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모든 것 안녕, 내 모든 것
정이현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94년은 지독히도 더웠다는 기억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때 나는 백수였다. 다니더 직장도 그만두고 글을 쓰겠다고 혼자 서울에서 동동거리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여유있는 부모님덕에 조금은 덜 찌질한 백수신세로 서울에서 버티고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 해 김일성이 죽었고 무지하게 더웠다.

뭔가 앞길은 보이지 않고 누군가 다른 이들은 다들 잘 사는 것 처럼 보였고 나는 그냥 덥기만 했다.

도서관에 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시 공부를 해서 취직을 해야할지 계속 글이라는 걸 써봐야하는 건지  차라리 여유가 있으니 뭔가 결정을 할 수 없는 게 아닐까하는 미친 생각까지 했던거 같다.

이렇게 더운 날씨라면 한번 미련하게 버텨볼까 하고.. 집에 있는 동안 선풍기도 켜지 않고 버텼던 시간들이었다. 등에서 땀이 흘러도 에어컨은 아예 없으니 말고 선풍기조차 켜지 않은 채 버틴 그 시간이 지금 내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을까

남들이 보기엔 잘난 부모덕에 여유있는 룸펜생활을 하는 팔자좋은 여자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지금 내가 돌아봐도 딱히 틀린 건 아니라고 인정하지만 그때 나는 참 막막하고 답답하고 그저 견디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시간이었다.

 

정이현의 소설을 보면서 그때가 생각났다.

소설속의 세미도 지혜도 준모도 그랬다. 뭐가 불만이니? 뭐가 모자르다는 거냐?

물론 그들 나름 가진 고통이 있고 무게가 있다.

보는 것마다 잊지못하고 기억해버리는 지혜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고

뚜렛증후군의 준모는 스스로 소통을 차단해야했고

자의와 상관없이 할머니댁에 얹혀 살아야 하는 세미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지 못한다.

그렇게 세 사람은 스스로의 상처를 속으로 숨기고 세상과 소통을 하지 못하고 안으로  고름처럼 외로움이 차올라 가고 있었다. 누구보다 단짝이고 친한 사이였지만 그들의 대화는 그저 말장나이거나 농담이거나 혹은 남의 이야기이지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세미가 가장 그러했던 거 처럼 보이지만 지혜나 준모도 마찬가지다.

함께 어울리고 서로의 상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기의 상처를 드러내는데는 셋 다 서툴렀다.

그건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누구나 자기 상처를 드러내는 일이 서툴다.

약해보이지 말아야 하고 남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야하고 당당하게 보이고 싶어서 어쩌면 배려에서 나온 행동일지라도 그건 자기에게 가장 아프다.

꽁꽁 싸매놓은 상처는 덧나는게 당연하니까.

결국 그들은 마지막 순간 단 하나의 비밀을 공유하지만 그것 조차 발설할 수 없는 그들만의 비밀이었을 뿐이다.

결국 그들은 헤어진다.

각각 길을 가면서 서로를 가끔 떠올리면서 그들은 각자의 상처를 들여다 볼 기회가 생겼을 것이다. 혼자만의 시간속에서 들여다 보는 상처들 이제 딱지가 않고 희미한 흉터가 되면 그땐 서로가 그리울 것이다. 그리고 연락을 하고 물을 것이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고...

 

작가가 말했었다.

꺄르르 웃는 여학생들의 하얀 종아리가 그렇게 슬프게 보였다고..

작가의 마음을 완전하게 알지는 못하겠지마 나도 소녀들의 웃음이 슬퍼질때가 있다.

내 아이가 그 나이가 되어서 친구들이랑 무언가를 공유하고 수군거리고 꺄르르거리는 걸 보면 왠지 슬프다. 이 슬픔은 어쩌면 김애란의 소설들과도 닮은 곳이 있다.

결국은 자라서 이렇게 될것을..

정이현의 소년들도 소녀들도 결국은 자라서 그렇게 된다.

강남에 산다고 유복하다고  더 특이할 것들도 없다.

어쩌면 그 곳에서 더 치열하고 드러내지 못하고 서성였던 결론일 수도 있다.

 

소설속 세미의 할머니와 고모의 이야기도 좋았다.

어쩌면 풍족해 보이는 속에서 느끼는 결핍.. 난 이런 걸 원해... 라고 솔직할 수도 없고 드러낼 수도 없는 사람들이 가지는 결핍과 불안이 느껴지면서 많이 슬펐다.

절대적인 가난이라던가  불행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살짝 비켜나간. 그래서 행복하고 모든 것이 충족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겪어내는 혼란은.. 어쩌면 예방접종없이 바로 덜컥 걸려버린 몹쓸 병처럼 더 아프고 혼란스럽다.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구차한 변명인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매맞는 고모의 질기게 이어지는 결혼생활이나 덜컥 쓰러져 버린 할머니의 절망이 결코 가볍다고 할 수도 없다.

 

 

덧붙여...

한때 나는 소설가중에서  하성란이 가장 이쁘다고 생각했다.

이쁜 사람이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 게다가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 혹은 재우고 나서야 비로소 글을 쓴다는 말에 참 질투가 났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비슷하게 살아가면서 글도 쓰는구나 하는 ...

그랬는데 정이현도 참 이쁘다.

깍쟁이같고 눈이 높아 결혼은 하지 않았을거 같은 얼굴에 이미 아이 엄마란다.

(난 왜 작가의 사생활에 더 관심을 가질까...)

요새는 이쁜 사람들이 글도 잘 쓰는구나..

어떤 어려움도 없이 살아온 사람처럼 보이는 얼굴로 비슷한 사람들이 가지는 결핍을 이야기하는 작가라... 어쪄면 공감을 많이 받기는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약간의 편견섞인 평가도 해보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편의 하나인"삼풍'을 썼고 가장 현실적인 연애담이라고 할 수 있는 "연애의 기초를 썼다는데 점수를 주고 싶다.

이 작품은 그 둘에 비해선 내게서 순위가 많이 떨어지긴 한다.

 

어쩌면 이렇게 자란 소녀들이 삼풍과같은 경험을 하고 연애의 기초같은 연애실패를 겪으면서 성장하지 않을까...

다음 이야기도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