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클래식 라이브러리 8
오스카 와일드 지음, 김순배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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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라이브러리 8권이다.

이 책은 와일드가 처음 구상했던 원고를 번역한 것이다.

잡지사에 제출한 후 검열을 거치고 출간된 초판본과도 다르다.

이전에 나온 번역본들은 대부분 개정판이었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첫 구상본이 13장이고, 개정판이 20장이란 것이다.

세부적인 부분으로 들어가면 성적 함의의 수위 등이 있지만 이 부분은 바로 확인이 불가능하다.

다른 판본과 바로 비교하는 바에 의하면 도리언이 처음 사랑했던 여인과 관련된 부분에서 차이가 크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인물은 크게 세 명이다.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 그의 초상을 그린 바질 홀워드, 바질의 친구 헨리 워턴 경 등이다.

바질과 도리언의 동성애 관계가 무수정판에서 조금 노골적으로 나와 있다고 한다.

솔직히 지금 기준으로, 번역자의 노력에 의해 즉각적으로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미 이 소설에 대해 여기저기에서 들은 적은 있다.

개정판에 시빌 베인의 분량을 늘린 것도 아마 이런 일을 피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녀의 죽음이 있은 후 바질이 그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변화가 생긴다.

실제 도리언 그레이가 저지른 악행의 결과가 초상화 속에 반영되는 것이다.


도리언 그레이와 헨리 워턴 경이 처음 만난 장소는 바질의 화실이다.

바질은 도리언의 초상화 마지막 작업 중이었다.

바질의 최고 작품이 완성되었고, 도리언은 이 그림처럼 영원히 아름답기 기원한다.

수줍음 많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청년 도리언 그레이는 어느 순간 헨리의 말에 휘둘린다.

편협하고 타락한 삶으로 길에 들어서는 순간이다.

물론 시빌 베인과의 관계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영원한 아름다운 젊음을 자신의 초상화에 넘긴 후 그의 삶은 이전과 많이 다르다.

그가 저지른 악행의 결과는 바로 초상화에 그대로 새겨진다.

당연히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초상화를 보여주고 싶지 않다.


도리언의 도덕심과 후회를 억누르는 역할은 헨리 워턴 경이 한다.

실제 와일드는 바질이 실제 자신의 모습이고, 헨리 워튼 경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한다.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이 되고 싶었던 존재라고 한다.

이 셋을 어떻게 결합하는 가에 따라 그의 모습은 바뀐다.

도리언과 바질을 연결하면 당연히 동성애적인 모습이 부각된다.

헨리와 도리언이 연결되면 바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 속 모습이 된다.

헨리가 도리언에게 주장하는 내용들은 정말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남성우월적이다.

순진했던 도리언에게 그의 존재는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다.

물론 어느 순간 도리언이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한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마지막 두 장이다.

자신의 도덕심을 자극한 바질을 죽이고, 그의 시체를 처리하는 문제에서 나온 행동이다.

살인은 우발적일 수 있지만 시체 처리는 완전히 자신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다.

이 시체 처리를 위해 협박까지 하는데 이런 협박이 처음은 아닌 듯하다.

이처럼 그는 주변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어 간다.

놀라운 반전은 이런 그가 도덕과 양심을 잠시 회복한 일이다.

개정판에서는 이 사이에 상당한 분량을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새로운 인생을 위해 자신의 초상화를 찢는 것이다.

알고 있고, 예상한 결말로 이어지지만 서늘하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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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실시 일상신비 사건집 허실시 사건집
범유진 외 지음 / 고블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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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실시라는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앤솔로지다.

‘일상신비’란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코지 미스터리를 다룬다.

이 모음집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무거운 듯하지만 결코 무겁지 않다.

어떻게 보면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이다.

사건이 아닌 사고로, 혹은 장난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사건들이 나온다.

다섯 명의 작가 중 기존에 읽었던 작가는 단 한 명, 범유진뿐이다.

다른 네 명의 작가들은 그들이 참여한 단편집만 겨우 알 뿐이다.

같은 작가들이 참여한 <허실시 기담괴설 사건집>도 같이 출간되었다.


범유진의 <달면 삼키는 안다정>은 가장 안정적인 단편이다.

게으르지만 단 것만 먹으면 그 에너지로 잠시 활발해지는 인물이 안다정이다.

어릴 때 먹은 초콜릿과 달달한 빵은 그녀를 제빵사로 만든다.

하지만 손 부상 후 단맛을 잃었다가 친구의 동네 빵집 허실당에서 그 입맛을 찾는다.

즉시 채용, 알고 보니 친구가 허실당 주인의 아들.

이 빵집의 유명한 빵은 모두 김 명장이 개발한 것들이다.

이런 빵집에 프렌차이즈에서 제품 개발 협업 요청이 들어온다.

