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의 방 푸른도서관 41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읽은지 오래되는 너도 하늘말나리야...그 이후의 소희 이야기

전작을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

굳이 알지 않아도 이 책에서 처음 만나는 소희를 대하면 그 아이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얼마나 주변에서 서성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소희는 15세가 되어 비로소 어릴 때 헤어진 엄마에게 가게 된다

상상이상으로 부유하고 풍요롭게 사는 엄마에게 동화되고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기 위해 소희는 노력한다. 내가 보여줄 거라곤 성적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공부에 몰두하기도 하고

부잣집 엄친딸이라고만 생각하는 친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다시는 예전처럼 생활보조받는 고아모범생으로 보이지 않기위새 소희는 정말 노력하고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스스로 만든 거짓말 하나가 계속 굴러가면서 점점 커지고 소희는 그것에 스스로가 갇히기도 하고 잘 보여야 한다는 부담으로 스스로를 꾹꾹 눌러가며 참아낸다

하지만 용량을 넘어가면 결국 넘치는 법이고 터져버리는 법이다.

엄마에게 갈구한 사랑을 얻지 못하고 마음을 닫은 소희는 우혁이 사건으로 엄마랑 대치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리고 자기만 아니라 엄마도 상처입고 많이 아팠다는 걸 안다

그리고 고모의 말처럼 혼자 참고 감내하고 보듬지 말고 힘들면 힘들다고 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떼쓰는게 정상이라는 것도 알게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생각한게 있었다.

지랄총량의 법칙.. 이건 사춘기 아이의 반항심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 관점에서 볼때 아이가 태어나 자라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것들은 결국은 겪게 되더라는 것

조숙하고 의젓하다고 믿었던 아이도 속에 눌러놓은 반항심과 화를 결국 언젠가는 터뜨려야 하는 것이고 무덤덤하게 넘어간 이성에 대한 관심도 나중에  뒤늦게 불이 붙어서 더 뜨겁고 남사스럽게 흘러가기도 하는 것 그게 인생이라는 거다.

아이를 보면서 내가 살아온 시간을 곱씹어보면 늘 그랬다.

그때 하지 않았다고 그냥 쉽게 넘어갔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고

지금 너무 힘들다고 징징거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금 힘든게 싫은건 여전하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게 최고라는 말 아직도 내겐 유효하다)

조금 쉽게 넘어가거나 힘들게 넘어가는 건 다르지만 어쨌든 겪고 넘어가더라...

하는게 지금의 나의 결론이다.

 

달밭마을에서 소희는 너무 어른스럽고 의젓했고 믿음이 가는 소녀였다.

그게 고모네에서 작은 집에서 다지고 다져져서 스스로 어떻게 하면 어른들이 좋아하는지 알게 되고 스스로 그런 공식에 자신을 맞출줄도 안다.

처음 가진 자신의 방에서 그 방에 맞는 정소희가 되기 위해 소희는 혼자 애를 너무 많이 썼다.

혼자 애쓰고 상처를 감추기에 급급해서 다른 사람의 상처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내가 누군가의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몰랐던거다.

내가 우혁에게 상처를 받듯 우혁이도 내게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 그건 몰랐다

채경이나 다른 친구들에게도 그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에 너무 급급하느라 그들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던거다

어쩌면 소희는 자신의 방에 스스로를 맞추는데 급급해서 그 방을 제대로 둘러볼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둘러볼 여유를 배우지 못했던거고 그건 소희의 잘못은 아니다.

아이에게 어른스럽다 의젓하다는 칭찬이 어쩌면 아이를 더 옮아매고 아이의 욕망을 억제하는 굴레가 될수도 있겠다는 걸 다시 배운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소희라 그 아이의 성장에 촛점이 맞추어 져서 주변 인물들이 그 아이를 위해 존재하고 만다는 아쉬움은 있다. 재서의 상처나 우혁의 상처도 어쩌면 소희의 것 못지 않을 수도 있는데 가장 아쉬운건 가정내의 폭력에 대해 그냥 발만 담그고 지나쳐버린 대목이다.

새아버지가 마냥 좋은 키다리 아저씨만은 아니고 인간적인 면도 있고 엄마의 풍요로운 삶과 속쇄를 끌고 살아야 하는 단면을 보여주기위해 넣었다고 이해는 하지만 폭력을 그렇게 쉽게 넘기는건 옳지않아보인다.

 

소희는 독툭한 성장기를 가진 그녀의 상처와 치유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또래 소녀들이 가지는 감수성 내면적인 갈등도 함께 보여준다.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것 기왕이면 자기를 좋게 포장하고 싶은 마음 남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등드

아직도 내게 남은 유치하지만 치열한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소희가 더 안쓰럽기도 하고 사랑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애들은 부모 속 썩히고 반항하고 형제들하고 싸우는 시간도 다 약정시간에 있는거야 너희 때는 그게 더 어울리는 거고 당연한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하고 싶은거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참지 말고 네 엄마한테 말해. 응석도 부리고 떼도 쓰고..너 하고 싶은대로 해....(중략) 무조건 너더러만 잘하라고 한 게 잘못이었어. 더 오래 산 어른들이 이해하고 받아 줘야지 어린 너한테 그 짐을 떠맡으리고 하는게 아니었어. "

고모의 대사는 아이를 키우면서 몇번씩 곱씹어야 할 말인듯하다.

 

어떤 위치든 스스로에게 당당하길.. 그리고 스스로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가길

내 곁에 서성이는 소희에게 그리고 내 안에서 서성이는 소희에게 그렇게 이야기 해주고 두 손을 꼭 잡아주고 싶다.

 

 

잡담

나도 자라면서 언니랑 함께 방을 썼다. 언니가 대학진학해서 집을 떠나기 전까진 싫어도 좋아도 한방이었고 함께 대학와서 다시 한방이었다. 그때 정말 간절한건 나도 나만의 방을 가지는 거였다.

그때 간절함이 아직도 남아서 결혼해서 아이도 있는 지금 어딘가에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딱히 그 방에서 뭔가를 하겠다는 건 없다. 자고 먹고 뒹굴고 끄적이고 뭐 그게 전부겠지만 그래도 나만의 방은  아직도 로망이다. 그런데 다시 나만의 방을 가졌을때 그게 그렇게 좋은 건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나혼자만의 공간이 싫은 건 아니다

그 안에서 무엇을 하건 내 자유라는 것도 좋았고 나만 쉴 수 있는 은밀함도 좋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누군가와 함께 투닥거리고 짜증내면서 공간을 공유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더 나만의 공간에 애착을 가지고 좋아하는 것일수도 있는거고

각각 방을 가지고 있는 딸들이 어쩌면 둘이 함꼐 좁은 공간에서 투닥거리고 죽일듯 덤비며 영역확보를 하는 과정을 겪지않은게 또 다른 결핍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결핍이 있기에 더 안으로 치열해지고 풍요로워지는 것도 분명 있다.

소희도 결핍으로 욕망이 어긋나게 표출되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래서 스스로를 타자화 시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선도 가진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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