 선택의 딜레마, 어떤 선택도 다 나름의 이유와 가치가 있기에 100% 옳은 선택이란 지극히 어렵다.   

등등.. 한 가지 한가지 읽어나가다 보면, 처음에는 쉽게 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은 문제도 나중에 가서는 글쎄.. 쉽게 답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고, 보는 관점에 따라, 경우에 따라, 얼마나 다양한 결론이 가능할지에 대해, 머리를 써 가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33가지 철학 퍼즐은 그런 면에서 정답이 없는 퍼즐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될 수 있는 어떤 논리의 오류와 맹점을 드러내준다.  

책을 읽고 나니 계속 오류라는 말이 머리 속을 맴돈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 자신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선택과 판단의 순간에 나와 다른 선택, 다른 결정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곱씹어 생각해 보아도 왜 저 사람이 저런 행동, 저런 결론을 내리는 지 납득할 수 없기에 그가 틀렸다고 쉽게 단정 지어버린다.  

나와 다른 사람을 "틀린" 사람으로 쉽게 단정짓기 전에, 얼마나 우리가 논리적이라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허술하고 오류 투성이인지 먼저 기억하고 다른 의견에 대한 관용을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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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꽃 백가지 1
김태정 지음 / 현암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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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조카랑 같이 산책을 나갔었다. 마침 디카를 들고 나갔기에, 조카는 연신 셔터를 눌러 대었다. 시골이라, 집집마다 조그만 텃밭에 감자며, 파며, 호박이며, 가지며, 고추 같은 것들을 심어 놓았고, 또 몇 몇 집들은 자그마한 화단에 이런 저런 꽃들을  가꾸고 있었다.  

총 천연색의 아름다운 꽃들은 내가 보기에도 참 예뻤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색감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인간이 만든 비슷해보이는 색들은 자칫하면 굉장히 촌스럽거나, 부담스러운데, 자연 속에서 만나는 꽃들의 색깔은 하나같이 어쩜 저렇게 다양하면서도 아름다운지 하면서 연신 감탄했었다.. 

그런데, 조카가 묻는다..  

"고모?? 저꽃 이름이 뭐야??"  

"......." 

많이 보던 꽃인데,  은초롱 꽃인가? 아니면 금낭화인가? 바람꽃인가? 암튼 알수가 없어서.. 그냥 "꽃!!" 이러고 말았는데, 좀 부끄러웠다. 장미나 백합이나, 튜울립, 카네이션, 프리지아 등 꽃집에서 흔하게 만나는 몇 몇 꽃을 제외하고는 이름조차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사서 읽는 중이다. 산에서 들에서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많이 본 꽃들이 책 안에 한 가득이다.  

이번 여름에 조카 데리고 다시 한번 들로 꽃구경 가야겠다.. 이번에는 이 책도 함께 들고 갈 생각이다. 꽃에 얽힌 이야기까지 덤으로 읽으면서, 꽃 이름도 공부하고 일석이조다.. 김춘수님의 시처럼.. 우리가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꽃은 꽃으로서의 의미를 더 크게 얻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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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즐거움>을 리뷰해주세요
노년의 즐거움 - 은퇴 후 30년… 그 가슴 뛰는 삶의 시작!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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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 열풍이 몰아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젊어지기 위해 숱한 화장품을 바르고, 별별 음식을 다 챙겨 먹고, 운동을 하고 옷을 차려 입고 심지어 얼굴과 몸에 칼을 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나이보다 좀 더 들어보이는 얼굴은 개개인에게는 지금 거의 저주처럼 다가오는 시대다. 그런 시대에 저자는 노인 예찬을 한다! 

