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한편의 연극을 보는 느낌이었다.

단촐한 무대위에서 한명의 여배우가 끌고가는 단단하고 밀도높은 고전극 한편을 보는 기분

마지막 로드니가 텅 빈 무대 위에서 혼자 쓸쓸하고 허무하게 중얼거리듯 마지막 방백을 뱉고 있을때  어쩌면 무대위의 조명은 로드니가 아니라 저쪽 구석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미소를 짓거나 콧노래를 부르고 있을 조앤을 비출고 있을 것이다.

로드니의 대사는 배경이 되고 관객은 조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인의 얼굴. 아니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은 여인의 얼굴

그 얼굴이 얼마나 공포스럽고 안타까운지를 느끼며 무대가 끝나고 있음을 느낄것이다.

몇몇 관객에게는 조앤이 필시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거부할 수 없는 사실때문에 끔찍함이 배가 될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문장과 함께 무대의 막은 내려졌고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객석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쉬지 못하고 그대로 정지해 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숨을 내쉰다. 순간 내 숨소리에 화들짝 놀라기도 할것이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메곳이라는 이름으로 쓴  추리소설이 아닌 여성의 삶과 사랑을 쓴 소설 중 하나가 이 책이라고 한다. 살인사건 탐정 등등으로만 기억되는 한 작가의 다른 모습 어쩌면 은밀한 본 모습을 보는 설레임도 있다. 추리물과 또다른 매력이 있지만 동시에 추리물에서 보았던 사람의 심리 인간관계의 뒷모습등의 세심함이 여기서도 발견된다. 사람을 이해하고 잘 알고 있는 작가의 노련함이 여기서도 느껴진다.

 

영국 런던 근교에 사는  조앤은 모든 걸 다 가진 여자였다.지역변호사이면서 다정하고 자상한 남편 로드니 그리고 잘 자라서 이제 각기 가정을 가진 세 자녀 평화롭고 풍요한 일상들 사교적인 사회생활, 그 모든 것은 그녀의 자랑이고 자부심이고 전부였다. 어느날 아픈 딸 바바라를 돌봐주기 위해 바그다드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폭우로 인해 사막 한 가운데에서 발이 묶인다. 가져온 책들은 다 읽었고 아무 할일이 없다. 그 곳에서 조앤은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돌아본다.

발이 묶이기전 만났던 동창 블란치의 말이 자꾸 맴돌면서 생각이 이어진다.

 

  "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 말고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될까 ..........전에 몰랐던 걸 알게 될까"

 

블란치의 무심한 듯 툭 던진 말한마디 그리고 또 그렇듯 무심하게 뱉은 자기 가족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때는 그냥 무심코 지나쳤거나 아니라고 단호하게 부인했지만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사막의 조앤에게는 길고 긴 생각거리로 이어졌다.

블란쳇은 마치 고전연극 속의 예언자같기도 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코러스같기도 하다 우연히 무심코 툭 튀어나와 우리의 주인공에게 고민을 던져주고 문제거리를 덩져준다. 그리고 무심히 무대뒤로 사라지지만 그녀의 흔적은 책이 끝날때 까지 조앤을 놓아주지 않는다. 비록 그녀에 대해 생각하진 않지만 그녀가 남긴 말 . 그 옛날 학창시절 그녀가 들었던 충고까지 모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조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조앤은 스스로 돌아보아도 행복하고 후회없이 살았다고 생각한다.

한때 농부가 되고 싶어했던 철없던 남펴을 다독거리고 몰아쳐서 지금의 안락하고 존경받는 생활을 하게 했고 철없는 딸의 불장난같은 사랑을 막았고 세상모르고 아무에게나 감정이 헤픈 막내딸까지 무사하게 결혼시켰다. 그리고 아들은 그녀가 원하는 변호사가 되게 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농장을 하며 잘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모두 그녀의 손끝에서 그녀의 결심과 철저한 보호아래서 이루어진 그녀만의 화려하고 만족할만한 성과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사막에서의 하루하루가 늘어나면서 그 모든 자랑거리와 자부심은 점점 먼지를 뒤집어쓰고 흐릿해지며 본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가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 진실들 꾹꾹 눌러놓았던 뒷 이야기들 보고도 못본 척하고 모른 척 넘어갔던  남편의 모습. 무조건 누르고 다그치며 몰아갔던 자녀와의 갈등 그리고 모두가 나에게 등을 돌렸다는 외로움

심지어 딸에 대한 지극한 애정으로 한걸음에 갔던 바그다드에서 바바라조차 자기에게 뭔가를 숨기려고 했고 무언가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에게 더 있다 가라고 잡았던 이유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루라도 더 아버지를 그냥 좀 내버려두라는 이유였다는 걸.... 그녀는 마주하기 시작한다

 

"적응 할거예요 게다가 이제 사정이 다르잖아요 아주 달라요. 파트너 변호사가 되는 거니까요 그리고 결국은 업무에..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될 거예요. 두고 봐요 로드니 결국에는 더할나위 없이 행복해질테니까요"

 "내가 행복해질지 당신이 어떻게 알지?"