담당자와 회의하는 도중 담당이 메탄올 중독 현상을 보이고, 김 명장이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학창 시절 친구의 사건을 해결한 전력으로 탐정 역할을 배정받는다.

작은 도시의 이권, 빵집 내부의 알력, 약간은 쉬운 트릭 등이 재밌게 진행된다.


그린레보의 <내 세상의 챔피언>은 슬픈 현실을 다룬다.

한 향토 사학자의 말로 시작해 평범하고 고요한 일상을 보여준다.

동네 사랑방 같은 카페, 서로 너무 다른 자매.

승승장구한 후 서울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언니.

특별한 재능도 열정도 끈기도 없어 보이는 동생.

술 취해 동생에게 5만 원을 팁처럼 준 노인을 쫓아간 후 전기충격으로 실신한 노인.

그 노인의 나쁜 손버릇, 동네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부자.

사건 해결을 위해 탐정이 된 자매. 그리고 공중전화 박스에서 발견한 단서.

하나의 사건 속에 담긴 중의적인 이야기들과 좌절과 연대. 마지막 문장이 아주 인상적이다.


김영민의 <작당모의 카페 사진동아리의 육교 미스터리>는 재밌지만 아쉽다.

사건이 처음 예상한 것과 다르게 흘러가면서 왠지 모르게 너무 쉽게 봉합되는 느낌이다.

짝사랑하는 동창의 부탁으로 과거 사건 재조사를 의뢰받은 화자.

불충분한 단서, 막막한 조사. 하지만 사건 현장을 본 후 생각이 달라진다.

그리고 이 단편에서 사진동아리가 모이는 카페는 상당히 재밌다.

새로운 신입의 통통 튀는 행동, 뭔가 다음에 다른 무언가 생길 듯한 분위기.

아마추어의 재조사로 생길 수 있는 부작용 등도 현실적이다.


박하루의 <돌아다니는 남자>는 보고 싶은 데로 보는 사람들 이야기다.

인구 20만 명이면 그렇게 작은 도시가 아닌데 그렇게 설정했다.

이 도시 이곳저곳에서 보이는 그냥 서 있는 남자.

중학생 둘이 이 서 있는 남자의 정체를 밝히려고 한다.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고, 이 남자를 제각각 다른 시선에서 해석하고 이해한다.

여기에 중간 매개 역할을 하는 향토 사학자는 다른 이야기에서도 등장한 인물이다.

중학생들의 조사 과정에서 드러나는 이야기들은 재밌고 한 편의 우화 같다.


장마리의 <둘리 음악 학원 신발 실종 사건>은 소문과 연대 이야기다.

정확한 명칭은 두리 음악 학원이지만 만화 ‘둘리’외 비슷한 발음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이 학원에는 며칠 동안 원생들의 신발이 사라진 사건이 네 건 있었다.

신발은 잃은 아이들은 신발을 잃어도 찾아도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당연히 부모들은 학원의 폭력이나 왕따 등을 걱정한다.

그러다 한 원생이 다른 음악 학원으로 옮기고, 위기감이 고조된다.

원장은 알바에게 사건 해결 시 보너스를 약속하며 수사를 의뢰한다.

현실적인 문제들과 아이들의 알 수 없는 행동들.

마지막에 밝혀지는 사건의 진실은 멋진 우정과 연대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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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하늘 아래, 아들과 함께 3000일
츠지 히토나리 지음, 김선숙 옮김 / 성안당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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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작가의 신작 한 권을 읽었다. 

그 이전에는 그의 소설을 몇 권 가지고 있지만 읽은 책이 거의 없다. 

왠지 모르게 사 모으지만 잘 읽지 않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이번에 이 소설을 읽은 것은 어딘가에서 아내 없이 홀로 아들을 키웠다는 글을 봤기 때문이다. 

그의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는 오래 전 본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하니 이전 아내의 이름이 바로 나온다. 

그 유명한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 주인공 나카야마 미호다. 

두 부부 사이의 이혼 사유는 모르고, 사실 큰 관심도 없다. 

하지만 이혼 후 홀로 낯선 타국에서 아들을 키웠다는 부분은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3000일, 8년이 넘는 기간이다. 

아들 나이 열 살에 이혼하고, 그후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아 홀로 키웠다. 

솔직히 아이를 홀로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키우는 곳도 일본이 아니라 프랑스 파리다. 

프랑스어가 유창하다면 좀더 쉽겠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도 유창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좋은 이웃과 친구들이 있었고, 둘의 노력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물론 이 둘의 하루하루가 평온하고 무난하게만 넘어간 것은 아니다. 

사춘기와 코로나 19 등이 겹치면서 결코 쉽지 않은 나날들이 이어졌다. 

이 에세이는 그 나날들의 시간 순 기록이다. 

