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의견이다.

 

 

맛은 기억이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우월한 맛도 없고 절대적으로  최악의 맛은 없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서 몸속을 흐르고 다시 나오는 과정을 통과하므로 위생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정의지만 그 맛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무언가는 없다.

맛이 있고 없고는 각자 나름이다.

흔한 말로 개인의 취향은 존중되어야 한다.

msg가 잔뜩 든 음식이 더 맛있고 그것이 더 끌리는 것은 그 화학작용이 일으키는 감칠맛에 끌리는 것도 물론 있지만 그 맛이 주는 나만의 기억이 나를 그 쪽으로 당길 수도 있다.

추운 날 귀가 빨개지고 손 끝에 아무런 감각도 없고 정신마저 얼얼해 진 상태에서 돌아온 날

집안에 퍼지는 라면 냄새는 그 무엇보다 유혹적이다. 그 냄새에 그 따끈함에 영혼도 팔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영양도 없고 몸에 안좋은 요소 덩어리라고 해도 그날 그 순간 낡고 허름한 부엌에서 찌그러진 냄비 위에서 김을 날리고 있던 그 라면은 무엇보다 가슴에 와서 푹 박혀버린다.

그 라면에는 맛과 온기 이외에 그걸 끓어내던 누군가의 정성과 그때의 안도감과  순간 확 풀려버리는 안도감  평안 어쨌던 좋다고 느끼는 막연함이 모두 버무려져서 내 기억에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맛은 내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사랑하는 맛이 될 수 있다.

그걸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라면은 몸에 좋지 않다고 그런 건 먹어선 안된다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기준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날 나를 안도하게 하고 긴장을 풀어준 그 순간이 그날 먹었던 그 라면의 맛과 함께 내 몸에 각인된다.

맛은 그렇게 나도 모르게 내 몸안에 새겨진다.

그래서 역으로 말하면 몸에 좋은 걸 좋은 기억이나 상황에서 먹는게 가장 좋다고 할 수도 있다.

 

엄마한테 등짝을 서너대 두드려 맞고 귀가 얼얼할 만큼 잔소리를 듣고 눈물콧물을 다 빼고 나서 기운이 쑥 빠져서 손가락하나 꼼짝하기 힘든 상황

해는 어둑하고 놀다가 혹은 딴 짓을 하다가 늦게 돌아온 내ㅁ에서 찬바람 냄새는 아직도 나고 울고난 뒤끝이라 기운이 빠지는 건지 아니면 때를 놓쳐 배가 고픈 건지 나도 알 수 없는 어딘가 후련하면서 어딘가 서러운 자락이 내안에 가득할때

이미 다른 식구들이 밥을 다먹고 아무것도 남은 게 없고 꼭 이렇게 일을 두번하게 만든다고 입으로 연신 잔소리를 하면서 함께 손도 함께 쉬지 않던 엄마가 내밀던 건 양푼이 하나뿐이다.

먹고 남은 밥에 먹고 남은 찬들 그래도 급하게 묵은 내 나는 김치도 급하게 들기름에 볶어얹고 냉장고 귀퉁이에서 잊혀졌던 무우 꼬랑이도 급하게 채썰고  대충의 양념으로 무쳐내서 올려놓고 큰 맘먹고 계란 후라이도 부쳐서 올려놓은 아무렇게나 올려놓았지만 절대 아무렇게나 만들 수 없는 그 양푼이 한그릇이 그저 눈물이 난다.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개도 아니고 어쩧게 이렇게 다 한데 섞어서 먹을 수 있냐고 투덜거릴 수도 없다.

밥 한귀퉁이는 이미 말라서 딱딱하게  이를 놀라게 하면서 입속을 굴러다니고 김치는 충분이 시어 볶아도 그 충격이 아직도 남아 있고 무채는 아직 아린 맛이 남아있지만 그건 내게 최고의 밥상이었다.

등짝 때린 엄마가 어느새 옆에 앉아서 그 등짝을 문질러주면서 천천히 먹으라고 퉁멱스레 내뱉아주는 걸 찬 삼아서 꾸역꾸역 먹고 있다.

세상에  이런 밥상은 누구에게도 내밀 수도 없다.

흉을 보는 건 고사하고 걷어차이지 않으면 다행일만큼 엉망인.. 아니 밥상도 아닌 달랑 양푼이 하나이지만 그 속엔 그 시간의 서러운 나의 마음과 그런 후 안도하는 나의 마음이 함께 섞여있을 것이고 자식때문에 이미 썩어버린 콤콤한 엄마의 속내와 그래도 뜨끈한 정성이 버무려져있다.

그 뒤섞임이 내 속에서 살이 되고 피가되고 내가 된다.

평소 나는 절대 이것저것 넣어 비벼먹지 않는다.

양념이 많은 음식도 좋아하지 않는다.

밥이 말라붙어버리면 아무 생각없이 버린다.

하지만 내 속에는 아무렇게나 비빈 그날의 그 밥이 아직 남아있고 그 맛을 그리워한다.

그 맛이 나이다.

내가 그 맛이다.

맛은 그렇게 맛 그자체로서가 아니라 기억으로 내몸에 들어와 쌓이고 내가 된다.

다양한 맛을 즐긴다는 건 다양한  기억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 기억은 아픈 것도 있고 잊고 싶은 것도 있고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

그래서 잊고 싶은 맛도 있고 혐오스러운 맛도 있다.

좋아하는 맛과 싫어하는 맛이 어우러져서 내가 되고 내 기억이 된다.

내 몸이 된다.

 

이제 나는 누군가에게 기억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맛을 소개하고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었다.

내 아이들은 혹은 내가 만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어떤 기억을 함께 가져갈까?

엄마한테 잔소리듣고 눈물을 뚝뚝 흘린 후에 먹는 닭강정 한조각은 어떻게 기억될까

누구 몰래 봉지 뜯어 우적우적 우겨넣던 한 봉지 과자의 맛은?

먹지말라고 해도 기어이 유혹에 못이겨 손에 쥔 길거리표 떡꼬치의 기억은?

아껴놓다가 잊혀져 방한 구석에서 녹아내리던 저 사탕은 어떤 맛으로 내 아이의 몸에 들어갔을까

 

내 아이가 맛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좋겠다. 맛에 호기심을 가지면 좋겠다.

먹지 않고 거부하는 편견대신 먹어보고 이해하고 그 맛에 대한  의미를 나름 가지면 좋겠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나? 하는 말.

나는 먹어봐야 안다고 믿는다.

왜 된장은 된장인지 똥은 똥인지.. 그리고 똥이 된장이 될 수는 없는지..

모든 맛은 좋은 것이다.

맛이 악한 건 아닐것이다.

기억이 나쁘고 상황이 나쁘고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가 힘들 뿐이다.

맛있는게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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