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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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것은  가끔 스산하고 먹먹하다

지난 시간이  마무리되지 않고 흐지부지 지나가버렸다면 더욱 그러하다.

만나서 마음을 나누었고 시간을 공유한 사이가 어느 순간 오래 연락이 없고 만나지 못해 그냥 그렇게 흐릿하게 지워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누군들 쉬울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상대가 어떤 오해를 했는지 알 길이 없다.

<카메라>의 문정이 그러했다.

한참이후 관희를 만나 알 수 없는 그녀의 행동들과 말을 통해 조금씩 지난 시간을 유추한다.

왜 관주가 연락을 끊었는지 그리고 어떤 일들이 있었고 그녀가 모르는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하나씩 퍼즐을 맞춰간다. 

이 단편은 그리스 비극을 닮았다.

빗나간 과녁의 화살처럼 누구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그 거리에 돌을 깔았던 지자체를 원망해야할지  사진을 배우고 싶다는 나 자신을 원망해야할지 아니면 오해하고 두려웠던 그 노숙인을 원망해야할지

어떤 우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비극은 발생한다

부당하게 불행을 겪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연민과 그 불행속의 사람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공포감은 비극을 더 크게 만든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서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 

실수라고 하기엔 누구도 잘못한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불행은 누구를 원망하지도 못하고 그 대상을 찾아 해매다가 결국 그 화살을 나에게 돌린다.

빗나간 화살은 나에게 돌아온다.

관희가 그랬고 이제 문정이 그렇다.

물른 그때 그 노숙인이 가장 잘못했다. 오해했고 두려웠다고 타인을 폭행하고 내버려둬서는 안되지만

결국 그런 일이 일어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고 또 올라가다보면 사람은 누군나 그 끝에 자신이 있다고 믿는다.

관희는 그끝에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불행이 묻을까봐 말로 꺼내지도 못한 동생을  잃었고 

어느날의 말다툼같지도 않은 갈등에서 서로 서먹해진채 연락하지 않았던 문정은 긴 시간 오해만 했다.


희미하게 끝이 난 관계는 이렇게 쓸쓸하고 아릿하다

자신에게 겨눠진 화살로 결론을 내려야 비로소 뭔가 아귀가 맞아지는 불행과 슬픔은 아직도 여기저기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울고 있다.


<층>의 남녀는 다른 양상의 비극을 보인다.

그리스 비극을 이어 세익스피어의 비극처럼 개인의 성격적 결함으로  불행하다.

여자는 남자의 통화를 듣고 그동안 남자에 대해 쌓아왔던 이미지를 와르르 무너뜨린다.

남자의 쌍소리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과정에서 나온 것인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차단하고 판단 내린다.

어쩌면 그 소리를 듣는 그 시간 여자가 겪은 상황과  맥락이 또 존재할 것이다.

힘든 가족을 잊으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애를 써온 남자의 일상은 그 순간 감정을 이기지 못한 한두 마디로 그냥 오해된다.

그렇게 오해하고  판단한 뒤 여자는 행복했을까

여자는 자신의 무심한 한마디 '아무것도 아니야' 라는 말을 들은 남자는 다시 무너진다.

어쩌면 자신이 그녀에게 무엇을 듣게 했는지 모르는 남자는 여자의 그 말이 비수였고  원망이었고 배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희미한 이별은 여기에도 있다.

다만 여자는 자신이 그 관계를 끊어냈다고 믿으면서도 일상에서 불쑥 떠오르는 기억마저 지우지는 못한다.

가장 힘들고 가장 지쳤을 때 만나 물에 말은 밥에  잘 구운 굴비살을 올려주었던 기억

그날의 맛과 온도와 분위기에 대한 기억은 오래간다.

사실 굴비를 먹던 날 여자는 남자의 사촌에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남자만 혼자 전전긍긍했고 모든 비극은 사촌의 혀에서 시작되었고 그 말을 듣고 믿은 여자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또 믿어버린다.

남자의 성급함 불안함이 비극을 잉태했고

여자의 성급함과 편견 역시 비극을 완성했다.


비극은 언제나 오래 기억에  남는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찝찝함이 있고 내가 그때 무언가를 잘못했는지 생각을 한다.

역시 빗나간 화살이다.

다만 이번에 화살은 자신에게 꽂히지는 않고 어디에 떨어졌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서 두렵고 자책한다. 


<이모>는  비극을 관통하는 인물이 나온다.

이모는 가장으로 집안을 책임지고 자신을 희생하다가 어느 순간 그런 삶의 도돌이표를  던져버린다.

더 이상 같은 공간 같은 관계에서 맴돌지 않으려고 결단을 내린다.

모두가 냉정하다고 말하지만 관계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끊어낼 수 없다.

작가의 최근 작 <실버들 만천사>처럼 끊어낸다고 아무리 시도해도 점점 더 엉켜서 서로가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친밀한 사이일 수록 더욱 그러하다.

좋은 말로 서로 좋게 좋게 끊어지는 관계란 없다. 

이모는 스스로 비극을 선택했다. 

다만 본인의 선택에도 본인이 납득해야할 이유가 필요하다.

나레티브는 우연의 연속과 맥락없이 성립될 수 없다.

예전 남자의 손에 담배불을 비벼 끈 일과   좀 더 가까운 시간에 얼어붙은 수도계량기를 녹이며 옆집과 일어난 헤프닝 등은

본인의 비극에 맥락과 연관성을 넣어준다.

그런 전환점이 필요하다.

길게 이어진 시간에서 어떤 전환점은 꼭 필요하다.

그게 나에게 밥을 주지도 않고 사랑을 주지도 않지만 삶을 길게길게 지루하게 늘어뜨리는 것 말고 단계 단계 잘라서 맥락을 만들어주는 것

그게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하고 내 삶의 의미가 된다.

이모의 정갈하고 소박한 생활속에 그런 맥락들은 그녀의 삶이 무의미하지는 않았음을 말해준다.

비극이지만 깔끔하고 명쾌하다.

이모도 그렇게 생각하고 삶을 매듭지었을까... 그건 모르겠다.


술냄새를 푹푹 풍기는 <봄밤>이나 주구장창 먹어대는 <삼인행> 이나 친구들 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주는 <실내화 한켤레> 등

모든 이야기는 비극을 안고 있다.

내가 선택한 엇갈림도 있고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우연의 결과도 있다.

결국 세상 일은 인간의 의지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정해지는 것도 아닌 아직도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다만 인간은 언제나 그 원인을 알고 싶어한다.

원인을 알면 다시 그런 비극을 겪지 않을 것이고 그 원인을 기록하고 보존해서 다음 세대로 넘기면 내 자손들은 나보다 편안할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비극은 여전히 반복되고 

여전히 원인을 찾아내고 

여전히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하거나  스스로 자책해야 편안해지는 모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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