 

프랑스에 사는 외국인의 시선이 곳곳에 드러난다. 

프랑스를 계급사회라고 말하는 부분을 보면서 어떤 부분 때문일지 궁금했다. 

현실적으로 일본인 외모를 가진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부분은 아주 현실적이다.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2개 국어를 하지만 일본어는 일본인 수준은 아니다. 

프랑스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면 일본도 쉽지 않다고 말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자신을 진로를 완전히 정하지 못한 상태라 시간이 필요하다. 

진로에 대한 부분은 이 책에 여러 번 나온다. 

상당히 유명한 작가란 사실을 생각하면 아들에게 많은 재산을 주는 것이 가능할 것 같은데 그럴 마음이 없다. 

아니 어쩌면 그의 글에서 나왔듯이 그 정도 자산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열네 살의 소년이 열여덟 살 청년이 되기까지 기록이다. 

프랑스에 살지만 아직 그의 머릿속에는 일본의 생활이 그대로 남아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먹는 것처럼 차려 먹기도 하지만 꽤 많은 수가 일식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아이의 식성이 바뀌는 부분도 나온다. 

코로나 19 때문에 자신처럼 밖에서 즐겁게 놀지 못하는 아들을 안타까워한다. 

다른 프랑스 부모라면 어떻게 했을까? 궁금한 부분이다. 

요리를 좋아하는 츠지가 아들에게 요리를 해주고, 아들도 요리를 배워서 한다. 

후반부에 오면 인스턴트 대신 홀로 만들어 먹은 이야기가 나온다. 대단하다. 

 

음식과 함께 꾸준이 나오는 것이 음악이다. 

츠지 히토나리가 밴드를 하는데 아들도 음악 기기를 사서 자신의 음악을 만든다. 

작가의 삶과 더불어 음악가의 삶, 아버지의 삶을 함께 산다. 

한 번도 일반 월급쟁이처럼 살 지 않았다는 부분에서 살짝 부러웠다. 

다르게 생각하면 글이나 밴드 활동으로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위해 요리한 것들이 요리 책이 되고, 가끔 쓴 일기는 이렇게 책을 묶여 나온다. 

이런 생활이 가능한 것도 바로 그의 열정과 노력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을 키우는 것은 민감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아이가 졸업하고,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눈시울을 붉힌다. 

새롭게 자신들만의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오고 간다. 

곳곳에 프랑스, 아버지, 가족, 아이의 성장 등의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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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리움
이아람 지음 / 북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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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우수상 수상작이다.

안전가옥 앤솔로지 <편의점>애서 <여자의 얼굴을 한 방문자>로 만난 적이 있다.

이전 글을 찾아보니 SF와 스릴러 요소가 담겨 있다는 글이 보인다.

이번 소설에서도 SF 요소는 필수적이고, 미스터리까지 넣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를 기본으로 한 소년의 여행을 그려낸다.

소년의 여행은 어머니를 찾아가는 것이다.

세상이 멸망한 후 홀로 어머니의 흔적을 쫓아 나간다.

그 여정에 동참하는 것은 죽음의 화신이라고 자칭하는 검은 개다.

검은 개와 함께 길을 걸어서 어머니의 흔적을 쫓는다.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 벙커 속에서 소년은 자랐다.

어머니는 과거의 유물을 통해 과거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먹을 것이라고는 과거에 만들어진 통조림뿐이다. 신선식품은 없다.

소년이 아플 때 어머니가 있었지만 깨어났을 때는 이미 사라졌다.

몇 개월이 지났지만 어머니는 오지 않는다.

소년이 안전한 벙커를 떠난 이유다. 이 여행은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

가장 위험할 수 있는 것은 야생 동물인데 그것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부상당한 들개를 도와주려고 하다 오히려 위험에 처한 경우는 있다.


어머니가 남긴 물건과 벙커에서 본 로고 등이 하나의 방향표가 된다.

우연히 어머니가 타는 차와 닮은 차를 발견하고 아파트 속에 들어간다.

아파트 안에는 암호가 걸려 있는 과거 컴퓨터가 한 대 있다.

소년은 추론과 관찰을 통해 비밀번호를 찾아내 그 기록 일부를 확인한다.

이때 정확하게 미래의 어느 시점인지 알 수 있는 연도가 나온다.

여기서 소년은 어머니가 간 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게 된다.

이 아파트의 주인 현우가 근무했던 헨리에타 연구소다.

소년은 다시 걸어서 이곳에 도착한다.


기이한 모양, 연구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로봇.

현우의 카드로는 연구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리다.

이때 소년을 기절시켜 데리고 나가는 여성이 나온다.

멸망한 세계에 소년 이외에 새로운 인간이 있다니 놀랍다.