" 분명 그렇게 될 거예요. 두고 보면 알아요"

 

아무리 부부라지만 타인의 행복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확실하게 아무 의심없이 말 할 수 있을까.그녀의 맹목적인 애정은 이렇게 남편에게 그리고 자녀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녀가 행복할거라고 장담하고 밀어붙일수록 다른 가족들은 숨이 막히고 불행할 거라는 걸 그녀는 절대 몰랐다. 그녀의 기준은 확고했고 언제나 옳았으며 언제나 가족이 우선이었고 절대적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에 대한 의심없이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완벽한 주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엾은 조앤

그녀의 그 확고한 신념에 의심이 더해지면서 더할 수 없이 흔들린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그녀가 가진 모든 자부심은 한낱 망상이 아니었을까 그건 나만 좋자고 만들어 낸  헛것들이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다니...

자녀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남편의 승진과 명예를 위해 그렇게 노력하고 노력했는데..

자기와 달라서 때로는 동정하고 때로는 경멸했던 이웃 레슬리 셔스턴.

그녀조차 이 곳 사막에서 돌이켜 보면 빛나고 건강하고 용기있는 여성이었던것이다.

그녀는 사막에서 이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의 어리석음 잘못된 판단 그로인한 불행들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제 길을 잃어버린다.

내가 어디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가 없다. 도데체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가

겨우겨우 찾아 돌아온 숙소에서는 새로운 소식이 그녀를 기다린다.

이제 기차가 들어왔다. 그녀는 이제 집으로 갈 수 있다.

집을 생각하니 로드니가 그립다. 그를 만나면 말하리라.. 미안하다고 자기가 잘못했노라고

그렇게 결심하며 조앤은 차에 오른다. 집이 그립다.

긴 여행 낯선 장소 낯선 시간에서 오롯이 자신을 들여다 본 사람은 많은 생각을 하고 결심을 한다. 그러나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 다시 일상에 젖게 되면 그 낯선 시공간에서의 나의 결심들이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는 우스꽝스러운 것인지를 알게된다. 오호.. 부끄러워라. 어디 누가 알까 아니 나조차 알고싶지 않아 꽁꽁 묶어서 저 깊은 기억 속에 봉인 시킨다. 그땐 분위기에 취해서 그랬던거야. 낯선곳에선 누구나 일탈하고 새로운 꿈을 꾸지. 하지만 현실을 내 일상도 그만큼 소중한거야.조앤 역시 그렇다.

모든 결심을 굳히고 오히려 마중 나오지 않은 로드니에 안도하면서 새로움을 각오했지만 집에 들어서는 순간, 익숙한 공간 익숙한 냄새 분위기에 마음이 놓이는 순간 다시 그녀로 돌아간다.

내가 변했다는 걸 그가 아는게 뭐가 대수란 말인가

어쩌면 그때의 내가 과대망상증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부끄러운 고백을 어떻게 한단말인가

결국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명랑하게 말했다 " 나 왔어요 로드니 .............나 돌아왔어요"

 

사람이 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어쩌면 모든 우주를 뒤바꾸는 대단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믿었던 신념이나 가치를 바꾸어야 하고 아니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그 것들을 반성하고 부정해야만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죽음과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사람은 진실을 알지만 그것에 눈감기도 하는 것이다. 남편을 향해 환하게 미소짓는 조앤을 떠올리면 나는 등골이 서늘하다.

사막에서의 기나긴 시간동안 내면을 바라보고 성찰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킨 조앤은 어디로 갔나? 그녀는 지금 서늘하게 웃으며 다시 그녀로 완벽하게 돌아와있다.

세상에 이런 반전이라니...

 

지금 이곳에도 수많은 조앤들이 살고 있고 그런 조앤을 견디는 수많은 로드니가 있을 것이고 조앤의 경멸과 동정을 알면서도 용감하게 살고 있는 레슬리들도 있다.

 

 

책을 읽으며 우리나라의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 휘청거리는 오후가 떠올랐다. 물론 사람의 위악이나 춤겨진 본성과 통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그게 바로 사람이라고 따뜻하게 품어주던 다른 작품도 많지만...

그 작품에서 남편 혹은 아버지의 등골을 빼먹으면서도 주위의 시선과 스스로의 속물근성을 부정하지도 못하고 눈감고  몰려가던 모녀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속의 블랑쉬도 생각난다. 끊임없는 망상속에서 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 차라리 망상속에서 행복했던 여자 그래서 이상하게도 현실감있던 그녀의 여동생이 더 안쓰러웠던 작품이었는데...

 

   당신은 외톨이고 앞으로도 죽 그럴거야 하지만 부디 당신은 그 사실을 모르길 바래.

 

로드니의 마지막 독백이 너무나 슬프다.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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