내 기억 속 가장 아름다운 할머니의 모습은 머리 숱이 별로 남지 않은 흰 머리를 풀어내려, 자주색 비단끈 같은 거랑 같이 곱게 따아 내린 후 예쁘게 쪽을 만들고 낡고 투박한 은비녀를 꼽으시던 그 손놀림이다.  아련한 그리움으로, 너무 오래전 일이라, 사실 할머니 얼굴 조차도 가물가물 생각나지 않는데도, 무슨 소중한 의식마냥, 방 안에서 작은 거울 앞에서 참빗을 가져다 놓으시고 꼭 새색시 분칠하듯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머리를 땋으시던 그 풍경이 어슴프레 떠오른다.  아마 그 때의 할머니 연세가 한 일흔 중반 정도 되셨던 것 같다.  

그 시절만해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노인에 대한 존경의 문화가 많이 남아 있었다. 어디서든 한 집안의 가장 높으신 어른으로 대접을 받으셨던 같다. 할아버지 말씀은 그자체가 무슨 법처럼 감히 토를 달수 없는 지극히 높은 말씀처럼 받들어졌었고 그래서 어쩌다 할아버지가 사랑방 위 작은 벽장 속에서 어쩌다 꺼내 주시던 과자며 사탕 같은 것에 그렇게 감격했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에는 노인분들은 대부분 인생의 깊은 지혜를 간직한 존재로 여겨졌었다.  (뭐, 이제 그 시절의 할머니만큼이나 나이들어 버린 우리 엄마가 가끔 당신의 시어머니인 할머니에 대해 맺고 끊는 게 분명치 않은 양반이라, 당신이 힘드셨다는 식으로 옛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속으로는 미덥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어쨌든 할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내 놓고 할머니한테 뭐라고 하시지는 못하셨던 것 같다.)  

언제부터 나이 드는 게 무슨 저주마냥, 도망갈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쓰던 도망가고 싶은 무거운 짐이 되어 버렸을까? 

대가족 제도 하에서 노인이란 인생의 지혜와 신비를 간직한 존재이며, 또 저자의 말처럼, 어린아이와도 같은 순수함을 다시 찾은 존재였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핵가족화 되어 버린 우리 사회에서 노인이란, 어느 새 일할 능력을 상실한,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인제는 힘도, 열정도, 재능도 다 잃어버리고, 인생의 중심 무대에서 떨려나 한발 한발 죽음으로 다가서는 (?) 존재처럼 취급되기 일수다. 또 노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대부분 부정적인 것 일색이기에 모든 인간은 불가항력으로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나이를 먹게 됨에도 불구하고, 나이 먹는 것에 대해 적대적, 혹은 방어적으로 되어 버렸다.  

그런 우리의 보편적인 통념에 대고 저자는 정말 그런가를 묻는다. 노인이기에 가질 수 있는 많은 축복들, 이를 테면, 인생의 고비 고비를 넘겨오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지혜와,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민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고, 하루 하루의 소중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음을 말한다. 깊게 패인 주름과 쪼그라들어 버린 육체 안에서 비로소 성숙되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말하고 지는 노을처럼 아름다운 노인의 마음씀을 이야기한다.    

이건 청춘 예찬이 아니라, 노년 예찬이다!! 브라보!!

사고방식이 경직되어 무엇 하나 새롭게 도전하지 못하고, 그저 남의 눈에 비쳐지는 내 모습에만 신경 쓰느라 소신 있게 살지 못하고 한 술 더 떠 하루 하루 먹고 사는 데에만 급급한 내 모습이 더 노인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 안주하고 더이상 노력없이 변화 없이 머물려고 하는 그 순간부터가 어쩌면 진짜 늙기 시작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자연에 가장 가까운 삶을 살고, 정신과 인품이 완숙해지는 걸 느끼며, 꽃보다 푸른 노년을 노래하는, 하루 하루 최절정의 아름다운 인생을 즐기고 있는 저자는 결코 노인이 아니다. 우리보다 더 푸른 청춘이다!!

저자와 같이 은퇴 이후에 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롭고 용감한 노장 어르신들께 당신들의 그 힘찬 용기를 닮고 싶다는 말씀을 올리고 싶다. 또 하루 하루 성실하게 살고 계신 우리 부모님께 이 책을 한권 보내드리고 싶다! 그런데, 이 활자를 읽으실 수 있으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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