이 여성은 소년에게 이 세계를 멸망시킨 것이 소년의 엄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멸망의 과정과 소년의 엄마가 한 일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우주에서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인공지능 생명체 헨리에타.

헨리에타를 통해 미래의 과학기술을 얻어내려는 인간들.

그렇게 발견한 연구 결과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인간을 내몬다.


이런 과거의 이야기와 새로운 세상과 그 사이를 채우는 호기심.

진실이란 이름의 물건이 가진 힘.

이 힘을 잘못 이용하면 어떤 파멸이 벌어질 지 모른다.

그리고 헨리에타를 통해 불멸의 힘을 가지려고 한 인간들.

소년의 주변에 갑자기 나타나는 죽음이란 존재들.

인간이 사라졌다고 지구에 종말이 온 것은 아니다.

인간 대신 지구를 채워 나갈 수많은 동식물들이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동식물보다 인간 혹은 인간과 닮은 존재에 눈길을 준다.

어느 순간 소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새로운 죽음을 잉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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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사람
김숨 지음 / 모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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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김숨의 소설이다.

찾아보니 장편소설은 처음인 것 같다.

단편들은 다른 모음집을 통해 가끔 읽었다.

오래 전에 나온 책들은 집에 그냥 묵혀 두고 있다.

660쪽이 넘는 분량의 소설인데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다룬다.

사실 분량 때문에 선택을 주저하기도 했다.

장르 소설이 아니면 이런 긴 소설을 읽은 것이 참 오랜만이다.

며칠 동안 다른 책 읽는 동안 조금씩 읽다가 마지막에 좀 달렸다.

솔직히 이 소설의 구성이나 전개가 아직 머릿속에서 정리가 덜 되었다.


1947년 9월 16일 단 하루 부산에서 일어난 일들을 담았다.

시간도 해가 떠 있는 동안으로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다.

특정한 인물을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가지 않고 그 시간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한정된 공간과 시간 속에 움직이는 사람들을 다루다 보니 중복되어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을 특정 주인공으로 말하기에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단편적이다.

이런 단편들이 모여 거대한 이야기로 서서히 바뀌어 간다.

각각의 사연과 관계, 엇갈리는 상황, 어떻게 든 살려는 의지 등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다.

그 목소리, 그 행동, 그 사연 하나하나가 이야기로 이어진다.


왜 작가는 1947년 9월 16일이란 특정 시간을 선택했을까?

이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선택하지는 않았을 텐데.

해방 후 부산이란 공간은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머물고 떠나간 곳이다.

이 당시와 비교할 시간은 아마 한국전쟁 때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중국에서 넘어온 귀국 동포들을 생각한다면 조금 복잡해진다.

이 소설의 상당 부분들이 귀환선이나 야매 배를 타고 일본에서 넘어온 사람들 이야기다.

일제 감정기에 자의에 의해 가거나 타의에 의해 일본으로 넘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중 일부는 일본에서 한국 남자와 결혼해 살다 남편과 함께 넘어왔다가 버림받은 일본 여자들 이야기다.


방대한 자료 조사가 있어야 가능한 글이다.

옛날 지명을 되살리고, 강제 징용 당한 사람들의 사연을 찾아내야 한다.

강제 징용을 피해 숨은 아들을 찾기 위해 부모에게 폭력을 가한다.

위안부를 강제로 징용하는 과정에 공장으로 간다는 거짓말도 동원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일본에 부역한 그 시절 친일파들이 있다.

해방 후 보복이 두려워 도망친 일본 순사나 공무원들이 미군정이 오면서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일본인이 남긴 적산을 물려 받아 이전의 사업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탄광에서 일하며 겨우 생존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간결하지만 강한 인상을 준다.

만주로 넘어가 일본인, 만주인, 중국인, 한국인 등 필요에 따라 국적을 바꾼 사람도 있다.


주인 없는 땅을 찾아 간척지에 판잣집을 짓는다.

어딘가 집을 지을 곳이 있으면 가재 도구를 놓고 담을 합판 등으로 세운다.

이들은 어딘가에서 흘러와 다른 곳으로 흘러갈 유민들이다.

갈 곳이 없어, 살 곳을 찾아, 이전부터 살던 사람들이 작은 목소리를 낸다.

다양한 곳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사연을 품어낸다.

머릿속에서 이들의 모습은 북적거리는 시장통의 풍경과도 닮아 있다.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고 날이 바짝 서 있는 삶이 곳곳에 보인다.

이런 와중에도 선의를 베푸는 사람들이 있다. 삶과 현실의 다양한 모습이다.

그리고 작가는 의도적으로 사투리를 배제한 채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덕분에 가독성은 더 좋아졌다.

너무나도 많은 풍경과 이야기가 들어 있어 놓친 부분이 많다.

평론가의 말처럼 언젠가 이 소설의 한 부분을 김숨의 다른 소설에서 마주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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